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잠언18장

등불지기 2012. 3. 5. 01:03

지혜는 말에 영향을 줍니다.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지혜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지혜의 열매인 셈이지요.

얼마나 유창하고 설득력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정결하며 덕을 세우며 유익을 주느냐인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 제 18 장 >

 

※신앙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잠언은 말하고 있다. 둘의 관계는 뿌리와 열매와 같다. 이것은 복음서의 가르침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예수님은 참된 경건이 어떤 것인지 여러번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대한 가르침이 선포되었다.

 

v.1- 그때에 왕이 없었으므로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한 말씀처럼 권위와 규범을 싫어하고 자기 소욕과 욕망이 왕이 될 때는 공동 사회 건설은 불가능하게 된다. 무리에 소속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단체규범이나 진리를 싫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나뉘는 자’ 즉, 분리주의자들로서 개인주의적인 욕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진리를 배척하고 개인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자는 진리와 공동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는 극단적인 개인적 가치를 ‘왕’으로 주장함으로써 진리를 배척하고 있다.

 

v.2- 모든 인간은 다 미련한 자들이다. 자기의 소욕을 섬기는 것을 본래적으로 기뻐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명철’을 기뻐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이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진상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각이나 느낌을 더 선호한다. 텔레비전 시대, 영상시대는 명철을 기뻐하지 않는다. 영상매체는 사람들은 점점 자폐인간으로 만들어간다. 무리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든다. 영상매체에 익숙한 사람들은 진리를 배우고 고민하는 일을 싫어한다. 그들은 자기 주장이 매우 강하다. 자기 의사만 기뻐한다. 오늘날 영상세대들을 보라. 얼마나 자기 주장이 강한가!

 

v.3- 그러므로 그들의 결국은 ‘멸시’와 ‘능욕’일 것이다. 이러한 피상성과 가벼움과 고민하기 싫어함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만들어내게 되고, ‘부끄러운 죄’를 만들어내게 만들 것이다. 그 결국은 멸시와 능욕이라는 심판이다.

 

v.4- 그러나, ‘이해’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이 얼마나 유익하며 얼마나 시원하며 얼마나 깊이가 있는가! 마치 “깊은 물과 같고...솟쳐 흐르는 내”와 같다. ‘이해’를 위해 몸부림쳐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유익을 주지 못한다.

 

v.5- 미련한 인생은 ‘이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을 범하게 된다.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진지함‘과 ’이해함의 부요‘가 없기 때문에 성급하게 일을 판단해버리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눈을 범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v.6- 미련한 인생은 ‘자기 소욕’을 섬기고 ‘공동체를 위한 진리’를 배척하고 무시하며, 자기 의사만을 드러내기 기뻐하기 때문에 다툼을 일으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입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청하는 것이다.

 

v.7- 그러므로 미련한 자가 하는 말은 자신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가 한 말이 어떤 무익한 말이든지 간에 그 말로 인하여 의롭다함과 정죄함을 받게 될 것이다.

 

v.8- 따라서 미련한 자는 ‘이해’를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을 좋아하게 된다. 세상사람들의 삶에 대해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별미처럼 달콤한 것이다. 죄인의 습성은 이처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v.9- 그러나 정작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싫어한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일에는 게을리 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구하는 일에는 게으르다. 갈6:3,4절에서 사도는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면하였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성찰에 부지런한 사람이다. 미련한 인생의 말에는 남에 관한 가십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지혜자의 말에는 자신의 영혼에 관한 성찰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자신을 먼저 구해야 한다. 그러나 미련한 인생은 자신을 구하는 일에는 나태함을 보이는 데 그 이유는 ‘명철’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v.10- 그러나 의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견고한 망대로 삼아 그곳에서 ‘안전함’을 얻는다. 자신의 미련함을 잘 알기 때문에 견고한 망대의 필요성을 느낀다.

 

v.11- 반면, 부자는 재물을 자기의 성으로 여긴다. 부자가 자기 재물을 높은 성벽같이 여기는 것 같이 지혜로운 인생은 하나님을 높은 성벽으로 여긴다.

 

v.12- 그러므로 미련한 인생은 필연적으로 교만하게 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미련한 존재임을 충분히 자각하고(멍철함), 자기의 일을 살피며,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존귀함이 따를 것이다.

 

v.13- 그런데, 미련한 인생은 자기 소욕을 섬기기 때문에, 무리에게서 스스로 분리하기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 의사만 드러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다 살펴보기도 전에 성급하게 답을 내리고 만다.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에 유대지도자들은 사연을 다 듣기도 전에 대답함으로써 어리석음을 드러내었다. 오늘날도 어떤가? 예수사건의 전말을 다 듣고 파악하기도 전에 판정해버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욕을 당할 것이다.

 

v.14- 이처럼 마음이 중요하다. 신중하며, 진리에 대해 진지하며, 사건의 전말을 충분히 파악하려는 진지함과 인내심은 중요하다. 마음은 육체의 병까지도 능히 이기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에 병들어 있는데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지 않은가? 마음이 성급하고 마음이 자기 욕망을 섬기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v.15- 반면, 명철한 자(이해하려는 자, 이해력을 가진 자)는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구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계속 배우는 자여야 한다. 배움을 멈추면 성장도 멈출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본래 지성적이며, 학구적이다. 기독교 진리는 본래 ‘이해력’이다. 신앙은 이해력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이해함이 없이 지식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v.16-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라. 진리를 사랑하는 증거를 그분께 보이라. 나타나지는 믿음, 증명되는 믿음만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줄 것이다.

 

v.17- 그러므로 사건의 전말을 충분히 파악하기 전에 섣불리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말라. 사도는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고전4)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며 다닐 때 원고(유대지도자들)의 말만 믿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건을 밝히셨다. 예수님은 피고로서 오셔서 그에게 사건을 밝히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원고(유혹자)의 말만 믿는데, 사실 예수님이 오셔서 사건을 밝힐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v.18-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라. ‘제비 뽑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모든 다툼이 왜 생기는가? 진리가 아닌 정욕을 추구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약4:1절 참조할 것) 자기 소욕을 섬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무리에게서 이탈하려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의 주권을 자기의 소욕보다 더 위에 두는 것이다. 그것은 다툼과 정욕을 다스리는 힘과 지혜가 있다.

 

v.19- 그러므로 화를 내게 하고 그와 다시 화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산성 문빗장과 같이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툼의 진정한 원인, 싸움의 진정한 뿌리는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정욕’을 섬기는 것에 있는 것이다.

 

v.20-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입의 말로 인하여 참 만족을 누릴 것이다. 사람이 하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행복한 삶, 성공적인 삶의 기준은 오직 지혜로운 마음에서 비롯되는 말(언어생활)에 달려 있는 것이다.

 

v.21- 그러므로 죽고 사는 것,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은 그 말에 달려 있다.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그 말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고 그 말로 인하여 정죄함을 얻을 것이다. 혀를 잘 쓸 줄 아는 지혜를 가진 것이 얼마나 복된가! 결국 지혜로운 마음(명철)과 미련한 마음(정욕)이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생사를 가름하는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v.22- 무리에게서 나뉘는 분리주의자들은 여호와께 은총을 입을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언약공동체(아내를 얻음)를 위하는 자들은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입게 될 것이다.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자기 소욕을 따르지 않고 언약에 충실하기로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는 아내를 얻을 수 없으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v.23- 따라서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는 것과 같이 지혜를 가진자는 권위가 있지만 지혜가 없는 자는 그 말에 권위가 없다. 하나님께 부요한 자는 권위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v.24- 그러므로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가 얼마나 귀한지! 어떤 친구를 얻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많은 친구를 얻고자 하는 자는 해를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많은 친구를 얻기 위해서 ‘진리’를 떠나야 하고, 자기 소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무리에 소속되는 공동체정신은 많은 친구를 얻으려는 것과는 정반대가 된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이 따랐지만 진정한 친구를 얻으려고 살지 않으셨다.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많은 친구를 얻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형제보다 더 친밀한 동역자를 얻을 수가 있다.

 

※영상세대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

잠언은 영상세대를 향해 경고를 하고 있다. 영상매체는 ‘명철’을 싫어하게 만든다. 영상을 보는 순간 인간은 ‘두뇌’가 정지하게 된다. 영상메시지는 무비판적으로 가슴속에 파고 들어오게 된다. 이런 것에 익숙한 신세대들은 판단하고 이해하고 고민하고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대신 그들은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경건생활을 잘 하려면 이러한 영상매체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 텔레비전을 끄라! 그리고 성경책과 경건도서를 읽으라. 그리고 머리를 쓰도록 하라. 유아들에게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틀어주지 말라. 그것은 뇌의 성장을 멈추게 하여 심한 경우 자폐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사들의 경고가 있다. 불행하게도 신앙 세계에도 자폐증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할 줄 모른다. 그들은 단지 느낌과 체험과 감각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력을 가지고 연구하는 일에 굉장히 어색한 자들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육에 속한 신자요, 어린아이들이다. 잠언은 우리에게 ‘명철’을 가지라고 말한다. ‘명철’은 지식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은 ‘이해’(명철)를 통해서 주어진다. 그리스도를 아는 원만한 이해의 부요함에 이르도록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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