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55)-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22:16-19)

등불지기 2012. 3. 3. 19:58

제 설교는 제가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설교를 들었고, 누군가의 책을 읽었고, 누군가로부터 배웠습니다.

물론 저의 가장 큰 스승은 성령님이십니다.

제 메시지는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저의 메시지를 가지고 자기 것인 양 설교를 한다고 해도 저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설교문을 베끼고 인용하고 설교하면서 제 이름을 언급하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전파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면 저는 기뻐할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55)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본문: 계22:16-19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지난 주간 우리는 한 나라의 대표를 뽑는 선거를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이번 대선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습니다. 지역차는 여전한데다가 세대차마저도 더 벌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2, 30대와 5,60대가 분명한 세대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대교체는 정권교체보다 더 큰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번 후보는 이 흐름을 잘 읽지 못해서 낙선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석을 많이 확보했으니 대선은 따논 당상이라고 아마 방심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정치하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은 세대교체라는 바람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정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부가 조류와 어류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그물을 던지듯 이 땅의 교회들이 주의 말씀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로잡으려면 이러한 흐름을 주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복음에 철저해야 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냉철하게 읽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보이지 않지만 급속도로 노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 30대는 앞으로 이 사회의 주류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약 30년이면 국민의 3분의 1을 차지할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이 땅의 젊은이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30년 뒤에는 상당히 도태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땅의 청년들은 무한한 열정과 감성의 소유자들입니다. 이들은 참된 비전을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참된 비전만 제시된다면 그들의 열정은 폭발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비전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30년을 내다본다면 지금 청년들에게 기도와 말씀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상교회가 어떤 비전을 품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이 땅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교회의 정치관이나 국가관에 대해서 특강을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정치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은 첫째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간에 그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집권자는 백성을 두려워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하며, 교회는 세상의 집권자를 바라보기 이전에 더 큰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 합니다. 우리는 임의로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세상 나라보다 더 큰 하나님 나라를 뚜렷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호와 가치관에 따라 어느 당을 지지하든 어느 후보를 지지하든 간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거 때마다 교회 안에서 싸우고 다투며 논쟁하는 것은 자신의 참 신분을 망각한 것입니다. 정치 이야기에 교회가 파묻혀서 복음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방해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거룩한 성도의 교제를 음모와 비방으로 얼룩진 정치판으로 끌어당기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정치에 무관심하자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더욱 소중한 것을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서 허락된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에 대해서 무지하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진정 성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았다고 성공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집권한 것이 그 인생이 성공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집권하지 못한 것이 패배한 것처럼 그려지는 것도 잘못입니다. 힘과 권력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힘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권세를 얻은 것은 더 큰 책임을 떠안게 된 것입니다. 힘을 주시는 이유는 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용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긜고 힘을 얻기 전에 먼저 힘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칼 쓰는 법을 배우면 칼을 얻게 되듯이 여러분이 성공하려면 성공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채움을 받으려면 먼저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지혜의 그릇이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지혜 없는 지식, 비전이 없는 권력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대통령이라면 잠언을 꼭 묵상해야 합니다. 나라의 치리자로서 갖추어야 할 지혜와 덕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사람을 잘 중용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보좌관으로 두지 못하면 아무리 지혜가 있는 치리자라 할지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해당됩니다. 혼자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잘 얻어야 합니다.

셋째로, 대통령이 바뀐다고 내 삶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구조적인 문제를 개혁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개혁이 성공한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저는 개표방송을 지켜보면서 어느 후보를 지지하기보다는 전국에 걸쳐서 민심의 흐름, 지역차, 그리고 세대차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는데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선거기간 동안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느냐를 가지고서 여러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나라가 잘 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운명은 한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내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나에게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내가 찍어준 사람이 내게 밥 한 그릇 사주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내가 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진짜 정치의 기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한 나라의 시민이자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는 점을 한 시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나라당, 민주당, 민노당, 혹은 사회당 등등 어느 당에 속했다는 소속감보다는 천국당에 속했다는 자부심이 더 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나라는 누가 집권하느냐를 가지고 서로 쟁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여러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정치와 인물과 당쟁 때문에 교회가 입씨름하는 것은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며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엡4:3-6)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정치 이야기로 교회는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6:20,21)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의 시민이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견고하게 서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임할 그 날을 소망해야 합니다. 지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와도 같습니다. 한 때 영국이 인도에, 프랑스가 베트남에 각각 식민지를 개척했었듯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식민지를 개척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주군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주인은 누구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누가 계십니까? 보좌에 앉으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핵심이자 전부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과 우주 만물의 중심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무게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1-23)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5-20) 바울은 진리로 허리띠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허리띠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만큼 영광스럽고 존귀한 이름은 세상 안이나 밖에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항상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서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고, 먼저 행동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최후말씀이자 최후행동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먼저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세상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모든 생애는 인간이 연구하고 묵상할 주제 중에서 단연 최고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고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전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행하신 일들은 기독교의 초석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 자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여러분과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우리 삶의 중심이십니까? 벽에 못을 박고 못에다가 옷을 걸어놓듯이 우리의 모든 삶이 그분께 걸려 있습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나 예수”라는 선언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예수는”이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이며, 교회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어 얼마나 핵심적인 위치를 갖고 있는지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아오면서 여러 가지 환상들을 보면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길을 제대로 찾았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계시록의 참 주인공이십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분을 놓치면 세상의 급변하는 조류에 휘말리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종말에 대해서 교회를 현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결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안내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풍성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는 반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찬성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마치 신랑과 신부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있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모든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참 교회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허리띠를 삼아야 합니다. 참 교회는 오직 예수만 있을 뿐입니다. 특히 나라의 중요한 선거가 있을 때면 교회는 더더욱 진리의 허리띠를 졸라 매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 우리가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작년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살펴보면서 알게 된 것은 이 책은 바로 교회들을 위한 책입니다. 특히 많은 고난과 시련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는 교회들을 위한 책입니다. 세상 가운데서 정체성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교회들을 위한 책입니다. 세상 가운데서 좌표를 바로 찾아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과 같은 책입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교회가 붙잡아야 할 참된 비전에 관한 책입니다. 본문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증거하게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을 증거하게 하였노라”고 했을 때 “이것들”은 교회의 영광에 대한 환상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환상들은 모두 지상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와 지상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상 교회로 하여금 천상 교회를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교회들마다 하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무궁한 영광과 영원한 승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세상 속에서 자기 길을 잃지 않는 비결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에서도 당당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하여 이 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책을 통하여 교회를 위하시는 주님의 열심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신부로서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이 책을 가슴에 지킬 때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이 책의 말씀은 교회를 비전 있는 교회로 세워줍니다. 주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머물 때 교회는 참으로 영광스러워집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힘이 있고 더욱 영광스러워지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 말씀을 가슴에 품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충만히 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씀”으로 말미암아(행2:42)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였습니다.(행12:24)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 편지하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고(골3:16),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살후3:1) 위기를 만날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했던 것입니다.(행20:31,32)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교회들은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에 대한 말씀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주님의 말씀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이 거룩한 책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이 고이 품으면 이 말씀이 여러분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 알려고 힘써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는 교회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교회들에게 주신 계시, 혹은 증거가 권위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다윗의 뿌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다윗이 믿었던 메시아를 뜻합니다. 다윗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무엇을 믿었습니까?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었습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예수님은 다윗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이 되십니다. 다윗이 섬긴 그리스도를 오늘 우리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며 예배하며 찬양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면 왜 교회에 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함께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왜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까? 다윗이 그러했듯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 하나님으로 믿고 섬깁니다.

둘째,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되십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중요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삼하7:10-13) 예수님은 다윗에게 주신 이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다윗의 뿌리요 다윗의 자손”이란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에게 왕권을 주신 분도 되시며,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을 분도 되십니다. 예수님은 큰 권세와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 분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이십니다. 광명한 새벽별 역시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밤하늘이 별들이 각기 제 빛을 잃을 때 찬란하게 빛을 뿌리는 새벽별은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세상 나라는 망할 것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빛을 발할 것입니다. 새벽별은 아침이 동터오기 직전에 가장 빛나는 별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직전에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그러나 가장 어두울 때 새벽별은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 별은 메시아의 별로서 가장 어두운 세상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4,5)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9-1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벽별이신 예수님을 성경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신다면 성경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달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1: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십니다. “오라”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17절) 성령과 교회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 보증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성령께서 교회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로 인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성령은 교회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계속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성령은 교회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계시하시는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4)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깨닫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성령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교회 위에서, 교회 옆에서 늘 언제나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성령과 신부가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면서 다시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순결과 믿음과 의를 지켜야 합니다.

보십시오. 성령과 신부가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함께 말하는 것은 모든 죄인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오라” 이것은 가장 위대한 초대입니다. 성령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경고하면서 온 세상에 초대장을 발송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초대하고 있습니까? 누가 이 초대에 응할 수 있습니까? 본문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듣는 자들을 초대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결코 이 초대에 응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했습니다. 성령과 신부는 말씀을 경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초대장을 보냅니다. 우리가 구주의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성령과 신부가 초청하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초대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만사를 제치고 이 초대에 응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과 신부는 목마른 자들을 초대합니다. 잠언27:7에“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 문제로 고민하는 자들에게 복된 소식이지 죄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오직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갈급한 심령입니다. 목마르고 주린 심령을 찾으십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찾으십니다. 셋째, 성령과 신부는 생수를 원하는 모든 자들을 초대하십니다. 무엇을 원하는 자들입니까? 영생을 원하는 자들이라면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진정 영생을 원하십니까? 이 생수를 맛보기를 진정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만나실 때 꼭 물으시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혹은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모하는 심령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오. 사모하는 심령이 되십시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물은 오직 은혜로만 받습니다. 본문은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에 대해 광범위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의 삶이 엉망이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수를 마시기 원한다면 오라. 와서 값없이 받으라”고 했다고 해서 생명수가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리고 성에 있는 삭게오를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삶은 엉망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값없이 영생수를 받기 위해서 먼저 삶을 정리한 것이 아니었지만, 영생수를 받은 후에 그는 자기 삶에 분명한 회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를 보십시오. 자신을 향하여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그에게 한 줄기의 빛이었고 또 생수였습니다. 그러나 생수를 경험한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람이 아무리 엉망이도 우리는 분명 생명수를 은혜로 받아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수를 받아 마신 사람이 그 삶을 엉망으로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생명수는 받아 마신 사람에게 반드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값없이 거저 받는 것이라고 해서 은혜를 값없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너무 값비싼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보배를 다 주어도 결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생의 은혜를 돈으로 값 주고 살려고 한다면 결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 값비싸기 때문에 값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값을 지불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멸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비싼 값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써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죄인들이 값을 지불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대신 우리의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싸구려 취급한다면 이것은 은혜에 대한 중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가품 정책으로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허영을 상업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똑 같은 물건인데 사람들은 이왕이면 비싼 것을 사려고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려고 합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값싼 것은 천대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천대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에 대해 가장 광범위한 오해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거저 주시는 은혜요, 값없이 주시는 생명수이지만 그 값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싼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저 받지만 그 값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삶 속에서 분명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과 긍정적인 태도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자랑하면 살 것입니다. 교회는 값없는 은혜와 값싼 은혜를 경계해야 합니다. 은혜 그 자체는 매우 값비싼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보배로운 것입니다. 단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믿음으로 받는다고 은혜의 가치를 과소평가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큰 오산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감사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결코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은혜에 대한 세 번째 광범위한 오해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입니다. 육신을 위해 살면서 영생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위해 살지 않으면서도 영생을 거두리라는 기대는 잘못된 망상입니다. 세상이 일확천금주의, 한탕주의, 그리고 요행주의에 따라 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지요. 오늘날 교회는 “오직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서 값없이 주는 은혜를 하나님을 기만하는 데 역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7-9)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그것이 영생수를 받아 마시는데 장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회개하기를 원하는 죄인을 받아주십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이나 의인은 한 사람도 이 생명수의 은총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죄를 충분히 덮을 만큼 넓습니다. 그러나 죄를 용납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죄까지 덮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의는 불의와 결코 동거할 수 없습니다. 빛은 어두움과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영생수 샘물로 나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듣는 자, 원하는 자, 목마른 자들이 되는 것이 모든 조건입니다. 그러나 생명수 샘물로 나아가는 것은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겠다는 결심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공과 행복을 기원하지만 회개의 도를 전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버리는 회개운동은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회개는 천국의 관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이 이 샘물로 나아가는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이 생수를 맛본 인생은 없습니다. 회개는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 한 가지 구원의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18,19절)고 하셨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생각을 첨가하거나 혹은 사람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시된 말씀 중 일부를 제거하거나 하는 행위는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막는 가장 근본적인 죄인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종류의 죄가 있지만 구원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임의로 가감하는 죄입니다. 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서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임의로 가감하는 이상 아무리 도덕적이고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치더라도 구원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죄이면서 가장 무서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지에 대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가 인류 역사 가운데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모든 타락과 방탕의 근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창세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가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셨습니다.(창2:16,17절) 그러나 간교한 뱀이 시험하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했을 때, 사람은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대답함으로써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더했으며,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정녕”을 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죄를 범할까요? 최초의 사람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했습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불신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일부를 빼거나, 혹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는 생각에 하와는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더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불평 때문에 하와는 “정녕”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생수를 마실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중대한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한 것이 결정적으로 죄를 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 것은 사단에게 빈틈을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바로 그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빈틈을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즉시로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거짓말을 했고 그 말은 그들의 마음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뱀의 거짓말이 사람의 가슴에 박히고 말았을 때 그들의 눈에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습니다. 뱀의 거짓말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졌을 때 사람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 것은 영생을 잃어버린 근본 원인이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오직 그것입니다. 무슨 거창한 선행이나 도덕이나 거금이나 희생제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한 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십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이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사단이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첫째는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입니다.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입니다. 셋째는 엎드려 절하기만 하면 천하만국의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겪는 시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세 번 모두 다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복종하심으로 사단의 무서운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섬기는 우리들에게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우리 자신이 있을 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정직할 때 우리는 참으로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임의로 가감함으로써 사단의 시험에 결정적으로 넘어지는 계기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지 못하면 사단이 금방 알아보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것입니다. 사단은 바로 그 빈틈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며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빈틈을 허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해짐으로써 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주의 말씀에 정직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수 샘물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고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더하거나 혹은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 중 일부를 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값없이 주는 생명수를 받아 마시기 원하신다면 오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한 자들이 되십시오.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저는 실로 이 말씀을 전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자들과 빼는 자들을 주의하십시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대하는 자들을 멀리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들과 가까이 하여 우정을 쌓으십시오. 다시 한 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보다 정직해지고, 보다 충성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부터 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해지기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 생각과 감정에 맞지 않더라도 그 말씀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위하여 주신 이 복된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의 권위가 우리 삶 속에서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 교회가 세상 한 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고 계속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의 말씀에 정직한 자들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