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54)-일한 대로 갚아주리라(계22:12-15)

등불지기 2012. 3. 3. 19:53

요한계시록 강해(54)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본문: 계22:12-15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요즘 환타지 소설과 영화들이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는 것 같습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라든가, “반지의 제왕”같은 영화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책은 계시의 책입니다. 이 책은 사람이 상상력으로 만든 환타지 소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신탁입니다. 먼저 계시가 요한에게 전달되는 방식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봅시다. 지금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서 요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천사 자신이 아니라 마치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처럼 느끼게 됩니다. 천사는 지금 충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자기 스스로 말을 지어내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과 추론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환타지 소설은 작가의 추론과 상상력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저자의 생각과 감정은 제외됩니다. 환타지 소설은 저자가 그 마음에서 만들어낸 이미지로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이미지를 그대로 보고 적은 것입니다. 오늘 천사가 요한에게 말하는 방식을 “대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대언의 사역이 있을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예수님인양 말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아를 혼동하는 어리석은 모습인 것입니다. 천사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대언하는 것과 요한이 그 말씀을 받아서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설교와 대언을 혼동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설교는 천사가 하는 말처럼 대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인격적이고도 신실한 응답입니다. 즉, 회중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방식이 아니라, 회중을 위하여 그리고 회중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설교는 회중에게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경외심으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대언하는 방식으로 설교하는 자들에게 미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한 사도는 나중에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겠노라.”는 식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어떤 사람이 천사가 대언하는 방식을 흉내 내려고 한다면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매우 위험하며 또한 매우 교만한 행동입니다. 물론 구약의 선지자들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서 사도들이나 다른 신실한 제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말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는 방언을 통역하는 분들이 통역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솔직히 의심이 갑니다. 저는 방언의 은사를 믿습니다. 예배 때 말고는 개인적으로 방언하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방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 방언은 분명히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방언을 통역할 때 마치 사람에게 대언하는 식으로 통역이 나올 때면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께 하는 말이면 감사, 고백, 찬양, 간구 등입니다. 그런데 지시, 명령, 책망 등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식으로 통역이 될 때 저는 당황합니다. 분명 성경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통역이 잘못 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통역의 내용은 하나님께 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통역이 아니라 예언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14:3) 그러나 예언의 은사와 오늘 천사가 주님을 대신하여 하는 대언의 사역과는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으로서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여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요한 사도에게 대언하는 것은 주님의 음성 그 자체인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개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며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섬김입니다. 반면 대언의 말씀은 사도와 선지자들로 하여금 교회가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설 수 있도록 성경을 기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도 방언과 예언의 은사는 여전히 교회에 필요하다고 믿지만 오늘날에도 대언의 사역이 있다는 것은 부정합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 사도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는 방식으로 하는 설교를 부정합니다.

우리는 예언과 방언통역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제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27-33) 저는 은사의 세계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오직 말씀의 권위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하다고 하더라도 기록된 말씀의 권위와 동등하거나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14:37,38) 우리는 오늘 천사가 요한에게 주님의 말씀을 하나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는 오늘 천사처럼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강조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모든 사람이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대로 스스로 신령하다고, 혹은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로 통제하지 않으면 은사가 어디로 튈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랑과 섬김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든 ‘신령한 것’들은 차라리 없애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 오늘 읽은 계시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교회를 격려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에는 분명한 상급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주님은 충성된 성도들에게 상을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내가 신속하게 오리라”고 약속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신속하게 오리라!” 계시록 22장에서 “내가 속히 오리라”는 약속은 7절, 12절, 20절에서 세 번씩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교회에 신속하게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왜 신속하게 오기를 원하시는지 교회가 이해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마치 약혼을 하고 먼 나라로 떠난 남자가 혼자 남아서 고생하면서 온갖 유혹에도 자신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그래서 곧 자기의 신부가 될 여자에게 “내가 빨리 가겠소.”라고 편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분을 그리워하고 기대하는 것보다 그분이 우리를 더 많이 그리워하고 기대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왜 신속하게 오기를 바라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속하게 오시고자 하는 이유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성도들에게 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상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은 상을 주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사랑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려주신 것도 은혜인데 넘치는 상까지 주시겠다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상을 주겠다’고 하면 지레 겁을 먹습니다. 아예 ‘상’이란 단어에 대해 거부감부터 품습니다. 분명 그런 사람들은 한 번도 상을 받아본 경험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남모르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세상도 상을 줍니다. 학교에서도 진학과 취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종류의 상을 만들어놓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상은 분명히 공로적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전교에서 50등 안에 드는 학생에게는 금배지를 교복 칼라에 달아주었습니다. 저도 금배지 한번 달아보려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분명 금배지는 제가 노력한 대가입니다. 금배지를 달아주는 학교에 대해 어떤 은혜를 느끼거나 감사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을 준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서 위화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열등감을 조장하는 분으로 생각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상을 받지 못한 것이 열등감을 조장하지만 하나님이 건설하시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그 믿음에 따라서 상을 받게 되므로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오는 세상에 구주께서 주시는 상을 이 세상에 있는 상처럼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상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오해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의 바다 한가운데서 구원하신 것도 큰 은혜인데, 게다가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시는 상에 대해서 부담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은혜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면 상급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맛본 사람은 주시겠다고 하신 상급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상주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과연 순수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인간적으로는 순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은혜를 모르는 것에 대한 변명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만약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상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가 헌신하고 충성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있고 상주심이 없다면 단지 죽기 전에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믿고 살아가라고 권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하나님의 상 주심이 없다면 우리는 헌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헌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서 행하실 때에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 예수님께서도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난을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상이 필요 없어. 나는 그냥 하나님만 믿는 것으로 만족할거야.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본다면 그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는가? 나는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어. 그래서 나는 상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어도 괜찮아.”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지 않는 것이 과연 순수한 믿음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과 헌신하지 않음을 변명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그분의 넘치는 사랑을 진정 안다면 더욱 더 그분의 상 주심을 사모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 그분의 상 주심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분의 은혜를 받지 않았거나 그분의 은혜를 잊었거나 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주심과 상 주심은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주심은 과거적이고 하나님의 상 주심은 미래적입니다. 이미 주신 구원이나 앞으로 주실 상이나 모두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써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미 일어난 은혜를 안다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상 주심을 바라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은혜를 아는 지식과 상급을 바라는 소망은 사실 같은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상 주심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소망은 하나님의 상 주심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상 주심에 대해서 여러 가지 궤설로 혼돈에 빠뜨리는 마귀의 계략을 주의하십시오. 마귀는 교회로 하여금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품지 않도록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해 오해를 품게 합니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넘치는 상급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 상 주심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상을 주십니까? 상을 주시는 그분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본문은 “일한 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각자의 일한 대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공평하십니다. 그래서 그날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은 상을 받는 사람을 향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똑같이 공부하고 노력했는데 누구는 점수가 더 나오고 누구는 덜 나올 때 사람은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만큼 결과가 나온다면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바로 그렇습니다. 매우 정직하고 공평하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이것을 분명히 아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봅시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참 신자인지 아닌지 금방 알아보십니다. 그 기준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입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니라 ‘열매’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 주님은 열매를 찾으십니다.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한다고 맺혀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열매는 맺는 것이 아니라 맺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노력하고 땀 흘려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열매가 아니라 제품이요 상품일 것입니다. 주님은 잘 포장된 제품이나 상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제품이 아니라 열매로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구별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열매와 상품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잘 포장된 제품을 열매인양 착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 열매로서의 ‘일’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그것은 종교적인 일이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기도하는 행위 그 자체는 열매가 아닙니다. 이방인도 역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주님이 칭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행위는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거나 상급을 더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그 자체는 주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상급을 받으려고 하거나 칭의(justification)를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그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직분을 수행하거나 남을 가르치는 일이 아닙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22절)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주님이 더 인정해주거나 칭찬해주는 것이 결코 못됩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것은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감당한 것뿐입니다. 직분을 잘 감당했을 때 우리는 “주의 종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9:16,17)고 했습니다. 충성스럽게 직분을 감당한 것이 상 받는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그 일에 대해서 무슨 상이나 칭찬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는 많은 유익이 주어집니다.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은 우선 담대한 마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면 주께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셔서 더 큰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더 큰 영향력을 갖게 해주십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직분을 잘 수행하는 것이 주님이 찾으시는 참 열매는 아닙니다. 셋째로, 그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무슨 대단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로부터 영원한 저주의 형벌을 받는 사람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도무지 모른다고 하신 사람들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22절)라고 했습니다. 상급은 주님의 이름으로 굉장한 사역을 감당하는 일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을 섬기고 고치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도와주는 행위는 제자들로서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러한 사역을 잘 했다고 주님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넷째로, 그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절) 종교적인 체험이 상급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굉장한 체험을 했다고 자랑할 일이 결코 못됩니다. 체험이 상급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일에 하나님은 상급을 주실까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와 같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참 믿음은 참 행위를 낳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삶 그 자체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투영해버립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가로막아 섰을 때 본인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충성심을 발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4-2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분명히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각 사람의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자기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열심히 행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일은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생각한 일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었지만 십자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위한 충성스러운 일이 ‘하나님의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의 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갚아 주시려는 행위는 자기를 부인하는 행위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이며, 자기 목숨을 구주를 위하여 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분명 인간적인 눈으로 보자면 당연히 충성스럽게 결심하고 나선 베드로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이 상을 주는 방식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입니다. 인간의 충성된 마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갚아 주시려는 것은 철저한 자기부정과 순교자의 각오로 살았던 삶인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는가를 보시고 상을 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고난을 받았느냐에 따라 상을 주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삶에 대해서 주님은 자신의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상을 주시려는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고 하셨습니다. 반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 행위는 아무리 선하더라도 상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6:1)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부인하였는지, 그리고 죽음의 십자가에 얼마나 참여하였는지를 가지고 상을 주실 것입니다. 기준은 땀이 아니라 눈물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고 세인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고생하였느냐 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권리를 누렸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권리를 포기했느냐 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 주는 상급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직분과 사역에 관련지어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요6:29)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하지요. 얼마나 예수님을 잘 믿었느냐를 가지고 상급이 결정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쉽다고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과 순교자의 각오가 없이는 쉽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신실하게 믿는 자들에게 그 믿음의 보상을 주고자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단순한 명제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기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취하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취하는 것입니다. 자기 계획을 버리고 주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일이 정말 쉽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에 대한 지식에 동의하는 것이라면 참 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참된 열매를 낳는 생명력 있는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르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그분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그분의 종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권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처분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부인을 요구합니다. 즉, 실제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종은 오로지 주인의 영광을 자신의 전 기업으로 삼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주인의 공급과 보호를 확신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삶은 우리가 그분의 종으로서 내 맘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맘대로 살 수도 없고,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의 것으로 늘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8,9)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다른 지체들을 함부로 판단할 권리도 기꺼이 포기했다는 말입니다.(롬14:1)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은 범사에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살 때에야 비로소 자기의 존재가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이 원하신다면, 아니 그분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나 선교사가 되었다고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불행한 일이지만 목사나 장로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갚아주시려고 하시는 일, 열매, 혹은 행위는 자기를 부정하고 순교자의 각오로 살은 삶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온전히 믿고 따른 삶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성공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상을 받을 행위를 살펴보았으면 이제는 상을 주시는 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상은 상을 주는 자의 존귀함과 권위에 따라 그 질이 결정됩니다. 학교장이 주는 최우수상보다는 대통령이 주는 장려상이 더 영광이 있습니다. 본문은 상을 주는 분이 얼마나 권위가 있는 분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권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13절)고 했습니다. 한 절에 똑 같은 의미를 세 번씩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또한 상을 주시는 분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상은 최고의 상입니다. 학자들은 노벨상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영화배우들은 아카데미나 오스카에서 상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영화제에서 주는 남우주연상과 아카데미남우주연상은 그 권위가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노벨 제단이나 아카데미 제단에서 인정해주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상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해주심!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상급입니다.

세상이 주는 상들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의 차이점이 있다면 세상은 열심히 노력하여도 상을 얻을지가 확실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은 확실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공평하시고 그 기준은 매우 공의로우시므로 그분이 주시는 상급도 매우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종류의 상은 그 기준이 참으로 모호하거나 불공평할 때가 많습니다. 아카데미도 그렇고, 심지어 학교에서 주는 표창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권위자이신 하나님께서 주는 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공평합니다. 안일 속에 산 사람에게는 고난으로 갚아주시고 십자가를 진 사람에게 영광의 면류관으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평한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가서 불꽃 가운데 신음하던 부자가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알고자 했을 때 그가 들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16:25)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6,7) 하나님의 위로와 인정해주심! 우리는 이 상을 알고 또 사모해야 합니다. 이 상을 얻기 위해 우리는 분투해야 합니다. 이 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 상을 얻기 위해서 한 가지 필요한 조건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큰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이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하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주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승리하도록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될 때 사람은 참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자신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심에 대해 자신이 믿음으로 순종하고 살아갈 때 어떤 상을 주실지 사모하는 마음이 또한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소돔왕이 나아와서 무수한 보물로 그를 유혹했을 때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상을 얻기 위해 작은 상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습니다. 작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 큰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영화를 얻기 위해서는 지상에서의 영화를 포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소돔왕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실 더 큰 상급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상을 얻으려면 세상이 제공하는 상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전도자로서 결혼하거나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고 거절한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9:1-14)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權)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전9:18) 우리가 세상에서 온갖 즐거움을 다 맛보면서 그날에 주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는 것은 모순입니다. 오늘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데 그날에 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 그날에 주께서 주실 상을 사모한다면 오늘 자신을 부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자신이 상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모하고 추구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줄 상이 내게 있다”고 하실 때 그 상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상급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 예수님의 영광을 얻는 것, 이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상급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세상의 상도 챙기고 하늘나라의 상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도 안락을 누리고 또한 하늘에서도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을 가지려면 포기하는 법, 거절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십니다. 그는 하늘과 땅과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또한 우리가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성령으로 새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는 처음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한번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끝내시는 분이십니다. 중도에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법이 결코 없으십니다. 그분은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속주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신실함은 오늘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또 그분 안에서 모든 소망을 갖게 되는 원천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줄 상이 내게 있다”고 하셨을 때 그 상은 성도들이 품는 소망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소망이 없이 살아간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십시오.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완전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 안에서 참된 소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시작하신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실 그 날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반드시 시작하신 일을 끝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자빠져도 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협조나 도움이 없이 그분이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분의 능력이나 진실함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오 시작과 끝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과 시련 속에서도 그분 앞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을 믿습니까? 그분을 신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과연 주님이십니까?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십시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함이로다.”(14절) 여기서 두루마기는 어떤 뜻입니까? 두루마기는 사람이 만드는 옷이 아닙니다. 이 옷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시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자기를 위해서 지은 것은 고작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행위들은 아무리 선하고 거룩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만드신 두루마기와 비교하면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두루마기를 만들어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동물을 손수 죽이셨습니다. 그것은 예표이자 예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에게 입혀주신 하나님의 두루마기를 통해 자신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분명 들었습니다. 이 두루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복종으로 행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지으신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 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이 의가 모든 성도들이 입고서 자랑해야 할 두루마기이며, 또한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반드시 입어야 할 두루마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알고 사랑하며 다른 의가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의를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외에는 다른 의를 자랑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다른 의가 개입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른 의에 오염될까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굳게 붙잡습니다. 그것이 진정 두루마기를 빠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 복음을 소중하게 간직하던가, 아니면 무시하거나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두루마기를 빠는 행위에 대해서 ‘죄를 자백하는 행위’ 혹은 ‘행실을 거룩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보니까 그것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시고 모든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리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열심히 자백하는 행위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행위 그 자체는 의롭다함을 받는 일에 전혀 기여하지 못합니다. 죄를 자백하는 행위를 제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행위는 죄를 자백하는 행위 그것을 포함하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늘 새롭게 해야 합니다. 죄를 자백하는 행위 그 자체는 아무런 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믿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죄를 자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우리는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죄를 뉘우치더라도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도덕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아니 상당할 정도로 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열매’를 찾으십니다.

이 믿음이 없이 죄를 뉘우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왜냐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가려줄 의의 옷은 바로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를 당당하게 세워줄 것은 우리의 공로와 노력으로 만든 무화과나무 잎이 아니라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의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주장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는 것이지 죄를 자백하는 행위 그 자체가 우리의 죄를 가려주는 의의 옷이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루마기를 빠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생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14절)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영생을 맛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오직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것뿐입니다. 두루마기는 의의 옷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죽었던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 즉 그분의 순종과 고난과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과 승천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이 우리의 두루마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사랑하며 즐거워합니다. 다른 모든 의를 버리고 오직 이 의만 붙잡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루마기를 빠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구원 받지 못할 인생들이 있습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15절) 이들은 그리스도의 의라는 두루마기를 더럽게 여기고 무시하고 또한 저주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합당한 예복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하신 두루마기를 멸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기를 입지 못했기 때문에 천성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가 이 두루마기를 입지 않을 자들입니까? 첫째, 개들이라고 했습니다. 개들이란 말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이 두루마기를 이해하거나 사랑하는 데 필요한 지혜나 총명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업신여기고 발로 짓밟고 찢어버린 자들입니다. 두루마기를 찢어버리는 모습은 마치 개가 옷을 찢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업신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개’인 것입니다.

둘째, 술객들입니다. 술객들은 ‘마법사’ ‘점쟁이’ ‘주술가’란 뜻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 현혹시키심으로서 무엇인가 유익을 얻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알고 섬기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미혹하고 속여서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요즘 마법사들이 나오는 영화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은 종말의 당연한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획기적인 마술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날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면 성공하기는커녕 오히려 당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주술적인 방법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 처음 발매된 ‘로또’가 20억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대박’의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식’으로 대박을 터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투자로서의 주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투기로서의 주식을 정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투기와 투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카지노와 같은 도박판에서 대박을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술객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아니라 온갖 술수와 요령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라는 두루마기 옷을 결코 입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셋째, 행음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쾌락을 즐기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즐기는 것이 없으면 그들은 방황합니다. 오직 즐기는 것이 그들 인생의 유일한 낙이며 목표입니다. 종말의 특징은 이렇게 온갖 종류의 성적인 중독자들과 쾌락에 탐닉하는 자들이 많아져가는 것입니다. 쾌락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자신을 부인하거나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을 가질 수는 있으나 오직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납니다.”(딤전6:5) 그들은 온갖 정욕의 포로들이며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떠나갈 자들입니다.

넷째, 살인자들입니다. 그들은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며 시기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쉽게 증오심을 풀지 않습니다. 종말의 때는 많은 사람들이 원한과 분노심과 증오심에 노예가 되어버리는 때입니다. 그들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들”이며 형제를 대하여 욕하는 자들이며,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고 조롱하는 자들이며(마5:22), 형제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들이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분열과 분쟁에 앞장서는 자들이며(엡4:2,3),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서 원통함을 결코 풀지 못하는 자들입니다(엡4:26, 딤후3:3). 분노심과 증오심에 포로가 되어서 결코 자기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주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모든 자들을 평생 원수로 여기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해주지 못하는 그들은 결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다른 피조물에 돌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탐닉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중독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하나에 미친 듯이 몰입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신성을 부여하고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종말의 특징은 어느 특정한 분야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매니아들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박수치면서 뜨겁게 찬양 부르는 사람들을 보고 ‘광신도’들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잠실 경기장이나 농구장에서 더 광적으로 환호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마음과 목숨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영광을 돌릴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오직 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울은 우상숭배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옷입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여섯째,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뭐라고 말하든 개의치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생각과 감정과 판단이 기준이 된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라는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노력하고 노력하는데도 점점 생명에서 멀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자기 생각을 주장합니다. 결코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 수도 없으며 또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말씀 앞에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라는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신속히 오십니다. 그분은 빨리 우리에게 오고 싶어 하십니다. 마치 약혼식을 올리고 난 뒤 먼 나라로 간 신랑이 혼자 남아 갖은 유혹을 다 뿌리치면서 순결을 지키는 자기 신부에게 빨리 오겠다고 편지하는 것처럼 지금 주님은 동일한 마음으로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빨리 오셔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일일이 그 행한 대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믿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상급으로 주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한 모든 삶에 대해서 그분은 자신의 영광과 존귀와 모든 보배로운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이 땅에서 참고 견디는 모든 삶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이 땅에서 고생하고 흘리는 모든 눈물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날에는 우리의 땀이 아니라 우리가 흘린 피와 눈물의 분량대로 그분의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상은 그분 자신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날에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을 안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실 장래의 영광스러운 상급에 대해서도 알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얻게 될 상은 그분처럼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에 누가 더욱 큰 영광으로 상을 받느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얼마나 참여하였는 가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높여주실 것인지는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낮아졌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삶에 따라서 그날에 얻게 될 영광은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에 우리가 얻게 될 상급은 은혜입니다. 공평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낮아진 만큼 높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분량만큼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흘린 눈물과 피의 양 만큼 위로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를 바라봄으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고, 오직 주 예수를 바라봄으로 우리는 그분을 닮아갑니다. 칭의나 성화나 모두 오직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한번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면 그분께서 친히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십니다. 그분의 상 주심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십시오. 그분을 주로 믿고 섬기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주를 앎이니라.”(고전15:58) 다른 것은 다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님을 잘 믿는 자들이 됩시다. 참 신자들이 됩시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걸어가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열심히 밟는 자들이 됩시다. 그것이 진정 큰 상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하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챦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 같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 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