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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설교

전도서 강해(1)-해아래 새것이 없나니(1:1-11)

by 등불지기 2012. 3. 7.

 

 

해아래 새것이 없나니

 

 

본문: 전1:1-11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전도서를 공부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도서는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 혹은 구도자들을 위한 안내서입니다. 진리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삶을 설계할 것인가 고민하는 청년들을 위한 책입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전도서의 주제는 인생의 참된 만족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를 실험적으로 탐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알기를 갈망하는 존재들입니다. 왜 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의미가 있는 삶인지 끊임없이 묻는 존재들입니다. 전도서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뿐입니다. 사람이 아닌 그 어떤 동물도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진 않습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것에서 만족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단지 먹고 마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먹고 마시고 배부르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더 깊은 차원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참된 만족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과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으면 참으로 행복하겠거니 하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그것을 얻으면 또 다시 허탈해집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또 다시 돌진합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거인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수고하다가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솔로몬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는 일=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자가 살았던 예루살렘으로 순례하여 모여들었습니다. 스바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서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진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할은 단지 유대땅을 다스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온 열방과 온 땅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도자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제사장 나라를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많은 구도자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왕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전도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히, 코헬렛)는 그러한 구도자들을 불러 모아서 인생의 참된 가치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이 전도서에서 압축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누구라도 인생의 가치와 방향을 바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청년들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 전도서만큼 적절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와 만족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방향을 모르므로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도서에서 그러한 방황은 확실히 끝날 것입니다. 이 전도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증명해보이고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전도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으며 목적이 뚜렷한 비전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함께 배우도록 합시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해결하기 위해 전도자의 안내를 따라 가봅시다. 이 일에 지혜의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좋은 보상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전도서 1장은 기본적으로 세상살이가 의미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와 만족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이런 가정에서 출발해봅시다.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만약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마치 집안에 늘 간섭하고 잔소리하던 부모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 장난꾸러기 아이가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지미 뉴트론]이란 영화의 초두에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모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데 세상은 금방 뒤죽박죽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모의 소중함을 깨닫고 아이들이 부모를 구하려고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철없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 수 있어 잠시 ‘행복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참된 의미와 만족과 행복과 목적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동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동원하여 무기를 만들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내면의 고통을 잊기 위해 쾌락이나 섹스에 중독되거나 의미 없이 생존을 위해 기계적으로 일하거나 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와 인생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나 개인이 진정으로 행복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그들에게 과연 새 것(참된 만족을 의미함)이 있는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참 만족과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찾기를 바랍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의미를 부여하시도록 하셔야 합니다. 전도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 만족, 행복, 그리고 참으로 ‘새로운 것’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치 공갈빵과 같이 겉은 크고 먹음직스럽지만 먹고 나면 뭔가 허전하고 여전히 배고픈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헛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된 말씀의 참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저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 쓰임 받은 사람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코헬렛)”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 이해하는 부분(정체성)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첫째, 다윗의 아들, 둘째, 예루살렘 왕, 셋째, 전도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첫째, 다윗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둘째, 예루살렘에 찾아오는 구도자들과 순례자들을 책임지고 가르쳐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하고 보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의 힘은 군대가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을 예루살렘 왕으로 소개한 것은 왕의 역할이 단지 정치 군사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함으로써 섬기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영향력을 주는 사명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전도자가 구도자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은 제사장의 역할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전도자가 했던 것처럼 세상 가운데서 구도자들을 진리 앞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 단지 병을 고치는 문제, 단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는 문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사람들에게 냉수를 떠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한 손엔 성경을 다른 한 손엔 신문을 쥐고 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물어올 때 진리를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주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하벨 하발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씀은 전도서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아니, 전제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일이 헛되다는 것을 6장까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헛되다는 말은 ‘입김’이란 뜻으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실속, 알맹이, 내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구도자’가 됩니다. 사람은 “어?”라고 깨닫는 순간부터 “왜?”라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식의 보고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을 언제 어떻게 깨닫게 될까요? 살아가면서 위기를 만날 때입니다. 자신이 믿었던 것이 ‘헛됨’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은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찾기 위해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생이 겪는 근본적인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했고, 솔로몬왕은 순례자들과 구도자들을 모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 전도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진리로 지도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다시 말해서 “무엇이 남는 장사인가?” 혹은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탄식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해 아래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 아래서’라는 의미로 보면 쉬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번 하나님이 없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습니다. 사람은 원숭이에게서 나왔다고 믿습니다. 사실 진화론과 창조론은 과학과 종교의 대결이 아니라 무신론과 유신론의 대결입니다. 진화론이 득세한 나라가 교육이 바로 서며,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고귀한 의미와 가치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안달입니다.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기도 하고 우주에 전파를 쏘아 보내는데 수 십 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여서 유전자를 조작해서 생명을 복제하려고 시도합니다. 왜요? 모두 하나님을 부정하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간섭받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가정을 비우면 아이들은 자기 세상을 만난 듯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그 집은 금세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전부입니다. 즉, 얽매이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세상을 한번 보자고 전도자는 제안합니다. 4절에서 11절까지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잘 보여줍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세상은 무의미한 반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4절) 전도자는 이제 의미 없이 되풀이 되는 세상의 일에 대하여 하나씩 언급합니다. 땅은 그대로 있는 반면 사람은 그대로 있지 못하는 것을 서로 대조하면서 사람에게 영구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땅과 같이 지속적인 것이 사람에게 무엇인가? 라고 질문합니다. 사람은 지속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가장 불안해하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유한한 자원 때문에 인간은 무척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일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오직 그것 때문입니다. 남의 것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빼앗기 위해 공부합니다. 과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도 사실 남의 것을 착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섬기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인생의 참된 의미가 남보다 더 많이 가지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한한 자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될 때 오는 것입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한번 봅시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고 연하여(=계속하여) 흐르느니라.”(5-7절)

여러분, 눈을 들어서 자연현상을 한번 보세요. 자연은 계속 순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순환하지 않습니다. 윤회는 사람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애는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단 한번뿐인 삶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사람은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잘 살고자 갈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전도자는 자연 속에 사람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후회함 없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야 합니다. 왜냐면 나의 삶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뿐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기회인 것입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생은 무의하며 피곤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8절)

사람이 제일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희망이 없고,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을 한번 보세요. 희망이나 의미나 만족이나 가치를 추구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만이 만물의 피곤함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사람은 권태와 무의미와 치열하게 씨름합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무의함입니다. 무의미가 사람을 무료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합니다.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사는 동물입니다. 사람은 늘 신선한 것, 가치와 의미를 찾아 헤맵니다. 가난해서 힘들 때는 죽기 살기로 정신없이 일하다가 어느 정도 풍요해지니까 사람들은 이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어서 지루해집니다. 이 지루함, 권태, 무의미함, 무목적성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레저와 스포츠나 섹스, 알코올, TV 드라마, 쇼핑, 인터넷 등에 빠져듭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입니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의미 없이 노력하거나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일상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둘 중에 어느 하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탈출하게 되면 어항에서 나온 물고기의 운명처럼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와 삶은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한 것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9,10절) 사람들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이란 의미 있는 무엇, 참신한 것, 영구적인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굶주려 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자신들에게 영구적인 기쁨과 희망과 만족과 의미를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새로운 것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울부짖으며 ‘새 것’을 찾아다닙니다. 보세요. 어디서 음식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가서 맛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새로운 것은 해 아래서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또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해 아래 사는 인생” 즉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는 삶은 참으로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세상에는 결코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어떤 것에서도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저 반복적으로 움직이지만 그러나 왜 그렇게 움직이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다가 죽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데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는지 아무도 밝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바이센테이셔널 맨’이란 영화를 보면 인간과 로봇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 영화에서 로봇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로봇이 인간을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늙어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연이 왜 계속 반복되는 지에 대한 것과 인간이 성장하여 늙어 죽는 현상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인정할 때만이 비로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기 싫어서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은 결코 새로운 것(something new)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진정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람은 진짜 사람다운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것을 그저 혼합하여 만들 뿐이지 결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느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삶이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나 TV나 스포츠와 같은 매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영화배우나 T.V 탈랜트나 가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에게 영광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도자의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 병을 고치는 것,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거나,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에 취직하거나, 삶의 질을 높이거나, 안정된 삶의 환경을 확보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목적이 아닙니다. 최근 살면서 이런 문제를 삶의 근본적인 것인양 생각하면서 연연해 한 적이 없었습니까? 최근 내가 몰두한 삶의 문제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세상에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한 전도자의 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희망이 없고, 의미가 없고,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들은 없지만 사람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사람은 권태와 무의미와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죽기 살기로 일하다가 삶이 풍요로워지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지루해지는데, 이 지루함(권태)을 극복하기 위해 레저와 스포츠와 성적 유희에 탐닉하게 됩니다. 당신은 삶의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를 직면하기 싫어 다른 어떤 것에 도피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종종 탐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삶은 거대한 서바이벌 게임장과 같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야근을 자처하는 것도 사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스트레스와 부담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여기 참된 삶의 의미와 목표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과 가치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이 됩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싶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방황은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생이 찾는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 안에 삶의 방향을 발견하십시오. 그것은 삶의 방황을 끝내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