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이엄 목사님은 아침마다 늘 시편과 잠언을 읽고 묵상한다고 했습니다.
잠언이 모두 31장이기 때문에 어떤 분은 하루에 한 장씩 읽고 묵상한다고 합니다.
아주 예전에 (십 년도 넘었을 것입니다.) 서울 세광교회를 부목사로 섬길 때
장년성경공부를 인도했었는데 그때 창세기, 잠언, 아가서, 전도서, 마태복음, 소요리, 등을 가르쳤는데요
그때 잠언을 가르치면서 정리해두었던 자료입니다.
한 절 한 절 설명하기보다 장별로 큰 흐름과 그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적용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2장>
※참조설명
잠언을 읽을 때 ‘길’이란 단어에 유의하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시편에서 의인의 길과 죄인의 길이 비교되는 것처럼 잠언에서도 두 길이 서로 대조되어 나타난다. ‘길’이란 개념은 창세기 3, 4장을 배경으로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고자 했을 때 이미 죄길로 접어 들었다. 그들은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추방된 그들은 동산 동편--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지키는 천사들이 내려다보이는--에 머물면서 오실 ‘여자의 후손’아 자신들을 구속해주어 다시 그 길로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될 것을 희망했다. 이렇게 생명길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최초의 사람들은 동편 땅에 정착하고자 했다. 그러나 죄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죄인들은 그 땅에서조차 추방당한다. 죄인들은 자꾸만 하나님의 성소였던 에덴동산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그래서 그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자꾸만 이주해갔다. 거기서 그들은 바벨탑을 쌓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게 생명나무가 있는 쪽으로 서쪽으로 이주해왔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백성들은 서쪽으로 갔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죄인들은 동쪽으로 이주해갔다. 이것은 훗날 성막도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성막을 향한 출입구는 동쪽으로 나 있었다. 이것은 죄인들을 초청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막은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흩어진 죄인들을 찾으시려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잠언서에서 이 길은 명백하다. 하나님께로, 생명의 빛되신 그리스도께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이며, 정직한 인생이며, 완전한 인생이다. 반면에, 하나님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가는 인생이 어리석은 인생이며, 패역한 인생길이다.
●v.1-5: 이렇게 지혜를 구하라.
지혜를 구하는 길은 쉽지 않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별로 적다. 그래서 그 길로 가려는 인생은 인내가 필요하다. 본문에서 지혜를 찾는 자의 인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받으며” “간직하며” “기울이며” “두며” “불러 구하며”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천국복음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단 그 보배를 찾으면 헌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배를 찾기까지는 찾으려는 몸부림이 필요하다. 산삼을 캐기 위해 산을 등정하는 심마니의 모습을 보라! 천국복음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했다. 얼마나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구할까! 복음은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한 진지함을 요구한다. 복음은 진리에 대한 진지한 열의와 탐구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에 대해 조금만 진지하게 살펴보더라도 거기에는 굉장한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그 본성이 어두워졌고, 지성이 타락했으며, 진리에 대해 연구하기를 게으르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진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구하는 자가 얻을 것이고, 찾는 자가 찾을 것이고, 문을 (계속)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지혜가 그렇다. 생명이 그렇다. 천국이 그렇다. 이렇게 지혜를 부지런히 구하며 찾을 때 지혜는 주어진다. 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구할 때 결국 만나게 되는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 경외하기”이며, “하나님 자신”이다. “깨달으며” “알게 될 것”이다. 즉, 기독교 복음은 깨닫게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경험적으로 알게 되어져야 한다.
●v.6-8: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대저” 즉, “왜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가 선포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야고보서 1:5을 보라.) 그 입에서 지식과 명철을 내시는 분이시다. 그 지식으로 우주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 분이시다. 누가 정직하며, 누가 행실이 온전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도덕적인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찾는 자들이 정직하며,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는 자가 행실이 온전한 자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을 온전하다고 부르신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매우 공평한 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그들의 길(=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성경역사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보전역사가 성경역사이다.
●v.9-22: 지혜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그런즉” 지혜의 교사(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결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깨닫게 되는 일이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전하시는 의지(8절)에 의한 결과이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적으로 조명하신 결과 우리는 ‘선한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선한 길은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으로 연결된 길이다. 그 길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길이다. 이 길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길’이며 ‘심히 좋은 길’이다. 선한 길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10절에서 부연하여 설명하기를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 지혜이신 그리스도가 마음 속에 실제적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구원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은 우리 영혼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영원한 지식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한다. 이 지혜와 지식은 개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세상학문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1)근신을 가져다 준다. 근신은 젊은이의 정욕과 욕심으로부터 보호해준다.
(2)지성을 가져다 준다. 지성이 여러 가지 유혹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다. 무지함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3)악한 자의 길에서 지켜줄 것이다. 악한 자의 길은 1:10f.를 참조하기 바란다. 악한 자는 패역을 말하는데, 그 내용은 1장에서 말하듯이 작은 이익을 위해 사람을 해치는 삶(이윤추구를 위해 인과 의를 저버리는 삶)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지혜의 교사는 악한 자의 모습을 잠간 설명한다.(v.13-15)
‘이 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버림받기로 작정된 무리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정직한 길’(생명을 찾는 길=지혜를 찾는 길=구도자의 길)을 떠나 그 반대편, ‘어두운 길’로 가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한다. 그들은 지식을 멸시하고 지혜의 책망을 싫어한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다(‘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한다. 즉, 악인이 더욱 악해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서 겉으로는 비웃으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정죄당하는 듯한 위기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하고 좋아한다. ‘이 무리’의 길은 ‘구부러진 길’이다. 결국에는 낭떠러지로 연결되는 길이다. 그들의 행위는 ‘패역’하다.(작은 이익을 위해 생명을 경시한다.)
계속해서 지혜의 교사는 지혜가 주는 보호함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4)지혜는 음녀에게서 구원할 것이다.(16절) 1장에서 ‘이익을 위해 생명을 경시하는 삶으로 초청하는 악인, 혹은 패역한 자’와 달리, 음녀는 ‘쾌락을 위해 생명길을 포기하라고 초청하는 악의 실체’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음녀를 말할뿐더라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향락을 추구하는 길로 유혹하는 모든 세상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죄악된 세상을 음녀, 혹은 바벨론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지혜의 교사는 음녀의 모습에 대해 또한 잠시 설명한다.(v.17-19)
음녀는 소시(‘어렸을 때’)의 짝을 저버린 자다. 즉,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것은 결혼의 거룩성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혼인언약을 저버린 사람이 곧 음녀다. 하나님과 인간은 언약을 맺은 존재로서 하나님은 이 비밀을 보여주기 위해 창조의 마지막 날에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여자를 나중에 창조하셨다. 남자로 하여금 ‘고독’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여자가 자기에게 다가올 때 ‘한 몸’의 귀중함을 알게 하셨다. 이것은 훗날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거룩한 언약으로 설명했다. 남녀간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원한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제정하신 은총이다. 음녀는 이러한 언약의 거룩성을 짓밟는다. 음녀의 집은 사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쾌락을 추구하여 거룩한 언약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음부’(무덤, 지옥)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참된 지혜와 지식을 구하는 구도자로서 생명길을 가는 도중에 그만 음녀에게로 가버린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생명길을 얻지 못한다.
계속해서 지혜의 교사는 지혜가 지켜줄 것이라고 말한다.(v.20-22)
(5)지혜는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할 것이며,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할 것이다. 지혜를 얻기까지 ‘악인와 패역한 자의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음녀의 유혹’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지혜를 가진 인생은 이런 것에서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지켜주실 것’(빌1:6)이다. 그리고 사자의 입에서 건져주시고 지금도 건지시며 앞으로도 구원할 것이다. 성경은 능히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우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지혜에 주목하라. 즉, 성경에 주목하라.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인생은 정욕과 탐심에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 진리를 진지하게 대하는 자는 의인의 길을 끝까지 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지혜를 얻은 자의 길과 그렇지 못한 자의 길은 어떻게 서로 다른지 지혜의 교사가 가르친다.(v.21,22)
정직한 자(=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진리를 사랑하는 자,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자)는 ‘땅에 거할 것’이다. 그는 약속의 땅에 남을 것이다. 생명길로 향한 땅에서 생명을 누리며 생명을 향한 그리움으로 살게 될 것이다. 지혜의 교사는 그를 ‘완전한 자’라고 부르고 있다. 누가 행위 완전할 수 있는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지혜)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이 온전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는 진실로 ‘온전한 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를 멸시하는 인생은 땅에서 추방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당했고, 가인이 에덴 동편땅에서 추방당했고, 범죄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곧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마태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