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이 도덕책이 아니라 복음서라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메시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상당히 윤리적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윤리적인 설교how to live는 거의 들어볼 수 없답니다!
복음을 외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고, 능력을 외치고, 치유와 권능을 자랑하지만
윤리적 삶에 대한 도전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제6장>
이제 지혜의 선생은 성도의 생활 속에서 지혜의 특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지혜자는 구체적으로 지혜없는 삶의 유형을 네 가지로 소개하면서 경고함으로써 지혜의 성격을 논한다: 보증, 나태, 패역, 간음에 대해서.....
●v.1-5: 보증(suretyship)에 대한 경고
지혜는 보증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 안다. ‘담보’ 혹은 ‘보증’이란 지켜주기로 약속하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지혜는 그러한 약속이 대단히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마치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 잡힌 것과 같으며,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 잡힌 것과 같다. 왜냐면 그 ‘입의 말로’ 그 자신이 얽혔고, ‘자신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혜는 내일일을 자랑하지 않는다. 지혜는 함부로 맹세하지 않는다. 지혜는 자신이 남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고 과신하지 않는다. 지혜는 말이 부도약속을 남발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지혜는 남에게 한 약속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에 대해 강조한다. 지혜(=말씀, 로고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인간이 맹세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신다. 오직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말하라고 가르치신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다 악이라고 했다. 야고보는 내일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가르친다. 바울은 오직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뿐이다. 복음은 인간의 말이 얼마나 부도성이 강한가를 강조하고 있다. 복음은 사람의 약속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지혜의 교사는 보증은 이웃의 손에 ‘빠진’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구원하라’고 두 번 권면한다. 스스로를 구원해보라는 말은 거의 불가능한 명령이다.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인가?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인가? 그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사람의 ‘보증’은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우리가 믿을 것은 하나님의 ‘보증’뿐이다. 보증에 대한 교훈은 단순한 인간관계에 유익한 지침만이 아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다.
●v.6-11: 나태에 대한 경고
본문은 나태함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게으른 자여...” 사람들은 24시간을 잘 선용하는 것이 ‘부지런 한 것’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게으른 자는 누군가? ‘추수때’를 준비하지 않는 인생이다. ‘종말의 때’를 준비하지 않는 인생이 나태한 자이다. 게으른 인생을 위해 하나님은 개미를 스승으로 내세우신다. 개미만큼 불확실한 때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매일매일 부지런하게 사는 것 같지만 종말의 때를 위해 준비하지 않는 한 그는 나태한 자이다.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드리우고 있는데도 잠만 자고 있지 않는가? 심판의 그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 무엇을 준비했는가? 예수님이 하신 부자의 이야기를 보라(눅12장) 부자는 열심히 재산을 모았다는 점에서는 부지런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는 대단히 나태한 자였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일에 대단히 게을렀다. 진정한 지혜는 영생을 대비하는 삶에서 드러난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심판을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심판의 날이 ‘도적과 같이’ 이를 것이다. 그 날은 홀연히 임할 것이다. 적군이 기습하여 쳐들어오는 것 같이 그 날은 갑자기 이를 것이다.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를 설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마태24장) 예수님께서 잠자고 있는 교회에게 무엇이라고 경고하셨는지 기억하라. “내가 도적같이 이르겠다” 그때 벌거벗은 모습을 주님께 보여드리지 않도록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때에 부지런히 그 날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영생을 얻기 합당한 믿음과 소망으로....
●v.12-19: 패역에 대한 경고
지혜자는 패역함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불량하고 악한 자”의 종말은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할 것이다. 패역한 자의 모습을 보라. (1)불량하다. 양심에 금이 가 있다. 양심이 무너지면 믿음에 있어 파선하게 될 것이다.(딤전) (2)악하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적인 무신론자이다. (3)궤휼한 입을 벌린다. 그의 입은 남을 헐뜯고 비난함으로 자신을 높이는 데 열심이다. (4)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로 알게 한다. 그는 겸손히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눈짓으로 명령 내리기를 좋아한다. 그는 대단히 권위주의적이다. 그는 명령을 내리고 자기 손으로는 까닥도 하지 않는다.(마23장) (5)그 마음에 패역을 품는다. 그는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생명을 무시한다. (6)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킨다. 그는 선을 베풀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이익을 얻을까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사람을 자기 원수로 여긴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갑작스런 재앙’뿐이다. 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특별히 있는데 그것을 알아야 한다. (1)교만한 눈, (2)거짓된 혀, (3)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4)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5)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6)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혀, (7)형제사이를 이간하는 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 곧 지혜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겸손이며 곧 경건이다. 나의 경건지수는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말로만 경외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미움’이 내 삶 속에서 없다면 나는 스스로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다.
●v.20-35: 간음에 대한 경고
20,21절에서 지혜자는 다시 한번 더 지혜의 말씀에로 제자들을 초청한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이루는 일이다. 이렇게 초청한 다음에 지혜의 교사는 그것(그리스도의 말씀)이 주는 유익으로서, 보호하고 지켜주는 능력을 설명한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22절)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24절) ‘대저’(왜냐면)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말씀(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것을 마음에 간직한 자의 삶에 있어서 등불과 빛과 같으며, 그를 생명의 길로 안내한다.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지혜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곧 성경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영생의 길로 안내한다.(요한복음) 그러나 지혜 없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싫어한다. 왜냐면 자기를 정죄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다. 지혜는 책망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지혜의 말씀은 세상의 오염과 죄로부터 우리를 넉넉히 지켜주는 힘이 있다. 세상의 간사한 온갖 주의(ism)로부터 우리 영혼을 ‘흠없이 점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세워준다. 지혜의 제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현혹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색”과 “눈꺼풀”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온다.(25절) 외모를 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죄이다.(약) 겉모양을 추구하는 것은 지혜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은 멸망할 음녀와 같다.(계) 세상 쾌락을 추구하는 자의 결국은 롯의 결국과 같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과 같이 비참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행위이다.(26절) 그것은 “불을 품에 품는 것”과 같다.(27절) 그것은 곧 내 인생 전부를 태워버리고 남은 것이 없게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화려함을 따라 내려갔던 롯의 결국은 다 타고 없어지고 남은 재뿐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 날에 불이 공력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했다. 그리스도 위에 어떤 집을 지을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언약을 버리고 “간음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다.”(29절) 그와 사귀는 것은 함께 부정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도적질보다 더 무서운 죄이다.(30절) 들키면 도적질보다 더 수치스러운 결과를 당해야 한다. 도적은 4배를 갚아야 하지만, 음란의 들킨 죄는 7배를 갚아야 하며,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어 주어야만 한다.(31절) 이러한 죄를 범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며,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될”것이다.(32,33절)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음란한 죄가 받을 최후의 모습을 알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이제는 부끄러워하나니 그 마지막은 사망”임을 잘 아는 사람이다. 죄의 삯은 사망임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짓기 전에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할 줄 안다. 심판의 주가 임하는 모습은 마치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아무 벌금도 돌아보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함”같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날에 투기하는 남편과 같이 분노하실 것이다.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분노의 화염으로 언약을 저버리고 간음한 모든 인생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단과 세상과 거짓선지자들과 우상에 절한 모든 사람들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계)
※주의사항
우리는 잠언서를 읽으면서 한낱 교훈집이나 도덕책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잠언서는 곧 복음서이다. 잠언서는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지혜의 스승이 가르치는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예표하고 있다. 따라서 잠언의 말씀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중요한 원리가 된다. 그것은 산상수훈의 기초가 될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토대가 된다. 우리는 잠언서를 읽으면서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인간이 어떻게 ‘어리석은 존재’이며 ‘말씀이 없이는 망할 수밖에 없으며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어리석은 인생들에게 그리스도는 영원한 지혜가 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