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56)-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21)

등불지기 2012. 3. 3. 20:03

아프리카에서 흑인 목회자를 대상으로 신학훈련사역을 하면서 발견하는 사실은

아무리 나이가 많은 흑인 목사라 할지라도 구약의 아가서, 신약의 계시록은 설교를 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강해설교는 전무하고, 아가서는 터부시하고, 계시록은 전혀 해석할 줄 모릅니다.

그들에게 이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제겐 크나큰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오래전 제 설교문이지만 지금도 종종 끄집어 내어서 읽곤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56)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본문: 계22:20,21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설교를 끝낼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쉽지 않을 텐데 잘 들어준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함께 씨름해온 16개월의 기간이 제게는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매주 300여명이 모이는 청년부에서 이 복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특권도 누렸습니다. 무엇보다 본문과 씨름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저는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교회와 말씀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를 섬길 때 어떤 비전을 품어야 할지 주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저의 개인적인 스승이자 가이드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복된 말씀으로 여러분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더욱 더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며 가르치며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요한계시록을 가까이 하십시오. 이 말씀을 두려워 말고 사랑하십시오. 이 말씀이 주는 통찰력을 사모하십시오. 이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에 도전하십시오. 앞으로 계속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기를 바랍니다. 한번 산의 정상을 밟아본 사람은 또 다시 그 산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을 밟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한 사람은 다시는 그 산으로 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갔었는데 왜 가느냐?” “가봤는데 그저 그랬어.” “나도 그 산에 가봤어. 한번 가보았으면 됐지 또 가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사실은 두려움 때문에 못가는 것입니다. 실패의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정상에 선 감격을 맛보았다면 다시 그 맛을 맛보려고 도전하려고 할 것입니다. 성취의 감격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요한계시록을 맛본 사람은 다시 도전하려고 할 것입니다. 대충 공부한 사람은 했는데 왜 다시 하느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엇을 대충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는 자만심 때문에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더 알려고 하는 열망을 품으십시오. 저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더욱 자세히 요한계시록을 살펴볼 생각입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그 동안 여러분에게 전한 말씀을 되새기고 복습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을 읽고 관찰하고 묵상하는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삶 속에 적용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여러분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전공과목으로 삼으십시오. 아무 아무개를 말하면 어느 성경을 먼저 떠올리도록 만드십시오. 이 말씀을 더욱 사랑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재림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요한계시록 설교를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재림신앙은 복음의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지 않거나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10일 만에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신자들의 고백이며 또한 간절한 소망이 되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저자들이 300번 이상을 언급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만큼 확실한 약속은 또 없을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바로 이 시대의 염세주의와 우울과 좌절의 바다 한 가운데 소망의 등대가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오리라’(요14:3)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재림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입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이 복된 약속을 땅에다가 묻어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요?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주님 자신의 약속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외치는 것은 마치 세상을 면하고 산속에서나 살아가는 광신도들에게나 어울리는 것같이 생각이 되는 이유는 왜일까요? 주일에 강단에서 설교되어지는 주제들을 분석해보면 일 년 중에 재림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설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만나서 나누는 대화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저만의 편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반사회적이고 완전히 무식한 자들이며 미성숙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현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광신도들처럼 인식될까봐 두려워하게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결혼 적령기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까? 세상을 즐기고 맛보아야 할 것이 많아서입니까? 소도 사야하고 밭도 사야하고 장가도 가야하고 시집도 가야하기 때문입니까? 도대체 교회 안에서조차 재림신앙에 대한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 교제할 때 구주의 재림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화두가 된 적이 언제였습니까? 이 시대 교회를 바라보며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가슴쳐본 적이 있습니까? 재림신앙의 실종이 이 시대 교회의 경박함을 만들어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참된 소망에 관하여 오늘날 기독교회는 심각하게 뒤틀려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우리는 분명한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오늘날의 교회가 세속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재림신앙을 잃어버리게 된 가장 근본 원인은 기복주의 때문입니다. 현세에서 잘 되고 잘사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며 성도의 소망인 양 가르쳐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교회성장주의신학과 현세중심적 축복관이 한 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이세벨은 이러한 가르침으로 교회를 좌지우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세벨은 현대 교회 안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기복주의 신앙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참된 소망을 잃어버리고 헛된 꿈을 찾아 방황하고 있습니다. 참된 축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인양 설교했기 때문에 재림을 설교하는 것은 이 땅에서 누려야 할 축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세를 소망하기보다는 노후를 걱정하는 성도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먼저 물량주의와 기복주의 축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된 축복인지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참된 축복은 다름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무엇이 참된 축복인지 까마득히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교회는 분명한 축복관과 상급관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많이 참여한 자가 진정 축복과 상급을 많이 받는 자임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는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그것을 널리 알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알면 복음을 전하려고 할 것입니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능력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재림신앙이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소망하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는 무책임한 태도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재림의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극단적 종말론자들 그리고 사이비 교주들과 같은 이단들의 활동으로 종말과 재림에 대한 강조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반이성적이며 반사회적인 것처럼 인식될까봐 하는 두려움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사이비가 아니냐는 오해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오해할 것을 두려워하여 복음의 진수를 땅에 파묻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는 재림의 복음을 시급히 회복해야 합니다. 재림의 소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전도에 마케팅 기법을 많이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교회의 문턱을 낮추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동질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무척 노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객감동원리를 교회 안에다가 적용해서 세상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만한 이야기를 꺼내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귀에 좋은 말만 골라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재림설교야말로 오늘날 ‘열린 예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주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복음과 함께 기꺼이 고난 받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믿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약속보다는 보이는 물질과 현상에 대한 믿음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다시 믿음을 회복해야 할 시기입니다. 어떻게요?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교회의 역사를 볼 때 교회의 진정한 영성은 바로 이 재림신앙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역사를 되짚어가면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올바른 재림신앙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한국교회를 봅시다. 우리 한국교회는 처음 복음을 받아들일 때부터 이미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출발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을 굳게 믿고 또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사실 구한말 시대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국가 민족적 상황이 재림의 소망을 더욱 붙잡게 된 한 원인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재림신앙은 절망 중에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제였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재림신앙의 특징은 역사적 천년왕국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땅에 문자적으로 천 년 동안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교회가 태동할 때부터 많은 목사님들은 요한계시록을 애독하고 강해했으며 성도들로 하여금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교회와 같이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내세에 대한 분명한 소망과 몸의 부활과 천년왕국이 수립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교회가 70년대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서서히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흐름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80년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치루고, 특히 92년도에 이장림씨의 다미선교회 사건으로 종말론이 사회에 물의를 빚은 이후부터 교회 안에서는 급격하게 종말론적인 신앙이 퇴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 및 여러 민간단체들이 주도한 사회운동들이 재림신앙에 간접적으로 타격을 가했습니다. 여러 시민단체들은 교회로 하여금 사회적 기능과 책임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점차 재림의 신앙은 물 건너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설교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도피, 무관심, 무책임을 옹호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림신앙의 약화에는 사회의 변화도 큰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산업화되고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재림신앙은 교회 안에서 점점 ‘왕따’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오직 살아가는데 실용적이고 필요한 정보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정보는 곧 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유용한 정보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도시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는 것은 큰 모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영성은 바로 이 재림신앙에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재림신앙이 매우 강했습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재림신앙과 함께 문자적인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을 함께 간직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한국에 온 미국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성경을 가르친 선교사들은 1860년 이후에 일어난 미국 대부흥 운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대 부흥사 D. L. Moody 역시 천년왕국을 그대로 믿고 가르쳤습니다. 미국교회의 종말론이 전반적으로 문자적인 천년왕국으로 특징 지워질 때 은혜 받고 헌신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던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신학교에서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였고 신학생들은 문자적인 천년왕국을 그대로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천국관에 있어서 미래성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지 지금 임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이 동시에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 한국교회의 천국관은 오로지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제시대 하에 민족과 국가는 참으로 암울한 때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은 힘들었고, 국가는 일제의 강점 하에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천국의 미래성만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고 했으며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32)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임하는지 예수님께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는 곧 바리새인들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이미 임하였지만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삶이 절망적이고 힘들면 미래적인 천국만을 바라보게 되고, 삶이 희망이 있고 풍요로워질수록 현재적인 천국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극단 속에서 치우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점점 물질적인 풍요와 번영을 구가하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자칫 현실의 번영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할 위험이 높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더더욱 주님의 재림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천년왕국과 관련된 극단적인 ‘유대주의’가 한국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적 종말론은 한국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극단적 종말론자들을 양산하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문자적인 천년왕국사상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적인 천년왕국사상에 대해 보다 근원적으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적인 천년왕국설이 미국과 한국교회에 처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사상은 유대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종말론으로서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바울의 메시지 가운데 재림의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재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겨우 3주간만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림신앙을 견고하게 붙드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재림신앙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니라.”(살전1:10) 그러나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극단적 종말론자들 때문에 생긴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1-4) 사도 바울은 극단적 종말론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살후4:4) 극단적 종말론자들에게 미혹을 받아 교회 안에는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재림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잘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스스로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없이 행하며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3:6-12)

이와 같이 재림의 복음은 초대교회의 특징이었으나 자칫 재림의 복음을 역이용하여 교회를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로 만드는 극단적 종말론자들의 활동은 처음부터 있어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된 천년 동안 왕노릇하는 나라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생각할 경우 이와 같이 극단적인 종말론으로 치우쳐서 미혹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 이후 2, 3세기의 교부들 중에서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등이 천년왕국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문자적인 천년왕국이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문자적으로 천년 동안 화려하고도 강력한 왕국이 땅 위에 건설될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게 되고 천년동안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데 그때는 세상에 차고 넘치는 풍요와 번영이 있을 것이며, 질병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수명이 크게 연장될 것이고 죽음이 거의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며,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일하며 그 소출의 일부를 예루살렘 성에 바치려고 올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을 봉사하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은 회복되고 끊어진 제사는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문자적으로 1,000년 동안 왕노릇하면서 살 게될 것이며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며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은 대다수의 교회가 아닌 극히 일부분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2세기의 몬타누스와 같은 이단들도 한때는 2세기 중엽에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주의적 종말론이 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점차 대대적으로 천년왕국사상을 배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신자로서 최초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천년왕국설을 부정하였고,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하나님 나라는 끝이 없다고 확정하게 되었고 결국 천년왕국설을 교리적으로 배척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거스틴이 천년왕국설을 가장 강력하게 배척했으며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며, 그리스도의 나라는 천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이 물질적으로 풍요한 나라라는 유대주의 사상을 정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후 431년 제 3차 교회 공회의에서 천년왕국사상을 이단으로 공식적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이후 천년왕국 사상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극소수의 모임에서 희미하게 가르쳐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재세례파와 같은 아주 극소수의 급진 종교개혁파들이 이 천년왕국사상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심지어 자신들이 천년왕국을 세운다고 하면서 주교를 쫓아내고 임의로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매일 밤마다 횃불을 켜고 벌거벗은 몸으로 축제를 즐기다가 결국 주교의 군대에 의해 다시 추방당하고 핍박을 받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 모두 이러한 천년왕국설을 믿는 급진 종교개혁을 배격했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개혁자들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의 분파들이 있어왔지만 대부분 이 천년왕국사상을 배격했습니다. 루터교회는 천년왕국설을 유대주의자들의 환상(시오니즘)으로 정죄했으며, 칼빈 역시 논할 가치가 전혀 없는 주제로 간주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재림, 부활, 심판을 강조했지만 문자적인 천년왕국설은 배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급진 개혁자들의 천년왕국 사상은 17세기 영국의 퀘이커 교도들에게 전파되었고 18세기 부흥운동을 거쳐서 19세기 초 플리머스형제단이 이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 분파의 대표자인 존 다비(John Darvy)에 의해서 천년왕국설이 다시 정립이 되어서 미국에 전파되었고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대부분 이 종말론을 가지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종말론을 이름 하여 ‘세대주의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20세기 초 발생한 부흥운동과 함께 부흥한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볼 때 한국교회는 분명한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재림에 관한한 문자적인 천년왕국설을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급진적인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종말론 이단을 양성하게 된 모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몇몇 사람들이 독립운동과 사회개혁에 크게 헌신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현실에 대한 도피의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한국교회는 현실 세계에 대해서 적극 참여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책임과 사명보다는 단지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급진 종말론자들의 난동으로 사회에 큰 물의와 파장을 일으킨 후에 한국교회는 종말론에 있어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재림신앙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올바른 종말론에 입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급진적인 종말론자들의 난동을 미리 막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른 종말론 신앙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종말론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신학교조차 이 재림신앙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신학생들은 나름대로의 종말론을 연구하고 개인적으로 확립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성경적이고도 분명한 종말론을 확립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분명히 경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종말론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칠 사명이 있습니다. 혹시 치우칠까봐 혹은 혹시 비난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성경이 말하는 참된 재림신앙을 선포해야 합니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감히 접근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을 과감히 탈피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교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영광스러운 말씀들을 무한히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메시지의 보고를 스스로 묻어두는 것은 교회가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교회는 무한한 보고인 이 책을 열어야 합니다. 열어서 황금 메시지들을 진리에 목말라하는 성도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루터와 칼빈은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한 올바른 구원론을 가르침으로써 교회개혁의 불씨를 살렸다면 이제 우리는 바른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중심으로 한 올바른 종말론을 가르침으로써 제 2의 종교개혁을 시작해야 합니다. 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는 구원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행하신 모든 일들이 개인의 삶속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이라면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재림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행하심으로 나라와 민족과 세계 열방 가운데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제공해줍니다. 지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과 우주에 어떤 대변화가 일어났는지 말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십자가 사건과 부활 승천 사건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역사를 복음으로 해석할 줄 아는 통찰력을 갖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운명을 갖고 있으며 어떤 고난을 당할 것인지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떻게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떻게 왕노릇하고 있는지를 말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왕국은 지어져가고 있으며 교회는 이 놀라운 사실을 온 세계에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핍박과 훼방과 멸시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완성될 것을 분명히 말해야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모든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다시 설교하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개혁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세상과 인류의 역사를 해석하는 눈을 갖게 되면 삶 속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맛을 제대로 맛본다면 교회는 분명 새로워질 것입니다. 교회는 분명 새로운 비전으로 무장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한 가운데서 정체성의 문제로 고민하거나 갈등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넉넉하게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보고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다시 한번 요약해봅시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교회들에게 증거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우리 주님의 영광이었습니다.(계1장)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아는 것은 교회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아는 데에 교회는 목말라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구주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교회를 가득 채워야합니다. 둘째는 우리 주님은 교회들을 일일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계2,3장) 모든 교회들을 개별적으로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각 교회마다 어떤 독특한 상황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보고 계시며, 그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들에게 총사령관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교회는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 주님은 하늘의 장엄한 예배의 주인공이십니다.(4,5장)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영원토록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모든 피조물들과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예배의 광경은 오늘날 지상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충분한 힘과 영감과 능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천상의 예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상의 예배를 지향하는 예배!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넷째는 우리 주님께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을 수행하고 계십니다.(6장)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리우신 우리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시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쉬지 않고 일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그분의 열심을 보십시오. 지금도 인을 떼시면서 우리의 구원의 날을 앞당기고 계시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다섯째,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당신의 백성을 알고 계시며 보호하고 계십니다.(7장)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 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완벽하게 보호를 받습니다. 교회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습니다.”(벧전1:5) 그래서 원수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건드리지 못합니다. 아무도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을 받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우리 주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이 땅에 하나님의 큰 날을 나팔소리로 경고하고 계십니다.(8장)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자연계와 영적인 세계와 모든 도시문명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9장) 교회는 이 나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소리는 경고의 소리요 큰 전쟁의 소리입니다. 이 나팔소리를 듣고 교회는 각성해야 합니다. 깨어서 그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이 경고의 나팔을 울려 불어야 합니다. 일곱째, 이를 위해서 우리 주님은 복음을 전할 선지자들을 부르고 계시며 말씀의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게 하십니다.(10,11장)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지만 그들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오시기까지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교회는 쉬지 말아야 합니다. 여덟째, 우리 주님은 땅을 멸망시키는 세력을 심판하실 계획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용과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용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12장) 용의 두 꼭두각시인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의 정체를 보여주십니다.(13장) 그러나 그들의 적대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택한 사람들은 정절을 지키며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원수들의 활개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는 구원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그 믿음은 반드시 보상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14장) 교회는 원수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의 간교한 계략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홉째, 우리 주님은 경고의 차원을 떠나 실제적으로 재앙을 이 땅에 쏟으실 것입니다.(15장) 그러나 사람들은 재앙을 보면서도 전혀 뉘우치거나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16장) 주님이 내리시는 재앙으로 말미암아 세상나라가 멸망할 것입니다.(17장) 주님은 세상나라의 화려함에 미혹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18장) 세상나라는 망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서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패한 세상의 끔찍한 잔해들을 볼 것입니다.(19장)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할 것입니다.(20장)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왕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고 있는 신자의 영적 현실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마지막 열 번째, 우리 주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고 하늘로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름다운 신부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십니다.(21장) 이렇게 예수님은 속히 될 일을 보여주신 다음 세 번씩이나 “보라 내가 속히 오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지어져가는 하나님 나라로서 구주의 오심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 도성의 환상은 오늘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교회의 비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내가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세 번째 약속을 봅니다. 계시록 22장에서만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동일한 약속을 강조하실 때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시 말씀드렸듯이, 약혼녀를 두고 사업이나 혹은 유학의 문제로 먼 나라로 간 약혼자가 혼자 남아서 고분 분투하는 장래의 아내를 향해 편지할 때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할 것 같습니까? “내가 속히 가겠소. 조금만 참으시오.”라는 말을 거듭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교회를 향한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요. 주님은 교회가 주님의 조바심과 안타까운 마음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교회가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고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교회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떠한 영광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인지 소망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소망 없는 다른 이들과 같이 슬퍼하거나 낙심하면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할 참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주님을 믿으며 살겠습니까? 주님께서 속히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의 삶과 상황과 지위는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그날에 주님이 오시면 세상이 땅을 치고 배 아파할 것입니다. 이 꿈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주님의 약속에 대해 교회가 고백해야 할 것은 이것뿐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만날 때 주고받아야 할 인사말은 ‘마라나타’여야 합니다. ‘잘 지냈니?’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오신다!’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진군해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영광중에 뵈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교회가 붙잡아야 할 참된 비전이요 소망입니다.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 고백을 하지 못하게 합니까? 세상이 좋아서입니까? 소도 사야하고 밭도 사야하고 시집도 가야하고 장가도 가야하기 때문입니까? 우리의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단 말입니까? 주님의 사랑보다 더 좋은 위로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큰 손으로 막으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의 불꽃 가운데서 연단 받게 하십니다. 그날에 정금같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곳에서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미움을 받으며 핍박을 받을 때에 비로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고개를 들게 됩니다. 그리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 사도는 이 책의 마지막을 축복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참된 기쁨과 평안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주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며 능력이요 힘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했고(벧후1:2),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벧후3:18) 극단적 종말론자들과 요한계시록을 구별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상한 현상이나 신비한 암호를 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암호를 해독하는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보다는 문맥을 따라 가면서 주님과 복음과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믿어야 할 교리를 찾는데 중점을 두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바로 해석했다면 결국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최종 종착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 되고 더욱 사랑하게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을 얻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의 터널 속에서 신음하던 교회들은 장차 나타날 구주의 영광과 하늘교회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터져 나오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교회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고난 속에 있는 교회들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라고 고백하면서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니다. 오늘 저는 같은 고백을 여러분과 함께 주님께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십시오.” 그리고 동일한 말씀으로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우리 함께 찬송하실까요?

 

대속하신 구주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

천만 성도 함께 모여 주의 뒤를 따르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우리 구주 오시네

엄숙하신 주의 위엄 모든 사람 뵈올 때

주를 팔고 십자가에 못을 박던 자들이

슬피 울고 가슴 치며 참 메시아 뵙겠네

주가 당한 고난 흔적 모든 사람 볼 때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 주께 경배 드리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 다시 오시네

고대하던 예수께서 영화롭게 오실 때

고난 받던 모든 성도 구주 환영하겠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여 어서 오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