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유혹을 받을 땐 어떻게 이깁니까?
질문:
세상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이기죠?
답변:
결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믿음으로 이깁니다.
구체적인 실행원리로서,
첫째, 이럴 땐 예수님의 성품과 원칙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내가 본받아야 할 원칙과 성품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둘째, 이럴 땐 성경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마음에 말씀이 담기면 유혹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집니다. 말씀이 없이 내 노력과 의지로 물리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면 유혹의 본질은 진리와 비진리의 대결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 지 그렇지 않은 지 내가 보고 아려 하노라"(창세기18:20,21)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세기19:24,25)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것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요한계시록 18:2-5)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4:3-8)
"하나님의 진노가 부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함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로마서1:18-32)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야고보서 4:4)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좋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5-17)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란 가운데 진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요한계시록2:21-23)
친구와 이단?
질문:
>두번째 질문입니다...
>오랫 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재수학원에서 알게 된 아인데...그때 처음으로 학원 기도회를 통해 교회에 나오게 되었지요...)
>만났는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있다고 같이 가보자고 해서 갔는데요...
>이단이더군요...
>당황했습니다...
>그 교회 사람과 얘기도 해보았는데요...논쟁으로 번졌습니다...쓸데없는 말 쌈이었지요...
>그 사람도 많이 안타까워하더군요...
>그 친구와 집에 오며 가지 말라고 설득하다가 다시 논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이단이냐, 친구냐, 그것이 문제로다! 고민스럽겠군요. 성경이 가르쳐주는 원리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첫째, 그 친구를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긍휼이 그 친구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그 친구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긍휼을 가지고 말하십시오.
둘째,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진리를 선언하십시오. 진리는 설득되어야 받아들이는 성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설득 당할수록 더 반발하게 되는 것이 진리에 관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그러므로 논쟁을 피하고 '배우고 확신한 것'을 선언하십시오. 전제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대화 그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제를 분명히 선언하면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깨닫도록 중보하십시오.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전제가 성령의 능력으로 깨뜨려져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 영혼을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부탁하십시오.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다면 언젠가 깨닫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당신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선언하시면 할 일을 다 한 겁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저의 가장 절친한 기도친구가 '구원파'에 심취했었습니다. 한참 논쟁도 했지만 논쟁으로 되지 않더라구요. 그러나 그는 결국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대구에서 목회를 아주 잘 하는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친구의 영혼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주님께서 보시고 부디 긍휼과 능력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비전에 대해서
질문:
>출애굽기 설교내용을 들으면서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내 안에는 자꾸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마음이 있거든요... 그래서 기도할 때도 필요한걸 구하지도 않았어요..
>어설픈 믿음에서 오는 두려움(만일 이렇게 기도했는데 안 들어주시면 어떻하지?)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지금은 조금씩 구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요 ...
>참 믿음과 자기암시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 지체나 모임에 대한 언약(vision)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요? 관련된 말씀을 읽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주시는 마음인지요???
>성령님과 상당히 어색한 저... 기도시간에 천국을 맛보길 소망하며...^^;
답변:
좋아요!
믿음이 무엇인가? 라고 늘 자문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기에 속한거에요.
왜냐면 우리는 믿음을 배워가는 중이거든요...저도 믿음이 무엇인지 배워가고 있구요, 더 배워야 할 부분이 많아요. 이것을 위해 저는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가 제일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주시는 그분 자신을 구하는 기도야 말로 믿음을 알아가는데 가장 중요하지요.
질문의 요지는...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차이를 어떻게 분별하는가에 대한 것이군요...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애요. 참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음으로서 주어지는 은사와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봅시다.
"참 믿음이란...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것인 반면에, 자기 암시 혹은 신념이란 자기 욕심이 만들어내는 허상에 대한 집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미암았느니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듣지 않고 결코 바른 믿음이 생겨날 수 없어요. 큰 믿음은 크게 들어야 하구요, 바른 믿음은 바르게 들어야 생기구요, 참 믿음은 참으로 들을 때 생겨나게 됩니다. 믿음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자, 믿음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근거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 믿음의 근거입니다. 반면, 자기 암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있어요. 예를 들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 예수님이 걸어오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결과이죠. 그러나 우리가 만일 "부르심"이 없이 물위를 걸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믿음이란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아갈 때 내 마음 속에서 초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은사입니다. 우리 세청일 GBS 교재에 그림 하나가 나오는데 잘 보세요. 무엇이 믿음인지 무엇이 자기 암시인지...
자, 그러면 모든 말씀에 근거한다고 다 믿음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막 16장에 믿는 자는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으리라는 말씀이 있죠? 말씀에 있기 때문에 나도 독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거죠. 그 문맥을 자세히 보시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그 약속의 말씀이 유효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순종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서 약속을 주장해도 그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니까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귀신들이 오히려 그들을 억제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주장했을 때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약4:6,7참조) 다시 말해서 순종하는 자가 약속의 말씀을 주장할 때 그 약속이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VISION 은 어떻게 받습니까? 비전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함께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가 순종해나가면서 점점 커지듯이 비전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 확인해나갈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은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나는 나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적(=비전)을 알게 됩니다. 비전이란, 하나님을 위한 나의 계획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계획입니다. 우리를 성령으로 부르실 때 우리는 우리를 통해 어떻게 영광 받으실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도 함께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구하는 것은 그분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니까요.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세요. 그분이 내 안에 임하시도록 간구하십시오. 말씀에 나타난 그분의 뜻을 순종하면서 이 부어주심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세요. 그분은 신실하셔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이와 같이 그분이 성령으로 부어주심으로 내 속에 들어오시면 나는 그분의 하실 일들을 보게 됩니다. 이 비전을 소유한 인생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부활절 계란에 대해서
질문:
부활절 계란의 의미에 대해서 가르쳐주세요.
과연 부활절이 되면 어린이들에게 색계란을 나눠주는 관습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답변:
십자군 전쟁 때입니다. 어느 귀부인이 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부인은 십자군에 종군한 후 소식이 끊어진 남편을 찾고 있었어요.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전사 소문이 나돌게 되었지요. 그 약점을 이용한 부하가 귀족의 재산을 횡령하고 그 부인을 먼 곳으로 추방해버렸답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무척 친절했지요. 거지꼴이 되어버린 부인을 따뜻하게 맞아 그 마을에서 정착하게 도왔답니다. 그러자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귀부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닭을 길러서 계란을 장만하여 동네아이들에게 선물했답니다. 부활절 아침 아이들을 모아 이렇게 말했지요. "숲에 가서 자기의 나무를 하나씩 정하세요. 그리고 버섯을 따서 그 나무 밑에 새 둥지를 만들어 놓으세요. 얼마 후에 하늘에서 이상한 새가 날아와서 여러분이 만든 둥지에 알을 낳고 갈 거예요" 아이들은 모두 신이 나서 숲에 들어가 자기의 둥지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귀부인의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식사 후에 둥지를 찾아간 아이들은 정말 알록달록한 예쁜 알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알에는 이런 글씨가 씌어져 있었지요.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날 부인의 색계란을 받은 아이 한 명이 친척 집으로 여행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길에서 몹시 지쳐 쓰러져 있는 부상병을 만났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의 보물처럼 생각하는 그 색계란을 부상병에게 줍니다. 군인은 계란에 쓰여진 글을 보더니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아니, 너 이 계란을 어디서 얻었니? 이 글귀는 우리 집안의 가훈이란 말이다. 그리고 이 필체는 분명히 내 아내 로자린의 것이야!!!" 그 뒷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은 로자린 부인에게 부인의 사랑은 아이들에게 어린 소년의 사랑은 한 부상병에게, 이런 사랑의 순환 속에서 새로운 행복과 평화는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신은 이 사랑의 순환 속에 작은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지요? 어린아이들에게 나눠주는 부활절 색계란은 이웃사랑의 작은 실천을 담고 있습니다. 이상 부활절 색계란의 유래에 대한 오리지널 답변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작은 '계란'이 많아져가기를 소망하며...
In Christ,
김광락 목사 올림
의리 있는 삶이란?
답변:
의리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성토모(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의 약칭)의 뉴스레터에 기고한 글을 올립니다.
제목: 의리를 아는 삶을 살자! /김광락 목사(성토모 자문위원)
성토모는 공의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부름받은 모임입니다. 이 선한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보다 많은 사람이나 재정이나 조직을 구축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승리의 길은 공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데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 사회단체에서 일을 할 때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한 사상적 근거와 개념적 체계를 구축하는 일에 등한시하고 외부적인 투쟁에 인간적인 열정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도를 바꾸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승리는 세계관의 변화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리’라는 단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요즘 의리가 있다는 말에 대해 광범위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나 매스컴에서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용기가 진정한 의리가 있는 것인 양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의리일까요? 그래서 저는 의리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잠언은 기독교 공의의 보고입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10:2)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잠11:4) 여기서 재물과 의리는 병행구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의리는 재물과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의리의 여부를 판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의리입니까? 신명기 24:12,13절을 보면,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 憫?말고 해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계속하여 하나님께서는 “곤궁하고 빈한한 품군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함으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데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고 했습니다. 의리는 철저히 자신이 종 되었던 옛 삶에서 속량하여 주신 은혜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배고플 때 하나님께서 대신 값을 지불하심으로 그러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그러한 의리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의리를 이해할 수도 또한 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특히 잠언 28장과 29장은 공의에 대한 지혜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삶은 육신의 힘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며, 오직 가난에서부터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해야만 가능합니다. 왜 공의가 무너지며 불의가 판을 칩니까? 자기 힘과 노력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의리를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성토모의 비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아울러 기도운동이 병행되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영적인 ! 영역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영역에서도 미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물질의 영역에까지 나타남을 담대하게 선포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영역에서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만을 이해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에서 탈피해서 물질의 영역에서도 ‘속량하여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 선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의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부터 공유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삶으로 고백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분명한 세계관의 정립이 분명한 삶의 변화를 가져오며, 더 나아가서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정의: 성경적 개념으로서의 의리는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번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저 베풀 줄 아는 삶입니다! 의리를 이해하고 소유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의리가 없이, 주님의 공급하심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은 씨를 뿌리지 않은 채 거두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며, 이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의리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이 의리는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특히 순수하게 구제와 선교에 물질을 드리는 개인과 교회는 진정 의리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리를 이해하고 소유하며 이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며...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사순절이란?
질문:
사순절이란 무엇입니까?
사순절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변:
1.정의
사순절(Lent, 봄을 뜻하는 말인 렌트라고 불리움)이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며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독교 절기로서 부활절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기독교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40일간 기리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2.기간
사순절은 특별한 회개일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2월 25일)부터 시작해서 성금요일 슬픔과 비극을 절정으로 끝납니다. 2004년도 사순절은 2월 25일부터 4월 10일까지의 46일이며 6번의 주일은 제외됩니다. 4순절이란 40일의 한자말입니다. 우리 예일교회는 3월 2일부터 4월 10일까지 지키도록 합니다. 금요기도회는 없이 특별새벽부흥회를 가지겠습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에는 3일간 십자가 사경회를 가집니다.
3.기원
주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신 것과 관계있습니다. 그전에 모세도 엘리야도 40일간 금식하면서 자기부인을 온전히 체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배회하면서 낮아지는 연단을 체험했습니다. 1세기 경에는 40시간(부활절 전)을 지켰고, 3세기 경에는 6일간 지키다가 731년 샤를레만 대제에 와서 다시 40일로 정착되었습니다. 사순절을 부활절로부터 계산하여 46일전 수요일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6번의 주일은 사순절 날짜에서 제외하고 40일간을 지키는 것입니다.
3.의미
본래 의미는 부활절 전 금식과 세례를 위한 준비에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 부활의 주님을 마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의 시간을 가지며 교리교육도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와 자기부인을 통해 그리스도께 온전히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회개, 자기부정, 자기희생적 삶, 사랑의 실천, 절제를 실천하는 기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훈련의 기간인 셈입니다.
3.생활
그러면 4순절 기간 동안 어떻게 생활해야 합니까?
첫째, 참회의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나의 죄를 기어하고 고난보다 안일 추구한 죄, 영적 기쁨보다 세상 기쁨을 추구한 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보다는 자기의 번영과 안일 추구한 죄 등을 회개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자아가 깨어지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둘째, 영적 훈련입니다.
이 기간에는 금식, 기도, 자기부인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슴, 기도, 섬김, 헌신, 자기희생 등의 영적 훈련의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의 분수에 맞게 영적 훈련의 계획을 세워 실천해야 하며, 교회는 세례받을 자를 교육하는 기간으로 삼으면 좋습니다.
셋째, 기도생활입니다.
교회는 금식기도대회를 선포하고 작정새벽기도나 저녁기도회를 실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예일교회는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며, 하루 한 끼 자발적 금식을 하도록 합니다.
넷째, 절제와 구제의 생활입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절제하고 이웃을 위한 살을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육식과 술을 금하고 사치스런 복장도 금할 것이며 기호식품, 군것질, 오락을 절제할 것입니다. 이렇게 절제한 가치를 가난한 이웃과 소외된 영혼에게 나눠주도록 합니다.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면 절제와 구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금욕을 위한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금욕이어야 합니다. 금식하면서 오락을 즐긴다면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진수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나 개인의 신앙에 항상 중심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만일 십자가가 없다면 교회도 참 신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이며 인류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가 왜 그리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과 죽음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구원의 은혜와 사죄의 축복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을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교회의 영적 갱신을 위해 새롭게 되는 갱신의 기회이며 개인과 가정의 영적 회복을 위해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이 죽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배울 때 비로소 성령 안에서 치유되며 자유하는 기쁨,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순절 기간 동안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 주님의 영광스런 부활의 감격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사순절을 통해 우리 영이 새로워지는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낮출 때 주님은 크신 은혜의 강수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4순절을 믿음으로 잘 준비한 성도가 부활절의 감격스런 아침을 맞이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스런 아침을 위해 우리 함께 4순절을 믿음으로 지킵시다! 영광스런 그 아침을 위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목회자의 연약함을 볼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질문:
일반적인 교회에서 목회자의 연약함(인품적 결함, 설교 말씀이 이상하게 여겨질 때), 또 교회가 하는 일들이 잘못된 길처럼 여겨질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답변:
목회자의 연약한 모습(실수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바라볼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데... 매우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십시오.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본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면 다윗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 죽이려고 3,000명이 군사들을 보내 추격하는 사울에 대해서 다윗이 보여준 태도는 사울에게 기름부으신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경외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실수하고 잘못할 때 그에 대한 대가는 하나님이 친히 요구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대가가 분명합니다. 그냥 죄를 지어도 무서운 형벌이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를 범하면 얼마나 더 끔찍할까! 소자를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서운 화를 선언하셨는데,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뜨리는 끔찍한 중형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지도자의 실수나 범죄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고 했습니다.
2.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예상한다면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이고 완벽할 수 없지요. 완벽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입니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부름받은 존재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연약한 그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실수와 넘어짐을 통해 무엇인가 배우게 된다면 그리스도께 조금 더 나아가게 되겠지요. 문제는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고 실족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인데...상처를 받는 분들은 대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들입니다. 영적 어린아이들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처럼 육에 속한 자들로서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을 더 따르고, 사람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 어린아이들이 항상 있게 마련인데 그분들이 대게는 상처를 받고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가기도 합니다. 그들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받더라고 잘 극복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승리하도록, 실족하는 소자가 생기지 않도록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나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더 급합니다. 더욱 더 내가 그 위치에 있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고 그의 연약함이 보여지는 곳에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그 연약함이 보인다는 것은 언젠가 나도 그 자리에서 연약함을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게 될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 목회자의 연약함을 통해 나를 미리 준비시키시고 단련시키신다는 뜻이 되므로 우리는 실족하지도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무엇인가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두아디라 교회를 보면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이 이상한 교리로 교인들을 유혹하고 있었을 때에도 몇몇 교인들은 깨어 있어서 그러한 교훈을 받지 않고 영적 순결을 지키고 있었는데 주님은 그러한 교인들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떠나지 아니하고)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줄 것이다."(계2:24,25) 딴 사람 속에서 연약함이 보인다는 것은 내 안에 더 큰 연약함을 발견하라는 주님의 신호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분명 승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4. 바로잡을 수 있도록(혹은 직면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지혜롭게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찾아보는 것도 적극적인 방법인데, 갈6:1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이 말씀이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지도자의 연약함이 계속 반복되고 그것 때문에 실족하는 영적 어린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면, 그런데도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본인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지혜를 구하면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예언의 은사"를 주셔서 덕을 세우면서 회개할 수 있도록 권면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5. 만일 진리에 관한 문제라면 맞서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싸운다는 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지키는 것이 우리가 싸우는 방식입니다. 비진리와 싸우는 것이지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단마다 약간의 교리적인 차이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거부하고 사도들이 가르쳐주신 신앙의 근본적인 고백들을 부정한다면 이것은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 연약함이 만일 진리에 관한 문제라면 절대로 방관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럴 때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누룩을 제거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였습니다. 공동체의 영적 순결을 위해 거짓 교훈과는 목숨 걸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이 일로 실족하지 않도록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모태신앙인 저도 어릴 적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수많은 목사님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분명 이해되지 않는 연약함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약함 때문에 힘들어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형제자매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자신의 영적 순결을 지키며 영적 성숙에 이르게 된 형제자매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고린도교회의 몇몇 성도들처럼 육에 속한 자처럼 반응해야 할까요? 아니면 영에 속한 자처럼 반응해야 할까요? 사람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고린도전서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보고 상처받고 실족함으로 스스로가 영적 어린아이임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와 말씀대로 주님을 따름으로써 영적 성숙에 이르도록 반응한다면 참 좋겠습니다. 성숙에는 고통이 뒤따릅니다. 고통을 성숙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지도자)의 연약함이 보일 때에도 성령이 교회들에게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면 항상 이기는 자가 됩니다.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머리되신 주님을 견고하게 붙잡는 건강한 교회, 차이점과 다양성을 용납하고 인내로 참아주고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줄 아는 성숙한 교회,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교회, 말씀이 이끌어가는 교회,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교회, 성령이 친히 운행하시는 교회, 우리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많이 배우지만 세상에 나가면 힘이 없는 이유?
질문:
왜 한국 교회 성도들은 힘이 없을까요?
말씀 공부를 안 하고 사역에만 바빠서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청년부 때 매주마다 말씀 공부하고, 좋은 목사님 모셔서 수련회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왜 세상에 나가면 힘이 없을까요?
왜 직장생활을 하고 바빠지면 신앙의 문제는 옛 추억이나 내 삶의 작은 부분으로 전락하고 마는 걸까요? 어쩌면 저도 한 10년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정말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청년부 때에는 공동체 열심히 섬기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믿음을 말해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순진해서, 착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못 이겨서, 가식적인 모습으로도 충분히 '믿음 좋은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으니까요..
답변:
왜 한국교회는 힘이 없을까?
요즘 새벽마다 산상수훈을 살펴보고 있는데...
팔복의 말씀을 강해하면서 나 스스로 느낀 것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품고 살았던 적이 얼마런가? 돌아보게 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문제의 증상이다.
증상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증상을 치유하는 것인가?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기도하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
그러면, 왜 그럴까? 열심히 배우고 했는데도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했을까?
아마도 모든 가르침이 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은 아닐 수 있겠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말씀이라도 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아닌 것이겠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기독교인의 힘과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달려 있다...
기독교회의 힘과 영광도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달려 있다...
그런데 항상 배우지만 진리(그리스도)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1-7)
경건의 모양만 추구하고 경건의 능력은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왜 그러면 경건의 모양만 추구하고 경건의 능력은 추구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갔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
포기하지 못하는 세상 것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려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고
그러면서도 어떤 이유로 해서 경건의 모양을 추구해야만 할 것 같고...
이것이 아닐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성령의 인격과 능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환영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의지하며
성령의 이끌림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삶...
그럴 때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내 안에 계신 그분의 거룩한 영이 나를 이끄시는 것...
이것이 진정 능력 있는 삶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제의 해답은 주님의 이끄심에 미묘하게 저항하면서 자신을 기꺼이 맡겨드리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욕심에 이끌리는 자신을 원하거나 혹은 그것을 방관하거나 혹은 그렇게 육체에 이끌리는 것을 오히려 즐기려고 하는 죄성을 방치함이 아닐까...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개념 이상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모험과 헌신과 결단과 포기와 자기부인과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차선의 끊임없는 거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은 단지 머리로 이해함으로써 품을 수 있을까?
단지 책 몇 권을 읽는다고 품을 수 있을까?
하늘 보좌를 버리고 하나님의 동등하신 본체이시만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시고 죄인의 모양을 취하시고 죄인의 자리에 서시며
십자가 처혐을 기꺼이 감수하시며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을
단지 책을 읽고 많은 수련회에 참석하고 전도여행에 참석했다고 품을 수 있을까?
단지 주님에 대한 어떤 교리와 개념에 동의한다고 해서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며
주님처럼 자기 비움에 이를 수 있을까?
머리를 사용한다고 주님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며 살 수 있을까?
신앙의 자리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며,
삶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삶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따르는 삶이며,
그리스도를 선택하기 위해 날마다 다른 것을 포기하는 삶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를 뒤따르는 모험의 선택의 연속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에게 이끌리기 위해 먼저 육체에 이끌리는 삶을 거부해야만 한다는 것...
늘 성령의 이끌림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그러한 삶을 살았으면...
단지 마음으로만 원하는 것이 아닌
실제적으로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과감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에 던져버리는 모험을 날마다, 일상생활속에서
실천하는 과감성으로 살기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기를...
날마다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실천의 삶을 살기를...
늘 승리하기 바래요...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요즘 Q.T가 잘 안 됩니다
질문:
요즘 Q.T가 잘 안 됩니다.
하기 싫어집니다.
다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하죠?
답변:
경건의 시간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적용중심의 Q.T’ 때문입니다. 경건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말씀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인격적인 사귐은 언제나 즐거운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이 싫어졌다면 아마도 인격적인 사귐이란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큐티책이나 세미나를 보면 공통적으로 적용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적용으로 끝납니다. 저는 이러한 방식을 싫어합니다. 적용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적용으로 끝나는 방식을 무척 싫어합니다. 적용을 강조하다보면 점점 주님과의 교제보다는 내 삶속에 말씀을 억지로 적용하려는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말씀을 억지로 적용하려는 율법주의적인 삶으로 기울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경건의 시간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과감하게 적용을 빼버리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적용의 칸에는 내가 오늘 무엇을 어떻게 실천할까 보다는 주님께 올려드리는 사랑의 편지를 써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경건의 시간은 오늘 내 삶에 적용할 말씀을 찾는 시간이 아닙니다. 적용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하시도록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경건의 시간에 적용점을 찾기보다는 주님의 마음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건의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할까 보다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리고 일어드리는 시간이 되도록 해보십시오. 또 한 가지 성령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십시오. 다시금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십시오. 반드시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큐티 책을 과감히 제쳐두고 성경책과 빈 노트를 가지고 주님 앞에 앉아보십시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택된 자와 동성애에 대해서?
질문:
>저는 예수님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그분께 더욱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의문 또한 커져 가고 있습니다..
>먼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부터 가졌던 의문인데요..
>근대 이전 시대에 살던 우리나라 사람들, 예를 들어 고려 시대 사람들은 복음을 전해 듣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었을까요..
>또, 하나님은 왜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를 부르셨을까요..
>저에게 주어주신 소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로 부르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로 죽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요..왜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또 하나의 의문은 동성애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 동성애의 지지자였습니다.
>지금은..솔직히 말하여 여전히 동성애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가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신 죄일까 라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도 제가 주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서도..
>제 안에 많은 충돌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성애자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지지하게 된 것은..
>학교수업 때의 과제를 통해서였습니다.
>사회의 일탈사례에 관해 동성애 사례를 조사하던 중,
>동성애자 인권연합 같은 사이트들을 살펴보고, 한 동성애자와 메일을 통해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느꼈던 것은..
>동성애자들도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에 대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사회적 일탈자로 규정되고 주류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비난받기 때문이겠지요..저는 사회적인 면에서는 이들이 일탈자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피해자 없는 일탈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성애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제가 아직 성경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충분히 하나님과 만나지 못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교회에서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섭리를 생각한다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를 통해
>또 다른 귀한 생명을 탄생하게 하시는, 그러한 섭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이 당연하다고 들었습니다.
>음...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섭리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의문은..
>동성애자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니까요.
>이성애자인 많은 사람들이 이성에 대해 끌리고, 설레이고,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
>이성을 대할 때 '이 사람에게 난 끌려야 되겠다." 와 같은 의지를 통해 동성이 아닌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기로 정해놓고 감정이 느껴지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듯이..
>동성애자들에게서 생겨나는 감정도 이성애자들처럼 자연스러운 유발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보면 우리가 갖게 되는 그러한 감정의 유발까지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것이 아닐까요...하나님은 죄지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듯이 동성애들도 사랑하시지 않을까요..
>생명탄생의 섭리에 의해서 동성애가 죄가 된다면..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 임신을 위한 관계가 아닌 성관계도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
>피임을 하고 성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의 몸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생명을 창조하게 하는 섭리와는 다릅니다. 현실적으로 피임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때에 많은 아이들에게 재정적으로, 감정적 지원하는 것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 우리가 그것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임을 하게 된다면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수정이 되고, 임신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는데 그것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방지하고, 단지 몸의 감각이 주는 기쁨을 느끼는 것일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때문에 피임을 금지하고 했다고 들었었는데요, 현재도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신교에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저는 부부가 피임한 채 성관계를 함으로써 갖게 되는, 느끼게 되는
>감정이..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맛있다고 느끼듯이,
>음악을 들을 때에 좋다고 느끼듯이,
>춤을 출 때에 즐겁다고 느끼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감각과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성애자들이 부부관계에서 그러한 즐거움을 갖는다면
>동성애자들이, 몸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것도
>이성애자들과 마찬가지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사회적으로 동성애자들의 결혼도
>저로서는 지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게 되는 것,,
>그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 해석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상대적인 해석이 발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토록 쉽게, 동성애는 죄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일까요.
>저의 의문은 시대적 잣대에 따라 혹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저 역시 저의 가치관과 기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맞추고,
>해석하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의 머리로 논리를 세우고 이성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혹시 제가 부족한 머리를 이용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여화와의 이름으로 우상을 만들었던 사람처럼 저도 그렇게, 주님을 따른다고 입으로 말하면서 생각과 행동으로는 저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을 맞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있어 절대적 진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저역시, 그래야 한다고..또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인간인 저로서는 의문을 갖는 것을 피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진리일까, 정말 그것이 그분의 뜻인 것일까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동성애를 죄라고 생각하실까요...
>그것을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치유하고, 이성애자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하는 감정일까요..
>그들이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인간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들의 몸과 감정을 그렇게 창조하셨을까요..
>지금 제 안에서 끊임없는 의문이 생깁니다..
>제가 참으로 주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목사님의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구도자의 고뇌가 담긴 질문입니다.
첫째, 복음을 듣지 못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까?
만약 복음을 듣지 못해도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결코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힘들게 믿고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자들이 됩니다. 정말 그렇다면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고, 도리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참 불쌍한 자들이 됩니다.
롬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료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가 같으니라."
롬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유럽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롬2:15, "이런 이들(율법 없는 이방인)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한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9,10,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ㅎ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벧전1:8,9, "예수를 너희(이방인들)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둘째, 하나님은 왜 하필 나를 부르시고 다른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셨을까요?
만약 모든 사람을 다 부르신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로 하여금 은혜을 알게 하시기 위해, 그 은혜에 감격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권적으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 은혜를, 그 은혜의 감격을 모른다면 제대로 부름 받았는 지의 여부부터 다시 보셔야 합니다.
롬9:15,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롬9:16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슬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롬11:7,8,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엡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셋째, 주님은 동성애를 죄라고 여기실까요?
질문하신 분께서는 동성애에 대한 주님의 관점에 관심이 있으신 듯하지만 그러나 저는 질문하신 분께 죄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고 간절히 주문하고 싶습니다.
동성애가 죄가 된다 안된다의 구분을 떠나서 죄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요구와 법을 어긴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 홀로 독립하려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자기주장의지(self-assertive will)입니다.
그렇다면 동성애 자체가 죄냐 죄가 아니냐는 쉽게 해결이 됩니다. 우리는 죄의 진정한 세력을 보지 못하고 단지 죄의 증상의 일부분만을 가지고 그것이 죄냐 죄가 아니냐라고 따지는 경향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로 큰 함정입니다. 만약 동성애를 죄로 간주한다면 이성애는 죄가 아닙니까? 우리는 자꾸만 죄의 실체는 놓쳐버리고 죄의 증상만 가지고 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를 직시하지 않고 행동양식이나 방식을 가지고 죄냐 죄가 아니냐를 논하는데 그것은 진정 죄를 무시하고 죄의 무시무시한 세력과 교묘하게 그리고 영리하게 타협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방식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농후합니다. 이게 왜 위험하냐면 죄의 증상을 죄로 착각할 때 증상을 제거했음에도 계속 증상이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겐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나는 죄가 없다고,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기를 의롭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때도 그런 식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환자와 환자를 앓게 하는 병의 원인을 구별하는 것은 의사의 기본적인 상식인 겁니다. 이걸 구분 못하면 오히려 환자를 두 번 죽이는 돌팔이가 됩니다.
따라서 죄와 죄의 증상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죄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향으로 나온 것들(증상)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요.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한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태어난 인간들은 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있게 되었고, 죄의 증상들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신실하게 주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죄의 증상들로 인하여 시달리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러면 동성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동성애를 영어로 '소도마이트'라고 하는데 창세기의 소돔에서 유래된 단어지요.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의 천국이었습니다.
창19:4,5,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글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육체적 관계)하리라."
창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19:13,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레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18:24,25,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신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신약성경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으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며"
롬1:27,28,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1:29,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애도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러면 동성애가 죄인가요? 주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주님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따라 보십니다.
마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이 주님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의 관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마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죄라기보다 죄의 증상이라고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죄의 증상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죄 때문에 사람은 병에 걸리게 되고, 죄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죄 때문에 살인하고, 죄 때문에 결국 죽게 됩니다. 그러면 병에 걸린 사람보고 "야, 너 죄인이야'라고 정죄합니까? 죄의 증상에 매여 시달린다고 감옥에 넣어 격리시키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인권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치료받을 권리가 있고 인격으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도 '미숙아'나 '장애아'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장애인들은 다 죄인으로 정죄받아야 합니까? 죽음에 직면한 말기암환자들은 다 정죄받아야 합니까? 그것들은 모두 죄의 증상이지만 그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을 우리는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최선의 방법으로 치유하도록 도와주며, 그들이 건강한 마음과 몸을 갖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동성애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없는 마음의 공허함 때문에 동성을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은 혼전관계나 혼외관계와 똑 같이 죄의 무서운 증상입니다. 우리는 혼전관계나 외도하는 것들을 강력하게 비난하지만 그러한 것에 묶여서 사는 '현대의 사마리아 여인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복음을 들어서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도록 복음을 전합니다. 죄 때문에 결국 병이 들었지만 정죄하지 않고 입원시켜 치료하듯 우리는 동성애를 비난하고 정죄해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동성애자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치료하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사회에 잘 적응하며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절대로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동성애는 강력하게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오히려 긍휼히 여기며 치유되고 자유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치유되어야 할 사람들(the seak)입니다. 사랑과 관심으로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 감옥에 쳐 넣어서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애인들을 대하는 것과 동성애자들을 대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면서 장애인이 되었는데 그걸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고 도와주며 섬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장애인들이 태어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으로 의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환자를 보호하고 돌보며 부당한 인권침해가 없도록 살피는 것과 환자를 건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당화(justify)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동성애는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질문하신 분께 이렇게 물어보죠.
본인은 이성애자이지만 마음으로 동성애를 옹호하고 지지한다고 하셨는데...
그리고 동성애자들끼리의 결혼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질문하신 분의 딸이 나중에 동성애를 하려고 한다고 하면 지지하겠습니까?
딸이 동성애를 즐기거나 혹은 같은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하면 허락하겠습니까?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0여년 정성스럽게 아들을 키웠더니 어느 날 "아빠, 나 아무게 남자가 사랑스러워, 난 그와 사귀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때도 위와 같이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니 동성애도 지지해야하고 동성애자들의 결혼도 지지되어야져야 한다"는 질문자의 논리를 20년간 키운 딸이 어느 날 "아빠, 나 여자랑 결혼해서 살면 안돼?"라고 간청할 때에도 과연 그렇게 대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질문하신 논리를 가지고 만약에 딸이 어느 날 자신에게 말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런 논리로 대답해주시면서 인정해주시고 격려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네가 같은 여자로서 그러한 느낌을 가진다면 이것 역시 자연스러운거니까 괜찮아" 이렇게 친히 낳아 기른 딸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못하실 것입니다.
저라면...제가 사랑하는 딸에게라면...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나는 딸이 만약 그렇게 하겠다고 우긴다면 허락하여 주겠다"고 하신다면 본성을 눌러버리고 하시는 말일 겁니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겁니다.
그 이유는 본성이 이미 그것을 '비정상적인 관계'임을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양심이 기본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어기는 것임을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그것을 증거하죠....
저는 좀 전까지 동성애를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 사랑의 계명이라는 원리에서 접근했습니다. 이제 다른 원리에서 접근해볼까요?
주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태도와 자신에 대한 태도가 서로 모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이웃사랑의 계명을 동성애에다 적용해보지요...
다른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관대하면서 정작 본인의 딸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면 분명 무엇인가 모순입니다.
자기 딸은 그러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은 그래도 될뿐더러 그것을 지지한다면 이것 역시 이웃사랑에 대한 성경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내 딸에게 대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들을 대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괜찮고 내 딸은 절대 안 되고...이것이야말로 모순입니다.
저는 내 딸이 절대로 안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를 정죄하고 비방하더라도 동성애자를 정죄하고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내 딸이요 내 아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불쌍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동성애를 벗어버릴 수 없는 동성애자들은 역시 내 딸, 내 아들과 같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옹호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그들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한 주님의 시선은 긍휼입니다. 동정과 옹호는 긍휼과 전혀 다릅니다. 그들 역시 복음을 들어야 할 가련한 인생들이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동성애자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성애 자체를 옹호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죄와 죄인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병과 환자를 엄밀히 구별하지 못하면 돌팔이가 됩니다. 병과 증상을 구별할 줄 모르면 의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특히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요...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입니다.
저는 이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는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한 몸을 이룰찌니라'고 하셨다고 믿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놀라운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저는 진정 바로 이것 때문에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는 행위이고,
하나님의 남녀창조 목적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장애우와 같이 태어나면서 동성애적인 호르몬과 기질을 타고났다면 어찌 해야 합니까? 정죄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긍휼히 여기고 인권을 보호하며 인격이 상처받지 않도록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가 그렇게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만드셨는가?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의 결과입니다.
아담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왜 그랬느냐? 고 물으시니까 당황하여 "당신이 내게 주신 이 여자 때문입니다."라고 죄책을 전가합니다. 죄인의 특성은 죄를 회피하고 죄책이 두려워서 죄책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으려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왜 전쟁을 만드셨느냐? 고 한다면 그런 질문 속에 인간의 죄와 죄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으려는 의도,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다분히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부모가 아들에게 야구방망이와 공을 사 주었습니다. 그 아들은 그것을 가지고 놀다가 남의 집 창문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집 주인이 와서 아이를 나무라는데, 그 아이는 두려움과 미안함을 공과 방망이를 사준 부모에게 돌립니다. 이렇게요..."아빠 엄마가 안 사주셨으면 내가 남의 집 유리창을 깨뜨리지 않았을 것 아녜요? 아빠 엄마가 책임지세요."
하나님께서 왜 장애인을 만드셨냐구요? 왜 동성애자로 태어나게 하셨냐구요?
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결코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연약한 그들에 대한 책임을 나눠 가져야 마땅합니다.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다음 성경구절을 보십시오.
전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요컨대, 죄의 본질을 놓쳐버리고 단지 죄의 증상만을 가지고 이것이 죄냐 죄가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본질을 무시할 수 있는 무서운 함정입니다. 우리는 죄의 무서운 세력을 제대로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지 않고,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으면서 죄의 증상만을 가지고 씨름한다면 이것은 병의 원인은 내버려둔 채 단지 병의 증상인 고통만을 가지고 씨름하는 돌팔이 의사와 같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읽어보면서 질문하신 분께 두 가지를 주문하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이성과 논리를 굴복시키십시오. 이성적인 논리와 추론이 성경의 권위를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둘째, 진정 죄가 무엇인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죄의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을 죄인이냐 죄인이 아니냐 논하는 일보다 죄의 참 세력과 싸우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가 질문하신 분이 영적으로 성장하느냐 아니면 영적으로 퇴보하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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