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삼강오륜과 같은 '도덕책'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은 '복음서'입니다.
인간의 처세술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지혜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격이신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은 지혜를 얻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4장>
4장에서는 지혜의 탁월함에 대해서 가르친다.
●v.1-9: 지혜의 탁월성. 비교할 만한 다른 것이 없다.
“아들들아”는 교사가 자기 제자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아비(교사, 스승)의 훈계(=가르침,instruction)를 들으며, 명철(=이해, understanding)을 얻기에 주의하라” 지혜(말씀, 로고스, 그리스도)는 우리의 아비요, 스승이다.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아비는 하나”라고 하셨다.(마태23장) 지혜의 가르침과 이해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가르침은 이해에 선행된다. 신약성경의 모습을 보라: 그리스도의 가르침(teachings of Christ)는 사도바울의 “원만한 이해의 부요함”으로 연결된다. 가르침은 ‘들어야’ 하며, 이해는 ‘얻기에 주의해야’ 한다. 진리는 그 성격상 피상적인 봄(seeing)으로써는 얻을 수 없다. 진리는 주목하여 관찰함으로써 얻어진다.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그리스도는 인간의 타락이후부터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선한 도리’를 전파하신 분이시다. ‘선한 도리’는 ‘생명에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 길은 선하며, 그 가르침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한님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 “내 법을 떠나지 말라” 지혜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에의 길이다. 1, 2절에서 지혜의 스승은 초청한 후에 3절에서 은혜의 본질을 말한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즉, 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라는 것이다. 지혜의 스승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자로 태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신앙위인전기를 많이 읽으라. 그러나 그들을 보면서 ‘그들 역시 평범한 죄인’이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어머니 보기에 유악한 외아들’이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4절에서 9절까지는 지혜의 스승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스승)이 자신에게 가르쳤던 바를 회상하면서 말하고 있다.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혜는 본질적으로 죽은 자에게 유익이 있다. 복음은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다. 자신이 ‘유약한 자’임을 알지 못하면 지혜를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이상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지혜자의 아버지(스승)이 지혜자에게 말했던 것은 지혜의 탁월함에 대해서이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너의 얻은 것(전 재산)을 다 팔아서 지혜를 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천국비유의 말씀 중에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를 하신 것을 생각나게 한다. 천국의 복음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팔아 살만한 가치가 있다. “그(지혜)를 높이라” “지혜를 품으라” 여기서 지혜는 분명 지혜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역사상 지혜를 가장 잘 높인 인물이 누굴까? 그리스도를 가장 잘 품은 인생이 누굴까?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잘 투자한 사람이 누굴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는 가장 가난한 것 같지만 가장 아름다운 관을 그 머리에 쓰고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v.10-19: 지혜는 곧 생명이다.
이제 지혜의 선생은 그 제자들에게 지혜의 생명에 대해 말한다.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지혜의 말씀은 생명길로 안내한다. 그 길은 지혜로운 길이며 정직한 첩경(short-cut)이다.(11절) 지혜의 말씀은 생명길, 좁은 길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의 길을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란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지켜줄 것이다. 거듭 강조하기를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사도바울은 교회 장로들과 헤어질 때 악한 이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노략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진리 안에 굳게 거하라고 권면하였다.(행) 그리고 젊은 목회자에게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하라’고 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일)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진리를 향해 생명길을 가는 순례자들은 잘못된 길을 조심해야 한다.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14절) ‘사특한 자’는 작은 이익을 위해 생명을 경시하는 자들이며, ‘악인’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15절) 살면서 그들을 만날 수 있으나, 그들의 첩경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누군가? “그들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그들은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일에 거의 욕구불만에 가득차서 잠을 설칠 정도이다. 그들은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신다” ‘불의의 떡’이란 불로소득을 추구하며, 물질을 위해 죄를 서슴지 않는 것을 말하며, ‘강포의 술’이란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고의적으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은 확연히 다르다. 지혜자는 두 길을 그려주면서 선택을 종용한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진리를 찾는 순례자들은 점점 진리에 다가가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모세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날 것이다. 진정한 광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인생은 이처럼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길은 넘어져도 무엇 때문에, 왜, 어떻게 넘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칠흙같은 어두움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중요한 양면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생의 영광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간 인생이 당하는 어두움과 비참함의 모습을 본다.
●v.20-27: 생명길을 지키라.
다시금 지혜의 스승은 제자들에게 생명을 향한 길을 지킬 것을 권면한다. 지혜를 찾는 순례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한다. 생명(지혜)의 길을 가는 순례자들은 자기를 점검할 수 있는 행동지침이 필요하다. (1)머리: 지혜의 말씀에 주의하며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리에 대한 피상성은 진리를 아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진리에 대한 진지함이 없이 결코 생명길을 잘 보전할 수 없다. “주의하며” “기울이마” “떠나게 말며” “지키라” 마치 보배를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것과 같은 신중함과 정성으로 지혜의 말씀을 대하여야 한다. 왜냐면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마음: 무릇(그러므로)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켜야 한다. 왜냐면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복음의 말씀은 항상 마음에 작용한다. 경건의 중심도 마음에 있다. 예수님은 마음의 중요성을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면서 강조하신 적이 있다. 마음에 쌓은 것에서 입으로 내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진정 더럽게 한다고 경고하셨다. 야고보는 진정한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3)말: 따라서 언어생활을 조심해야 한다.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예수님은 예,예, 아니오,아니오라고 하지 않는 모든 말이 악에서 비롯된다고 하셨다. 우리의 입술이 얼마나 간사하고 부정한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진정한 경건은 자신의 입술의 부정을 잘 인식하는 사람이다. (4)눈: 우리는 사물을 바로 보아야 한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우리는 사물이나 말씀이나 모든 상황을 대충 보아서는 안된다.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하며, 응시해야 하며, 주목해야 한다. 경건한 사람들은 그 눈이 가볍지 않다. (5)발: 발을 조심해야 한다.(26,27절) 긍정적으로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벧후1:10에 사도 베드로는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권면했다. 우리는 모세가 기도했던 것같이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시90편) 또한 우리 발은 소극적으로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말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진리의 정도를 떠나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치명적인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에 착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해로운 정욕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의 발은 그리스도가 계신 시온성을 향해 바삐 움직여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가는 길에 발걸음이 향해 있지 않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을 날마다 확인하고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