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를 어떻게 보셨어요?
답변: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평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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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를 보고서 / 김광락 목사
영화 배우 멜 깁슨이 유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재 2,500만불을 투자하여 만든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종교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재의 수요일이라고 불리는 지난 2월 25일 전미에 개봉되어서 미국 전역에서 3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으며, 부활절까지 수입예상액이 4억불을 웃돌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춘 이번 영화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큰 호응과 지지를 받았으며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영화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비평이 한번이라도 제대로 내려졌는가에 대해서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맹목적인 수용과 찬사가 가져다주는 어떤 위험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저는 수원 CGV에서 목회자를 대상으로 열린 시사회에 초대를 받아 아내와 함께 무료로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개봉하기 하루 전날에 시사회에 초대받는다는 것이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특권이라 생각하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주의 깊게 보면서 수많은 크리스챤 형제자매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고서 느낀 것을 정리하여 제 나름대로 보고서를 올리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짜로 영화를 본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하겠지요^^
우선 이 영화에 대해서 일반적인 소개들은 따로 하지 않아도 매스컴이나 신문에서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생략하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이 영화가 정말 ‘대단한 작품’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이 영화가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이 영화는 종교영화로서 드물게 ‘대박’을 터뜨림으로써 종교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조차 이 영화를 보면 무엇인가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려하기를 ‘그리스도의 수난’이 상품화되는 것이 아니냐, 상업적인 목적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제가 볼 때 이것은 너무 지나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분명 이 영화는 전도용으로 어느 정도 가치가 있으며,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듯이 상술이 개입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해야 마땅합니다.
둘째, 이 영화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각성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장면이 극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데,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개념으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이 사실적인 신앙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 분명합니다. 저랑 같이 영화를 본 아내가 본 후에 하는 말이 “이제 정신 차리고 바로 살아야겠어요. 주님은 고난을 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염려하고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하고 있으니... 세상적인 것들로 염려하지 말고 주님을 바로 믿어야겠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정말입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믿는 사람들, 지상 교회들로 하여금 세속화를 막아주거나 혹은 세속화에 대해서 경성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분명 큰 영향이 될 것입니다.
셋째,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사순절이나 고난주간 때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영화적 상상력이 주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비디오나 DVD가 나온다면 꼭 사서 소장할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이 영화는 주님의 고난을 상상하는데 분명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계속 이 영화는 장차 교회의 사순절 기간과 고난주간 동안 상영될 것을 생각하면 분명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장하겠지만 이것 때문에 교회가 고난주간 때마다 이 영화를 보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예수영화 중에서 이 영화가 제일 낫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결코 종의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영화 중에서 제일 흥행성적이 좋을 뿐입니다. 어떤 기준에서 '제일 낫다고 볼 수 없는가?'에 대해서는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교리적으로 놓고 볼 때 그렇다고 봅니다.
넷째, 이 영화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참 성공의 공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온갖 반대와 멸시를 무릅쓰고 사재를 다 털어 10여 년 간의 준비 끝에 ‘작품’을 만들어낸 멜 깁슨의 용기와 선택에 새삼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조급하게 성공을 엮어내려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개봉된 것 자체가 큰 도전을 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멜 깁슨은 흥행이나 수익을 계산하고 이 영화를 만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수익이나 흥행을 고려했다면 이 영화를 만들다가 중도에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멜 깁슨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기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결과를 예상하거나 예측하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과 우리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어떤 결과와 성적으로 평가되든 간에 그 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다섯째, 종교적인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관념을 이 영화가 보기 좋게 깨뜨림으로써 앞으로 교회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영화라는 매체를 도외시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만 해도 교회의 대문화적 사명에 대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이제 교회는 영상매체를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대충 이 영화가 끼친, 그리고 끼칠 긍정적인 영향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떨치지 못했던 아쉬운 점들 혹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점들을 제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믿음을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리 위에 건설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첫째,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과도한 포커스였습니다. 다들 알듯이 멜 깁슨은 로마 카톨릭 계열과는 약간 다른 계열의 카톨릭 신자입니다. 어쨌든 카톨릭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마리아에 대한 과도한 집중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멜 깁슨은 내내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모친 마리아의 얼굴을 클로즈업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모친 마리아는 요한과 함께 항상 같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면서 가는 모든 길에 함께 서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분명 멜 깁슨은 마리아의 숭고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자칫 마리아 숭배를 정당화시키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시선이 또한 동시에 모친 마리아에 대한 시선으로 옮겨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연코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의 시선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관람하는 내내 별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것들로 인해 저는 눈물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시신이 내려질 때 막달라 마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모친 마리아의 품안에 안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이 묘사하는 장면과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 의하면 분명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장면을 지켜본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마27:55,56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즉, 막달라 마리아와 모친 마리아만이 아닙니다. 여러 여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은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시체를 만질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시체를 내려서 장사할 때는 모친 마리아와 요한은 없었습니다. 마27:61에,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것을 멀리서 지켜본 후 시신이 내려져서 장사되어지기 전에 요한과 함께 모친 마리아는 그 자리를 떠나가고 다른 여인들만 남아서 끝까지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병행구절로서 막15:40,41,47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만 등장하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또한 처음부터 요한 사도와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항상 함께 동행하는 것도 성경이 말하는 사실과 다릅니다.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핏자국을 닦는다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춘다든지 혹은 예수님의 시신을 안는 장면 등...아무튼 모친 마리아의 숭고함을 사실과 다르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신은 모친 마리아의 품에 안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적인 영화라기보다는 다분히 카톨릭적인 영화였습니다.
둘째, 이 영화를 보면서 멜 깁슨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사단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단은 검은 옷을 입은 교활한 청년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노중에서도 계속 따라다니며 십자가 처형의 장소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반하는 장면에서는 매우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가슴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몇 관람객들은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볼 때 멜 깁슨의 의도는 사단에 대한 과도한 포커싱으로 그리스도의 숭고한 결단을 부각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볼 때 사단에 대한 두려움을 일부러 조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데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정말 리얼하게 묘사한 것은 일품입니다.) 사단이 나타나서 “너는 누구냐?” “네 힘으론 인류의 죄를 짊어질 수 없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실제 성경은 어떻게 이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까? 눅22:43에 보면,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 순간 사단의 등장이 아니라 천사의 등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단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 유발은 극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었지만 사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에 대한 관점을 흐려놓을 수 있다고 보입니다.
셋째, 이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인정합니다만 고난에 대해 묘사하면서 세부적인 점에서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것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마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서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몇 가지 점들을 지적하자면(반복되는 것이 있지만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단이 나타나서 유혹한 점.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2-베드로가 군병의 귀를 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성경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일 수 있지만 대제사장의 종, 그리고 그 이름이 ‘말고’라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군인들 중 한 사람의 귀를 잘랐다는 것과는 분명 의미상 차이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라고 보낸 사람에게 매수된 성전파수병의 귀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잡으라고 보낸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3-예수님께서 끌려가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분명 사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시각을 봅시다. 예수님은 저녁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만찬을 드시는 도중에 가룟유다가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가룟유다는 이 만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가룟 유다가 이 만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시 확인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만찬을 다 마친 다음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시면서 상당히 길게 설교를 하셨습니다.(요13:31-17:26절) 그런 다음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 편으로 나가셔서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신 것으로 성경은 말합니다.(요18:1,2) 이곳에서 얼마 동안 기도하셨을까요?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비교적 상세하게 때를 묘사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시면서 동일한 말씀으로 세 번씩 기도하셨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3시간 가까이 될 정도로 길게 기도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끝내시자마자 잡히셨는데(마26:47) 잡히신 시각을 추정해보면 자정을 훨씬 넘긴 때로 보입니다. 이 때는 모든 사람이 잠든 때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어린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고, 동네 사람들이 많이 길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재판에 참석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심지어 재판정에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지켜보고 있다고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재판정에는 일반 주민들이나 심지어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가 참석한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마26:57에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상황을 추론해보면 유대인 지도자들은 일반 주민들이 요동하지 않도록 매우 신속하고도 은밀하게 재판을 일사천리로 처리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재판이 시작된 시각이나 장소나 재판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분명 있습니다.
4-그리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긴 시각이 영화상에는 밝은 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하는데 성경에는 새벽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27: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니.” 즉, 백성의 지도자들은 군중들이 소동하지 못하게끔 일사천리로 은밀하게 강행한 것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온 많은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기 전에 사건을 종결지으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예수님의 서신 재판정에 너무 많은 유대주민들이 등장해서 소란을 피우더군요. 법정에서 매를 맞으실 받으실 때 조롱하고 비웃은 많은 유대인무리들,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욕하는 유대인들, 이러한 장면들이 과연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반유대주의적 색체가 전혀 없다고 볼수는 없다고 봅니다. 유대인들 중에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 일부, 그리고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사주받은 하속들과 소수의 패거리들이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외쳤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유대인들 전체에 대한 어떤 편견이 전혀 배제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멜 깁슨이 그것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복음서를 자세히 주석해볼 때 영화는 분명 유대인에 대한 주관적인 편견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5-빌라도가 손을 씻는 장면이 영화상에는 그리스도가 매를 맞은 후라고 나옵니다만 실제 성경에는 빌라도가 손을 씻은 다음 총독의 군병들이 채찍질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멜 깁슨은 빌라도가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만, 성경은 빌라도의 인간적인 고뇌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빌라도는 아무 느낌도 없이 냉정하게 이 일을 단순 처리한 것으로 보아야 정확할 것입니다. 인간 빌라도에 대한 포커싱은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영화적 장치이지 사실과 다릅니다.
6-그리스도가 채찍질을 당할 때 막달라 마리아와 모친 마리아가 지켜보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를 수건으로 닦아내는 장면은 분명 성경에서 말하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것은 분명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카톨릭적입니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보시면 의외로 카톨릭적인 시각이 곳곳에서 보일 것입니다.
7-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해 영화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으로 영화는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란 여인은 일곱 귀신에 들려 고생하다가 예수님께 치유 받은 여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이라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편견입니다.
8-예수님의 부활 장면에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은 해가 한참 뜬 아침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실제 부활이 일어난 시각은 해가 뜨기 훨씬 이전이었으며, 돌이 옮겨지고 나서 예수님이 벌거벗은 몸차림으로 걸어 나가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성경은 돌이 옮겨지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이 먼저 있었다는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볼 때 느끼는 것은 돌이 옮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빠져나가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 향유를 바르기 위해 오는 자들에게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9-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이 어수선하게 처리되어 있는데 성경에는 매우 차분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영화상에는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 있다가 얼떨결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영화에는 다른 제자인 요한은 언제나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성경은 다릅니다.)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 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18:15-18)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경황이 없는 중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많은 중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또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세 번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번역문제일 수도) 그러나 성경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막14:30절)
10-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을 묘사할 때 항상 모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특히 모친 마리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는 것은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고백하는 말 중에 “내 몸에서 나온 아들, 내 영에서 나온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말도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지도 않았는데 요한 사도가 모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여러 번 부르는데 이것 역시 카톨릭적입니다.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칼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분명 느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영화는 과도하게 마리아에게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두 여인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마리아가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인 양 묘사하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모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완전히 제외되고 있는 것으로 성경은 그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카톨릭은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을 낳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요. 마리아의 ‘성모’이미지에 금이 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영화에서도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마리아의 품에 안겨진 장면은 전혀 성경적이 않으며 오히려 카톨릭의 어떤 벽화를 연상케 하더군요. 이런 카톨릭적 묘사에 대해서 너무 과민하다고 저를 비판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이 영화를 봤더라면 손수건을 가지고 눈물을 훔치면서 관람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불쾌하게 영화를 관람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분들은 영화를 보지 않아도 성경을 보면서 충분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다가 오히려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은 평소 성경을 읽을 때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고 밋밋하게 보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는 증거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화만큼 감동을 받지 못하는걸까요?
11-십자가를 구레네 시몬과 예수님이 함께 짊어지고 가는 것으로 영화는 그리고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사실은 이렇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눅23:26절) 예수님이 앞서 가시고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 것입니다.
12-또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겟세마네에서 시신이 내려지는 때까지를 12시간으로 정하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시간을 적어도 저녁 9시라고 잡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신 시간은 20시간으로 보아야 정확하다고 봅니다.
13-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의 수난에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왜 다른 많은 여인들은 빼놓습니까? 그리고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할 대 입고 있는 옷은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마치 수녀의 복장을 연상케 합니다.
14-영화에는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백부장이 놀라서 도망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성경에는 이 순간 “이는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 최초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은 백부장의 고백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시신을 가슴에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장면-그리스도의 임종의 순간-을 설교할 때 영화적으로 묘사할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적으로 묘사할 것입니까? 백부장의 고백을 빼버리고 그 자리에 마리아를 놓은 것에 대해서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성경이 세밀하고도 상세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칫 그 시네마적 리엘러티에 압도당한 나머지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볼 때에는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홍보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실과는 상당부분 동떨어져 있다고 보입니다. 개신교 지도자들조차도 이 영화를 보고서 이 영화를 ‘성경적’이라고 추켜세우는데 저는 그러한 평가에 대해서 실망스럽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극히 일부분(한두 가지 장면정도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성경적’으로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이 영화는 다분히 ‘카톨릭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제가 볼 때 그리스도가 매 맞는 장면에 대해 대충 그리고 만 ‘벤허’라는 영화가 멜 깁슨이 만든 이 영화보다 덜 ‘카톨릭적’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성경적’에 가깝다고 봅니다. 과연 어느 장면이 과연 ‘사실적’이며 또한 ‘성경적’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은 채 단지 리얼한 구타장면만 가지고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 우습지 않습니까?
자, 이 영화를 보는 많은 분들이 "아,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엇이 '사실'입니까? 저는 오히려 성경에 비추어볼 때 전혀 사실과 다른 묘사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단지 '리얼하게' 채찍에 맞는 모습, 고통에 못이겨 얼굴이 일그러지고, 온 몸이 채찍자국으로 가득 찬 묘사가 '사실적'입니까? 단지 몇몇 장면에서 리얼하게 묘사했다고 해서 사실을 다룬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더 많은 부분들 때문에 저는 이 영화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은 영화라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분명히 이 영화는 일견의 가치는 있다고 하겠으나 이것이 단지 영화일 뿐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설교하는 데 있어 주된 위치를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나 연출 감각이나 주제의식, 카메라 앵글, 영상과 음향의 감각적 조화, 영화적 상상력 등의 가치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 이상의 가치를 두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영화보다 성경이 더욱더 사실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와 세상에서 양 다리를 걸치면서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보면서 묵상할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는 그런 사람들, 성경을 보는 것보다는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일견을 추천합니다. 주께서 이런 영화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불신자나 초신자들이나 낙심이나 시험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생각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입니다. 그들의 입과 마음에서 한번이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떠올리도록 만든다면 이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할 줄 아는 사람들에는 그냥 일견(一見) 그 이상의 가치를 두지 마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는 단지 영화일 뿐입니다.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사실,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사실은 아닙니다. 전도용으로 활용할 수는 있어도 양육용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려되는 것은 교회가 이 영화를 양육적 차원에서 의존할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영화는 다분히 카톨릭적 신앙고백이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가 앞으로 이 영화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을묵상하는데 이용할까 두렵습니다.
이 영화는 묵상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감상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일에 성경이 아닌 영화에 의존하는 것은 유치한 단계의 신앙수준입니다. 제가 볼 때 이 영화는 단지 영화로서 감상해야지 영화 이상의 묵상적 교리적 성경적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이 영화를 보신다면 루터와 칼빈의 심장과 눈으로 "감상"해보시라고 권하고 싶군요. 그리스도의 수난은 성경을 보면서 제대로 "묵상"하시고요.^^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부족하지만 영화를 감상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4년 4월 1일 고난주간을 앞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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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로,
The passion of the Christ 책 서평을 올립니다.
제가 대표로 섬기는 에클레시아 선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여기서도 올리고자 합니다. 이 영화를 성경적으로 감상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고난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묵상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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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The Passion of Christ(앤 캐서린 에머리히 저)에 대한 서평 / 김광락 목사
제가 요즘 ‘더 패션’이란 영화에 대해 열을 내는 이유는 이 영화에 대해 열광하는 교회의 반응을 보면서 ‘개신교의 정체성 위기’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서 미국과 한국의 저명한 개신교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성경에 충실한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좀 더 '연구'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변찮은 서평을 영화와 관련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올린 글에는 영화자체를 보면서 제가 제기한 문제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과 “사실을 다룬 작품”의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제가 볼 때 그리스도의 수난을 사실적으로 다루었다기보다 몇 가지 장면에서 ‘영화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란 것입니다. 즉, 이 영화는 사실적인 영화가 아니고 성경적인 영화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성경적인 영화가 아니라 카톨릭적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주장에 대해서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주관과 관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영화는 영화감독의 주관과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람객이 어떤 주관과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든 그것은 관객의 몫이므로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냥 영화를 영화로 감상하는 것이면 좋습니다. 그러나 감독의 주관과 관점을 무비평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관객의 주관과 관점에도 상당히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관객의 몫으로 일임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특히 개혁적인 관점을 제시함으로서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멜 깁슨이 어떤 주관과 관점을 이 영화를 찍었는지 바로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이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에클레시안들, 혹은 급진복음주의, 성경으로 모든 것을 개혁한다는 개혁주의자들에 국한시키고 싶습니다.) 어떻게 비평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우리의 기준과 관점을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멜 깁슨이 어떤 관점으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원작으로 삼았던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모든 영화가 원작이나 시나리오가 있지요. 그런 점에서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작자나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를 만든다고 보아야 합니다. 감독의 역할은 원작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는데 골몰하니까요.
최근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미국 역대 영화사상 6위에 해당하는 공전의 흥행을 기록하자 이 부분에 대해서 덩달아 읽혀지는 책들이 있습니다.
1.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 (존 파이퍼, 알리스터 맥그라스), 규장, (16,000원)
루터란 시각에서 십자가 사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낯선 시각이 아닙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반유대주의적 시각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는 것이 돋보입니다.
2.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리 스트로벨, 개리 폴), 두란노, (3,000원)
새들백 교회에서 구도자 사역을 하고 있는 리 스트로벨은 [예수 사건]이란 책으로 유명한데, 그는 멜 깁슨이 초청한 영화시사회에서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고, 성도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해설서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작은 책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련된 6가지 이유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자세히 읽어보지 못했으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습니다.
3.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앤 캐서린, 에머리히), 집사재 출판 (11,500원)
이 자리에서 제가 비평하고 싶은 책은 이것인데, 이 책은 멜 깁슨의 영화가 개봉된 이후 무려 160만부가 팔린 책입니다. 영화의 배경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이 책이 어느 날 멜 깁슨의 다락방에서 자신의 집 선반에 떨어졌고, 이 책을 집어든 멜 깁슨은 이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이 책을 영화화 하기로 결심했고, 10년을 준비한 끝에 최근의 영화가 개봉된 것입니다. 다라서 영화의 원작인 것이기에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책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앤 캐서린 에머리히는 아우구스티노 수녀외 소속의 독일인 수녀로서 1774년에서 1820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독일 북부 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하녀로 일하다가 28세에 수녀원에 들어갑니다. 수녀가 되었지만 건강 악화로 병상에 계속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는 ‘성흔’이 생겼고, 자주 예수의 삶과 고난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시인이었던 클레멘스 마리아 브렌타노가 그녀가 본 환상을 듣고 기록하였고, 그녀가 죽고 난 후 3권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성모 마리아의 삶’ 그리고‘그리스도의 삶’입니다. 멜 깁슨이 원작으로 삼은 책은 첫 번째의 책입니다. 나중에 카톨릭 교회는 에머리히에게 성인 반열에 오르는 고급단계의 칭호인 ‘가경자’란 칭호를 수여했다고 합니다.
멜 깁슨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참고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사서 읽어보고 있는데, 이 책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이 책은 카톨릭 수녀가 병상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환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병상에서 에머리히가 자신이 본 환상을 진술하고 있고 당대 뛰어난 작가가 그것을 받아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이것입니다. [앤 캐서린 에머리히의 묵상 기록] 즉 성경이 아닙니다. 머리말에서도 이 책은 한 수녀가 묵상한 내용이며, “그녀의 묵상을 통하여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을 역사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멜 깁슨의 영화는 성경에 기초한 영화가 아니라 한 수녀가 본 환상에 기초한 영화라는 것입니다. 멜 깁슨은 전혀 성경을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책만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같은 분들, 시사회에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은 몇몇 한국교회 이름난 목사님들을 압니다-- 이 영화를 ‘성경에 충실한 영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이 아니라 환상에 충실한 영화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책을 한번 읽어 보고나서 그 다음 영화를 한번 보시지요. 멜 깁슨의 영화는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는 이 책에 충실하게 그려내었지 결코 성경에 따라 그리지 않았습니다.
둘째, 이 책은 독실한 카톨릭 수녀가 자신이 본 환상을 진술한 것을 책으로 만든 것인데 이 책의 맨 처음에 기록된 헌사에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군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하늘과 땅의 여왕이시며, 매괴의 성모이시며, 기독교인에게 도움을 주시는 성모이시여, 죄인의 피난처이시며,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께 이 책을 바칩니다.”
즉, 이 책의 의도는--이것은 멜 깁슨의 의도이기도 하겠지요--고난 받으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훌륭하게 감내해낸 ‘성모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볼 때에 이 영화는 멜 깁슨 감독이 그러한 관점과 의도에서 연출했다는 점을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영화를 한번 보시면 아시듯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의 시선,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시선에서 보게끔 유도합니다. 영화의 초반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격정의 휩싸여 기도하실 때 역시 마리아도 괴로움에 잠을 못 이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지요. 그런데 제가 보는 이 책에 영화의 그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군요. 제가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너무 과민했나 싶었는데, 이 책을 사서 읽어보고 있으면서 확실히 카톨릭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수난이 어떤 것인지 조금 이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 누구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영광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책과 멜 깁슨의 영화는 그분을 잉태하고 기른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셋째, 이 책은 카톨릭적 명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묵시적 묘사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이를 테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단이 나타나서 온갖 환상과 위협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공포분위기 조성은 카톨릭적 명상의 특징인데, 이 책에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예수님을 위협하고 비난하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는 고통의 성배를 마지막까지 다 비우심으로써 사탄이 예수의 숭고한 인간애를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사탄은 예수를 비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나사로에게서 받으셨던 막달라 마리아의 재산을 막달라에서 탕진한 일을 두고 예수를 질책하였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뇌와 고통의 무게에 짓눌린 한 마리 애처로운 벌레처럼 온 몸으로 괴로워하셨다. 사탄이 예수께 비난을 퍼붓고 있는 동안 나는 간신히 화를 참고 있었는데, 사탄이 막달라 마리아의 재산을 예수께서 팔아넘겼다는 말을 하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가 어찌 예수께서 그 재산을 파신 일을 범죄라고 말하며 예수를 비난할 수 있느냐? 은혜로운 일에 써달라며 나사로가 예수께 드린 돈을 예수께서 디르자에 감금되어 있던 스물여덟 명의 빚진 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을 나는 분명하게 보아서 알고 있다!”] (70,71쪽)
사단이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비난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성경에서 과연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단이 그리스도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도무지 성경에서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노려보고 비웃는 사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장면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라 분명 카톨릭적이지요. 저는 이 영화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카톨릭적 묵상이 교회 안에 들어올까 우려됩니다.
넷째, 이 책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18세기 독일인 수녀입니다. 독일에서 나찌즘이 발생한 것은 다 아시지요? 이 책에서는 예수님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간계와 조롱이 매우 경멸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반유대주의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성경책보다 유대인을 더욱 교활하고 악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에 대해서만 나쁘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 드리고 두려움 없이 공공연하게 그분의 가르침을 수상해왔으며 예수님의 성스러운 임무에 의심을 품지 않았던 성녀에 대해서도 악담을 해댔다....나는 증오와 광포한 감정이 예루살렘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불꽃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 불꽃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다른 불꽃들과 합쳐지면서 시온 방향으로 나아갔다. 크기는 매순간 점점 저 커져서 가야바의 법정 앞에 멈춰 서 머물렀을 때는 완전히 거대한 불꽃의 소용돌이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로마 병사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보초를 늘리고 보병대를 정렬시킨 후 엄중하게 경계태세를 취했다] (121,122쪽)
멜 깁슨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의식한 것은 분명 아니지만 멜 깁슨이 영화의 원작으로 삼고 영화를 찍은 것은 성경책이 아닌 이 환상책이며, 이 책에서는 분명 유대인들의 분노와 증오심을 과장하고 있으며, 이것은 영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영화나 이 책에서나 마찬가지로 잔인한 유대인과 성녀의 모습에 대해서 대조적인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잔인한 유대인들의 독기어린 말과 득의양양해하는 태도에 성녀들의 마음은 심하게 상처 입었으며, 그들 귀에 친절하거나 동정심이 담긴 말이 들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123쪽)
[안나스의 집은 가야바의 집에서 300걸음이 좀 못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길은 사람들이 들고 있는 횃불과 등 때문에 환하게 밝았고, 흥분하고 성난 수많은 유대인들이 서 있었다. 군인들은 군중 때문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안나스의 법정에서 예수께 너무나도 부끄러운 짓을 했던 자들이 예수께서 가야바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동안 내내 그분에게 모욕을 가하고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130쪽)
이 외에도 제가 일고 있는 에머리히의 책에는 유대인들과 제사장들을 포악하고 간악하며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는 동안 “그 사람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올 것이오.”라는 유대인들의 소름끼치는 외침을 듣고 있다고 상상할 때면, 언제나 그 저주의 결과가 내 눈 앞에 기묘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나는 피색깔로 물든 구름에 덮인 어두운 하늘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마음에 그려본다. 하늘에서는 불타는 검과 화살이 쏟아져서 고함치는 군중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불러들인 저주는 그들의 골수까지, 아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들의 자손에게까지 파고드는 것처럼 보인다....](233쪽)
자, 멜 깁슨의 영화는 과연 성경이 묘사하는 법정장면과 일치하는가? 물론 감독의 주관과 관점으로 독창적으로 성경을 영화화했다고 하겠지만, 제가 볼 때는 멜 깁슨은 에머리히의 환상책의 내용을 충실하게--성경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기보다는--영화화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이 책에서는 ‘성녀’의 숭고한 모습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와 영혼의 교감으로 서로 결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성모께서는 그로 인해 괴로워하셨으며, 예수가 살인자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할 때 함께 하셨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머니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죄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또한 아들인 예수가 끔찍한 고문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혼신을 다해 기도했다...](150쪽)
이 책에서는 제자들이 마리아를 향해 이야기할 때마다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카톨릭적 신앙고백인데 이것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옵니다. 이 책에서도 영화와 같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끌려가시는 곳마다 항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시고나서 영화를 평가하시지요?
[...성모 마리아께서는 자주 무릎을 굻으시고 예수께서 쓰러지신 땅에 입을 맞추셨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깊은 슬픔에 젖어 두 손을 꽉 쥐고 괴로워하였다. 요한 역시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지만, 간신히 힘을 내어 두 여인을 위로하며, 계속애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에 대한 최초의 신성한 헌신이며, 수난이 완성되기도 전에 예수께서 겪으신 수난의 신비에 대해 최초로 경배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무결한 순수의 표상인 성모 마리아께서는 바로 예수에 대한 교회의 깊은 숭배를 최초로 나타내신 분이셨다. 이처럼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눈물로 종교적인 오점을 적시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고 위안이 되는 일이다....이처럼 감동적인 방법으로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는 헌신의 반석을 세우시고 예수의 고통으로 표시된 각 지점마다 그리스도 수난의 무한한 공로를 마음속에 쌓아서 이를 값진 돌과 달콤한 향이 나는 꽃으로 모아 모든 참된 신자들을 대신하여 영원하신 하나님께 선택의 제물로 바치셨다...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귀한 향을 발라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그녀는 예수께서 배신을 당하시고 고통을 겪으시며 그녀가 지은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시리라는 것을 보았다...요한은 그가 깊이 사랑했던 선생인 예수의 어머니를 부축하여, 그녀가 십자가 길의 각 지점을 따라 최초의 성지순례를 하시도록 도왔고, 예수의 수난 이래로 기독교 교회 신자들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헌신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을 보조하였다.](184,185쪽)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 책의 25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영화에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핏자국을 수건으로 닦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책의 25장에 자세히 묘사하고 있네요.
제가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 여긴 장면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졌는데 어떤 여인이 우아한 모습으로 포도주잔을 들고 예수님께 나와서 마시게 하려고 했다가 로마군병에 의해서 잔이 깨어져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그 여인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운반하기 시작한 지점으로부터 200발자국 정도 전진했을 때 길 왼쪽 편에 있는 아름다운 집의 문이 열리더니 위엄 있는 풍재를 지닌 어떤 여인이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리고 행렬의 맨 선두로 걸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세라피아였는데, 화가 나 있는 예수의 적들과 대담하게 맞선 용감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성전에 속한 의회원 중의 한명인 사람의 부인이었다. 이날 세라피아가 행한 용감한 행적을 기녀하기 위해 ‘vera icon’(참된 모습이란 뜻)이라는 라틴어에서 나와서 훗날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세라피아는 향기나는 훌륭한 포도주를 준비했다. 이 포도주는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고난의 길에서 예수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경건히 바치려고 준비한 것이었다...그녀는 용감하게 군중과 군인과 궁수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 앞에서 무릎 꿇고 베일을 건네주며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얼굴을 닦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왼손으로 베일을 받아 피 흘리는 얼굴을 닦으신 후 감사하게 여기시며 다시 돌려주었다. 세라피아는 베일에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옷 아래 그 베일을 두었다. 그때 소녀가 두려워하며 포도주를 내밀었으나 잔인한 군인들은 예수께서 그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257,258쪽) 카톨릭에서는 세라피아, 즉 베로니카는 세례요한의 사촌이라고 합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피가 묻은 이 베일을 죽을 때까지 간직했으며 나중에 그것은 성모 마리아에게 넘겨졌으며, 성모 마리아는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이 베일을 교회에 넘겨주었다고 합니다.(259쪽)
여섯째, 이 책에서 묘사하는 여러 장면, 이를 테면 유다의 배신, 자살, 베드로의 부인하는 장면, 빌라도의 인간적 고뇌, 등은 세세히 묘사하면서 당시 상황을 잘 연상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것인가 생각할 때 지나친 상상이라고 보입니다. ‘지나친 상상력’ 이것은 환상문학의 특징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세세한 묘사를 두고 ‘성경에 충실한 영화’라고 개신교 지도자들이 평가를 내린다면 참으로 어이없기 그지없습니다. 사실은즉슨 멜 깁슨은 독창성을 발휘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원작에 충실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찾아보지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성전의 초박살나는 것을 보는데 저는 영화를 볼 때 좀 과장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요. 왜냐면 성경에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만 했지 성전이 깨어져 박살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책을 보니까 영화적 장면이 그대로 있네요.
[이때 성전의 모습은 사람들이 돌을 던진 개미집과 같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누군가 막대기를 개미집의 중심부에 넣고 쑤셔 대어 개미집 안에 일대 혼란을 야기시킨 것과 같은 상태였다. 돌이 떨어지거나 또는 막대기로 들쑤셔진 지점에 있던 개미들은 혼돈과 공포에 빠져 이리저리 헤매고 달아나려 애를 쓰지만 침입을 받지 않은 위치에 있던 개미들은 조용히 노동을 계속하면서 손상된 부분을 수선하려 하는 것이다....지성소의 입구에는 기둥이 두개 서 있고 거기에는 휘장이 장엄한 모양새로 드리워져 있었다. 토대가 흔들려서 왼쪽에 있는 기둥이 남쪽으로 쓰러지고 오른쪽 기둥이 북쪽으로 쓰러지자 ...지성소 입구에 있는 벽에서 거대한 돌들이 느슨하게 빠져나와...떨어졌고 아치문이 부서져버렸다. 당이 솟아오르면서 성전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여러 개의 기둥이 쓰러졌다.](307,308쪽) 책에서 묘사하는 대로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 예수님의 죽음이나 시신이 내려지는 장면, 기타 등등 이 책에서 묘사하는 장면에 충실하게 영화는 재현해내고 있더군요.
자, 정리해볼까요?
제가 이 책을 보면서 확신한 것은 멜 깁슨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성경책"을 원작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18세기 말 독일의 아우구스투스 수녀원의 병상에 누워있던 에머리히 수녀가 본 "환상책"을 원작으로 삼고, 이 원작에 충실하게 화면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은 18세기말 독일 카톨릭의 전형적인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멜 깁슨 감독을 카톨릭 근본주의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멜 깁슨 자신은 현재 로마 카톨릭을 자유주의적 카톨릭으로 비판하고 있지요.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틀이 지난 오늘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제공한 이 책을 읽어가면서 비로소 영화가 어떤 관점에서 만들어졌는지 훤히 이해가 되더군요.
여기서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말을 인용해보면...
[이 영화는...선과 악의 극한 대립을 통해서만 관객을 주인공의 심리에 극적으로 감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할리우드의 오래된 믿음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예수의 수난을 축으로 악인으로 묘사된 유대인과 로마 군인들의 면면이 지독하게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임을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선악의 대립적 도식 위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의 몸을 더 한층 걸레처럼 망가트리기 위해 온갖 업그레이드된 폭력묘사를 마다하지 않는 이 영화의 감독 멜 깁슨은 우리의 가련한 육신을 저버리는 것을 통해 영적인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완고한 근본주의적 신념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이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객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붙이는 이 영화의 "마력"은 사실상 선과 악의 극단적 대립 속에서 피가 난무하는 과도한 폭력미학과 거기에 전혀 대조적으로 시종일관 차분하게 관조하는 이른 바 "성녀"들의 눈물어린 시선을 서로 대조하는 능력, 선악 이원론 구조 속에서 음향과 영상의 강렬한 임팩트로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 연출력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임팩트가 너무 강한 나머지 우리는 절제된 감동이 아닌 강요된 감동에 포로가 되어서 정말 정신차리고 보아야 할 부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구속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절제되지 못한 폭력과 모성애와 여성적인 섬세함에 호소함으로써 인간의 감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눈물을 쏟아내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것...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할리우드식 장치와 선악 이원론적 구도 속에서 우리가 받는 감동과 눈물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이 진정 성령이 주는 감동일까요? 파이퍼 목사가 말한 대로 "오감에 일방적인 폭격을 가하는 이 영화"가 진정 그리스도께서 친히 받으신 수난의 거룩한 목적을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까요? 이 책과 영화에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늘 아버지의 영광"보다는 아들이 겪는 고통을 보면서 견뎌야 했던 "마리아"와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읽어가면서 참으로 혼란함과 답답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의 핵심은 계시의 권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과연 한 수녀가 본 환상의 내용을 성경의 권위처럼 받아들어야 옳은가? 수녀가 본 환상을 기초로 영화를 충실하게 만들었는데 우리가 “아, 멜 깁슨은 참으로 성경을 독창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잘 그려냈구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볼 때 멜 깁슨은 독창적으로 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것이 아니라, 캐서린 에머리히라는 한 수녀가 남긴 환상책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충실하게 그린 영화라는 것입니다.(책에서는 에머리히 수녀가 1823년 2월 18일부터 4월 6일까지 본 환상의 내용이라고 밝히고 있다. 398쪽) 즉, 멜 깁슨은 독창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영화를 만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멜 깁슨의 영화는 18세기 말 한 독일인 수녀의 환상책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긴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성경책에 충실한 것, 혹은 성경을 감독의 주관과 관점으로 독창적으로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카톨릭적인, 그것도 단지 환상책에 충실한 것입니다. 결코 성경책을 근거로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멜 깁슨의 감독적 의도와 관점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시 보면 더욱 더 잘 관람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감독의 독창적 재능을 운운하면서 영화에 감탄을 연발하는 일보다는 영화는 영화로서 보는 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멜 깁슨! 그는 전혀 독창적인 감독은 아닙니다. 다만 원작을 ‘하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10년간 고집스럽게 준비해온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개신교의 정체성 위기에 와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개신교의 열렬한 환호와 찬미를 보십시오. 에클레시안 여러분, 그리스도의 수난을 카톨릭적 방법으로 묵상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은 프로테스탄트입니까? 여러분은 개혁자들의 자랑스런 후예들입니까? 진정 개혁주의자들입니까? 누군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성경적으로 묵상하며 개혁주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성경이 말하는 대로 힘써야 할 일이 우리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환상책을 가지고 공포와 슬픔을 극적으로 다루는 묵시적 장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기보다 성경책을 가지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기독교 포털 사이트에는 이 영화에 대한 홍보 도우미 '서포터스'가 결성되어서 수천 명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서 "이 영화는 정말 성경에 충실하게 묘사한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글쎄요... 그들의 반응을 문제 삼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저를 비롯한 우리 동역자들의 반응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오직 성경! 을 외치면서 개혁자의 후배들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멜 깁슨의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서는 아무런 감동을 못 받고 성경이 아닌 환상을 기초로 만든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부족한 서평이지만 여러분들의 개혁주의적 관람과 감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오늘은 고난주간 금요일로서 교회마다 기도모임을 가질 것입니다.
저희 교회도 사순절 기도회와 함께 이번주간에는 3일간 십자가 사경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번 사경회의 주제는 가상칠언입니다. 오늘 저녁은 특히 성찬식을 가질 예정입니다.
제가 영화에 대해서 비평을 했으니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묵상하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비판의 정신만 남으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영화가 묘사하는 바와 달리 성경이 말하는 것을 대충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은 예수님의 최후 12시간이 아니라 그분의 오심과 생애 전체가 고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12시간만 고난인 것처럼 묘사하는 듯합니다.(예수 역의 카비젤이 식탁을 만들 때 보여준 태도를 보십시오.) 좁은 의미의 고난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 가시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속죄일(욤 키푸르)에 시행되는 아사셀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담당하고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며, 그러한 사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의식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사명의식이 최고로 드러난 순간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가 분명하게 선포됩니다. 그러데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매우 약합니다.
(2) 성경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영화와 같이 ‘리얼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최대한 절제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의 3분의 1이 넘을 정도로 고난주간 때 일어난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매우 자세한 진술을 하면서도 예수님이 겪으셨을 인간적 고통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한 묘사를 일부러 꺼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 의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분명 그 까닭은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느끼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들보다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재판장이나 빌라도 법정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매우 당당하며 위엄이 넘칩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진정한 의도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폭력에 대한 절제가 전혀 없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영광과 위엄의 구주라기보다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겨우 말씀하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아무런 느낌이 없군요. 그리고 말 그대로 사람잡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묘사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같은 위엄으로서 당당하게 고난을 “선택하신 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영화는 예수님의 수난을 ‘수동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능동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연약한 몸"으로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으로 당당하게 "선택하신 것"입니다. 영화적 묘사와 성경적 묘사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님의 영광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3) 성경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을 자기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대속적 희생제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제사의식은 매우 거룩하고 장엄하게 진행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그렇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멜 깁슨의 영화는 무지막지한 폭력에 대한 연민의 정, 그리고 무저항주의의 고상한 정신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사의 거룩한 의미는 사라지고, 오직 제물을 잡는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합니다. 예수님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복음서의 진정한 의도를 놓치게 만듭니다. 이 영화를 보고 찬사를 던지는 많은 목사님들이 폭력이 난무한 시대에 화해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라고 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불신자들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멜 깁슨의 연출 의도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과 눈물’이 일시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자신의 죄를 정직히 들여다보는,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대해서 바라보는 계기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복음서의 묘사를 살펴보아도 폭력과 인간화해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다고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대속적 희생제사이므로 성경은 매우 장엄하게 당당하고 거룩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독자의 감성을 건드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절제"한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에 대한 과장된 묘사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끔찍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성경은 “거룩하고 장엄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매조키즘적’ 관점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장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거룩한 제사의식이며 따라서 매우 영광스럽고 엄숙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거룩한 의식이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는 이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 사건의 엄숙함과 장엄함,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영광과 거룩-그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바로 묵상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참고로, 존 머레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분을목격하고 영원토록 그치지 아니할 찬양과 영광을 그에게 돌릴 것이다.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시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잔을 마신 분이시다. 그 잔은 재앙의 잔이요 형용할 수 없는 고뇌의 잔이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기가 두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말이다. 저주받은 나무에서 부르짖은 절규는 다름 아니라 죄의 대가로 버림받은 것(유기)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은 천사장이나 위대한 성도들이라도 재현할 수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다. 가장 거룩한 사람과 가장 강력한 천사라도 이 고난을 약간만 흉내 낸다면 박살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인간적으로 고통을 겨우 견디시며 몸부림치는 육체를 바라보면서 매조키즘적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장엄하며 또한 당당하게 이 고난의 잔을 드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적 감동의 연민의 눈물을 흘리도록 의도적으로 연출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에서도 기뻐하며 당당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려주고 있는 바 그리스도의 수난은 모든 폭력에 대한 무저항정신의 숭고함을 가려주기보다는 모든 종류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당당해지도록 만들어준다고 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이 당하시는 처참하고 리얼한 고문장면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한 연민이나 혹은 보여주신 인내와 용기 때문에 ‘감동’을 받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보여주신 장엄하고 거룩하심과 견고한 사명의식 때문에 ‘감동’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완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냅니다. 이때 엿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식--그것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는 없을지 몰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 당당하게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 삶을 살도록 충분한 능력을 줄 것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고난의 잔을 홀로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도 역시 그것이 아닐까요?
soli deo gloria!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신천지 예수교란?
질문:
목사님 안녕하셨습니까?
목사님께서 고등부에 글 남겨주신 후 가끔 들러 사진으로도 뵙고 글도 읽고 있습니다.
건강히 잘 지내시는 것 같아 기쁜 마음입니다.
사모님과 자녀분들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글을 올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가까운 분이 '신천지예수교'라는 곳의 교회에 출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 뿐 아니라 일주일에 5일씩 하고 있는 성경공부에도 약2년간 열심으로 다니고 계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몇 텀을 수료하시고 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경공부를 권하고 계시는데 제가 알기로는 이곳이 '이단'으로 판명이 난 것으로 알 고 있는데요..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마음에 혼란스러움과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는 사람으로 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또 실제적으로 취해야 할 행동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많습니다만...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몸은 멀리 떨어져있지만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샬롬!
자매님, 참 반갑습니다. 섬기는 일은 항상 평안하신지요?
늘 기억해주시고 기도해주시는 것 무어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질문을 읽고 나니 제 마음도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이단에 속한 모임에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것입니다.
제가 자매님이 염려하는 그분을 저도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신천지 예수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천지교회는 신천지예수교라는 종교단체의 교단 명칭이며, 예장통합과 예장고신에서 이단으로 분류됐다. 신천지교회에서 개설한 시온기독교신학원은 과거 '기독교무료신학원'에서 명칭이 바뀐 것이며 이희재 씨가 설립자로 되어 있다. 이희재 씨는 과거 이만희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왔다. 현재까지는 '시온기독교신학원' '무료성경신학원' '평신도성경교육원' 등의 명칭을 사용하며 신학교육기관처럼 행세했으나, 최근에는 '대한예수교교역자선교협의회' '세계교역자연합선교회' '세계복음화선교협의회' 등의 선교단체 이름으로 활동중이다.] (국제기독신문, 2003.6.17자)
쉽게 말하면 '무료성경신학원' 혹은 '무료기독교신학원'을 설립하여 기성교인들을 향해 "함께 성경공부하자"고 유인하여 그들의 교리를 가르치는 집단입니다.
그들은 우선 기성교회를 강하게 '이단'으로 비판하면서 자기(이만희)가 유일한 말씀의 소유자이며, 그들만이 구원이 있으며, 그들 모임 안에서 예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발언은 서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 5월달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부산 수영로 교회에서 불법시위하다가 예배당 안까지 침입하여 예배를 방해한 사건이 있었지요. 신천지교단이 그 주범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의 특징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화적인(allegorical) 방법으로 해석하면서 성경을 임의대로 해석하고 가르치면서 사도들이 전주하여 준 정통신앙고백을 부정합니다.
또한 그들의 모임은 매우 비밀스러운 것으로 일정 단계에 이른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모임에 미혹된 자를 돌아서게 하는 방법은 인간적으로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보여지는 것은...
1. 지혜와 계시의 영이 그의 눈을 밝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지성을 도와주지 않으시면 우리 지성은 항상 편견과 선입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
2. 만약 그가 믿음의 식구를 미혹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접근한다면 단호히 교제와 대화를 일체 거부해야 합니다. 강하게 나가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미온적으로 대처하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이 10,11)
3. 우리 자신이 성경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역사적 문맥적 문법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성경을 결코 억지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른 교리와 건전한 해석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제가 대학1학년 때 저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구원파'에 잠시 빠졌던 적이 있었었습니다.
처음부터 구원파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향한 갈급함을 채우려고 하다가 곁길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후 다시 진리를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
그 친구는 이미 거듭난 상태에서 잠시 혼돈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혹은 '명목상 신자'의 상태에서 이단에 심취한 경우는 거의 힘들다고 보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의 강력한 성령만이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새이시라."(요일5:20)
다른 형제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방어막을 치는 것은 말씀을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섬김입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같은 마음을 품고 중보기도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연합하여 주께 부르짖으십시오. 혹시 주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이단과 사이비 문제는 영적 전쟁입니다...어둠의 영에 포로가 되어 있는 영혼을 되찾아오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자매님,
부디 우리 주님의 손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신자로서 빚을 지는 것은 괜찮은 건가요?
답변:
빚에 대해서는 성토모 소식지 42호에 실린 저의 칼럼을 올립니다.
성토모 소식지 42호에 게제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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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빚이 넘쳐 나는 나라
김광락(성토모 운영위원, 예일교회 담임목사)
다소 두서가 없지만 빚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한번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빚이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는 가계부채의 증가입니다. 금융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작년도(2003년) 3.4분기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470조에 달했으며 개인당 3100만 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가계부채가 자꾸만 증가하는 원인은 카드빚과 주택을 담보로 하는 대출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IMF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카드를 이용하여 소비를 활성화시킴으로 땜질 처방을 내리고, 토지에 대한 거품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방치해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동산가격이 오르면 은행으로부터 빌렸던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인데, 만약 부동산가격이 폭락하게 되면 가계는 줄줄! 이 도산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IMF는 한국사회에 장기불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계속 경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통령은 아직 나라가 위기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온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것은 IMF 구제 금융 때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가계 빚에 대한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지난주 수요일(9일) 충남 당진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38세의 조모씨가 가계 빚이 1억원으로 늘어난데다가 식당을 경영하여 얻게 되는 한 달치 카드 회수금 130만원을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밀린 연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몽땅 회수해 가버리자 이에 비관하여 아내와 2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빚’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짓누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 시대에도 노예제도는 엄연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노예나 종이라는 말만 없을 뿐 실제로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은행에서 대출을 하면 은행에 일단 묶이는 것입니다. 사채는 더욱 더 분명하게 노예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돈에 노예가 되어가는 시대, 돈으로 자유를 잃어버리는 시대라고 단정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실제적인 노예로 만드는 주범은 빚입니다. 그런데 이 빚이 늘어나는데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카드도 아니고 부동산투기도 아닙니다. 그것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의 정책상 무능이나 방향감 없음도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탐심’이라는 죄입니다. 모든 불행이 소유욕과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토모의 지대조세제를 관철시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탐욕과 소유욕을 죽이는 일입니다. 이 탐욕을 죽이지 못하면 지대조세제는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토모는 더욱 기도해야 하며 탐심에 대한 선지자의 외침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득권자의 탐심과 더 가지려는 소유욕에 대해 통렬하게 정죄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강하게 느끼는 것은 교회가 이 일에 오래 동안 방관해! 왔으며 그 결과 신자들조차도 양심이 무디어져 있으며 투기와 불로소득에 대해서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존재보다는 소유지향적으로 되어가는 시대에 바른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성토모가 더욱더 광야의 소리가 되어주기를 주문하고 싶습니다. 선지자의 양심과 선지자의 입이 되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빚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롬13:8절)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또 속박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갈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빚을 져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삶의 규모를 축소하면 됩니다. 하루 세 끼를 두 끼로 줄이면 됩니다. 부득이 하게 빚을 져야만 한다면 하루빨리 갚아야 합니다. 자꾸만 지체하면 빚이 빚을 만들어내어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까지 노예로 삼으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기억해야 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남에게 빚을 지면 그것은 그에게 속박을 당하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구속이 되면 신앙생활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교회 안에는 일절 금전거래가 없어야 합니다.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각종 투기와 불로소득은 우상숭배요 죄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영적인 빚을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도 바울은 철저히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자로서의 특권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기 때문에 미안함과 죄책감마저도 가졌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가진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닐까요? 법이 바뀐다고 세상이 진정 변화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죄를 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근면 성실한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영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해지니까 마음은 탐욕과 과도한 소유욕으로 기울어지게 되! 고 탐심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요, 이 탐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성토모는 철저히 합리적이어야 하면서도 철저히 영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은혜를 받은 자로서, 먼저 복음을 받은 자로서, 먼저 진리를 깨달은 자로서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사역에 임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빚이 넘쳐나는 이 나라에 희망은 성토모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먼저 깨달은 것은 특권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양심과 소리! 이것이 성토모의 비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할로윈데이와 종교개혁주일에 대해서
답변:
내일은 10월 31일 주일로서 종교개혁주일 487주년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문에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서
로마교황청과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면 개혁을 촉구했던 정신을 기념하고
오늘날에 계승하여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정신으로 교회를 끊임없이
개혁하는 개혁교회가 되자고 다짐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종교개혁주일이 교회들로부터 점점 외면당하거나 사라지는 듯합니다.
이유인즉 아마도 종교간 화해무드가 조성되는 시기에 카톨릭이나 세간 사람들의 비난을
의식해서인 듯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정신이 사라지고 개신교의 정체성이 희박해지고 물에 물탄듯이 희석화되는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요즘들어 '개혁'이란 말처럼 뜨거운 감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4대 개혁입안을 두고 정가에서는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의 방향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차치하더라도 교계를 바라보더라도 더욱 우리를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참된 개혁의 기치를 올린 개혁자들의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것도 모자란데...종교개혁주일이 귀신들의 잔치인 '할로윈데이'로 대체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할로윈 데이 역시 매년 10월 31일에 있는데요...
교회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10월 31일을 중심으로 사탕을 주고받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이것은 귀신놀음을 흉내내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할로윈 데이의 유래에 대해서 잠시 말하자면요...
흔히 할로윈 데이하면 횃불을 들고 귀신복장을 하고 돌아다니거나, 호박등을 달고 다니며, 집집마다 아이들이 돌아다니면서 과자나 사탕을 거두는 것을 연상합니다.
이 할로윈 데이는 복음이 전파되기 전 주후1세기경 유럽 켈트(Celt) 족이 지켰던 이교도 풍습에서 유래했답니다. 1세기경, 영국 Celt 족 승려인 Druid(드루이드)에 의해 미신이 전파되었습니다. 켈트족은 마법에 걸려 죽은 인간의 영혼들은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인 Samhain(삼하인) 즉, 죽음의 신에 의해서 구제될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모니 친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동물들이나 심지어 사람들 (어떤 경우는 처녀)을 죽여서 희생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켈트족은 10월 31일에 겨울이 시작된다고 믿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요...이날 열리는 삼하인 축제에 죽은 자들이 긴 겨울밤 활동하기 위해 살아난다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유령, 마귀, 마녀, 해적, 요정, 야수 등이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었답니다. 이것이 할로윈 축제에 사람들이 귀신의 탈을 쓰고 가면무도회를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지요.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바깥 출입을 금하고 집에 불을 끄고 귀신들이 자기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군요. 그리고 죽은 자의 망령들을 인도하기 위해 호박등(호박의 안을 파내고 그 안에 양초를 두어 만든 등)을 켜두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할로윈 데이에 호박등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지요. 이 켈트족의 삼하인 축제가 10월 31일이고, 11월 1일이 '모든 성인들의 날'(All Hallow Day)이었는데, 삼하인 축제가 '모든 성인들의 날 이브 축제'(All Hallow's Eve)가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Halloween이란 명칭으로 된 것입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이 귀신놀이 풍습이 미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는데요. 이 날이 되면 아이들이 귀신들이나 마녀 혹은 마법사의 복장을 하고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Trick or treat" 즉 "과자를 안 주면 장난칠 것이다"는 말을 하면 집집마다 준비한 사탕이나 과자나 과일을 수거하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고대 삼하인 축제 때에 죽은 자의 망령을 달래기 위해서 희생제물(심지어 처녀)을 요구하던 풍습, 희생제물을 내놓지 않으면 저주를 내리겠다는 협박을 하는 고대 이교도의 풍습을 희화화한 것입니다.
이제 할로윈의 유래와 의미를 아시겠지요?
그런데...이 할로윈을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교인들'이 참 많아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사실 10월 31일은 할로윈이 아니라 종교개혁기념일로 지켜야 하는 날인데요...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할로윈을 더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웬일입니까? 할로윈이라고 하면서 사탕을 주고 혹은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고...
이제 우리의 결단과 행동이 남았습니다.
10월 31일은 귀신놀음의 날로 지킬 것인가, 아니면 종교개혁기념일로 지킬 것인가?
비난을 두려워하여 침묵하는 것보다 차라리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핍박과 비난을 받는 것이 더욱 낫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모양이라도 본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할로윈 데이는 귀신들의 놀이이므로 그 풍습과 습관을 재미있다는 이유로 흉내내거나 본받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이 날에 온갖 미신과 부패로 찌든 거대한 세력에 말씀으로 도전장을 내민 개혁자들의 용기와 도전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로서 마땅한 바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10월 31일을 종교개혁기념일로 계속 지킬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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