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잠언9장

등불지기 2012. 3. 5. 00:21

전체를 본다는 것은 흐름flow과 구조structure를 본다는 것입니다.

이번 chapter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먼저 이해한 다음 한 절 한 절 묵상에 들어가보십시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제9장>

 

자, 이제 공은 사람에게 넘어왔다. 지혜의 부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련한 인생들, 죄인들은 결정해야 한다.

지혜의 부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이 부름에 응할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저 사람이 지혜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혜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군가? 이런 문제들에게 대해 본장은 명쾌하게 답변해주고 있다. 본장의 구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해답이 있다. 1절에서 6절까지 지혜의 부름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며, 13절에서 18절까지 지혜의 부름을 흉내내는 음녀의 부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 가운데 7절에서 12절까지 시금석이 나와 있다. 이 시금석에 불합격한 자는 음녀의 부름에 응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이 시금석을 통과해야 한다.

 

●v.1-6: 지혜의 부름

지혜는 사람들을 부르기 전에 충만하게 준비해 둔다. 지혜는 ‘그 집’을 짓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집을 지으러 간다’고 말씀하셨다. ‘일곱 기둥을 다듬고’ 일곱 기둥은 완전한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일곱 영, 곧 성령의 완전성을 말한다.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예수님은 마태22:1-14에서 혼인 잔치를 준비한 왕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지혜는 이렇게 준비한 다음에 사람들을 초청한다. 이것은 창세기의 위대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잔치를 준비한 다음에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언약의 족장들을 준비한 다음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준비한 다음에 이스라엘을 요단을 건너게 하셨다. 선한 목자는 ‘준비한 밥상을 베푸시기 위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이렇게 준비한 다음 지혜는 여종을 보내어 사람을 초청한다. 여종이 지혜의 보냄을 받은 곳은 성중 높은 곳이다. 복음은 감추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나야 할 성격이다.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마5) 복음선포는 가능한 모든 사람, 모든 계층에게 듣도록 해야 한다. 지혜가 보낸 여종이 그곳에서 말하는 것을 보라: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지혜의 종이 선포하는 것은 복음의 종들이 수없이 선포한 그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성령과 신부는 말씀하시기를 “오라. 듣는 자도 도라.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22:17) 인생들은 모두 죄인들(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이다. 지혜가 예비한 식탁의 자리로 향해야 한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어야’ 살 수 있다. 명철의 길(=원만한 이해의 부요한 길)로 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히 배우며, 그 말씀 안에 거하며, 그 말씀을 그 안에 거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살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은 진정한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 정말 잠언서는 솔로몬 복음서(Gospel according to Solomon)이라고 불러야 한다.

 

●v.7-12: 시금석

지혜의 부름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는 따로 있다. 결코 거만한 자는 지혜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가 지혜의 부름에 응할 것인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의 죄를 책망해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징계’ ‘책망’ ‘교훈’이라는 말로 묘사되고 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게 되느니라”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아벨이 가인에게 핍박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핍박하는 자는 자신이 정죄 당한다는 느낌 때문에 영적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의인을 핍박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유기로 작정된 사람은 진리의 교훈을 미워하며 복음전도를 대단히 싫어한다. ‘네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그들이 들을 때 ‘너는 죽었기 때문에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완전 부패하고 전적 무능한 죄인이라’는 말에 굉장히 분노를 터뜨린다. 그는 빛을 대단히 미워하기 때문에 빛으로 가까이 가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이 말씀은 ‘비판하지 말라’는 교훈 뒤에 따라나오는 말씀이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빼주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뺀 다음에 그리 해야 하는데 자기 들보를 뺀 다음에 형제의 잘못(죄)를 교정해주려고 할 때 그가 진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먼저 살펴보라는 것이다. 만약 그가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면 그의 잘못을 교정해주는 것은 실패는커녕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을 말씀으로 책망해보면 그가 진정 거만한 자인지 아니면 지혜로운 자인지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지혜로운 자라면 그를 향한 책망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와 나는 더욱 가까워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1에서부터 가르친 말씀의 진정한 배경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1-3) 또한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13)고 하신 의미이다. 그에게 징계와 책망과 교훈을 주어보면 그가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참된 복음전파와 가르침에는 반대와 핍박이 따를 것을 예상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지혜로운 자(구원받기로 작정된 자-행13장)가 이 책망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책망하는 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복음전파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거룩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지혜로 말미암아 생명(영생, 구원,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11절) 지혜로운 자는 이 말을 받을 것이지만, 거만한 자는 이 말을 거부함으로 스스로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결국 명망의 책임을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v.13-18: 음녀의 부름

지혜가 보낸 여종이 사람들을 부르는 것과 같이 음녀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사람을 부른다. 여종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말한 것과 같이, 음녀 역시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초청한다. 여종이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고 하면서 죄인들을 초청하듯이, 음녀 역시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고 하면서 죄인들을 초청하고 있다. 음녀는 여종을 모방하고 있다. 이처럼 사단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자신을 내세운다. 앞에서 언급한 시금석에서 실패한 사람은 이러한 사이비에 쉽게 유혹 당하게 될 것이다. 여종(복음전도자, 선지자)이 약속하는 것은 생명의 누리이지만 음녀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의 누림이다.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남 몰래 맛있는 음식을 혼자서 먹어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 지를 잘 알 것이다. 이처럼 음녀가 제공하는 것은 달콤한 쾌락이다. 음녀는 영원한 생명수를 약속하지는 못한다. 앉은자리와 부르는 대상은 여종과 동일하지만 그러나 그 선포의 내용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더구나 음녀는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말한다. 이것이 세상 쾌락과 사이비의 특성이다. 이것이 마귀가 죄인들에게 접근하여 넘어뜨리는 방식이다. 모든 죄인들이 이 두 가지 종류의 부름을 받고 있다. 이 부름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음녀의 부름을 받아 음녀의 집으로 가까이 가는 자들은 지옥의 불길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음녀)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8절)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하였다.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계17:1,2)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17:4) 장망성과 같은 세상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18:2)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라고 했다. 성경은 세상과 짝하는 삶에 대해 경고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d라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주의사항: 솔로몬의 잠언은 솔로몬에 의한 복음서로서 솔로몬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다윗의 아들 솔로몬(잠1:1)은 분명히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마1:1)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솔로몬의 잠언은 따라서 한낱 윤리책이나 도덕지침을 모은 책으로 읽혀진다면 우리 영혼에 아무 유익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잠언서를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과 인간의 죄인됨과 하나님을 떠나 사는 비참함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영원한 복음의 기초를 잠언서에서 발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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