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질문:
> 목사님.. 궁금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 제가 죄를 너무도 많이 짓는 것 같습니다..
> 기도할 때에도 언제나 죄를 지어서 주님께 용서해 달라고 하는데...
> 또 세상에 나가면 다시 죄를 또 짓게 되더군요..
> 주님께서 저의 많은 죄들을 용서를 해주실 지도 모르겠고..
> 너무 주님께 죄송스런 마음만 듭니다...
> 용서해 달라고 해놓고 또 죄를 짓고.... 그러면서는 주님께 구하는 건 많고....
> 인간이라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두렵습니다
> 이러다가.. 주님께서 날 버리시지는 않으실까..
>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답변:
좋아요. 여기서 핵심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대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중요한데요....
우리가 죄를 지어놓고서는 자꾸만 반복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쉽지요.
그럴 때 나는 주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대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나와서 용서를 구하는 자를 무조건 용서하신답니다. 문제는 주님이 나를 용서하지 못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주님께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더 큰 문제이지요.
주님이 왜 우리를 무조건 용서해주시는가? 우리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다 쏟으시고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죄값은 다 지불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믿으면(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죄라도 주님의 보배로운 피값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믿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가의 문제가 사람에게 남았지요. 우리는 결코 공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대가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그 아들 독생자의 흘린 피를 통해서 우리를 보신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다시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구한 죄에 대해서 다시 자책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지요.
회개와 자백이 다르다는 겁니다. 회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구요, 자백은 내 죄와 허물을 주님 앞에서 애통하면서 시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회개는 하지 않고, 자백만 하려는 경향이 있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싫어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은 죄를 다시 반복하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을 믿지(받아들이지) 않고서 단지 내 죄를 사해달라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의 은총을 구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사랑을 믿어야 하며, 내게 빚지고 상처주고, 내가 미워하는 자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백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정말 믿음으로 그렇게 간구하는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회개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지나 노력으로 회개하려고 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양심의 가책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자기 잘못을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합니다. 대게 그런 식의 회개는 다시 되풀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는 회개는 회개한 다음데 다시 되풀이되지 않지요.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왜 회개하려고 하는 걸까? 단지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정말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인가?
노력이나 의지로 회개하지 말고, 믿음으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면서 내 죄짐 보따리를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그 어떤 무겁고 무서운 죄짐이라도 우리 주님은 다 받아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봄, 즉 믿음과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속죄하신 구세주를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운세를 보아도 되나요?
질문:
오늘의 운세...
이런게 있잖아요..
그런걸 보는 건 죈가요?? 저는 죄같은데..죈지 아닌지 확실치가 않아서..
답변:
운세에 관해서.
오늘의 운세가 꼭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현상을 심리학적 용어로 바넘효과(Barnum Effect)라고 하지요. 그 점괘가 정확할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느낌 때문에 사람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까지도 영향을 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오늘의 운세 때문에 사람은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신문에 나 있는 오늘의 운세라든지 혹은 그와 같은 종류의 것들은 한 마디로 '귀신들의 놀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그것은 하나님보다는 운세를 더 두려워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영적 식중독'을 일으킵니다.
(2)그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그것은 '운'을 믿는 것이지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우연'과 '확률'을 숭배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그것을 보지 마십시오.
그것을 보는 것은 스스로를 식중독에 걸리게 하는 자살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왜 죄가 되는지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식입니다.
경청하는 기도란?
질문:
듣는 기도는 어떻게 하는건 가요??
그냥.. 들으면.. 되나~
듣는 기도에 대해 ........ 알고싶습니다.
답변: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듣는 기도는 사실 성경적인 기도의 본질입니다.
바울 출판사에서 나온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듣는 기도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뜻)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그분의 음성(말씀)을 듣고자 사모하면서
진정으로 그분의 뜻(말씀)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분이 알게 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가 일방적일 때 많이 지치고 힘든 노동이 됩니다.
그러나 쌍방적일 때 기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기쁜 경험이 될 것입니다.
기도의 맛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이러한 쌍방통행의 즐거움을 압니다.
대화도 주고받는 것이 일방적으로 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처럼
기도도 대화입니다.
친구와 대화할 때 원칙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자제하고 상대방의 말에 먼저 경청할 때 친구관계가 오래 지속되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래야 합니다.
먼저 경청하고 들어주고 상대방의 의도와 뜻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고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듣는 기도입니다.
진심으로 듣는 기도를 할 때
우리의 기도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기도는 노동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승리하길...
성경을 암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
좋아요.
암송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고 기록되었습니다.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암송이지요.
우리가 암송을 해야 하는 이유는
(1)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2)그것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길이기 때문이며 (암송하지 않으면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늘 성경을 보면서 살 수는 없지요~)
(3)그것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길이며 말씀을 순종하는 길이기 때문이며
(4)그것이 우리가 평탄하고 형통한 길을 걷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5)그것이 복 있는 사람의 당연한 것이며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시편1편)
(6)그것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셨고, 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암송의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7)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늘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을 펴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8)무엇보다 암송은 시험이나 위기의 때에 성령의 검으로 작용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매우 유익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고 했습니다. 말씀이 암송되고 마음에 새겨져야 필요할 때 다시 입으로 마음에 새긴 말씀들을 끄집어내어 검을 휘두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암송은 성령의 검을 가지는 것이며
성령의 검을 휘두르는 연습인 것입니다.
암송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며
억지가 아니라 즐거움입니다.
방언은 있습니까?
답변:
방언은 정말 있습니다.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들 중에 기본적인 것입니다.
방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자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감을 유지하는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물론 방언기도에도 잘못된 면이 있습니다.
마귀는 항상 좋은 것을 모방하기 잘 하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 구해서 응답받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진지하게 믿음으로 방언을 구해서 응답받은 경우에,
결코 잘못된 방언을 받을 수 없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하는 자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학교 친구를 전도하려면 어떻게 하죠?
질문:
> 학교에 있는 친구들을 전도할 때, 기도로만 하는 것이 좋을까요 ?
> 아니면, 그들이 하는 것을 같이하고 그들과 어울리며 조금씩 교회로 데려오는
> 것이 좋을까요 ?
> 그리고 친구를 전도할 때 열매가 중요한 것입니까 ?
> (복음을 전했을 때, 상대방이 믿지 않으면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건가요?)
답변:
예, 좋습니다. 영혼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구원하신 은혜를 알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지요. 자, 어떻게 친구를 전도할까요? 전도할 때 중요한 원칙이 있답니다.
첫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내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셨거든요. 따라서 우리는 전도할 때 내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도권을 잡도록 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전도하기 전에 먼저 그 영혼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그 영혼을 열어주셔야 내가 전하는 말씀이 들어가 역사하게 되지요.
둘째,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방법대로 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입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방법이 더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특정한 방법 안에만 제한되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만 하는 것이 효과적일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다가가서 얘기를 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어떤 사람은 그저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매우 효과적입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의 영적 상태가 매우 다르기 때문이예요. '길가'와 같은 심령을 가진 사람은 기도만 해야 할 것입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밭을 가진 사람은 그저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아무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대로, 그리고 그 영혼의 영적 상태에 따라 지혜롭게 유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셋째, 친구를 전도할 때, 열매가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한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는 데는 여러 단계가 있답니다. 길가와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친구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하기 때문에 그들을 긍휼이 여기며 중보기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전도의 과정입니다. 또 그들이 마음이 많이 열리도록 여러 가지 선행과 사랑으로 돌보아주는 일도 매우 중요한 과정이지요. 그리고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열매 맺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이제 막 구원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자세히 가르치는 것도 전도입니다. 어떤 경우는 복음을 제시만 했는데 금방 회심하고 주께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 열매가 맺히기 까지 다른 보이지 않는 사람이 기도해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밭을 가는 사람이나,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나, 밭에서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나, 거둔 열매를 곡간에 저장하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은 상을 받습니다. 열매를 거두는 것이 굉장해보여도 사실은 열매를 거두기까지 눈물로 씨를 뿌린 사람이 더 큰 상을 받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 영혼들을 바라보고 무엇인가 몸부림치는 모습이 더 중요하겠지요.
넷째,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씨를 뿌려도 당장 열매 맺는 것은 아니지요. 열매 맺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농부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농부는 당장 결실을 거두지 못해도 절대로 낙심하는 법이 없습니다. 열매 맺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 영혼을 향한 긍휼과 사랑을 계속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결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결실이 없더라도 계속 눈물과 사랑으로 부딪히는 몸부림이 있을 때 '길가'나 '돌밭'과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때가 되면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수고는 내가 했어도 열매를 거두는 영광은 다른 사람이 얻을 수 있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전도의 상을 주십니다. 부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포기하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질문:
>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뜻하시는 것과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뜻하심 아래 어떻게 내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내게 어떠한 삶을 계획하셨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기 위해 어떠한 길을 예비하셨는지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안에 거하고 기도로 준비되어 나갈때 깨닮음과 확신을 주신다는 것 입니까?
> 또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는 말씀과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첫째, 기본적인 뜻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양심과 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있지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지극히 선하신 뜻이 있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갈 때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랍니다. 내가 어떤 법칙을 지킬 때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첫째, 세상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지요. 둘째, 그런 다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의 갈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고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십시오. 먼저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답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믿음으로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기도랍니다. (참고로 롬12:2을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싶다고 했는데, 앞서서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소원을 일으켜주십니다. (빌2:13절을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그분의 계획을 집어넣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면 그 다음엔 그분의 계획과 나의 계획이 온전히 일치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분 안에 거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분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피곤한 작업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하십시오. (요15:1-8절을 꼭 읽어보세요.)
기본적으로 내가 거듭날 때(주의 은혜로 마음이 새로워질 때), 주님은 내게 새로운 비전과 그 비전을 수행할 수 있는 달란트까지 한꺼번에 주신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기 전에 먼저 내가 주님과 온전히 하나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으면 나를 향하신 주님의 온전하시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저절로 밝혀지게 해주십니다. 그때 주님의 계획과 뜻은 내 계획과 뜻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내 소원과 별개로 강제적으로 당신의 소원을 주입하시지 않으십니다.
빌4:13절의 말씀은 이런 뜻이예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상황을 만나도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참 만족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겁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서 궁금
질문:
제 친구 중에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싶어하는 친구가 생겼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이 틀리다면 어떻해서 창조론이
옳은지 알려달라고 하네요. 역시나 성경지식이 많이 없는전.. --;;;
목사님께 질문을 드리네요~ 부탁드려요!
답변:
좋은 질문이예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서 제가 일일히 대답해주기보다
좋은 사이트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한국창조과학회: www.kacr.or.kr
위 사이트를 적극, 강력 추천합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어겼을 땐?
질문:
안녕 하세요? 목사님
제가 얼마전 부터 금식(먹는것이 아닙니다)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을 어기었습니다.
어떻하지요? 또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약속 한것을 어기었거든요
어떻하지요? 주님께서 저에게 큰 죄를 주실것 같은데......
답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회심은 단 한번이지만 자백은 반복적이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번이지만 씻음은 계속적이어야 합니다.
선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결심한 것을 어긴 것은 주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므로
죄이지만 그러나 사랑의 고백으로 고백되어져야 할 죄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자백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자백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함을 자백하기 바랍니다.
주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구하기 바랍니다.
그런 경우에 깊은 죄책감이나 자책감에 고통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주님 앞에 자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자백하는 마음속에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저주 받은 후손이 있나요?
질문:
> 얼마 전에 친구에게서.. 수련회 다녀온 얘길 들었습니다..
> 기도시간에 한 아이를 두고 여러 명이서 기도를 해줬다고 합니다..
> 그런데 그중 두 명의 아이가 동일한..이상한 환상?을 봤다고 하더군요...
> 예수님께서 마구 혼을 내시는..
> 너무 이상해 목사님과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너무 놀라시더랍니다..
> 그 아이는 저주받은 후손이라고 했답니다.. 저주받은 가계..
> 그러면서 그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주면 절대로 안 되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되고..
> 정말 저주받은 가계가 있어서..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건가요??
> 선하신 하나님께서 저주를....??!!
답변:
축복이 있다면 저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제가 볼 때 너무 이상하군요.
기도하는데 환상을 본 것은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러한 환상을 근거로 해서 저주받은 후손이라고 단정짓는 것이 너무 이상합니다.
그러한 견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매우 궁금하군요.
제 생각에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주받은 후손, 혹은 저주받은 가계라고 하는 것은 아담 이후에 출생하는 모든 인간을 가리켜서 말한다고 볼 수 있지요.
모든 사람은 다 죄와 저주 아래 태어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 받은 후손인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저주와 치욕의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주받았으니 가까이 하지 말라는 얘기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비교해보세요.
결과적으로 저주 받은 죄인인 우리를 구하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면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저주받은 우리를 가까이 하셨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 친구를 가까이 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제가 볼 땐 새빨간 마귀의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마귀의 속임수라고 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두기를 바래요.
하나님은 저주받아 신음하는 우리 인간들을 구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사실...
예수님은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찾으러 오셨다는 사실을...
저주 아래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가까이 다가오셨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정 안다면 더욱 가까이 해서 기도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분별하십시오.
복음을 대적하는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종교개혁?
질문:
시험기간 중 세계사 공부를 하는 도중에 '종교 개혁'이 나와서 질문하는데요. 우리는 종교 개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며, 이런 문제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지가 궁금하거든요~^^(너무 추상적인가요?) 어쨌든 문득 이러한 궁금점이 생겨서 질문합니다~
답변:
semper reformanda!! (교회는 성경에 의해 부단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자들의 표어)
종교개혁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하지요.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한 마디로 결론내리기 매우 복잡하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부단히 우리 자신과 교회가 개혁하는 것을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는 물은 반드시 썩어 냄새가 나는 늪지대로 변하듯이 개혁되지 않는 개인이나 교회는 반드시 타락하여 그 순수성을 상실하게 마련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절)
개혁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계속 변하여야 하며 부단히 개혁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변해야 하며 교회를 개혁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개혁의 기준과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직 말씀, 그리고 오직 성령의 능력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이 두 가지를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의 모든 판단기준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과 성령--이것이 개혁의 원리이자 방법입니다.
칼빈, 루터, 쯔빙글리, 뮌쳐, 등 수많은 개혁자들이 카톨릭의 미신과 교황주의에 대항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그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각각 다를 수 있겠지만 그들의 개혁적 의지는 우리가 본받을만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속에 불붙었던 개혁의 의지가 오늘 우리 마음속에도 불타고 있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질문자가 이 시대의 루터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재록, 이단, 분별?
질문:
제가 어제 큰 댁에 갔다가 전철을 타려고 구로역에 갔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 무언가를 나눠주더군요..."이재록"인가(이름이 잘 기억 안나는군요...)
하는 이름의 목사님의 이야기였습니다...
무심코 받아서 열차를 타기위해 기다리면서 읽어 봤습니다....
거기엔 그 목사님께서 일본 등에서 농아들과 귀머거리들을 기도로서 치유했다는 이야기와
태풍사오마이가 그 목사님의 기도로 물러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을 오고가는 비행기주위에 둥근 무지개가 나타나는 사진과 함께
그것이 주님께서 그분을 지켜 주시려고 무지개를 보내셨다고 써있었고
또 많은 신도들이 그것을 보았다고 써있더군요..좀 황당하고 약간은
사이비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읽고 있는데..어떤 아주머니께서 오시더니 제게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이런 거 함부로 믿지 말라시며 이사람 TV에도 나왔는데...이단이라고
그랬습니다..지금 이사람 이단 처분하려한다고 하시며 요즘 학생들이 이런 거에 혹해서
이런 거 믿고 그러는데, 이런 거 함부로 믿지 말고 교회 생활 열심히 하라고 하시며 가셨
습니다..그 이재록 목사님인가 하는 분은 이단인가요? 알려주세요....
또 그이단과 사이비의 분류법과 그걸 이단이라고 정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궁금해요~
답변:
좋습니다.
이재록 목사는 기독교대한성결교단에 소속되었다가 교단으로부터 얼마 전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입니다.
그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는
(1)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주장하며
(2)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내세우며
(3) 성경계시보다 자신의 말에 권위를 더 부여하며
(4) 교인들과 사회를 신비주의 신앙으로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그의 설교와 생활에서 이단적인 요소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단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 모르는 신자들로 하여금
미혹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단을 규정하는 곳은 이단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기독교 이단 연구소가 있으며
각 교단에서 이단연구 위원회가 있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모임인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하면 교회는 일단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단을 분별하는 법은 신학적으로 깊이 훈련받은 분들이 모여서 파악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죠.
그러므로 일반 신자들은 그러한 이단전문가들이 판단한 것을 따르면
거의 무리가 없습니다.
혼자서 개인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보다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하는 교회생활이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을 세속과 이단의 유혹에서 지켜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늘 우리 믿음을 왜곡, 변질시키려고 하는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이란 처음에는 같이 나가다가 끝에 가서 다른 결론을 내리는 비정통, 사이비를 가리킵니다.
이단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항상 끝까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리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 교인들은 이 교리훈련을 거의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젭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믿음의 체계를 반듯이 세워야만 합니다.
교리를 사랑하십시오. 교리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교리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위기의 때, 유혹의 때에 지켜줄 것입니다.
승리하기를....
꿈도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인가요?
질문:
> 목사님~~~
> 우리가 잠을 자면 꿈을 꿀 때가 있잖아요...근데 어젯밤 꿈속에서 나타난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꿈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인가요???
답변:
하하...꿈 이야기야 말로 정말 재미있죠~~^^
좋습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한 형태는 맞습니다만 모든 꿈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것일 수도 있고 마귀가 주는 것일 수도 있지요.
꿈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답니다.
첫째, 정상적인 정신활동의 결과로서 꿈을 꿀 수 있지요.
평소에 정신활동이나 무의식속의 생각 등이 몸이 휴식을 취할 때 활동하는 것입니다.
의학자들은 말하기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을 꾼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이 꿈을 꾸지 못하도록 자극을 주면 환상을 보는 등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로 되는 등 정신건강에 있어서 꿈은 매우 중요하다고 실험결과로 입증되었습니다.
둘째, 마귀가 주는 꿈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꿈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본인이 알 수 있습니다.
대문 밖의 낯선 음성이 아버지의 음성인지 아닌지는 오직 그 자식만이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지요.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은 내게 믿음과 확신과 평강을 줍니다.
어려울 때 힘들 때 낙심될 때 그것은 내게 무한한 힘과 지혜와 위로를 가져 줍니다.
그러나 불안과 의심을 가져다주든지 혹은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할 때 우리는 가차 없이 그것은 '마귀적'으로 판단 내려도 무방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결코 혼란이나 어지러움이나 무질서한 어떤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혼란과 무질서와 어지러움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도 확실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너무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간밤에 꾸는 꿈보다 더욱 더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굉장한 돼지꿈을 꾸었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치더라도 그것은 반복음적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의 성취는 내가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고 일시적 성취는 마귀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당신이 꾼 꿈!--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그것이 기록된 성경말씀과 그것의 권위에 무슨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건전한 신앙은 꿈이나 환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성경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저는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을 믿습니다. 그 가치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넘어서거나 혹은 말씀의 권위를 희미하게 만들거나 위대한 계시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안내하지 못한다면 저는 그러한 것들이 수만번 제게 임하더라도 저는 단호히 거부할 것입니다.
저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환상도 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면 거부하기 원합니다.
꿈 때문에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것보다 꿈 없이 예수님께 집중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모든 계시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체험을 저는 배격합니다.
그러므로 꿈을 존중하되, 체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자, 그분의 말씀을 더욱 알고자 해야 합니다.
말씀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가운데 체험이나 신비나 꿈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켜서
저는 '신비주의 신앙'이라고 지적하겠습니다.
세고인어여! 신비주의 신앙으로 흐르지 마십시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 안에서 우리는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할 때 그분이 꿈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 없이 꿈을 꾸고자 할 때 마귀가 그 마음의 허점을 노리고 공격해올 것입니다
부디 꿈 꾸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신비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환상을 보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허영심으로 조작된 몽상을 보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언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성경말씀을 더 많이 알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꿈꾸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오는 어떤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말씀의 권위와 상관없이 임하는 것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참된 꿈이 무엇일까요?
올바른 꿈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배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참된 꿈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보게 하며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하게 하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인내와 수고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그 어떤 것입니다.
요셉의 꿈과 같이...
신령한 꿈, 참된 꿈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란?
질문:
> 저는 10월 초에 하나님께 제 삶을 드리겠다고.. 기도 드렸습니다.
> 그리고 지금 훈련받는 중에 있어요...
>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려는 것을 느끼고 감사드려요..
> 저는 지금 예일여고 Y-CAM이라는 기독교 서클에 있는데요..
> 선배랍시고... 2주 후에 또 말씀을 전합니다....
> 10월엔 수련회에서 알게 된 기도에 대해 나누었구요.
> 이번엔 하나님께 맡기는 삶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 그저 제가 체험한 것을 나누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 주님께 맡기는 삶에 대해 뿌리 깊게 알 수 있는 성경말씀이나.. 서적들을 알려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아~!
>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는 삶 되세요~
답변:
아주 좋습니다.
주님께 맡긴 생애가 어떤 축복을 경험할 지 두고 보세요.
하나님께 맡겼으면 하나님이 전적으로 인도하시는 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맡겼다고 하면서 근심하고 고민한다면 아직도 덜 맡겼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맡긴다는 것은 그분의 처분과 주도적인 인도하심에 절대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부디 맡기고 다시 찾아가는 삶이 아니라 맡겨 버리는 삶이 되길 바라며...
맡겨 버리는 삶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두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암송할만한 가치가 있구요.
(1)시편55:22
(2)벧전5:7
우리가 짐을 맡겨버려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붙드시고 계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우리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면 우리는 더 쉽게 맡겨버릴 수가 있지요. 반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잘 맡겨버리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시골에서 올라 온 할머니가 처음 택시를 탔는데 짐을 머리에 이고 탔다는 우스개 얘기가 있지요? 짐을 내려놓기가 미안해서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나 택시를 타는 것이 무엇이며 돈을 지불할 때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는지 안다면 쉽게 안심하고 짐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맡겨 버리기 위해서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계속 배워야 하고 그분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일단 한두 번 그분을 신뢰하고 맡겨버린 다음에 그분이 어떻게 나를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가를 맛본 다음에는 더 쉽게 맡겨버릴 수 있겠지요. 택시를 처음 타본 할머니보다 여러번 타보면 짐을 내려놓는 것이 익숙해질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도 어쩌면 익숙해질 때까지 맡기는 삶이 자연스러울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하고 훈련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음...좋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는데...출판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필립얀시가 쓴 책들이 이런 부분에서 좋은 책을 많이 냈구요, 코리 텐 붐 여사가 쓴 하나님의 현미경이란 책도 아주 좋은 책이구요, 조이 도우슨 여사가 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책(죠이)도 아주 좋은 책입니다. 우선 생각나는 데로 말했는데요,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생을 맡기고 살았던 신앙선배들의 전기나 간증집을 읽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음... 죠지 뮬러나 허스든 테일러의 자서전도 매우 좋습니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했습니다만, 맡기는 삶은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애요. 수영하는 사람을 보면 처음에 어색하지만 물에 몸을 맡기는 연습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몸이 물에 뜨는 것처럼,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기계에 몸을 맡기는 연습을 해야 넘어지지 않고 잘 달리는 것처럼 하나님께 맡기는 것도 하나씩 하나씩 경험해나갈수록 점점 더 쉬워진답니다.
은혜의 강물에 유유히 자유롭게 헤엄치는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 종파의 차이점?
질문:
지금까지 자세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가 문득 떠올랐는데요,
교회에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등이 있잖아요....
그런데 차이점은 어떤 것이 있고, 또 왜 그렇게 나뉘게 되었나요?
답변:
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려면 책 한 권을 요약해야 할 상황입니다.
===========================================
기독교 종파를 말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 전체를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고 할 때 흔히들 천주교와 개신교라고 나눕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하지요.
좁은 의미에서 개신교 안에 많은 분파가 있습니다. 한국에만 해도 150여개 교단이 있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거의 비슷하답니다.
역사과 기원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종류와 특징에 대해서만 보면,
-감리교:웨슬레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으로서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인데 그래서 'methodist'라고 부르지요.
-침례교:세례를 주는 방법에서 물을 뿌리는 것을 거부하고 물에 잠그는 방식을 주장한다고 해서 'baptiset'라고 부릅니다. 미국교회는 거의 침례교라 할 수 있답니다.
-장로교:화란 개혁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으로 말씀을 강조합니다.
한국 장로교 안에도 많은 분파가 있답니다. 우선, 기독교장로회(기장), 예수교장로회(예장)이 있는데, 예수교 장로회안에 크게 합동, 통합, 고신측이 있답니다. 저희 세광교회는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예수교장로회는 하나였는데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측이 먼저 분립했고, 그 다음 WCC(교회일치)문제로 합동과 통합으로 서로 갈라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은 같습니다. 장로교는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만이 독특한 특징입니다.
-성결교:신유, 성결, 재림, 중생을 강조하는 교단입니다.
-오순절(일명 순복음): 방언으로 알 수 있는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교단입니다.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많지요.
-이 외에도 많은 분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유일성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동일합니다. 기독교의 범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믿는 신앙으로 구분합니다.
대체로 교파가 나뉘게 된 이유는 역사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과 교리적 요인이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요인도 작용하구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이 하나님 말씀됨과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한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문:
> 목사님!
>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너무 궁금해서요,,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선생님께서 우리 반에 오시면 항상 주님께 기도드리고 말씀을 전해주셨거든요? 어렸을 때 들은 거라서 잊어먹지 않고 잘 기역이 나는데요...
> 그 선생님이 하는 말씀 중에 기도할 때요,,,마칠 때
>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라고 하잖아요? 그 말을 안하면 사탄에게로 가는 거라고 그러셨거든요? 그래서 그게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 꼭 가르쳐 주셔요!!!
답변:
좋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반드시 덧붙여야만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멘’하고 기도를 끝내기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표현은 주문이 아니란 겁니다. 즉, 입바른 말로 그저 형식적으로 붙여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것이지 그런 말을 붙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는 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권세와 예수님의 공로와 예수님의 중보를 의지하여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이지, 그저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렇게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예수님의 공로와 중보와 권세와 능력을 믿지 않으면서 그저 입으로만 하는 말은 아무런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이름을 믿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 이름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부디 형식에 머물지 말고 내용에 도달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참 뜻과 의미를 알고 믿음으로 마음으로 그렇게 고백하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주님의 도우심과 중보하심을 의지하며, 주님 외에는 다른 구세주가 없으며,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반석이시며 의지가 되심을 믿고 이러한 기도를 드립니다." 라고 말입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노래와 춤에 빠져도 괜찮나요?
질문:
또 글을 올리게 되네여...갑자기 궁금한 게 많아서여...목사님 근데 음악을 듣는 다는건
나쁜가여??? 전 주로 락이나 아님 발라드...^^;;그리구 메탈도 듣구 그리고 라틴은 어쩌다
가 듣고 그리고 그냥 음악이 좋아서 모인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요즘 춤 가르쳐주느라
구 애를 많이 쓰고 있는데...솔직히 말하면...춤 출때나 아님 음악에 미쳐있을 때^^;;하하
(비유한게 넘 심했나??? ^^)보면 제가 봐도 교회보다...아니 하나님보다 음악...춤을 더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여...그건 안 되는 줄 알지만...저두 자제를 하구
있구여...암튼 이런게 나쁜건 아니겠져???
답변:
노래&춤에 빠지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의 문제네요.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선악의 절대 기준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의 견해는 참고일 뿐입니다.
음악과 춤에 빠지는 것이 좋은 지 나쁜지는 내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구요,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거듭난 양심이 가르쳐주는 거랍니다. 성령님은 기록된 성경말씀의 범위 안에서 분별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에 대해 내 양심과 더불어 주님의 기준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진지하고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음...이 문제에 대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음악과 춤은 그 자체로는 나쁘다고 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기타나 드럼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요.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어디에다 쓰는 가가 중요하겠지요.
기본적으로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전도서에 잘 나와 있지요.
즐거워하는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해 음악에 빠지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왜, 그렇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음악과 춤에 미쳐서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즉, 목적이 중요한 거예요.
예를 들어 돈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요.
문제는 왜 돈을 벌려고 하며, 어디에다가 돈을 쓸려고 하는 건가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성경이 말했습니다.
선하고 악하고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문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사람의 돈(음악, 춤도 마찬가집니다.)은 선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 돈은 매우 나쁜, 불의한 재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용도로, 어떤 목적으로 쓰여지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용도와 목적이 하나님의 의도에 부합하는가에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분의 명예를 위해서, 그분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집중하고 미치고 빠지고 몰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왜,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더욱 열심히 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잠간 절제하고서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조용한 시간과 장소에 주님과 만나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께 여쭈어보세요. 주님께서 내게 지혜를 주셔서 잘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도움을 간구해보세요. 주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절제할 힘을 주시도록,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이름을 위해 잘 개발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면서 모든 것을 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모든 것을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늘 생각하면서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일 세상일과 교회일이 겹친다면?
질문:
세상적인 일과
교회일이 겹치면 어떻게 해야 되져??
정말 답답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답이 않나오네요..
답 좀 주세요~~~~~~~~
답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는 이유가 당연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인가? 분별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스스로 최선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분법 구도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영원히 못찾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부단히 몸에 익혀야 할 시기입니다. 일을 하는 법을 배우지 말고 바른 일을 찾는 법을 배우는데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1)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7일째 안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2)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드러내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3)목적이 분명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저는 6일 동안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교회일을 한다는 이유로 공부에 등한히 하거나 성적이 내려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공부도 더 잘 해야 당연합니다.
자, 무엇이 세상일이고 무엇이 교회일입니까?
교회 건물 안에서 하는 일은 교회 일이고, 세상에서 하는 일은 모두가 세상일입니까?
내가 성실하게 공부하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세상일이고, 내가 교회에서 잡담이나 나누는 것은 거룩한 교회일인가요?
어떤 것은 사람 보기에 필경 바른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잠언에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볼 때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친구들이랑 어울려 노는 것이 더 거룩하게 보일 수 있지만 주님 보시기에 전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무엇을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하느냐 입니다.
만약 내가 공부하는 것을 주를 위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주의 일이 되고 거룩한 일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모임을 가져도 주님을 위한 것보다 내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열심히 교회일을 하여도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라 결국 내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명예를 위해 하지 않는 모든 것이--그것이 교회일이라 할지라도--세상적인 일입니다. 교회일도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곧 자기일이 되버리고 맙니다. 학교일도 믿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세상일과 교회일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자기가 인정받는 것 때문에 열심히 교회일을 합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일은 교회일이라 하더라도 세상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열심히 학업에 열중합니다. 그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세상에서 하는 일이지만 주님의 일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지 말고, 왜 이것을 하는가 하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하십시오.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의 나라와 의에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인지 고민해보면서 기도해본다면 틀림없이 주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세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한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기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문제가 아니라, 기도해서 주님께 지혜를 구해서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스스로 책임감 있게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책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도록 늘 부단히 자신을 가꾸고 말씀으로 훈련하는 일을 하십시오.
In Christ,
김광락 목사
'신앙상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들과 함께 했던 상담8 (0) | 2012.03.05 |
---|---|
청년들과 함께 했던 상담7 (0) | 2012.03.05 |
청년들과 함께 했던 상담5 (0) | 2012.03.05 |
청년들과 함께 했던 상담4 (0) | 2012.03.05 |
청년들과 함께 했던 상담3 (0) | 2012.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