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은 단순한 도덕책이 아닙니다.
잠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엄밀하게 말해 잠언은 구약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proverbs라고도 하고 parables라고도 합니다.
잠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지혜는 proverbs와 parables를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비유는 보이지 않는 것(오묘한 가르침, 간접적인 메시지)을 보이는 것(이미지,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이나 히브리지혜문학의 중요한 문법적 특징이 평행법parallelism입니다.
예를 들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물'과 '성령'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물의 이미지와 보이지 않는 성령의 실체가 서로 엮어지는 것이 지혜의 말씀이 가진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평행법과 비유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잠언을 이해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이번에 제가 올리는 자료는 잠언에 대해 연구한 것을 요약형태로 올려봅니다.
잠언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1장>
●v.1-잠언의 표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이라” 그냥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시작하지 않고 다윗의 아들임을 강조한 것은 삼하7장의 다윗언약의 중요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잠언이란 히브리어로 마샬, 즉, ‘비유’라는 말이다. 비유는 무엇을 가리키기 위해서 보이는 것을 사용하는 교훈방식이다. 반대로 ‘풍유’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는 해석방식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교훈방식에서 중요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유하셨다. 곧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구약의 잠언 역시 지혜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v.2-6: 잠언의 저술목적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기 위해 (흔히, 지혜는 사물의 본질을, 훈계는 생활의 지침을 말한다.)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 (기독교 복음은 우선 지성적이다. 성령은 지혜와 지식의 영이시다. 성령의 사람은 반지성적이지 않다.)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해 훈계를 받게 하기 위해 (행동지침을 주기 위해서)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기 위해 (기독교 복음은 지성과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도하고 있다.)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을 주기 위해 (기독교 복음은 진정한 경건성으로 인도한다. 복음은 청년의 정욕과 죄를 다루는 힘을 제공하는 힘이 있다.)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며 (가진 자는 더 가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라)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다. (명철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명철을 가진 자는 싸움에 이길 지혜를 얻을 것이다. 잠언은 모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략을 제공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기독교 복음은 근본적으로 깨닫는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깨닫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v.7-9: 잠언의 영광
잠언(proverbs, parables)의 영광은 곧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다. 잠언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께 얼마나 가까이 가도록 돕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란 말은 모든 지식의 목적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학문의 타락을 보라. 하나님 경외하기를 파괴하는 학문은 인간의 죄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참된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하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싫어하는 자(미련한 자)는 지혜와 지식을 멸시한다. 기독교 복음은 지적인 설득에 의한 종교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의 문제이다. 불신자들은 사랑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반지성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진지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얼마나 반지성적인지, 얼마나 진리를 멸시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진지함(“아비”와 “어미”는 진리를 가르치는 솔로몬 자신이자 진리를 말하는 교사를 가리킨다)을 가질 것을 성경이 요구하고 있다. 진리에 대한 진지함을 가진 사람을 보라. 그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쓰고 다니고 있으며, 그 목에는 찬란한 금 사슬이 드리워져 있지 않는가? 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며 그와 동행한 사람이 반지성적인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영성은 에스라와 같이 말씀을 연구하는 영성(studying spirituality)이다. 오늘날 교회를 보라. 얼마나 진리에 대해 진지한가? 진리에 대해 경솔한 모습이 없는가? 진리에 대한 피상적인 언급, ‘과연 그러한가?’라고 살펴보았던 베뢰아 교인들의 진지함이 있는가? 목사들은 진리를 개인적으로 연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이다.
●v.10-19: 지혜를 추구함에 있어 만나는 장애물을 조심하라
이제 ‘지혜의 교사’ 솔로몬은 가르치기를 지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한 가지 난관을 소개하면서 주의를 당부한다. 지혜를 배우는 자(여기서 ‘아들’로 나온다. 아들은 솔로몬의 혈통적 아들이 아니라 솔로몬이 가르치고 있는 대신들이나 제자들을 가리킨다.)는 악한 자의 꾐을 주의해야 한다. 그들의 유혹이 얼마나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는가? 11절에서 14절까지는 악한 자가 꾀는 내용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악한 자가 유혹하는 것이 무엇인가? ‘온갖 보화’ ‘우리 집에 채움’을 위해 함께 하나의 지갑만 두자는 식으로 유혹해서 이웃에게 해를 가하거나 이웃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이익에 눈 먼 자들이다. 악한 자들은 지혜를 구하는 제자들에게 ‘전대 하나만’ 두자고 유혹하고 있다. 지혜를 구하는 제자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탐심에 기우는 것이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바울이 말했고, 예수님도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자에게 주는 권면을 일러주었다. 교회는 부하고자 하는 자는 온갖 해로운 정욕과 악에 떨어진다고 경고하여야 한다. 복음이 결실하지 못하는 중요한 장애물은 바로 ‘재리의 유혹과 탐심’이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자라다가 이것에 막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재리’와 ‘탐심’을 추구하는 인생은 자기 생명을 해할 뿐이다.(18절)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gains)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 생명을 잃게 만든다. 기독교 복음에 최대의 원수는 다름 아니라 ‘이’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교회가 진정한 영성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라. 기독교회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은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악한 자의 꾀임을 떨쳐 버려야만 한다.
●v.20-33: 지혜가 부른다.(calling of the Wisdom)
지혜는 여기서 인격체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지혜의 본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원이셨으며, 구약에서 성도들을 불러 모으는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내가 너희를 불러 모으려고 노력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지혜가 성육신 하셨는데,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사도요한은 그 지혜를 ‘말씀’으로 묘사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영원한 말씀이 곧 지혜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사도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힐 때 진정한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골로새서를 기록했다. 지혜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들에게 일반적 소명, 외적 소명을 주신다. 소명을 주시는 곳은 특별한 곳이 아닌 공개된 장소이다. 즉, 그 어느 누구도 마지막 심판 날에 ‘나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받지 못했다’고 변명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진리에 대한 진지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진리에 대한 피상성을 책망하고 있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사도 요한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빛으로 나아가기를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은 옳은 지적이었다. 시편 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이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기다린다.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그리스도는 탄식하면서 참고 있다. 제1차 전도여행에서 제우스 신전에서 서서 ‘지나간 길을 허물치 않았다’고 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길이 참으심을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최종적인 기회를 인류에게 주었다. 재림하실 그날까지 더 간절한 사랑으로 애타게 부르며 죄인들을 기다리시고 계신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기독교 복음은 우선적으로 ‘책망’의 형태로 다가간다. 지혜로 가까이 가는 길은 이 책망의 문이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지혜로 가는 길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이 싫어서 어리석은 자의 길로 간다. “나의 신을 부어주며”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결심하고 책망의 문을 통과하여 그리스도께로 가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을 부어주어 그리스도의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령은 본질적으로 지혜의 영이시다.(엡1)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담긴 영광과 풍성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도 듣기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혹독한 재앙이 약속된다.(v.24-30)
그리스도의 소명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인생들에게는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할 것이다. 근심과 슬픔이 갑자기 이를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짖어도 지혜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부지런히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다. 소명은 때가 있는 것이다. 때를 놓치면 더 이상 소용이 없는 것이다. 버스가 지난 뒤에 손을 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마태복음 25장에 5명의 어리석은 처녀를 보라. 그들은 뒤늦게 문을 두드리지만 안에서는 매정한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이처럼 복음은 긴박성을 가지고 있다. 지혜가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왜냐면(‘대저’) 그들이 지식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책망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그 행위는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갈 것이다.(v.31-33)
어리석은 자는 퇴보한다. 미련한 자는 지혜의 소명을 듣고도 게으르다. 그 결국은 행위대로 될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둘 것”이라고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은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복음의 본질을 설명한다: 지혜의 책망을 듣고, 지혜자(그리스도)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는 자는 안연히 살 것이다. 재앙을 만날 두려움이 없이 평안할 것이다. 말씀을 듣는 자에게 약속된 것은 ‘생명’과 ‘평안’이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미암았다고 말했다. 믿음은 주의 깊게 복음을 듣는 데서 생겨나는 은총이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은 사람은 생명이 주어지고, 평안이 주어진다. 보라. 복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대처했는가를. 재앙의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것은 복음이 사망의 권세를 지배하는 힘이 있음을 말한다. 죽음의 권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묶여졌다. 사망은 더 이상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