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상담

청년들과 함께 했던 상담4

등불지기 2012. 3. 5. 15:44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는 신앙생활의 비결?

질문: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는 신앙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답변:

예, 그것은 매우 간단하며 또 단순하지요.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성경을 묵상하십시오.

성경을 깊이 연구하십시오.

성경을 읽고 행동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감정적인 것 이전에 지성적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자 지혜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받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성적인 면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특징을 나타내 보입니다.

만일 지성적인 면에서 발전하지 않는다면 그가 참 성령을 받았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불가능하지요.

"그런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좋아라고 하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그 이유는

지성적인 토대를 견고하게 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진리를 깨닫는데서 시작합니다. 깨닫는 깊이와 폭과 너비가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큰 감정의 은혜를 경험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사상누각과 같은 거죠.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7:24-27절 말씀)

야고보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둡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야고보서1:22-25절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내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듣고 잊어버립니까? 아니면 듣고 행합니까?

분위기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듣고 깨닫고 행동하는 가가 문젭니다.

저는 분위기에 예민한 사람보다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 그리고 듣고

깨닫는 사람, 그리고 말씀대로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이 참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사람은 결코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지혜와 지식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지혜의 보혜사 성령을 구하고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정말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신앙인이 되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오직 말씀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지혜와 지식을 구하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양할지어다!!!

사탄을 분별하는 방법?

질문:

> 이번 주 목사님 설교 잘 들었습니다...

> 듣던 중에 잠깐 못 들어서 그런데요....사탄은 때로는 착한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사탄을 어떻게 구분하죠?//....

답변:

좋습니다.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분별의 원칙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사단은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경건의 모양으로는 도무지 사탄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모습과 진정 믿음으로 사는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진정으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행함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말만 있고 행함이 없다면 이는 귀신적인 믿음입니다.

귀신도 믿음이 있죠. 머리로는 지식이 있는데 순종하는 의지가 없는 거죠.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뽑혀서 지옥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좋은 열매가 무엇입니까?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는 입바른 고백이 아닙니다.

의와 경외감과 정결함과 거룩함과 자비를 베풂과 공의를 사랑함과 주님과 동행함이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만일 그 행실로 그 믿음을 입증하지 못하면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에게서는 지식도 감정도 찾아볼 수 있지만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열매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잘 분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온갖 유혹을 잘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사탄의 정체를 정확하게 잘 분별해내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다음의 세 가지는 예수님의 분별능력의 원천이었습니다.

(1)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시험하려는 사단의 세력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순간순간 기도로 깨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힘쓰셨습니다.

(2)예수님은 하나님이 하라고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드리고자 애쓰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3)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만날 때마다 성경말씀을 암송, 인용하심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모르고서는 도무지 사단의 정체를 분별해낼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단은 거짓말로 우리를 현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중심을 보지 않고 외모나 외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며 묵상하고 연구하며,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명감이 분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단의 정체를 분별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 대해서?

질문:

> 영적전쟁에 대해 궁금합니다.

> 그리고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영적전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답변: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10-13까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영적전쟁이란 하나님의 백성들과 어둠의 영들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과 마귀의 전쟁이 아니구요....)

어둠의 세력이 노리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여 사람을 자신을 섬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마귀가 하는 것은 거짓말로 인간들을 현혹하고 속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영적전쟁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이라고 했는데요....

이미 영적전쟁터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특별한 어떤 상황만이 영적전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상황이 그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구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세력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면 됩니다.

마귀의 말이 거짓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면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며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영적전쟁에서 최선의 방법이죠.

창세기 3장, 에베소서 6장, 마태복음 4장 등에 마귀가 어떻게 시험하고 접근하는지 읽어보기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

답변:

추수감사절의 유래에 대해서 질문했는데요.....

99년 11월 국민일보 신문에서 자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

고난 중에 드린 감사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됐다.1621년 영국에서의 신앙의 핍박을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그해 늦은 가을,정착을 도와준 원주민 인디언 손님들과 함께 만찬식탁에 둘러 앉아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물론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도 추수감사절을 꾸준히 지켜왔다.그러나 황무지에서 힘든 노동과 추위,질병과 배고픔 속에서도 이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했던 것이다.일주일간 계속됐던 이 행사를 기려 1864년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대통령은 11월 넷째 주간을 추수감사주일로 정했다.

한국교회에서는 1904년부터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됐다.이 해 소집된 제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우선 11월10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했다.그후 1914년 각 교파 선교부 회의를 거쳐 11월 셋째주일을 감사절로 정했다.물론 당시 정서상 가까웠던 선교국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가깝다는 것도 고려됐다.

현재 미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기독교는 그 민족의 추수 때에 맞는 주일을 감사절로 지키고 있다.중국교회만 해도 9월 말에서 10월 초까지 오곡백과가 무르익을 때 감사절을 지키고 있다.현재 한국 교회 일각에서도 추석을 전후해 한국교회다운 추수감사절을 새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이를 시행하는 몇몇 교회도 있어 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성탄절과 산타와 선물에 대해서?

질문:

성탄절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답변:

정충영 교수님의 글로 대신 답변하겠습니다.

제목: 크리스마스는 없다

며칠 전 시드니의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기 반 어린이들에게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말했다가 파면을 당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어린이들이 잠잘 동안 부모님들이 몰래 선물을 갖다 놓고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갖다 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폭로(?) 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어린이들은 크게 쇼크를 받아 절망하여 울고 집에 돌아가 저녁도 먹지 않고 울음을 계속했다고 하며 이를 안 학부모들이 거세게 학교 당국에 항의하자 그 교사를 파면하게 된 것입니다. 꿈을 빼앗긴 어린이들은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어린이들은 꿈을 먹고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존재합니까?

시드니에는 성탄절기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봉사할 자원자를 모집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심사가 까다로워 지원자가 적다고 한다. 과거에 어린이 성 관련 범죄에 관련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서명해야 하며 이에 대한 뒷조사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산타할아버지 지원자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의 피부접촉을 피하기 위해 손에 장갑을 끼고 산타 코트의 기장을 느려야 한다는 여론까지 일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범죄를 우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시드니는 지금 무더운 여름이란 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인된 산타클로스가 공원이나 쇼핑센터 혹은 큰길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해주거나 사진을 찍도록 포즈를 잡아주거나 안아줍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산타가 분명 있습니다. 그러지 않다 하더라도 성탄절에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는 분이 산타할아버지라 한다면 그 많은 어린이들에게 산타할아버지는 실재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존재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착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산타가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 준다는 것은 착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산타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2) 선물을 받는 날이 아니라 주는 날입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선물을 받으려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양육되면 큰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그의 목숨까지도, 우리에게 주려고 왔습니다. 주일학교에서의 성탄절 선물교환 행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모두들 자기가 준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을 받으려 야단입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조건의 사랑으로 주셨는데 성탄절에 우리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하도록 훈련받고 있는 셈입니다.

(3)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목자를 찾은 천사들은 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탄절에는 가진 자들의 잔치가 되고 갖지 못한 자들의 슬픔이 쌓입니다. 물질을 더 많이 갖는 일이 기쁨으로 둔갑되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없다" 그러나 이를 회복시켜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세력과 싸워 이겨야 할 분은 바로 당신이며 우리입니다. 진정한 성탄절을 맞이할 당신에게 하늘로부터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소망으로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생각하는 글> 정충영 교수 드림(2001/12/22)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인터넷으로 억대의 돈을 번다면?

질문:

> 질문은 두 가진데여....

> 1.만약 제가 인터넷 광고로 홈페쥐 운영으로 억대에 돈을 벌었다면??

> (어디까지나 가정 입니다..)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어긋나는걸까여??

답변:

인터넷 광고로 억대의 돈을 버는 것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구요. 정보화사회에 그런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답니다.

다만 점검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1)일확천금을 노리는 동기는 잘못입니다. 복권당첨이나 암웨이식 다단계 판매는 절대 안됩니다. 다단계 판매방식이 잘못된 이유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사행심을 조장해서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어떻게 버는가는 어떻게 어디에 쓰는 가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땀과 노력과 실력으로 벌기를 기대하십니다.

(3)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4)디모데전서6:6-10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읽고 나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의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5)정당한 실력이나 노동의 대가가 아닌 불로소득은 실질적으로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위의 사항을 점검한 다음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면 좋습니다.

성형수술은 나쁜가요?

질문

> 목사님~!

> 성형수술은 나쁜 건가요?

>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씀해 주세여~~~~~!

답변:

음...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의 신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이구요. 그렇지 않은 상황...다시 말해서 오히려 성형수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상황이 생긴다면 얘기는 다르겠지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성형수술을 반대합니다.

대게는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개인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셨으면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신체에 대해 민감한 것에 대해 성경은 외모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구요.

사도바울은 목회서신에서 디모데에게 교인들로 하여금 외모나 땋은 머리로 하지 말고 내면으로 아름다움을 꾸미라고 가르칠 것을 명령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에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제가 볼 때 아주 특별한 극소수의 상황(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을 제외하고서는

원칙적으로 성형수술은 전적으로 성경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에 새로운 몸으로 덧입혀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김광락 목사 올림

기독교가 하나 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답변:

사실 하나님 앞에서 교회는 엄연히 하나만 존재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둘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지상교회를 보면 많은 교단과 교파로 난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교회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지상교회는 다양한 문화와 기질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복음에 대한 다양한 적응과 적용 때문에 다양한 교파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지상교회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기독교가 하나 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독교가 여러 분파, 교단으로 나뉘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 중에는 교리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이유로, 문화적인 이유로,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히 주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질적으로 하나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 교단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가 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또 하나로 되었다고 해서(예배형식, 정치제도, 등등) 반드시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거룩함으로 하나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기독교 일치운동이 정치적 운동이나 획일화를 지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상교회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모색해야 합니다.

자칫 통일성을 추구하다가 획일성으로 흘러가버리면 복음의 본질이 깨어질까 우려됩니다.

뱀같이 지혜롭게,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고난의 원인?

질문:

> 고난에도 야곱의 고난과 요셉의 고난이 있다고 하던데 잘 몰라서 질문올리게 되었습니다,,,죄로 인한 고난과 의인의 단련함의 고난인지요?

>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좋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1절을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할 때 원인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애매한 경우에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면 아름다우며 칭찬과 상급이 뒤따른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고난과 요셉의 고난을 보면서 하나는 죄로 인한 고난이며 다른 하나는 의인의 단련이라고 구분짓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반드시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단련함이 죄와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도 사실 어렵습니다. 물론 요셉이 자기 죄 때문에 고난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야곱 역시 죄 때문에 고난받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란 현상을 죄와 전혀 무관하게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받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근본적으로 죄악으로 물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고난을 구분하려고 한다면 그 마음에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의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확신이 있는 반면에, 악인은 고난을 당할 때 마음에 평안은 커녕 불안과 근심 속에서 절망합니다. 의인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며, 악인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는 고난의 원인을 따지기 보다는 고난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따지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처사라고 봅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고난의 원인을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원인을 따지기 보다는 고난을 당할 때 올바른 태도를 가질 것을 권면합니다.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방법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느냐 당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이 고난을 겪기 때문입니다. 고난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한냐에 따라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설날 때 추도예배를 드려야 하나요?

답변:

음...제 생각에는 추도예배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예배지, 추도(추모)를 위한 예배는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원래 추도예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추도예배가 죽은 자를 위한 예배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의 영정을 앞에 놓거나 혹은 그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지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인데요...

불신 친지들이 많이 있다면 우선은 '추도예배'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무방하겠지만

앞으론 '온가족예배' 혹은 '가정예배'란 말을 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목적으로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예배 시에는 한분 하나님의 성호가 선포되어야 하며

조상들의 이름이나 공적은 사라져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을 정확히 알면 '추도예배'가 온 친지를 전도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온 친지가 주님을 알게 되면 그 때 가서 '온가족예배'로 명칭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온 친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승리하시길...

친구문제에 대한 성경말씀?

질문:

> 안녕하세요

> 저는 정은이라고 합니다.

> 다름이아니라 요,제가 요새 죄지은 게 많구

> 친구간에 문제도 조금 잇능거 같아서요

> 친구문제같은 거는 성경 어느 부분을 읽어야 하나요?

> 그리구 각각 잠언이나 시편 이러캐 그 부분들이 몰 설명하능지도

> 가르켜 주세요..예를 들어 지혜의 글(잠언서) 이러캐요..

> 그냥 막연하게 읽는 것보다 저에게 필요한 주제를 찾아서

> 읽는게 나을듯 싶네요ㅋ 그럼 빠른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삶에 고통을 안겨다주는 많은 죄와 문제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때만이

제대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친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성경구절을 읽어야 할지

물어보았는데...그런 경우 어느 구절을 제시하기가 어렵네요.

왜냐면 성경은 어떤 상황이나 문맥이 있는데

문제에 맞추어서 성경을 잘못 적용하기 쉽기 때문이지요.

대신 친구문제와 관련되어서 추천할만한 성경인물들이 있지요.

형과의 관계문제에서 승리한 야곱,

형들을 용서할 힘을 얻게 된 요셉,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울을 용서한 다윗,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자신을 떠나간 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사도 바울,

등이 좋은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마음을 열고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주님이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특히 죄문제에 있어서 좋은 경건서적을 한 권 추천하고 싶은데...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입니다.

이 책은 죄문제로 고민하는 영혼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서

자유를 얻게 되는가 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의 품안으로 달려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면서 나아오는 자를 언제나 용서해주시지요.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나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남을 용서하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 같이 너도 남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친구와의 문제는 곧 하나님과의 문제가 해결될 때만 온전히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사람이 겪는 모든 삶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려져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온전히 마음에 모셔 들이는 순간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제들을 처리하여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마태5:21-26절

마태5:38-48절

에베소서 4:25-32절

요한일서2:9-11, 3:10-24절, 4:19,20절 등을 읽어보십시오.

여호와의 증인이란 단체?

.질문:

>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단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 간략하게 요점만 설명 해주심 고맙겠습니다.

답변:

1. 성부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성자와 성령을 부정합니다.

2. 사후세계를 부정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소멸된다고 가르칩니다.

3.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4. 성경만이 하나님말씀임을 부인합니다.

5.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합니다.

날과 절기를 지키지 말라?

질문:

> 갈라디아서 4장 9-11 절을 보면 날과 절기를 지키지 말라고 했는데.

> 그럼 생일이나 그런 것들을 지키면 안 되나요?

답변:

1. 본문에서 말하는 날과 절기는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월삭, 등과 같은 날입니다.

2. 그러한 날을 '삼가'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생일은 중세시대에는 이교도들이 만들어낸 풍습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건너온 풍습입니다. 청교도들은 이교도의 풍습이라고 해서 생일을 기념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4. 생일이나 기타 기념일을 지키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삼가' 지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5. 주일은 구별하여 지키되, 우리는 '삼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즐거이 섬기기 위해 지키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질문:

> 그리고 성경에서는 땅에서 산다고 하는 말이 가끔 나오는데.

> 그렇다면 천국은 땅이 되나요?

답변:

1.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라는 등, "땅"은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그런 토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는 임재,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상태, 혹은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하심을 가리킵니다.

2. 천국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이지 우리가 보는 그런 토지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러나 계시록과 같이 어떤 곳에서는 땅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문맥을 따라 보면 됩니다.

4.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거의 대부분 예수님 자신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천국을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질문:

> 그럼 하늘에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이 되나요. 천국 간다는 말이

> 하늘로 간다는 말이 아니였나 보네요?

답변:

1. 하늘은 우리가 보는 가시적인 하늘(1층천), 타락한 천사들이 지배하는 2층천,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이 거하는 3층천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성경당시의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2. 천국 가는 것은 하나님의 품,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재림 시에 우리 몸은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된 채로 공중으로 들림받게 됩니다.

3. 우리는 몸을 입었기 때문에 땅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한 우리는 영적 하늘에서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본문의 문맥에 따라 보면 됩니다.

4.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곳은 엄밀히 말하자면 ‘낙원’입니다. 낙원에서 예수님의 재림시 영광의 부활을 기다리며 주 안에서 안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잠을 잔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이미 ‘천국’(=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천국은 불완전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 완전해집니다.

교회(학생회) 내 이성교제는 왜 안되죠?

질문:

> 왜 그렇게 이성교제를 반대하는거지요??

> 거의 광적(ㅡㅡ;;)으로 반대해서..

> 특히 몇몇 사람들..

> 이성교제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멀어진다고 하는데..

>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는 말이 아니였나 보네요?

답변:

무조건 안 된다고 누가 말했나요?

안 된다고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책임감 없는 교제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임 있는 이성교제란 결혼을 전제로 하는 이성교제입니다.

대학1년생이라도 결혼을 전제로 책임 있게 교제한다면 저는 언제나

환영하고 축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책임 있게 교제한다는 것은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몸, 영혼, 정신, 성장,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과 상대방을 책임지려면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책임 있는 교제와 무책임한 교제를 언제나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별합니다.

책임 있는 교제는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도움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무책임한 교제는 언제나 교만하기 때문에 기도하지도 않고 성경을 보지도 않으며 조언을 구하기보다 자꾸만 몰래 은밀하게 교제를 즐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상대방을 책임지는 교제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것입니다.

재미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과 영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귀는 것은 우리 영혼에 엄청난 유익이 됩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됩니다.

잠언을 보면 아내를 얻는 자는 여호와께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결혼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성교제는 왜 안되냐구요?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은 채 이성교제에 몰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둘째,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일대일 교제에 몰두하는 것은 개인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은 3명 이상의 관계를 힘들어합니다.

그리고 일대일 관계에 몰입하려고 하지요.

인격을 독점하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이성교제는 100% 독점적 교제입니다.

이런 경우 관계가 깨어지게 되면 극심한 상실감에 이르게 되는데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됩니다. 군대생활 할 때 탈영하는 사람들의 십중팔구가 이런 문제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은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 한 인격을 독점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세고 지체들이 일대일만의 '독점적' 교제보다는

여러 지체들과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적' 교제에 먼저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 나은 것을 선택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랑하는 제 딸이라고 가정한다면 저는 당연히 강요할 것입니다.

저는 제 딸이 잘 되기를 진정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더 나은 선택인 줄 확신한다면 그것을 강요해도 나중에 오히려 감사할 것이니까요.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결코 참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생활을 거쳐오면서

일대일 '독점적' 교제를 마음으로 여러 번 원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은 제가 30세가 될 때까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대신 주님은 저로 하여금 '공동체 교제'를 많이 허락하셨지요. 교회에서, 학교에서 여러 자매들을 만나고 교제했지만 '독점적인 교제'로서의 일대일 교제는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독점적으로 교제하는 친구들을 보면 내심 부러워했지만 지나고보니 제가 더 많이 자유롭게 누리면서 살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독점적 교제'를 한 친구가 있었는데요.

그 친구는 그것을 선택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지요.

그 친구는 '공동체 교제'를 즐길 수 없었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독점적 교제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는 '공동체적 교제'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사귐의 순서와 분량을 지켜야 건강한 사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삼각형을 그려보세요. 이것은 사랑의 트라이앵글입니다.

이 트라이앵글은 세 가지 단계로 쌓아올려야 합니다.

먼저는 영적인 사귐이 중요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이지요.

주님과의 사귐은 참으로 세상의 그 어느 사귐보다 달콤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화하고 교제하는 기쁨은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사귐이 있는 사람은 아무런 대가없이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귐이 없는 사람은 조건적으로 사람을 사랑합니다.

상대방에게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지요. 이것은 제일 기본입니다. 이 기본이 약하거나 없으면 다른 모든 사귐도 없습니다.

그 다음은 정신적인 사귐, 즉 우정을 의미합니다.

저는 중고등부 때와 대학 청년 때에 많은 신실한 자매들과 함께 교회 일을 하고 학교일을 함께 한 것은 좋은 경험이었답니다. 결혼한 이후에도 신실한 우정은 변함없습니다.

이 단계는 세상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요...

왜냐면 그들은 순수한 의미의 정신적인 사귐이 이성교제와 혼동하는 것은 영적인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만 이성교제의 로맨스가 없이도 순수한 정신적인 사귐을 가질 수가 있지요.

그 사귐은 결코 독점적이지 않습니다. 형제 자매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남매는 로맨스를 느끼지 않듯이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도 모두 한 가족이며 형제요 자매입니다.

이 우정을 충분히 느낄 줄도 모르면서 단지 이성적으로만 특정 인격에 몰두하는 것은 뭔가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분명한 증거지요.

마지막이 질문한 바로 그 이성교제, 로맨스를 나누는 관계, 한 이성에 대한 책임지면서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밤늦게 은밀히 교제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당당하며 공개적이며 서로를 참고 견디면서 섬겨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귐과 공동체적인 사귐이 견고하게 기초가 형성되어 있어야

신실한 이성교제도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억지로 이성교제부터 먼저 할 경우 반드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성교제는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순서의 문제요 선택인 것이지요.

이성교제는 안 된다는 것은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선택한 것에 대해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좋고, 저것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지만 더 좋은 쪽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우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법을 먼저 배우기를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여러 사람과 함께 교제하는 '공동체 교제'를 먼저 배우기를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이 예비하신 때에 예비하신 '돕는 배필'과 '독점적 교제'를 하는 것이 가장 건강하게 또 행복하게 교제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도 전에 독점적 교제부터 시작하는 것은 정말이지

(살아본 경험에 의하면, 또 교제하는 많은 커플들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정말이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딸이라면 펄펄 뛰면서 반대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정말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운 지체가

제대로 이성교제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고전7장을 꼭 묵상해보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아가서도 좋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가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이성에 대한 독점적 교제에 대한 욕망을

가급적이면 일찍 깨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원하실 때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대에게 그것을 허락하실 때

주님이 이끌어 주시는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조급하지 마세요!

너무 급하게 서둘지 마세요!

먼저 충분히 주님과 교제하는 법을 먼저 배우세요.

그래야 주님의 사랑으로 이성교제도 잘 할거니까요.

우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니까요

주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이성과 교제하는 것을 먼저 시작하면 질서를 깨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가혹합니다.

저는 순서를 어기고 이성교제를 급하게 먼저 시작했다가

몸과 영혼과 삶에 낭패를 본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여!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바 된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몸으로 주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을 먼저

연습해야 합니다.

그것을 충분히 연습하고 훈련하십시오.

그 후에 주께서 주님의 때와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사람을

동역자로 보내주실 것입니다.

이성교제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의 섬세한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먼저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주님께서 내 감정과 선택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잘 보고, 선택하고, 잘 사귈 수 있도록 주님께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날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게 해달라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으로 잘 준비된 사람이 정말이지 행복한 교제와 결혼생활을 할 수가 있답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성급하게 자기 욕망을 따라 흘러간 영혼들의 시체들이 세상길에 널부러져 있답니다. 저는 이성교제의 영역에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승리하는 세고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김광락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