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전도서강해(2)-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1:12-18)

등불지기 2012. 3. 7. 17:39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본문: 전1:12-18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고민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동물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결코 고민하지 않습니다. 단지 먹기 위해 고민하고 먹고 배부르고나면 결코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저 본능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먹고 배부르고 나서도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아니 배부르고 나면서부터 진정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배고플 때는 먹고 사는 것이 방향이었습니다. 그런데 먹고 살만 하니까 생존은 진정한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방향을 찾기 위해서 방황합니다. 사람이 방황하는 이유는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다시 말해서 방향을 찾으면 방황은 끝나는데 불행하게도 어디에서도 방향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고려해서 방향을 정해버립니다. 계속 방황하기보다는 일단 최선의 방향부터 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면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이를 때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의 때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스타트 라인에 서 있을 때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삶의 진정한 방향을 발견하셨나요? 사람들은 이렇게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책을 보고 연구를 합니다. 사람들의 삶을 탐구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로우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계 나라를 보세요. 최빈국일수록 행복도가 높습니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만족지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옛날에 못 먹고 배고플 때보다 오히려 잘 먹고 배부를 때일수록 더 많은 우울증과 스트레스와 자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배우면 배울수록 똑똑해지면 질수록 머리가 좋아지면 질수록 사람은 행복하고 만족하기는커녕 삶의 불만이 많아집니다.

 

 

 

오늘 전도자는 이러한 고민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2,13절,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여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이 진정으로 ‘괴로운 것’ 즉, 감옥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바로 죄의 대가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이 수고는 죄의 대가로 주어진 것입니다. 범죄하기 이전에도 수고가 있었지만 이 수고는 창조적인 수고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 인생의 수고는 창조적인 수고가 아니라 의미 없는 수고, 그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수고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전에는 창조의 기쁨을 누렸으나 죄를 지은 이후에는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에게 수고를 명령하셨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7-19) 고생하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과 같습니다. 왜 공부합니까? 왜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법니까?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인이 밤늦게까지 퇴근을 못하고 일하는 이유는 바로 ‘서바이벌’에 대한 부담감 때문입니다. 만일 살아남기 위해 공부한다면, 생존경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다닌다면 이것은 회개해야 하는 징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어떻게 하든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부담감을 어떻게 털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요즘에는 레저활동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이종격투기와 같이 과격한 싸움에 몰두하는 매니아가 늘고 있습니다. 경쟁사회에 대한 스트레스가 주범인 것입니다. 레저에 열심히 몰두하는 것 역시 ‘서바이벌’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가지고 신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음과 같이 나는 이렇게 탄식하고 싶습니다. “오 이 괴로운 세상에서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줄 곳은 어디인가?” 정말이지 세상은 곤고한 곳입니다. 제대로 쉴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이 수고하고 고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의 삶을 연구의 결과 다음과 같이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4절,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그런데)보라!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거듭 말하지만 ‘해 아래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들이 다 의미가 없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은 다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인데 자기들의 소원과 달리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전도자는 이것을 ‘바람을 잡으려고 애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처럼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노력하고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성취감을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간적인 기쁨과 만족을 얻는데 그칠 뿐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요? 전도자는 그 원인을 죄에서 찾고 있습니다.

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인생이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참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구부러진 것’은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인간의 죄성(罪性), 타락한 본성(本姓)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본성은 심각하게 뒤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없고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은 참된 만족과 행복을 찾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실탄으로 사격을 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자신은 표적을 향해 정확하게 조준을 해서 격발을 했는데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그렇다면 원인은 영점을 잘못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핸들을 바로잡고 직진을 하는데 차가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면서 기울어집니다. 원인은 얼라이먼트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휠 얼라이먼트를 교정하면 그런 현상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사람입니다. 총이나 자동차는 구부러진 것을 다시 고칠 수 있는데 사람은 어떻게 고치느냐입니다. 사람의 문제는 더 복잡합니다. 왜냐면 사람은 아주 정교한 컴퓨터보다 훨씬 더 정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기계로 비유하자면 기계를 만든 사람이나 공장에 가야하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해 아래 있을까요? 물론 병이 나면 병원에 가면 어느 정도 치유가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병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치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삶의 행복이나 의미 같은 것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잡았다 싶으면 금방 ‘이건 아니야!’라고 반응하게 될 겁니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해 아래서는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교정하고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해 아래서는 고칠 길이 전혀 없다는 선언에 대해서 동의합니까? 동의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직접 실험해보십시오. 연구해보십시오. 행복하게 살려고 나름대로 애쓰는데 잘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구부러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이 구부러진 것을 다시 펼 수 있을지 한번 연구해보십시오.

 

전도자는 이러한 연구에 필요한 지혜와 지식도 무능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16절,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사람은 공부하고 싶은 욕구를 다들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입니다. 동물들은 배우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억지로 가르쳐서 배우지만 결코 자신이 배우기 위해 찾아나서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찾아나서는 구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나서는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며 길을 떠나는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줄 스승을 찾아나서는 것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동물은 자신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청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동물은 그저 강제로 훈련시켜서 길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길들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진리를 찾아나서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찾아 나서는 자율적인 학생의 길을 가길 바랍니다. 나는 어릴 적 학교가기를 무척 싫어했었습니다. 왜냐면 억지로 해야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입식 교육, 학원식 강의는 정말 싫었습니다. 너무 일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점수를 얻기 위해서 선생이 원하는 답을 적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찾아서 하는 공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나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 삶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 학교교육은 마치 거대한 학원처럼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안타깝습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며 탐구하는 모습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밤 12시가 넘도록 정보를 주입하는 학대에 시달리며 강요당하는 학생들을 보면 이것 학생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학생이 아니고 순전히 노동자입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간들 만족하던가요? 그래서 취직한다 한들 행복하던가요?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지 않던가요? 스스로 공부해야 합니다. 강요에 의해 공부한다면 그것은 진정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진리를 찾아나서야 합니다.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는 결코 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왜 교회 다니는지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니까, 혹은 부모가 하라니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나의 신앙이 아니라 남의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찾아다니는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보세요. 동물은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전혀 없지만 그러나 사람은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서 무엇을 배우고자 한다면 무슨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배우고자 열망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영적인 존재임을 증명해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이러한 지적 갈망이 매우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지혜와 지식을 많이 얻으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18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지혜와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찾아 발견할 수 있게 해줄까요? 세상에서 솔로몬보다 더 많이 공부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솔로몬이 깨달은 것은 공부를 많이 해도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더라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더욱 삶의 무게에 힘들어하고 있으며 삶의 피곤함(권태)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식을 많이 축적했다고 해서 인생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문제들을 더 많이 발견하고 제시할 뿐입니다. 행복해지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지혜와 지식은 그 반대입니다. 지식을 얻을수록 사람은 근심이 많아집니다. 최근 동향은 가벼운 지식(인터넷 정보)을 열심히 추구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진지한 지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벼운 지식에 머물게 합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세계 대학과 비교해볼 때 우리 나라 대학생들의 독서율은 형편없습니다. 진지하고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 책은 절대로 보지 않습니다. 요즘 세대는 확실히 진지하게 고민하며 탐구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고민은 많이 하긴 하는데 진리에 관한 것보다는 삶의 가벼운 문제에 관한 것뿐입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서조차 고민하지 않습니다. 부디 가벼운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 허우적거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깊은 지식의 대양으로 나가야 합니다. 삶의 문제로 고민하기보다는 진리의 문제로 고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요즘은 인문학이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잘 사는 사회를 이루려면 인문학이 탄탄해야 합니다. 저번에 여러 번에 걸쳐 강조했듯이 정보와 지식과 지혜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21세기에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정보는 사물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이고, 지식은 경험된 정보이고, 지혜는 지식을 평가하고 통제하고 사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요즘 학교는 정보 교육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참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더욱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지식을 쌓으려면 경험을 많이 해야 하는데 경험할 틈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패와 역경을 통해 지혜가 생기는데 실패하면 그대로 낙오시켜버리는 사회 시스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러한 부분을 알고 교육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교육부 장관이 나오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정보가 많아지고 지식이 많아진다 하더라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광기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프로이드도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광기를 밝혀내는데 성공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문제를 밝히고 드러내는 일에 성공했을 뿐입니다. 솔로몬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탐구하고 연구했지만 구부러진 것을 어디서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어떻게 발견하고, 어떻게 펼 수 있을까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인생에 ‘구부러진 것’은 바로 ‘죄’이며,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불가능하며, 그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해 아래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로 보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만족과 의미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지위와 평강은 헛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인간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 수 있어 잠시 ‘행복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참된 삶의 의미와 만족과 행복과 목적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동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동원하여 무기를 만들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섹스에 탐닉하거나 마약에 중독되거나 의미 없이 생존을 위해 그저 기계적으로 일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와 인생을 보세요. 새 것이 있습니까? 삶의 만족과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까? 만족과 기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일시적이지 않습니까? 어디서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해 아래서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그 비결이요 그 원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에게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온 구도자들은 반드시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생의 모든 방황은 끝이 납니다. 그리스도 안에 인생은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되고, 진정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유익과 만족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을 즐거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럴 때 인생은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아름다운 존재를 발견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과 관련지으십시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하시게 하십시오. 인간을 기계에 비유해봅시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정밀하고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 모든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나 공장에 가져가서 고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해 아래서는 어디서도 불가능합니다. 죽음의 문제나 내세의 문제나 인생의 의미와 만족의 문제는 해 아래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진정 새로운 것을 찾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