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silence에 대해서 묵상해보았습니다.
침묵의 영성은 오늘날 현대교회에 그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고, 어떤 일을 열심히 하는데 아무런 결과가 없이 고요할 때가 있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침묵해야 할 때가 있기도 하지요..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마지막 7일의 외침을 위해 6일간 침묵했고, 모세는 생의 불꽃을 사르기 위해 광야에서 40년간 입을 다무는 법을 배워야 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400년 동안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심으로 침묵하셨지요..내 삶에 침묵기는 참으로 답답한 기간이지만..침묵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로 크고 중요한 일이 곧 일어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삶의 침묵,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침묵이 오히려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계8:1절을 묵상하면서
희한하게도 성경에서 '침묵'을 이야기할 때 '진노' '심판' '멸절'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침묵하다'는 말과 '죽는다' 혹은 '무덤에 들어가다'는 말과 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시115:17)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는 것은 죽는 것 같은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실은 하나님이 안 계시고 나를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침묵기 이후에 말씀하셨지요(욥4:16). 그러니까 침묵한다는 것putting oneself to silence은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일,새 생명은 죽음과 같은 고통의 기간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Putting oneself to silence is a process of dying.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이 침묵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 시끄럽고 너무 분주함으로써 스스로 가벼운 기독교, 시끄럽고 요란한 기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많은 영성가들이 '자기죽임' '자아부정' 등 여러가지 주장했지만 사실은 '침묵'put oneself to silence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음성을 듣기 위해 부르짖지만 침묵하지 못함으로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내가 '깊은' 침묵속에 잠길 때(putting myself to silence) 들리는 것입니다.-욥4:16 참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했고(빌3:10,11) "날마다 죽는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고전15:31).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을까요? 어떻게 날마다 죽을 수 있을까요? 저는 바울이 침묵훈련을 했다고 믿습니다. 침묵하기 위해서 가장 외롭고 가장 고요한 자리에 자신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힘든 것은 고독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적막한 가운데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죽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이 고통이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침묵연습!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신음하는 현대교회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어지는 경건의 연습입니다.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 침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침묵케 하는 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강제로 광야로 보내시기도 합니다. 성령도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셨고, 다윗도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는 생존의 문제때문이었지만 광야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 곧 광야야 말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진정한 "성소"였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훗날 시간이 흘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내가 가장 곤고하고, 힘들어 했고, 답답했고, 지쳐했던 그 때가 가장 거룩한 성소였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경험하기 위해 찾아 들어가야 하는 성전은 어떤 건물이 아니라, 의지할 그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찾아볼 수 없는 '마르고 황폐한' 광야와 같은 삶의 자리입니다.-시편63:1,2절 참조
하나님이 잠잠하신 것 같을 때처럼 괴로울 때가 없지요..이것은 영성의 깊이와 아무 상관이 없답니다. 즉,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정성이 부족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지요. 구약의 선지서를 읽어보면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의 침묵하심으로 고민 많이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박국 선지자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어려웠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면..첫째,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에 맞는지 확인해보고(1:13-17) 둘째,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옳은지 질문했고, 셋째, 중보기도자리에 서서(2:1), 넷째, 자신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기다렸습니다. 내 삶의 영역에서 비슷한 문제가 있다면 고민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왜 잠잠하신지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그리고 잠잠히 그분의 대답을 기다려보십시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며 언제나 말씀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다만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그분의 깊은 생각과 지혜로운 시간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내 시간표에 하나님의 응답을 끼워맞추려고 하는 기도는 스스로 피곤해질뿐입니다. 하나님이 하박국에서 대답하신 것 중에 먼저 말씀하신 것이 "때"에 관한 것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 하나님께서 행동에 옮기시기 직전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침묵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결정적인 어떤 일'을 하는 준비과정인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신학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일반대학에서 불신친구들과 공부하고 있었을 3년 동안, 늦은 나이에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온갖 훈련을 받으며 몸과 마음이 지칠 때, 아무 문제 없던 담임목회직을 내려놓을 때, 때로는 금식으로 때로는 작정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싶었습니다. 얼마나 목마르고,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곤한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고 나를 버리시고 나를 멀리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덧 흐른 후 문득 "아!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라고 번개같이 생각이 스쳐갈 때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내 삶에 최선이었고 축복 그 자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침묵은 내게는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삶에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났던 기간이었고,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통해 내 삶에 가장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변화, 깊이, 성숙, 미래를 위한 준비, 훈련, 어떤 말로 단정지을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고, 나를 최선의 길로-비록 내가 알지 못하였지만-인도하고 계셨고, 미래의 새로운 변화, 더 나은 변화를 위해 나를 준비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본질은 약간 다르지만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질문한 것은 주로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비슷한 문제로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12:1)" 질문을 던지면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답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첫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렘12:5)" 말과 경주해야 할 사람이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 문제로 피곤해한다는 것이지요.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말과 경주할 생각은 않고(더 큰 문제의 본질은 잊어버린 채) 사소한 문제와 씨름하면서 스스로 피곤해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17:28)" 침묵은 금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침묵은 금입니다. 1시간 기도하는 것은 쉬워도 1시간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미치지 못한 큰 일과 위대한 일에 마음을 떼는 것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내일일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에 대해 마음을 접는 것도 중요합니다. 침묵의 영성이란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것인지 모릅니다. 즉, 나의 분수를 넘어선 문제나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에 대해 잠잠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now and here 내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이 쌀가게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별로 이득을 보지 못하셨는데 그 이유는 다른 가게에서 흔히 사용하는 됫박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또 쌀을 담을 때 됫박을 흔들기도 하십니다. 됫박을 흔들면 쌀이 좀 더 담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라, 그러면 누르고 흔들어 안겨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 침묵이란 '누르고 흔드는 과정'입니다. 누르고 흔들 때는 힘들고 곤고하고 피곤하지만 사실은 더 많이 담는 과정이고 충만해지는 과정이고 넘치게 받기 위해 필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침묵은 충만을 위한 선행단계이지요.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왕하4:27)"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수넴 여인의 문제에 대해서 숨기시고 침묵하신 이유는 엘리사와 수넴여인 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직접 무슨 문제인지 물어보고,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 문제를 공감하기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종종 인격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실 때가 많습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물어보고 들으면서 상대방의 실상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은 나의 변화나 상대방의 변화에 대해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성경구절 두 개로 침묵에 대한 묵상을 마무리해보려 합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을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일을 숨기시고 감추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을 숨기실 때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거절하시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합니다. 그럴 때 이 구절을 곰곰히 묵상해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미치지 못할 크고 놀랍고 위대한 일에 마음을 접고 오늘 내가 순종해야 할 그분의 계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침묵은 자신의 한계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우리 모두는 침묵을 통해(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 침묵하는 자신의 훈련) 더 깊은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