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 아래 잇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가 있다고 할 때는 격언을 만들 줄 알고, 비유도 만들 줄 안다는 뜻입니다.
오묘한 가르침을 비유와 이미지로 감싸서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을 뜻합니다.
잠언을 읽을 때 옷(비유, 격언)만 보지 말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실체(오묘한 가르침, 지혜의 본질)를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제7장>
지혜의 교사는 다시 지혜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당부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의 예를 들어 가르친다.
●v.1-5: 지혜의 말씀을 고이 간직하라. 그것이 죄의 오염에서 지켜줄 것이다.
지혜자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지키며” “간직하라” “지키라” “새기라” “내 누이라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갖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영생을 판가름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라고 했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기 원하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향해 “너는 내 누이라”고 말해야 한다. “명철(understanding of the Word)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화목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릴 수 없다. 우리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영생을 위한 견고한 기초이며, 든든한 토대이며, 영원한 밑거름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영성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달려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구하는 진지함이 있는가? 아니라면 나는 ‘어리석은 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혜는 ‘혈통이 육신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은총이다. 내 노력이나 수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 노력의 열매가 결코 아니다. 본문은 지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한다. 잠언서는 단순한 교훈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의 중요한 특성을 말하고 있는 성경이다. 이렇게 지혜의 말씀(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그 말씀이 죄와 오염에서부터 우리를 능히 지켜줄 것이다. 세상의 타락과 부패에서부터 보호할 것이다.(5절) 이것이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니다.
●v.6-23: 지혜의 말씀을 가지지 못한 자의 모습을 보라. 소가 푸주간에 끌려가는 것과 같다.
지혜의 교사는 지혜없는 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리석은 자 중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자이다. “소년 중에” 혈기왕성하며 정욕이 넘치는 청년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유익한가? 오직 말씀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시119)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인생이 어떻게 세상 오염에 물드는가에 대해서 지혜자는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가 “거리를 지나” 이 거리를 세상의 거리이다. 시온성을 향해 가는 길에 이 거리를 통과해야 한다.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쾌락으로 나아가는 것은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진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진리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인생은 그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진리를 담고 순례길을 가는 제자들은 진리로 만족감을 얻기 때문에 음녀의 집문에도 가기를 싫어한다.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서” 죄인은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자신이 곧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다. 깊은 밤은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진리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영혼의 상태이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는 예수님의 중생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저물 때’ 조심해야 한다. 그때에는 진리의 등불을 켜야만 할 때이다. “기생의 옷을 입은” 그 옷은 그리스도인의 옷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최초의 인간을 유혹한 뱀은 가장 간교한 짐승이었다. ‘간교함’은 인간의 외로움과 고독을 잘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진리를 떠나 쾌락을 향해 나아갈 때 마귀는 즉각적으로 맞이한다. 이 계집은 유혹의 명수인 뱀의 화신이다. 그는 어떤가? “떠들며 완패하며” 그는 신중함이 없다. 진리에 대해 관심도 없을뿐더러 경솔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그는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않으며 자기 일에 성실함이 없다. 그는 늘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는 성실하게 집중하는 법이 없다. 마귀가 정처 없이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 것과 같이 이것저것 건드려보지만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머물지 못하는 것은 죄인들의 특성이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수많은 남자들을 건드려보지만 만족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만다. 음녀는 ‘사람을 기다리는 자’이다. 그는 사람을 소유하고 지배하고 부리는데 관심이 많다. 그는 사람이 도구이며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섬김의 대상으로 바라봄으로써 죄를 정복했음을 선포하고 다닌다. 그 계집은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춘다” 죄인들은 즉각적으로 환영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훈계의 책망’을 통해서 생명길로 안내한다. 죄를 책망하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 죄는 근신을 모른다. 죄인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죄는 뻔뻔스럽다. 심지어 죄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마귀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나타난다. 거짓선지자들은 다름 아니라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선지자 노릇만 할뿐이지 주의 말씀에 주의하며 주의 말씀을 준행하는 삶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음녀는 욕망의 대상을 만난 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간주하고 있다. 음녀는 자신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양 가장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목표는 진리를 알고 순종하는 것이 아닌 단지 즐기는 것뿐이다.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노라” 죄인은 자신이 죄를지을 때 대단히 반기는 줄로 착각한다. 마귀는 이렇게 사람을 두루 찾아다니고 있다.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죄인은 색채에 현혹 당한다. 외모를 보고 죄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다.“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죄인은 분위기에 취약하다. 죄의 유혹은 항상 분위기를 통해서 다가온다.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죄인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은 죄를 범하면서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노래를 보라. 얼마나 ‘사랑’을 노래하는가? 그러나 참된 사랑에 대해서 무지하다. 자기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추악한 행동일 뿐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더 피어오르게 하는 것일 뿐이다. “남편은 길을 꺼나 먼길을 갔는데...” 음녀는 언약을 비웃고 있다. 음녀는 남편의 권위를 상실한 상태에 있다. 죄인은 자기를 붙잡아 매어 줄 진정한 권위를 이미 상실한 지 오래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를 오히려 슬퍼하기는커녕 즐기고 있다. “은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음녀가 하는 유혹을 보라. 지금 음녀는 청년을 안심시키기 위해 심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유혹하고 있다. 아직도 시간이 많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직 멀었다고 말함으로써 안심시킨다. 그런 것은 오지 않는다고 유혹한다. 음녀가 하는 말은 ‘여러 가지 고운 말’과 ‘호리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죄를 깨닫게 한다. 복음의 능력은 죄를 깨우치는 능력을 말한다. 지혜는 ‘훈계의 책망의 말씀’이다. 결국 이러한 유혹에 청년이 넘어가는데 ‘곧’ 즉각적으로 넘어가고 만다. 청년은 아무런 거리낌이나 주저함이 없이 즉각적으로 유혹을 받아들인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았을 때도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유혹에 즉각적으로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다. 또한 “새가 빨리 그물로 (달려)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결국은 살이 그 간을 뚫어버릴 것이다. 간에 화살이 박히는 것은 회생 불가능한 치명적인 타격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을 것이다.
●v.24-27: 지혜자의 간곡한 당부: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그러므로 이 욕심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이 유혹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한가? 수련과 명상으로 가능한가? 아니다. 오직 “내(그리스도, 지혜, 로고스) 입의 말에 주의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할 때만이 죄를 이기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역사하기 때문에(복음의 자리는 마음이다.)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그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원한 말씀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착념치 아니하면 온갖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는 바울 사도의 경고는 기억해두어야 한다. “누구든지 바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 그렇다. 이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 생명을 잃어버린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젊은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영원 앞에 서서 회한과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을 마감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들 중에서도 유혹을 받아 음녀의 집에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 집은 음부I=무덤)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27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계18:4,5)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세상에서 나와 영원한 구원을 받으라. 장망성과 같은 바벨론에서 쾌락을 누리는 데 마음을 뺏기지 말고 하늘에 간직된 영원한 기업을 향하여 순례길을 전진해나가자. (★본문의 핵심:지혜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주의사항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기억해야 할 진리로서 영원한 복음의 중요한 기초를 설명해준다. 복음은 모든 인간을 ‘어리석은 자’로 규정해놓는다. 지혜의 말씀을 듣고 받고 간직하지 아니하면 ‘살지 못할 인생’으로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지혜)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그것이 없이 죄를 낳는 욕심을 다스릴 길이 없다. 지혜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이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기울임으로 영생을 얻으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