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상담

청년들과 함께 했던 신앙상담11

등불지기 2012. 3. 5. 16:06

인간이 범죄할 것을 아시면서도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질문:

하나님께서 전지하셔서 인간의 범죄사실을 아시면서도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을 것을 아시면서도 인간을 만드시고 자유를 주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엄마가 잉태한 뱃속의 태아가 만약 무뇌아이든지 혹은 장애인이 될 것이라고 의사가 충고했을 때 그걸 알면서도 낳기로 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할 것을 결심하지 않고서는 그런 결심을 할 수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지혜와 능력으로 더 나은 대책(구원의 길)을 미리 마련하지 않으셨으면 인간창조를 시작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대책 없이 출산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뛰어난 지혜와 권능으로 대비책을 마련하신 다음에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찬양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은 어떻게 되나요?

질문:

>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선교사나 성경이 접해지기도 전에

> 돌아가셨잖아요...그럼..그 조상들은 구원받지 못하나요?

> 예전에도 이런 질문이 올라왔었지만 답변을 못 본 것 같아

> 다시 올립니다.

답변:

좋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에겐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혀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핵심이요, 믿음의 내용입니다.

자, 성경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세요.

"내가 곧 (유일한 그) 길이요, (유일한 그) 진리요, (유일한 그)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7-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만약 그들에게 구원의 길이 따로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야 할 이유도 없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으셔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길이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공연히 수고하신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다른 길이 있다면 예수님이 절대로 이 땅에 오시지 말아야 했습니다. 왜냐면 인류에게 또 하나의 길을 만드심으로써 인류를 피곤하게 만드신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 교리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람은 아담의 죄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죄를 좋아하고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복음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그냥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도, 그들이 복음을 듣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 없이 사람을 구원할 길은 전혀 없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곁을 추방당하였을 때는 이미 아담으로부터 태어날 후손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의 말씀으로 먼저 찾아가시지 않으신다면,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히 갇혀 형벌 속에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아담의 죄와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죄와 진노에서부터 구원합니다. 만약 그들이 복음을 듣지 않아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도, 구원받을 길이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대속의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멸망해가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멸망에 방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시급히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도구로 쓰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롬2:14,15을 봅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버버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역사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만약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내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유일성을 믿는 것 때문에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고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만약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면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고 또 핍박과 미움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유일성을 믿는 것은 기독교가 핍박과 오해와 질시를 받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구원 받을 길이 따로 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명 있을 동안에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복음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영혼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이 늘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대답하면서 살아가야 할 그런 질문입니다.

이사야 43:21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찬송' 혹은 '영광'이라는 말이 무수히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잘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자, 이렇게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은 그림 그리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조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창작하여 돈을 벌어보려고 하는 걸까요?

그런 사람도 있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예술가라고 볼 수 없지요.

(세상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지요. 즉, 세상을 창조하여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기적인 예술가와 비교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대게는 자신의 즐거움 때문입니다.

무엇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의도가 없지요.

창작품 그 자체가 자신에게 기쁨이요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고자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창조된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사람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참 목적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 길, 사망의 길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시려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즐거움을 알게 하시고, 또 누리게 하시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의 사는 유일하고 근본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찬송이 되는 것.... 이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알고자 하는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창조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청지기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함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두 번째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영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를 저주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첫째, 열매 맺지 못하는 유대성전, 형식적으로 흘러가버리는 성전예배에 대한 진노의 표시였습니다. 당시 성전예배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빈껍데기와 무성한 잎만 있는 나무와 같았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러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신 일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제자들에게 믿음에 관해 교훈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위력에 대해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믿음의 실습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

답변: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대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악과를 통해 우리는 도리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선악과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했습니다. 선과 악을 규정짓는 능력을 주는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규정짓는 능력은 하나님의 고유의 능력입니다. 천사에게도 없는 능력입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지으며 살아갑니다. 사사기에서 말한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사람이 가질 수 있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험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신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고자 하셨다면 결코 선악과나무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선악과나무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이유는 사람을 당신의 신뢰하는 청지기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종과 청지기의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창고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요셉을 보세요. 바로왕은 그를 애굽의 청지기로 삼으면서 자신은 보좌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요셉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왕이 될 수 있는 권력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가 요셉을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신뢰가 아니었다면 결코 선악과나무를 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집에 청지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집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막강한 파워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나무를 선택했습니다. 생명나무를 선택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리고 수많은 유실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하필 선악과나무를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집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종으로 부려먹기 위해 창조하셨다면 결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본학?

질문:

다른게 아니라..

성구가 영어랑 완전히 틀려요.

그러니까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마 21:31)

이 NIV에는 "The first" they answered... 라고 써있는데...

영어 문맥을 살펴보면 The first가 둘째 아들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없던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럼 이만

정말 궁금한 것은..

이른바 권위역이라는 KJV에서도 'the first'라고 기록이 되어있다는 건데요..

물론 이런 부분이 성경의 교훈성 자체를 흐트러놓지는 않겠지만...

한글 권위역과 영문 권위역이 해석이 차이가 날 수 있나요?

계22:18-19 말씀과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비권위역이라면 모를까..

일어 성경엔 '第'라고 되어 있는 것 봐선 동양권으로 넘어 오면서 차이가 난 것 같은데..

근본이 잘못된건지..제가 영어가 짧아서 이상한 트집을 잡는 건지....

확실히 가르쳐주세요.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한글 성경은 바티칸 사본(B)에 근거해서 번역한 것이고,

영어 성경은 시내산 사본과 베사 사본에 근거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아주 드문 경우에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서로 다른 본문들이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에 대해 결코 아무런

차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본의 다양함은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성경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사본의 내용이 이렇게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교리상으로는 일치를 보이는 것이

거의 기적적인 신비에 가까운 일이죠.

권위역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는데...진우 형제가 나중에 사본학을 공부해보면 잘 알게 되리라고 봅니다. 두 가지 사본 중에 어느 것에 더 권위를 줄 것인가 하는 것과 어느 본문(text)이 더 신빙성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오직 문맥과 교리와 교회의 신앙고백이 결정합니다.

첫째 아들이라고 대답한 것이나, 둘째 아들이 대답한 것이나 문맥에서는 어긋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조금이라도 손상 끼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면 두 상이한 사본이 모두 강조하는 것은 참된 회개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어느 것에다 권위를 부여하더라도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즉, 둘 다 권위있는 본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아들인지 아니면 둘째 아들인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과연 아버지의 뜻대로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창세기 7장에...?

질문:

2절에는요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이라고 되어 있고요,

8~9절에 보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라고 되어 있는데

왜 숫자가 다른 거죠? -_-;;

사소한 거에 집착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성경의 한 부분 한 부분이 결코 사소할 수는 없잖아요..;;

알려 주세요~

답변:

모든 짐승은 기본적으로 암 수 둘씩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정결한 짐승의 경우는 암 수 일곱씩 취하도록 했습니다.

그 차이는 정결한 짐승은 제사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암수 둘씩을 언급하는 본문은 하나님의 보존을 강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암수 일곱씩을 언급한 것은 특별히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술된 것입니다.

9절 말씀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2절과 모순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노아에게 자동적으로 나아온 동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노아는 제사의 목적을 위해서 정결한 짐승을 취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암수 둘씩" 나아왔다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하나님의 강력한 섭리가 작용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없습니다.

비슷한 질문이 창세기 6:19과 7:2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개괄적인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부가적인 설명입니다. 전체 동물의 생명보존을 강조할 때는 단지 '암수 둘씩'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제사의 목적을 강조할 때는 정결한 짐승을 일곱씩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는 개괄적인 언급이고, 다른 하나는 부가적인 언급입니다. 개괄적으로 언급하는 이유와 부가적으로 언급하는 이유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모순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의문을 품는 것이 중요한 자세입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연구에서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참되고 큰 지식을 전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에스더는 어떤 인물이에요?

질문:

목사님^^

엄마가 절 위해서 기도하실 때마다

"에스더와 같은 여인이 되게 하소서..."

라고 하시거든요???

성경에서 에스더를 읽어보면 민족을 구한 여인으로 나오는데요...

어떤 여인인지 좀 더 알려주세요~^^

성경만으론 잘 이해가 안가네요~~

부탁드립니다^^

답변:

좋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여인으로서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아하수에로)이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의 왕비가 왕을 노엽게 한 것 때문에 갑자기 폐위가 되었고, 전국에서 아리따운 여인들을 골라 간택작업을 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에스더가 왕비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1) 에스더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2) 에스더는 사랑받는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왕비로 뽑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사랑받았고 사람에게 사랑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잠3:3,4절을 보면,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 은총을, 사람에게 귀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인자와 진리를 사랑하였던 사람이었음을 증명해줍니다.

(3) 에스더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모르드개란 인물은 경건한 유대지도자였습니다. 모르드개를 통해 하나님 중심 교육을 잘 받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4) 에스더는 민족을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애국심은 불굴의 용기로 왕에게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5) 에스더는 기도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에 위기가 찾아오자, 에스더는 시녀들과 함께 3일 금식기도를 작정합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 민족을 살려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는데,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의 무릎이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6) 에스더는 결단과 용기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줄 아는 용기가 있었고, 그런 결단을 내릴 줄 알았습니다.

(7) 에스더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왜 왕비의 자리에 앉히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에 위기가 찾아올 줄 미리 내다보시고 대비케 하기 위해서 에스더를 왕비의 자리에 앉혀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왕비로 삼으신 것은 자신의 미모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있었고, 유대민족의 위기를 대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위기에도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나설 수 있었습니다.

(8) 에스더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가 하만을 처리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 인간적인 감정으로 성급하게 처리하지 않고 매우 지혜롭게 처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스더는 매우 현명하게 유대민족의 위기상황을 왕에게 잘 말합니다. 다급할 때 오히려 에스더는 매우 침착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위기의 때에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대처하는 침착함과 여유로운 지혜를 보여줍니다.

(9) 에스더는 눈물이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자기 민족을 달라고 구할 때 임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녀가 자기 민족을 정말 사랑하고 있으며, 자기 민족의 위기를 정말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눈물이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10) 에스더는 겸손하고, 매력적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했으며, 임금 앞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할 정도로 지혜가 있었으며, 문제를 감정으로 대처하지 않고 지략으로 대처할 줄 알았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와 같은 여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여인으로서 모든 것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모, 지성, 결단력, 지혜, 신앙, 사랑, 눈물, 애국심, 등등. 에스더는 모자람이 전혀 없던 여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에스더와 같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스더에게 주신 지혜와 믿음을 나에게도 주소서!

성경과 과학의 조화가 가능한가요?

질문:

성경을 중심으로 과학을 본다고 할 때...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이런 공룡이 이런 것들도 그렇게 봐야하는 것인가요?

과학적으로 보면 구석기시대라고 하는 지층 아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연대측정은

소용이 없지 않을까요? 천지를 창조하실 때 7일 만에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

말 그대로 7일이 아닌 것인 가요?? 뭔가 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과학중심이 아니라 성경중심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둘이 합치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경이 진실이니깐. 과학으로 언젠가는

그것을 증명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요?? 합치점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인가요?

그리고 목사님 전에 말씀하셨던 변증론처럼 이것들을 증명할 수는 없는 건가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기독교에 대해서 이런 점을 가지고 비판을 한다면

변증론으로는 변증을 할 수 있지만. 목사님께서 답해주신 것같고는 모자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믿음이 많이 부족해서 이런 의문이 자꾸자꾸

드는군요.

답변:

성경과 과학의 조화가 가능한가??

믿음이 부족해서 의문들이 자꾸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세계관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해도 기독교 세계관이 없는 사림이 있을 수 있지요.

사실 그 믿음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요...

아무튼 지금 고등부 청년부 시절에는 강한 세계관으로 무장해야 할 시기입니다.

이 작업에 가장 큰 장애물은 자신의 이성과 편견과 선입견에 한계가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배우려는 갈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 질문으로 돌아가볼까요?

질문은....성경과 과학이 조화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조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조화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과학을 가지고 성경을 입증하려고 할 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놓치지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과학을 같은 수준에서 보면 안 됩니다. 그리고 과학에 대해서 맹신하면 안 됩니다.

과학도 많은 오류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고 먼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사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과학의 한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설이나 이론들을 가지고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과학도 전부가 '과학'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과학은 성경의 신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성경에 대해 불신이나 의심을 품게 만든다면 우리는 과학에 대해서 의심을 해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질문한 고생대와 신생대 이야기는 제가 볼 때 과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고 역사적 가설(theory)입니다.

과학은 가설을 다루지 않습니다.

과학은 검증학문입니다.

검증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론은 이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공룡 이야기를 했는데,

성경에 공룡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공룡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공룡은 고고학에 의해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검증된 것이지요.

그러나 공룡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공생대니 신생대니 하는 말은 가설이고 이론이죠.

핵심은 검증된 것이 아닌 가설이나 이론을 가지고 잣대를 삼지 말라는 거예요.

문제는 시기와 시대에 관련된 문제인데요...

시기와 시대를 측정하는 것은 과학이 과연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을까하는 문젭니다.

연대측정은 확률과 가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과연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릅니다.

문자가 만들어진 때 이전의 시대를 측정하는 것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앞에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 그 6일이 오늘날의 6일인지 아닌지는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어요. 성경을 문맥을 따라 자세히 보세요.

일월성신과 같은 일 년과 하루개념의 시간은 넷째 날에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시간으로서의 하루개념은 인간의 하루개념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시간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개념을 설명하려고 하면 혼돈이 생깁니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시간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면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라는 시간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개념이고 검증이 안된 가설이고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다만 검증된 것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검증된 것은 성경의 이야기가 틀렸다고 감히 밝혀내지 못합니다.

과학과 역사, 그리고 고고학이 하는 일은 고작 그 정도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검증되지 않은 개념이나 이론이나 가설을 가지고 성경을 판단하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에 대해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부끄럼 없이 자행한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말한 고생대 신생대 그리고 공룡 등의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것이 가설이고,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검증된 것인지 잘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고학이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밝혀주지 못하듯이

과학이 성경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밝혀주지는 못합니다.

다만 과학은 성경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고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해낼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과학은 수많은 이론들과 검증되지 않은 가설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임의대로 만들어낸 가설들을 가지고 성경의 기록들의 진위를 판단하는 잣대로 삼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학이란 명분 아래 검증되지 않은 가설들을 가지고 성경을 판단하려는 것은 죄입니다.

성경이 진실이니까 언젠가는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좋아요.

그러나 과학이 절대적인 지식으로 발전한다는 가정 하에서는 그 말이 맞아요.

그러나 과학이 절대적인 지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예를 들어, 뉴턴이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때 이것이 절대적인 지식이라고 다들 믿었지만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서 깨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이 검증되지 않은 것이 많고 이론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실험실에서 예를 들어 진공관에서 단백질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자연적인 조건에서 생물체가 만들어지고 진화했다는 가정은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가설들을 가지고 진리를 무색케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학의 현실을 자세히 보세요.

과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하잖아요? 진화론 내부에도 여러 가지 분파가 있구요.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요. 초근에는 메타 진화론이란 말도 들어보았는데...과학자들 역시 회의적이예요. 과학자들마저도 일치하지 않는 어떤 이론을 가지고 우리가 성경을 따지는 것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지금 과학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들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까지 과학적이라고 혼동하는 상황에서 과학이 성경을 밝혀낸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일겁니다. 그러나 고고학과 같이 발굴해낸 것처럼 과학도 검증된 것이라면 우리가 성경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것은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만 증명할 뿐이지,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못합니다.

예를 들어, 여리고성이 무너지지 않았고 불태워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냈다면 성경의 기록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오히려 고고학은 그러한 잔해를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했습니다. 역사나 과학이나 그러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직한 과학자, 정직한 역사가가 될 수 있습니다.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면 얼토당토않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들을 가지고서 성경을 마구 도려내고 비판하는 죄를 범할 것입니다.

이 방면으로 관심을 가지고 싶으면 창조과학회에서 나온 책들과 세계관 책들을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성경을 제한하는 우를 범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먼저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편견이나 선입견이 틀릴 수 있고, 가설이나 이론일 수 있고, 검증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늘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는 죄를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과학이나 역사나 고고학이나 그런 학문들이나 우리 이성의 한계에 대해서 솔직하고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과학도 한계가 있지요. 그걸 알면 많은 도움이 되지요.

과학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 책들을 많이 읽어 보고 연구해서 이 부분에 고민하는 다른 지체들을 도와주기를 바래요.

주께서 범사에 지혜를 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뜻인가요?

답변:

창세기 1: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다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서 나오는 '형상'이란 말은 말 그대로 '닮은 꼴'입니다.

영어로 likeness 혹은 image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닮은꼴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인과 신실과 자비를 닮을 수 있는 존재로 말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능력,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의 존재를 뜻합니다. 일종의 분신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신 후에

우리를 통해 당신 자신의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한없이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를 닮은 자녀를 낳을 때 너무 너무 기뻐하듯이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함으로 인해

죄가 인간에게 들어와 그 형상이 왜곡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게 되었고

자기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참여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믿고 영접하고 의지하면서 살게 되면

내안에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이 원래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되는

은총이 임하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과 삶속에 들어오셔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일그러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구되어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참여하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축복이 임하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전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당신의 아들의 온전한 형상을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무궁한 영광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진정 기뻐하십니다.

이 은총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순종하면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내 삶을 다스리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육신을 썩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총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잠언14:20절 말씀의 뜻?

질문:

잠언 14:20절을 보면 가난한자는 이웃에게 미움을 받고 부요한자는 친구가 많다는데요

이거 해석을 어떻게 해야할런지..

알려주세요 목사님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인심을 설명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없는 사람을 멸시하고 가진자를 가까이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고, 가진 자는 얻을 것이 많기 때문이죠.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함을 주는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파산하게 되면 친구들을 다 떠나게 됩니다.

그들은 진실한 친구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얻어내려고 가까이 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없는 자를 멸시하고 부자를 가까이 하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흉한 인심이 그렇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심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미움을 받는 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부자에게 친구가 많은 것도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잠언 14:20 말씀은 세상이 그렇게 간사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안 되고를 따져서 가까이 하는가 안 하는가를 결정한다는 것이지요. 본문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따라 친구를 사귑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면서 힘없는 자, 가지지 못한 자를 친구로 사귀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우리가 그 다음에 나오는 21절을 보면 20절의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지요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가난한 자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던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거저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값없이 은혜를 받았다면 가난한 자를 함부로 미워하거나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내게 아무런 유익이나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미워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상 잠14:20절에 대한 설명을 마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란?

답변:

제가 고린도전서13장을 묵상하면서

사랑에 대한 생각들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 = = = = = = = = = = = = =

사랑이란?

어떤 사람들은 '관심'이라고 정의하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베풂'이나 '호의'라고 생각하지요.

혹은 '들어줌'이라고 말하기도 하구요.

혹은 '작은 배려'라고 말한답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사랑이야 말로 진짜 사랑이거든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도 제대로 받을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랑을 주고 받는 것도 주님을 사랑을 아는 지식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 중심의 사랑을 빼버리고 인간중심적인 사랑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이기적인 동기로 (=받기 위한 대가성 목적으로) 사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상대방이 사랑을 안 베풀어준다고 불평하면서 사실은 상대방의 오래 참음과 참 사랑을 위선이나 거짓으로 비판하는 미련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참 사랑을 줄 수도, 또한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세현이가 고린도전서 13장과 요한일서를 깊이 묵상해보기를 권면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원초적인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세현이를 위해 베푸신 그 원래적인 사랑을 깊이 알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주의 성령께서 세현이를 도우셔서 그분의 사랑을 깊이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뭘까요?

자, 고전13장에서 대충 묵상해봅시다.

사랑은 믿음보다 탁월하며 은사보다 귀합니다.

사랑은 헌신보다 중요한 겁니다.

사랑이 없이도 자기 몸을 줄 수 있지요.

사랑이 없이도 상대방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오래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느긋이 기다려줄 줄 아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또한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사랑은 사람이나 돈을 바라보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에게서 선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선한 것을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친구나 라이벌이 나보다 앞서 나갈 때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남이 나보다 못할 때 진심으로 긍휼히 여깁니다.

사랑은 남이 나보다 잘할 때 진심으로 기뻐해 합니다.

사랑은 결코 자신을 내세우거나 뽐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과시하고픈 마음과 거리가 멉니다.

사랑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수고를 무시하고 비웃더라도 화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늘 자신을 낮추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남을 나보다 항상 낫게(better) 여기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아무리 나보다 못한 듯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갖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가장 편하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더 예의를 지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함부로 말하거나 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주도면밀함입니다.

예의를 벗어난 것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항상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사랑은 자신의 작은 이익을 남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여유입니다ㅏ.

사랑은 항상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처받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존심 상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실망하는 법도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 편에 섭니다.

사랑은 악한 생각을 멀리합니다.

사랑은 불로소득과 같은 부당한 방법과 물질을 싫어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남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부터 알도록 하세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깊이...

그 속에서 참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해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창37장과 안식일과 주일 문제에 대해서?

질문:

목사님 궁금한 게 많습니다-_-;

음..요즘 갑자기 궁금한 것이 많이 생겼습니다.

우선 창세기38장을 보다가 느낀건데...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죽였다고 했는데..무엇이 악한 것인지 못찾겠습니다. 게다가 형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고 동생이 설정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후에 다말이 동생을 얻으려고 창녀로 속여 시아버지와 행음하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나 문란해보이거든요? 그 시대에 창녀의 존재가 인정이

되었는지 인정이 안 되었다면 그들이 죄를 지은 셈인데 처벌을 받았는지. 형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아 그리고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일요일에는 먹을 것을 '사'먹는 것이 안 좋다고 선배에게 들었거든요.

그 이유가 안식일에는 생산을 하면 안 되는데 우리가 '사' 먹으면

그들이 생산을 하는 활동을 하게 되고 그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되서

우리가 죄를 짓는다. 라는 이유인데요. 그러면은 일요일에 공부를 한다던지.

독서실에 가는 것. 학원에 가는 것 이런 것들은 죄가 되는 건가요? 독서실이란 곳이

주일에 생산하는 것이 되고 학원이 생산하는 것이 되지 않나요?

궁금합니다.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많이 생기는 것은 매우 좋은 조짐입니다.

왜냐면 호기심이 있어야 배움이 가능하고, 배워야 성장하기 때문이지요.

첫째 질문은 유다와 다말에 대한 건데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 시대의 문화와 관점으로 당시를 보면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먼저 당시의 관점과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지요. 그것이 성경을 보는 법입니다. 당시에는 계대결혼법이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일부일처입니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씨)을 보존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임시적으로 제한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관점으로 보면 다말이 잘못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다말이 유다보다 더 의로운 것입니다. 왜냐면 다말은 하나님의 씨(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믿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중에 유다가 이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는 나보다 의롭도다" 이렇게 말이지요... 유다는 자식이 죽을까봐 염려하면서 가만있었지만 다말은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의 행동은 정말 문란한 행동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마태1장 참조) 부디, 성경을 볼 때 약속의 관점으로 보기 바랍니다. ;약속과 성취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윤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약속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두 번째로, 안식일에 대한 문제인데요...

주일에 매식하지 말라는 것은 오직 거듭나고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 요구하고 싶습니다. 왜 매식하지 말라고 한 것은(이 말은 제가 강조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죄를 짓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사먹으면 우리는 좋지만 그들은 언제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사먹을 때 우리 교회 좋은 교회인데요 교회 나오세요 혹은 예수 믿어보세요 라고 전도해보세요. 주일날 매식하면 그들에게 전도할 명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일날 좀 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주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절제를 위한 절제가 아니라 예배를 위한 절제입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참 사랑이 매식을 절제하게 하는 진정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려고 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비전에 대해서?

질문:

> 느헤미야는

>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은 일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저 마음에 성전을 다시 건축해야겠다는 '부담감'으로 성전을 건축했다고 들었는데요..

>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계시가 없어도

> 이런 식으로 보여주시는 것도 비전이라 할 수 있나요?

답변:

좋아요...

느헤미야가 예레미야와 같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직접적인 음성과 계시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꿈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환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의 감동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확신으로 주어집니다.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뜻)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은 반드시 음성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음성의 형태로 이것을 안 것이 아니라 기도응답에 의해 확신이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했지만 주님이 응답하시고 인도하지 않으셨으면 성전건축을 하려고 나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감화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가인의 아내는 누군가?

질문:

> 창세기를 읽다가 느낀건데요 아담의 아들가인은 누구랑 결혼했나요?

> 아담과 하와 말고도 또 누군가를 창조하셨었나요?

> 그때의인류는아담,하와,가인,아벨,뿐이아닌가요?

> 또 가인의 아들들의 아내가 있는데요 그들은 어디서 나온 사람인가요??

답변:

좋습니다.

아담은 가인을 낳은 후에도 계속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과 셋만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담의 아들 가인은 그 누이랑 결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말고 다른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경에 가인과 아벨의 이름만 나온다고 해서

다른 딸들을 낳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가인은 많은 딸들을 낳았는데(아담의 수명은 거의 1,000년이 되지요)

그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기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질문: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한분으로 생각해야 하나요? 각각 인격을 가지신 하나의 인격자로 생각해야 하나요? (그러면 세분이 되는 건가요?) 성경에도 보면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이런 말 이 있던데,,,,,, 글쎄요 헷갈립니다.

그리고 따로따로 떼어놓고 그 분들을 생각해야 한다면, 기도할 때는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나요? 물론 주님께서는 다 들어 주실거라 믿지만요.

그렇다면 기도를 끝마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는건가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앎아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또 한 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하는 거 하나하나 아신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하나님과 대화를 끝마칠 때에는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해야만 하나요?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응답하시나요?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기도할 때 그 말에 얽매여 지는 거 같아서 질문합니다.(자기전 기도할 때 잠들어 버려서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잔적이 많은데 그럼 그 기도는 듣지 않으신 거예요?)

답변:

어려운 질문이지만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우리 이성으로 쉽게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2차원의 개미가

3차원의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하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한 본성에 잇어서

단일하시며 유일하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정,의를 소유한 인격으로 말하자면 세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 헷갈리는 이유가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과 권능이

하나인데 본성과 인격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본성은 하나요, 인격은 셋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서로 하나이십니다.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십니다. 따로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세 인격이 전적으로

하나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으시면 됩니다.

성부께서는 계획하시고 선택하시고 작정하십니다.

성자께서는 성취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적용하시고 보증하시고 확실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성부께서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성부, 성자, 성령께서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이시며, 동일한 신성과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분이란 의미에서 유일하시며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존재적으로는 삼위로 존재하시며, 사역적으로는 삼위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는 누구에게 합니까?

원칙적으로 성부에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중요하지 단지 입으로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란

말을 주문처럼 붙여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 그런 말로

기도를 끝내지 않아도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고 말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형식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 주 예수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공로를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을

앞에 내세우고 하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디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과 믿음으로 말을 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 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자격도 없는 자들이지만

오로지 주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소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변:

참소한다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헐뜯고 죄를 과장해서 고해바쳐서 벌을 내리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소하는 일은 사단이 하는 주된 일이었습니다.

사단은 성도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해바치며 성도들을 비난하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써 사단은 하늘에서 쫓겨나서 참소하는 일을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기에 지상에 남아 있는 교회들을 괴롭히고 핍박하고 훼방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참소하는 자가 하늘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늘에서는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땅에서는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로 승리하셨고 앞으로 재림하심으로써 완벽하게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자는 그 승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마라나타!

여호수아를 읽을 때 왜 하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잘 해주셨나요?

질문:

저는여 여호수아를 읽고 있는데여~~

궁금한 점이 있어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만드셨는데...왜 하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그토록 잘해주셨나여??

그리구여..전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도와주기 위해서 다른 민족은 많이 죽었는데..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 궁금하답니다!!

답변:

좋아요.

(1)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사랑하셨다는 증거나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더 특별히 사랑하셨고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은 성립이 되어도 이스라엘만 사랑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창12:1-3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복'을 받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제사장 민족'으로 쓰임받기 위해 부름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모든 나라 민족들에게 증거하고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2)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멸망시켰다는 증거도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기 위해 다른 민족을 파괴하셨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전쟁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를 들어,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불타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의 관영한 죄악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될 때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싸우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민족의 손에 맡기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섬길 때만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방민족들을 무조건 무너뜨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들과 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는 데도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만 보지 말고, 아이성 전투에서 처참하게 깨어지고 패배한 것도 기억해보세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매우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어보면, 이방민족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면 그들을 받아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사랑을 받고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 제사장 민족으로서 사명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재림의 날?

질문:

다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얼마 남지않았다고 그러더라구요..

근데...그게요..진짜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인가요...??

아님..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인가요...누군가 그러더군요...

앞으로 몇 년 안에 주님은 오신다구요...성경에 나온 종말의 때와..지금의 모습이 비슷하다고요...근데그런 걸 정해놓는 이들이.. 이단이며 사이비 아닌가요? 궁금합니다..그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하루하루 가까워진다는 뜻인지..아님 진짜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인지요?

답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모든 지체들에게 주님의 평강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은 (1)아무도 그날을 알 수 없다는 사실과

(2)그날은 반드시 어김없이 찾아오고 만다는 사실과 (3)그날은 홀연히, 느닷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우리는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세상에 전파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고 모든 종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반드시 끝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때와 기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족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끝은 있고 때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느 임금이 선전포고를 한 뒤 잠시 기다렸다가 일시에 공격 개시하는 것과 같이,

숨 안 쉬기 내기를 할 때 물 속에서 코를 붙잡고 참고 있듯이,

권투선수가 결정타를 날리기 전에 심호흡을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그렇게 결정타를 날리시기 전에 참고 기다리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때를 "종말" "말세" "마지막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혼란한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언제 오실 지 그 날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날이 매우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어볼까요?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날이 임박했다고 할 때 그것은 실제로 며칠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말입니까?

죽음은 언제 일어날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한 시간 뒤에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지요.

개인의 종말은 죽음으로, 역사의 종말은 재림으로 마무리됩니다.

개인의 삶속에 죽음이 임박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그렇게 임박해 있습니다.

아무도 언제 그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오시는 그 날이 언제인지 묻지 마시고

그날에 당당하게 그리스도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순결하게 정결하게 거룩하게 깨어 있으면서 주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하루하루를 설렘으로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깨어 있는 모든 지체들이 되기를 바라며....

마라나타!

He's coming!

엘리사에 대한 의문?

질문:

> 열왕기하 8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하사엘에게 이해가 안 되는 몇 가지 행동을 했는데요 첫째는 10절 하사엘에게 거짓말을 시킨 것이었고 두 번 째는 11절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는 것이었습니다.

> 굳이 곧 죽을 왕에게 "너의 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거짓말 한 이유는 무엇이에요?

> 그리고 11절은 약간은 미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사실은 아주 약간 섬찟 했습니다^^;)

> 괴이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인간인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서 좀 여쭈어 볼라구요..

> ^^그동안 시험기간이어서 홈페이지를 들어오지 못하다가 오늘 이렇게 질문을 몇 개 올립니다.

>

> 아 또 있는데요 열왕기하 10장에 보면 예후가 나오잖아요. 예후는 정말로 하나님의 일을 정열적으로 행했던 사람같아요. 그런데 29절이 잘 이해가 안 가네요.바알신당도 다 헐고 그랬는데 왜 죄가 떠나지 않았다는 거죠? 그것도 하필이면 죄중에서도 여로보암이죠? 여로보암이랑 예후는 어떤 관계였나요?

답변:

예, 좋은 질문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영혼은 너무나 보기 아름답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깊이와 즐거움을 소진이에게 더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음...질문한 내용은 잘 알겠습니다.

에리사가 하사엘에게 거짓말을 하게 했지요. 이것은 거짓말을 해도 무방하다고 엘리사가 본 것입니다. 왜냐면 벳하닷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벳하닷이 엘리사를 찾아온 것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병 낫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찾아온 것이라면 이런 말을 하도록 시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허용적 지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벤하닷은 수없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괴롭혔던 이방왕이었기 때문에 그가 엘리사를 찾아온 것은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하사엘을 가만히 바라보니까 하사엘은 벳하닷보다 더 악한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할 것이 영감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1절 말씀이죠. 쏘아보았다는 말은 가만히 지켜보았다는 얘깁니다. 눈이 뚫어지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본 이유는 하사엘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할 악한 일들을 예언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엘리사는 그것 때문에 울게 된 것입니다. 하사엘은 악한 왕 벤하닷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된 것인데, 그 하사엘이 벳하닷보다 더한 악한 왕이 될 것을 엘리사가 알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벤하닷이 악한 왕으로 쓰임받았고, 하사엘이 더 악한 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하지 않자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서 벤하닷이 쓰임받았고 계속해서 하사엘이 더 악한 도구로 쓰임받게 된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사엘에 의해서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고서 엘리사는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가만히 지켜보시다가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보고 우신 것입니다. 이렇듯 아무리 이스라엘이라도, 예루살렘이라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요...

예후가 떠나지 않은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가? 에 대한 것인데요.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후는 열심을 다하여 바알산당을 파괴하는 일을 충성스럽게 했지만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는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갈라지게 되는데 북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바로 여로보암왕입니다. 여로보암왕이 임금의 자리에 올라보니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세 차례 절기가 되면 남쪽 유대나라의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북쪽 단과 남쪽 유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인 벧엘에다 금송아지를 세우고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가지 말고 금송아지 앞에 절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예후는 바알산당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무너뜨렸지만 아쉽게도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숭배는 오히려 허용/장려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떠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후는 자기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 백성들이 남쪽 유다로 순례하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후는 금송아지숭배를 인정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9장의 왕과 우상숭배?

질문:

사무엘 9장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원할 때 많이 섭섭해 하셨잖아요.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게 의존하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맞나요?) 그럼 그것은 우상숭배랑 무엇이 달라요?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거든요. 우상숭배는 곧 드라빔이나 이방신에게 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외의 것을 우선으로 하여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되는거라고요..만약 제가 들은 것이 맞다면 왕을 세우는 것이랑 우상숭배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주셨어요. 그리고 훗날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훌륭한 왕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사역을 행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왕과 우상숭배의 공통점과 차이점입니다.(덧붙여서 왜 왕을 주셨는지도요..)

지금 제 글이 횡설수설 하지요?^^이걸 쓰고 있는 저 자신도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고 제가 알고 있던 기본적인 것들이 헷갈려서 그렇답니다. 목사님 바쁘신데 자꾸 이런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에 대해 많이 섭섭해 하시는 것 같으면서도 왜 왕을 주셨는가? 질문의 요지가 맞지요?

자, 먼저 왕에 대한 규례가 무엇인지 봅시다. 신명기 17장 14절부터 17절까지 보기 바래요. 여기 보면 우리가 몇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1)이스라엘은 원래 신정국가입니다. 즉, 왕이 없이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국가통치체제라는 사실.

(2)세상나라와 같이 왕을 세우려고 의도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율법에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내걸고 있습니다.

(3)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 그 기준으로서 첫째, 이방인이나 타국인은 안 되며, 둘째,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세울 것이며, 셋째, 군사들을 많이 두지 말 것이며, 넷째,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이며, 다섯째, 은금을 많이 두지 말 것. 등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자세히 보면, 왕을 세우는 것 자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조건에 맞는다면 하나님도 O.K.하신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요구했을 때 사무엘선지자나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셨는가? 하는 문젠데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말씀을 따라 왕을 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열국과 같은 그런 왕을 구한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사무엘서의 상황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선 사무엘선지자가 노쇠하였고 그 아들들도 변변찮았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좀더 강력한 왕을 요구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기준을 따라 요구하는 겁니다. 키가 크고, 힘이 세고, 무기를 잘 다룰 줄 아는 일종의 코만도 이미지의 왕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무엘이 섭섭해 한 것은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데 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요구를 따라 왕을 주신답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기준에 부합되는 왕을 주십니다. 그가 사울입니다. 사울은 키가 크고 잘생기고 마음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은 그를 버리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 '다윗'을 준비하시고 왕으로 주십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솔로몬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라기보다는 자신은 단지 재판관으로 부름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을 왕이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한 일을 많이 범하게 되고 맙니다. 역사를 보면 항상 선한 왕들은 자신들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심을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디.

자,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 왕이십니다. 하나님만이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된 왕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기준에 부합된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것이기 때문에 곧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된 왕은 자신을 왕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왕이 스스로 왕으로 내세우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면 그는 악한 왕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선한 왕들은 항상 자신이 '목자' 혹은 '재판관' 혹은 '청지기'로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왕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왕'같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왕은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의 형상에 비기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왕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처럼 금신상을 세우는 것과 같이) 자기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에다 비긴다면 이것은 분명히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왕과 몇몇 소수의 선한 왕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스스로를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왕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만약 자신을 왕이 아니라 청지기이자 목자로 여긴다면 그것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