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가지 질문들
질문:
편의상 번호를 매겨 하나하나 물어볼께요. 얼마 안 되는 양이긴 하지만.. 평소 정말 궁금해왔었고 여기저기에 물어보고 알아보고 했지만 아직까지 의문들의 반도 제대로 못 해결했어요. 심지어 어느 목사님께도 물어본 적 있지만 그때도 확 풀리는 그런 느낌은 없고, 답답함은 여전했었죠. 통신의 익명성에 숨어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만 하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1.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여기 있는 글들, 이 페이지의 것만 읽어봤지만 우연히 바로 아래에 관련글이 있더군요. 그렇지만 납득은 가도 제 의문은 여전히 안 풀렸어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전부 쓸어버리시려고도 하셨잖아요.
더군다나, 모든 사람이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나뉜다고 하는건, 어떤 영혼들은 분명히 고통을 받으며 사후의 영생을 보낼텐데, 그건 왜일까요? 그럴려느니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여기서 어떤 대답을 들어봤어요. '자유의지'를 줬기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과 지옥에 가는 것이 모두 자기의 탓이라고. 그런데 환경이란 것도 있고, 악의 성향으로의 지름길 코스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부 밟은 것처럼 살게'되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어요? 주위 환경때문에.. 만약에 전부 천국에 가길 원하셨다면, 그냥 자유의지를 주고 애초에 천국으로 보내버려서 전부 즐겁게 살거나 하는 건 안 되는 걸까요? 지옥에 가는사람이 꼭 있는만큼(연옥도 아니고, 영원토록 고통스러워 한다는 말이 성경엔 참 많이 나와있어요.) 하나님이 저흴 왜 창조하셨는지는 의문이 들어요. 더군다나 그 자유의지라는 것도 삐딱하게 보면 하나님이 만든 무대에 서서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엔 짧은 인생 마치고 천국 지옥 기차를 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요? 과연, 영혼과 관련한 진정한 자유의지인가가 궁금해요. 마치, '공부를 하건 안하건 자유' 라고는 하지만, 결국 사회적인 성공(높은 지위나, 부)를 얻기 위해 만들어놓은 가장 평탄한 길이 결국 공부를 하는것과 같은 것처럼 말예요. 착하게 살라는 길을 만들어놓고 그 길을 가는것도, 안가는것도 자유의지대로. 그러나 대가는 지옥이 될수도 있다는 건지..
(말이 길어지다보니 많이 벗어난감이 드네요. 너무 악의에 찬 질문같이 보이는데 그점 죄송하구요. 이만 하겠습니다. 사족이지만, 자세한 답변해주시길 바랍니다.)
2. 울면서 하는 기도의 진실됨은 어디까지일까요?
물론 아무도 없는 방안에 혼자서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성령님를 뵈서 감격하여 운다던지, 아니면 자신을 후회하고 채찍질하고 반성하며 눈물이 나온다던지 하는 것의 진실됨을 묻는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꼭 운다는것에 중점을 둬서 한 것도 아니에요. 그만큼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울기도 하는 그런 기도..제가 말하고픈 상황은.. 일례로. 어떤 무리 안에서 어떤 사람이 열정적으로 한 설교를 듣고, 조용한 분위기에 어쩌면 마음을 울리는 음악같은 것도 흘러나오며, 어둡기도 한 그런 상황에서 하나둘씩 기도를 하다보면, 그 주위사람들 전부 언제부터인가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손을 꽉 잡고 경건하고 엄숙한 표정과 함께 가끔씩 우는 사람도, 크게 소리치며 기도하는 사람도, 또는 방언을 중얼거리는 사람도 함께 보이는 그런 상황입니다. 꼭 찝어 말하자면.. 캠프나, 수련회나, 여튼 그러한 특별한 날들의 마지막 날쯤에 나타나는 그런 상황말이에요.(제가 간 캠프만 그런진 몰라도, 제가 직접 겪어봤거든요.) 말이 너무 두서가 없는데.. 대충 아셨으리라 믿고 계속 얘기할게요.제 의문은 이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혹시 조명이나 분위기, 음악에 알게 모르게 심리적인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그 이전에 목사나 전도사의 열정적이고 강렬한 말을 들었거나 하여, 그 모든게 복합되어 마치 자신이 진정 반성하고있는 기분이 들고, 모든걸 토해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있는것처럼 느끼는게 아닐까 하는거지요. 본의 아니게 너무 문장을 길게 썼네요. 그러니까 분위기, 음악, 조명, 설교, 주변사람들의 행동등에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서는 비슷한 행동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거에요. 즉 자기 자신이 진정 그러해진게 아니고, 단지 주위의 영향에 더 끌린게 아닐까.. 왜냐하면 그렇게 한번 한다고해서 인간이 변한 경우를 별로 못봤거든요. (너무 길게 똑같은말 반복했네요. 이제 짧게 하겠습니다.)
3. 세상의 불평등은 왜 있는 걸까요? 악은 왜 존재하며, 악이 하나님께서 정한 필요악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파멸하는 사람들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그걸 바라시는 걸까요?
4. 악한 사람일수록 더욱 성공하거나 잘사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런데 옛부터 지금까지 그런 자들이 너무나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실까요? 이건 어렸을 때 든 의문이에요.
5. 성경에 나타난 말을 인용하여 너무 '억지로' 그것에 현실을 껴맞추려고 하는 성향이 교회에 있는것 같아요. 옛날에 생긴 말의 어떤.. 신성함이나 절대성을 나타내기 위해 주위 깊게 듣지 않는다 해도 금방 사리에 맞지 않는듯한 말들을 교회에서는 많이 들었습니다. 단지 가설에 불과한 것을 그것이라는듯 말하고, 또 그게 정말 틀린 경우도 종종 있고.. 굳이 예를 들진 않을게요. 하지만 그런 경우가 정말 있답니다. 보통의 상식적인 생각에 비추어보면 말이죠. 이걸 단지 '믿음이 없어서 그런거야!' 또는 '다른건 다 틀린거야!' 라고 덮어놓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6.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이건 정말 중요해요. 왜냐하면, 단지 천국의 존재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건(천국가려고 라든지)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천국의 존재를 제껴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만약 '결국엔' 천국에 가기위한 행동이라면(하나님을 믿는것과 관련한 모든 행동이) 그건 옛날처럼 '천지신령께 비나이다..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것 같아요.
7.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성경을 부정하거나, 종교를 부정하는 말들을 커갈수록 훨씬 많이, 훨씬 더 강력한 논리와 설득력을 가진 것들로 듣게 되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요?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질문이 굉장히 긴 것 같네요. 답은 간결할수록 좋지만, 답도 나름대로 긴 질문에 호응해서 나온 답이었으면 좋겠어요. 구체적인 답 없이 그냥 덮어놓고 하는 말은 이제껏 많이 들어 충분합니다. 그럼 답변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답변:
음...상당히 많은 질문이지만...속 시원하게 대답해줄 자신이 없지만 그러나 고민을 풀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아마도 질문하신 분은 고등학생이 아닌 것 같군요...고등학생 수준이 아닌 것 같애요.)
(1)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최초로 언급되는 성경말씀은 창1:26절에서 30절까지 말씀이죠.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우리의 형상을 다라 우리의 모양대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이 범죄할 것을 아셨지만 창조를 감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냥 로봇이나 기계로 만드셨으면 좋았지 않겠어요? 성경이 말해주는 인간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입니다. 그 의미는 한마디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 즉, "신"의 영역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에 참여하고 그것을 누리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물질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참여하고 누리는 곳입니다. 지옥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떨어져 사는 것의 고통을 영원히 누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지금 우리 가운데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경험하고 있으며 단지 사후에 경험하는 것은 그 경험이 영원하다는 것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31절을 꼭 읽어보세요. 우리의 지혜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만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지요.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구원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태11:25절) 우리의 지성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있고 타락해져 있기 때문에 성령의 초자연적으로 조명하시는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일을 행하시는 지, 왜 그런 일을 행하시는 지 결코 알 수 없지요.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영이 질문한 지체의 마음을 도와주시도록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좋은 말로 논리적인 말로 설명하더라도 어쩔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역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임의로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하려 듭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을 부정하려 하기보다는 빛 때문에 자신의 어두움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행하시는가? 라고 질문하기 전에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의지인 주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이렇다 저렇다고 판단할 자격이 도대체 있는 걸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사실 저에게도 있지만 저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 기준을 따라 판단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짧은 지면에서 다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꼭 롬9장을 묵상해보기를 바래요. 꼭. 우리는 질그릇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입니다. 왜 우리를 이런 모양으로 빚어가시는지 그 이유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아요. 결코...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죠. 창세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나오죠?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에 한 사람과 같이 되었다는 말씀이 나오죠? 그것은 우리 생각이 기준이 되어 버리게 만드는 것을 말한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기준이 된 거예요. 내가 봐서 옳으면 옳은 것이고, 내가 봐서 이상하면 이상한 겁니다. 그러나 사실 옳고 그름은 "하나님 보시기에"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이죠.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사시대와 같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생각, 자기 기준, 자기 마음이 곧 하나님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성이죠.
--결국, 누구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고 누구는 지옥에 가고...이런 것이 불공평하지 않을까 생각들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답니다. 왜냐면 그분은 토기장이시오 우리는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겠느냐"(롬9:14-21)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저는 솔직히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대답하고 싶군요. 질문한 지체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신앙하는 깊은 지식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제가 확신하고 신앙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나보다 훨씬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선과 지혜로 말미암은 놀라운 계획은 이루 측량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참고로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욥기 40장과 41장을 꼭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으면 더 좋을텐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시니까요. 저는 또한 하나님이 너무 불공평하시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버립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나보다 훨씬 착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과 선하심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영광이며 특권인지 모릅니다.
(2) 울면서 하는 기도의 진실됨은 어디까지일까요? 그러니까 분위기, 음악, 조명, 설교, 주변사람들의 행동등에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서는 비슷한 행동을 하는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분위기에 따라서 우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사실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삶의 변화는 없답니다. 자, 우리가 이것을 숨기지 말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상황을 매우 잘 분석하고 있군요. 매우 객관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제가 이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을 얘기해보죠.
첫째, 우리가 지성적인 깨달음에서 시작하지 않는 울음 내지 애통함은 다분히 감정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기도가 진실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보고 위선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환경이나 분위기에 의해서 조장되는 눈물의 기도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런 사람을 향해 우리는 위선자니 하는 말로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봅니다. 분명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자기감정에 솔직하려고 할테니까요.
둘째, 우리는 무엇이 '참된 감정'인지라고 말하기보다 '축복된 감정'이라고 불러야 적합할겁니다. 왜냐면 예수님도 이런 감정이 있으셨고, 또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도 말씀하셨거든요. 애통하는 것은 그냥 서러워서 애통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또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감정이 '분명한 지적 발견' 혹은 '진리에 대한 자각 내지 깨달음'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축복된 감정'이 분명합니다. 대게는 지적인 자각이나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다분히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한 것일 수는 있겠지만 사실 '축복된 감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질문한 지체에게 '축복된 감정'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3) 세상의 불평등은 왜 있는 걸까요? 악은 왜 존재하며, 악이 하나님께서 정한 필요악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파멸하는 사람들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그걸 바라시는 걸까요?
이 질문은 앞에서 (1)번 질문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요점만 생각해볼까요?
첫째, 하나님은 절대 선하시고, 절대 지혜로우시고, 절대 자유로우시며, 절대 영원하시고, 절대 불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는 행하시는 면에서 절대 주권적이신 분입니다. 절대 자유롭다고 한 말이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 세상에 존재하는 악들, 필요악들, 악한 사람들의 존재, 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절대 자유와 지혜와 선함이 침범되거나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악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선함과 자유를 드러내는 도구로써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그러한 악한 존재들을 기뻐하시지 않지만 그러한 것들을 당신의 지혜와 선함과 자유를 드러내기 위해 일시적이고 잠정적으로 내버려두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즉,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과 지혜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아주 좋은 비유를 말씀하셨지요. 마태13장 24절에서 30절까지 기록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의 말씀이죠. 이 귀한 말씀은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보여준답니다. 꼭 읽어보세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으로 예수님은 마태13장 36절에서 43절까지 자상하게 설명해주셨답니다.
여섯째, 이 질문에 대해서 좀더 깊은 연구를 원한다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책이나 혹은 [하박국 강해]를 꼭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는 사실 먼저 깊이 고민한 선배들의 책을 읽어보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답니다.
(4) 악한 사람일수록 더욱 성공하거나 잘사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런데 옛부터 지금까지 그런자들이 너무나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실까요?
--이 질문도 앞에 (3)번 질문과 비슷하군요.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라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암시되었듯이 사실 농부들의 경험을 기록한 책을 읽어보면 (저는 농사지어본 경험은 없지만 많이 들어보았답니다.) 곡식보다 가리지가 더 잘 자란답니다. 가라지가 더 생명력이 질기답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자세하게 대답하기보다 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군요. 시편 73을 꼭 읽어보세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쓴 시편73편 강해와 함께 시편 73편을 찬찬히 묵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73편은 악인이 의인보다 잘 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시험들뻔한 사람이 쓴 노래랍니다. 꼭 읽어보세요~!
--또한 하박국서도 마찬가지랍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조차도 그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해서 불평하는 투로 시작하고 있지요. 그러나 선지자는 나중에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함으로 글을 마무리하지요. 질문한 사람도 꼭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답을 얻으려고 하지 말기 바래요. 먼저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고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시는 것이 더 좋겠죠? 저 역시 그런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답니다. 아주 오래전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질문한 지체도 그런 깨달음의 과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깊이 고민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가르쳐주셔서 깨닫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일러드린 본문이 그 답을 분명 주고 있으니까 본문을 가지고 씨름해보시기를 바랍니다.
(5) 구체적으로 어떤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이해는 갑니다. 사실 그런 경향이 없다고 부인할 수 없겠지요. 질문이라고 하기 보다는 화가 나서 하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런 경우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경우를 보면 내가 만약 그런 입장이라면 나는 과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과연 그렇게 억지 주장을 하지는 않을까? 나는 신중하고도 틀림없으며 정확하게 항상 말하는가? 라고 생각해보면서 나 자신을 낮추는 계기로 삼으려고 노력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저에게 항상 도전을 주는 말씀은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더 실수를 잘하기 쉬운 입장에 있기 때문에 더욱더 겸손해야 하며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점과 관련하여 야고보서 3장을 꼭 묵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6)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좋은 질문이고 좋은 지적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천국의 개념이 단지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런 물질적인 유토피아라면 아니에요 그러나 천국의 개념이 만일 하나님 자신이라면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천국의 개념은 무슨 황금, 다이아몬드, 휘황찬란한 보석들, 뭐 그런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천국은 하나님 자신과 직접 관련된 것, 즉,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어떤 곳이라고 봅니다. 만약 천국의 개념이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할 수만 있다면 천국이 우리의 목적이자 방법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왔던 그런 천국은 물질적인 개념으로 많이 배웠지요. 그렇다면 제가 볼 때 신앙의 목표는 우리가 배워온 그런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것이죠. 이 주제에 관하여 존 파이퍼 목사님이 쓰신 [여호와를 기뻐하라](생명의 말씀)를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군요. 꼭 읽어보세요. 너무 귀한 책이예요. 좀 얇은 책을 원한다면 존 도우슨 여사가 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예수전도단)이란 책을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7)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성경을 부정하거나, 종교를 부정하는 말들을 커갈수록 훨씬 많이, 훨씬 더 강력한 논리와 설득력을 가진 것들로 듣게되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요?
--제가 볼 때 그 이유는 우리가 믿음을 가진 후로 믿음을 변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냥 믿음을 가지고 대충 살려고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세상은 더욱 더 예리한 질문과 그럴듯한 논리로 우리를 공격하지요.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믿음을 가진 다음에는 그 믿음의 이유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고민하지 않는 믿음이 세상의 논리에 쉽게 무너지기 쉽다고 봅니다. 믿은 다음에는 그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변증을 배워야 합니다. 변증이란 변호+증명입니다. 당신이 믿는 것의 이유에 대해서 변호하고 증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첫째, 성경을 즐거워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삶을 사십시오. 한꺼번에 성경을 보지 말고 하루에 2장이나 10장 정도 규칙적으로 읽고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매일 밥을 먹듯이 말이죠. 성경도 한꺼번에 읽고 또 쉬었다가 또 읽고 하는 것은 별로 유익이 없답니다.
둘째, 세상의 논리에 대해 더 강력한 믿음의 논리로 당신의 믿음을 변호해나가십시오.
셋째, 당신의 변증론을 다른 친구들과 나누십시오.
넷째, 먼저 고민하고 몸부림쳤던 선배들의 책들을 많이 읽어나가십시오. 적어도 한달에 한권정도는 경건서적을 읽어나가도록 하십시오.
다섯째, 계속 공부해나가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배움과 영적 성장은 같이 갑니다. 배움을 중단하면 믿음의 진보도 중단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질문에 대해 저는 좋은 대답을 했다기 보다 좋은 방향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질문한 사람에게 지혜를 주셔서 지속적으로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천년왕국?
질문:
> 며칠 전에 어떤 친구에게서 천년왕국이란 말과 음부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 그 애가 말하는 내용이 너무 사이비틱해서 목사님께 여쭙니다.
> 장로교에서 천년왕국이란 말을 쓰는지....
> 그리고 지옥이랑 음부를 나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 좀 가르쳐 주세여~!
> 감사합니다..............^^
답변:
천년왕국은 성경(요한계시록)에 분명히 나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문맥을 따라 자세히 봐야 할 성질입니다.
왜냐면 천년왕국(밀레니엄)이란 단어는 계시록에만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왕노릇하는 상징적 기간입니다.
장로교에서 천년왕국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천년왕국을 믿지 않습니다.
장로교의 신학적 거장이었던 존 칼빈도 문자적인 천년왕국을 믿지 않았습니다.
천년왕국에서 중요한 것은 천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왕노릇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가 다양합니다. 크게 볼 때 천년왕국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보는 견해가 '전천년왕국설'이고,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보는 견해가 '후천년왕국설'이고, 천년이란 기간은 문자적으로 천년이 아닌 상징적인 기간으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카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무천년왕국설' 이렇게 크게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집니다.
원래 장로교 신학은 무천년왕국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후천년왕국설은 요즘 거의 지지되지 못하고 있으며, 전천년왕국설은 주로 침례교에서 신봉하고 있는 종말론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장로교회 중 많은 교회가 전천년왕국설을 믿고 있는 이유가 한국교회 초창기에 들어와서 사역하고 가르쳤던 선교사들이 대부분 전천년왕국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천년왕국설을 가르친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단은 명백하게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구원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절대성을 믿습니다.
천년왕국설에 대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왕노릇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 각 나라에 전파되는 것을 말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다음에는 왕노릇이 더 이상 필요없을 것입니다. 원수들은 완전히 정복될 것이고 이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지옥과 음부에 관한 얘기는 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이 죽어 들어가는 무덤을 가리켜서 '음부'라고 일컫기도 했습니다.
즉, 구약에서 원래 '음부'란 말은 '죽음' 혹은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음부는 의인이나 악인이나 예외 없이 들어가는 곳으로서 많이 얘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음부가 '지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중간기와 신약시대에 와서 이 음부가 '지옥'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지옥과 음부를 같이 볼 수도 있고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문맥을 따라서 해석하면 됩니다.
의와 공의란 무엇입니까?
답변:
성경에서 의(義)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것’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 혹은 신분’을 의미합니다. 한자를 잘 보세요. 내가 제물을 짊어지는 모양이지요? 의는 나를 대신하여 흠 없는 제물이 희생을 치룰 때 하나님께서 그 희생을 대가로 우리를 용납하시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이 ‘의’를 ‘하나님의 날개’ 혹은 ‘그리스도의 옷’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반면 공의(公義)라고 할 때는 하나님에 의해 옳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즉 사회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입은 자의 신분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 혹은 하나님의 은혜가 잘 드러나는 사회질서를 가리킵니다. 특히, 성경에서 공의를 잘 다루고 있는 본문은 레위기 25장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공의는 언제나 토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즉, 공의란 개인의 소유와 하나님의 소유, 그리고 공공의 소유를 잘 구별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나의 것과 남의 것, 그리고 우리의 것,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잘 구별하는 사회를 공의로운 사회라고 하고, 그렇지 않고 경계선이 무너져 혼란한 사회를 불의한 사회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의 것을 잘 인식하고 분해하는 것입니다. 불의란 공동의 것을 개인의 것으로 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물론 개인의 것을 빼앗아 공동의 것으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로운 사회는 개인의 것은 개인에게, 공동의 것은 전체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 토지를 개인의 것으로 삼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사람이 토지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토지사유제는 그런 점에서 모든 불의의 뿌리입니다. 모든 불의와 죄들이 토지독점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에 대해 더 깊은 공부를 하려면 성토모 홈페이지에 한번 방문해보십시오.
아가서는 어떤 뜻으로 쓰여졌나요?
질문:
지금 아가서를 읽고 있는데여...
>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어여..분명히 사랑에 관한 이야긴데...
>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겨져??
답변:
아가서는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간의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란 뜻으로 가장 우아하고, 가장 거룩한 노래를 뜻합니다.
아가서는 노래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아가서를 통해 우리는 참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배웁니다.
세상 가요에 '사랑'이 빠진 것은 거의 없지요?
아가서는 가장 탁월한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솔로몬(평화의 왕)과 술람미(평화의 왕후) 간의 사랑의 노래가 사랑의 고백을 서로 주고 받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아가서를 읽으면서 다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합니다.
저도 아가서를 언뜻 읽어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깊여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또 깊이 기도하고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만 겨우 그 뜻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정도입니다. 저도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그러나 저는 아가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큰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 깊은지,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 깊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가서를 읽기 전에 깊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연구한 다른 분들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가서는 우리에게 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주는 귀한 책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아가서를 '지성소'에 비유했습니다. 그만큼 아가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 아가서가 너무나 거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마지막 8째 날이면 어김없이 이 아가서를 낭송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경을 사랑하는 민족에게 아가서는 매우 소중했고, 매우 사랑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지난 주간 아가서를 읽으면서 왜 그들이 이처럼 아가서를 최고의 노래라고 일컫는지 이해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속에 그러한 사랑이 불타오르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은혜가 질문한 지체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답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지키는 12월 25일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의 12월은 비가 오는 장마철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목자들이 밤에 양들을 지키고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겨울이 아니라 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2월 25일이 성탄절이 된 것은 주후 354년부터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청교도들은 성탄절을 지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청교도들은 '더러운 인간들이 발광하는 날'로 비난하였습니다.
1644년 크롬웰은 교회에서 성탄절을 지키는 것을 금지하였고,
성탄절 행사를 치른 사람들을 체포하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위가
이교적인 행위라고 해서 반대했었습니다.
그것이 4세기까지 계속되었지요.
그런데 4세기부터 교회는 생일축하에 대한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생일축하받는 것은 12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습니다.
어쨌든 간에, 만일 우리가 성경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초대교회의 교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성탄절은 없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절기가 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신 날이 축제일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왜 축제일이 되어야 하는지 아직도 의아스럽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탄절을 지켜야만 한다면 그것은 눈물의 날,
회개의 날로 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기쁨의 날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받은 날이니까요^^
칭의와 성화의 관계?
질문:
어느 책을 보다가 '성화'와 '칭의'라는 말을 봤었는데 뜻을 잘 몰라서요....
답변 부탁드릴께요....
답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칭의(justification)이란 '의롭다고 칭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다'는 뜻입니다.
성화(santification)란 '거룩함을 얻다' '거룩하여 지다'는 뜻입니다.
칭의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칭의는 성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것은 순간적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칭의는 신분의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화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것은 진행적입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영원히 지속됩니다. 성화는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밀접히 관련이 있지요. 칭의는 성화를 약속하고, 성화는 칭의를 근거로 시작합니다. 즉, 칭의가 없이 성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성화가 약속되지 않는 칭의는 없습니다. 칭의와 성화의 중심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칭의와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화를 사람의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 어떤 것으로 봅니다만 사실은 칭의와 성화 역시 전적은 은총입니다.
칭의는 한 영혼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출생의 사건'과 같고, 성화는 새 생명이 자라나는 '성장의 사건'과 같습니다. 칭의는 땅에다 씨를 심는 것과 같고, 성화는 심은 씨앗이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심는 것과 자라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다함을 얻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음으로 하나님의 의롭다하시는 판정을 받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음으로 하나님의 거룩케하시는 은총을 받습니다.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질문: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것들에 자제하면서 살고 있잖아여..그것에 대한 애기인데 읽어주시고 답변좀 부탁드릴께여.
오늘 학교를 마치고 친구2명(둘다 기독교이며 믿음도 좋습니다)이랑 저까지 셋이서 집으로 돌아가던중 한친구가 자기는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였다며 말을 꺼내었습니다..
친구1:나 이제부터는 노래방도 안가고 가요도 안 듣고 세상 것들을 자제 할꺼야..
친구2:야!꼭 그렇게는 안해도 돼.가요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꼭 하나님을 어기는 짓은 아니야.
그러자 친구1이 세상것들을 왜 자제한다는 것인지 설명하였습니다
친구2:그것들이 다 사탄의 노래라면 가요를 부르는 가수들(기독교인)은 뭐지!?!
가수들 중에서 교회에서 자기노래(가요)를 불르는 사람도 봤어!그사람도 절실
한 기독교인인데 그게 잘못된거야?!!!
그러면서 두친구는 의견이 엇갈리면서 분위기는 나빠졌습니다..친구2는 그건 아니라면서
화를 냈고 결국 친구1이 "넌 교회를 헛다녔어"라고 말하자
친구2는 자신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고 자신의 믿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는지 화를 내고 그냥 가버렸어여..
여기까지가 이상입니다..그때의 분위기는 진짜로 심각했어여. 더 심한말도 나왔는데 쓰지는 못하겠고..세상것들을 자제하면서 사는 것이 맞는거 같지만 친구2의 주장은 정말 자기의 믿음이 맞다고 확신하듯이 말했어여.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나여? 확실한 기준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목사님..답변 좀 해주세여. 두 친구가 화해를 할수 있게..
답변:
우선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읽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라"(롬14:1-3)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세상 문화(음악, 춤, 노래, 가요, 인터넷, 스포츠, 등등)를 완전히 등지고 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세상을 떠나 산 속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말라는 얘깁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고, 세상 사람들이 춤을 즐기고, 세상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세상가요를 부른다고 해서 주님을 떠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가요를 즐겨 부른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에 음악과 춤의 문제로 질문을 올렸던 지체에게 대답한 것과 비슷한 답변인데요.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명예(이름)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즐거움을 확보하기 위해 절제함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율법적인 태도로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이것은 좋고 저것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왜냐면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주님은 중심을 보시니까요. 주님은 우리가 어떤 동기로, 어떤 목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저는 야구나 농구나 또는 세상 가요나 춤을 즐기는 편이 못됩니다. 할 줄도 모르구요. 그러나 저는 신자가 야구한다고, 신자가 노래한다고, 신자가 춤을 춘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는 저는 모르고 오직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옳고 그름을 주님께 맡기고 판단을 보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자신에게 적용할 때는 단호해지려고 합니다. 내가 성경 보지 않고, 내가 설교준비에 게으른 채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어 스포츠를 열심히 본다든지 혹은 체육관이나 음악공연장을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가정해보세요. 저는 그것이 저에게 주님과의 교제생활이나 교회를 섬기는 제 사명에 대해 굉장한 치명타를 가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체육관을 찾는 모든 교인들보고 비웃지 못합니다. 저는 그들을 비웃을 자격이 없고, 그들의 중심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기 때문일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게는 단호하지만 남들에게는 관대해지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그 친구들 가운데 있을 때 진정으로 대화가 회복되겠지요. 그리고 설령 상대방이 주님과의 교제보다는 세상 것들에 빠져서 즐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그들이 왜 저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교제를 즐기지 못하고 세상 것을 즐기는 것에 푹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디. 사도바울이 말했죠? "날을 중이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14:6) 롬14:5을 보면,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가요를 부르고 안 부르고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누구의 이름으로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요.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명예를 위해 그런 일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 그것을 금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그 중심(의도, 동기, 목적)을 보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관점을 빼버리고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보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그 친구들과 다시 한 번 만나서 이런 제목으로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과연 주님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실까?" "내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내가 사도 바울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예수님은 어떤 죄 때문에 돌아가셨나요?
질문:
>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원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박혀 돌아가신 건가요?
> 아님 저희가 회개할 때 예수님의 피를 어린양의 피를 대신하는 거에요 ?
> 오늘 학원 선생님이랑 한바탕 싸웠어요 저는 어린양의 피를 대신하는 거라구 하구
> 샌님께서는 원죄를 씻는 것이라고 ..
> 휴 ~~ 밝혀주세요
답변: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죄는 우리의 원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포함하지요.
우리가 회개할 때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회개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회심이죠. 큰 회개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생에 단 한번 있는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나게 됩니다.
이 회개를 거치지 않고 거듭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둘째는 자백이죠. 요일1:8,9을 보세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미쁘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자백은 회심 이후에 따라나와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신분에는 변화가 없지요.
우리가 자백(고백)하는 것은 주님의 빛 앞에 모든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심으로 우리의 신분이 변하고,
자백으로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함을 이룹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기사?
질문:
>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나타나셨을 때 다음과 같이 상반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 즉, 마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직후 무덤으로 찾아간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금방 알아보고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마 28 : 1-10). 하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마리아는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도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 20 : 11-17). 그렇지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이 영(靈)으로 생각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누가복음 24 : 36-39)
> 위의 내용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직 하나님께로 올라가지 못한 영의 상태로 존재하는 단계를 거친 후 제자들이 잘 알아 볼 수 있는 육의 모습을 갖춘 새로운 부활태(復活態)가 되어 다시 나타나신 것인지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러한 맥락에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무덤에서의 두 장면이 시차를 두고 일어난 일인지요?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식으로는 어떻게 위의 상반된 내용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답변:
좋은 통찰력으로 보셨습니다. 이건 사건보도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사건의 증인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충실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만약 제자들이 부활사건을 만들어내었다면 이런 차이점이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 사건의 난해성을 풀기 이전에 그 난해성 자체가 부활사건의 역사적 진실성을 증명해주고 있음을 먼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부활의 사건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 따라 보는 시각이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마태가 보는 관점과 요한이 보는 관점이 누가와 마가가 보는 관점이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사건의 진상을 재구성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확실히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이 무덤으로 찾아가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 그 안에 천사를 보고 놀라서 도망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마리아는 가장 연소자였으므로 가장 빨리 뛰어 이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확인하기 위해 뛰어갔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이 본 천사도 이상하게 생각하며 돌아옵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혼자서 빈 무덤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에서 최초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천상으로 올라가서 하늘의 아버지를 뵈어야 했으나 슬픔에 잠겨 무덤으로 오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아시고 빈 무덤에 다시 오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매우 거룩했으므로 하늘의 성전에 갖다 오시기 전까지 사람이 만질 수 없는 성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지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그런 다음에 천상에 다녀오신 후 슬픔과 놀람에 잡혀 돌아가고 있던 다른 여인들은 먼저 만나주셨습니다. 이때를 마태가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신 것이 시간적으로는 훨씬 먼저이죠. 천상이 갖다 오셨기 때문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슬픔에 잠겨 깊은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던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부활하신 주님은 저녁 마가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대충 이것이 부활하신 그 날에 되어진 일의 순서입니다. 마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있어서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요한이 빈무덤을 본 것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 사도는 직접 빈무덤을 목격했던 사람이고, 마태 사도는 부활의 날 저녁에 여자들의 목격이야기를 먼저 들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증언하는 사람의 경험과 입장에서 서 보면 사건을 묘사하는 차이가 왜 발생하는 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증언한다고 가정해보세요. 우리가 '일어난 모든 사건'을 다 증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할 뿐입니다. 또 우리가 어느 사건을 증언한다고 할 때 우리가 간접적으로 들은 것을 생략해버리고 직접 보고 들은 것만 증언한다고 할 때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선택해서 증언했다고 그것이 위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신실한 증언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마태와 요한은 신실하게 부활의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증언이 신실하기 때문에 각자의 증언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역사적 특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만약 부활의 사건이 제자들이 소로 지어낸 이야기라면 결코 이러한 상이한 보도(report)는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두 형태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누구에게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고 누구에게는 만져보라고 하신 것은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에 첫 열매는 무조건 하나님께 먼저 바쳐야 하는 법이었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을 뵙기 전에는 사람이 만지는 것을 예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뵙고 경배하시고 나서 비로소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이같이 첫 열매로서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은 아버지를 뵙기 전까지는 누구도 만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부활 이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이전에는 잠도 못 주무시고 식생활도 보잘 것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이후에는 예수님의 육신은 가장 영광스러운 육신으로 변모되셨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나 다른 제자들은 처음에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분명히 영광스러운 외모로 변모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부활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말입니다. 아멘.
애굽의 제사장?
질문:
목사님 안녕하세요?
>성경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지난번에 궁금했던 것이 있어 글을 올립니다.
>창세기47:22절에 보면 제사장이 나오고 그 제사장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가 하나님을 믿었는지 아니면 요셉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제사 드리며 기도하는 제사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부터 제사는 오는 세대에 계속 계승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4장에는 제사장 멜기세덱이 등장하는데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존중하여서 자신의 십일조를 그에게 바칩니다.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고 더 가까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의 장인 역시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모압왕 발락이 발람에게 찾아가는데 발람은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동방에 살았던 욥이란 인물 역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지 히브리백성이나 요셉의 점유물만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희석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요셉 당시 바로는 요셉을 처음 만났을 때 "이같이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하면서 바로 역시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요셉이후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400여년 동안 지내면서 가나안과 애굽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섬기던 것은 완전히 자취를 감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나안땅에는 멜기세덱과 같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것이 전혀 없이 오직 죄악이 창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밤이 가장 깊었을 때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불러내어 하나님을 아는 나라와 족속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제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47장 22절이 기록된 의도는 이같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가진 특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바로에게 고용되었지만 제사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받은 축복과 특권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내려갈 때 비록 7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세계에서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보호받고 양육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의 아름다운 것으로 먹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통해서 그 사회와 그 나라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 때문이지요. 질문에 대한 요지는...요셉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와 제사장이 요셉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요셉 당시의 애굽의 영적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00여년이 흘러 요셉도, 요셉의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왕조가 애굽에 쳐들어왔을 때 그 왕조는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고 핍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핍박이 가중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주시고 자유로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축복이 더욱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존귀함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세례에 대해서?
질문:
>어제 GBS 시간에 어떤 아이가 물어보았는데요.. 세례는 꼭 받아야 하는거냐구요...
>그래서, 대충 제가 알고 있는 대로 대답을 해주었는데요...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어요..
>교회에서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지.. 정말 거듭남의 표징인지... 거듭남의 확신이 있다면, 안 받아도 되는건지..
>궁금합니다. 가르쳐주세요..^^
답변:
좋은 질문이에요.
첫째, 세례는 꼭 받아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예, 꼭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공동체 안에서 공포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아야 할 다른 이유로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향해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세례는 두 가지 종류가 있지요. 물세례와 성령세례이비다. 물세례는 우리가 만 14세 이상 되면 누구나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구요, 성령세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세례인데,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내가 실제적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질문한 '아이'는 세례가 너무 형식적인 것이 아니냐?는 의도로 말한 것 같은데...교회에서 주는 '물세례'는 사실 의식(ritual)입니다. 그러나 매우 거룩한 의식입니다. 장로교회가 성경을 통해 '거룩한 의식'으로 인정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죠. 세례와 성찬입니다. 형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거룩한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교회에서 받는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귀하죠.
둘째,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세례라는 말의 단어적 의미는 '잠그다' 혹은 '잠기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세례의 의미는 '연합' 혹은 '하나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 것을 공포하는 의식입니다. 만 14세 이상 되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 주는 '물세례'는 지상교회의 일원으로 소속되었고 교회에 연합되었다는 것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내가 얼마 전에 둘째 딸을 낳았어요.(물론 내가 직접 낳지 않았지만...) 굳이 그 딸을 동사무소에 가서 출생 신고할 필요가 있을까요? 내 딸이 분명한데 왜 굳이 호적에 입적해야 할까요?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도 이런 문제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는 무엇입니까? 성령세례는 우리가 천상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공포하기 위해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지상교회에 지체로서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연합되었다는 징표로서 주는 것인 반면 성령세례는 천상교회에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징표로서 받는 은혜입니다. 물세례는 거듭남의 징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지상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출생신고'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아도 교회에서 세례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구요.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 받도록 사모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그의 마음과 삶속에 주인으로 들어오시면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물세례를 받으면 더 좋겠지요? 아무튼, 세례의 의미는 연합입니다. 사도바울은 롬6장에서 이 세례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셋째, 거듭남의 확신이 없다면 세례는 안 받아도 되는가?
거듭남의 확신이 있는 자가 '물세례'를 받으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러나 교회에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 이유가 거듭남의 확신이 있어서 받는 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정한 세례인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과정에 입문한다는 징표로서 받는 성격이 더 강합니다. 따라서 세례는 거듭남 혹은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또 세례를 위해 신앙고백을 해야만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세례를 준비하면서 복음을 알게 되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는 일들이 참으로 많아요.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세례는 무조건 받으라고 권유해야 합니다. 물세례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출발점이니까요. 물세례는 꼭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물세례를 받은 자에게는 성령세례를 받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지상교회에 연합되었다고 저절로 천상교회에 등록된 것인 아니니까요.
아, 참....가장 중요한 것! 세례를 안 받으면 교회에서 크리스챤 학교에 입학할 때 혹은 기독교직장에 취업할 때 곤란해요...세례증명서를 요구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거든요...어떤 교회는 '추천서'를 아예 안 써준대요~~~
창세기 38장의 유다에 대해서
질문:
> 개인적으로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때면 또 잘 모르겠는게 바로 창세기 38장의 유다 이야깁니다.
> 창세기 49장에 보아도 요셉과 유다에 대한 축복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창49장 8-12절의 유다에
> 대한 축복에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실로'가 오기까지 미칠 것이라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유다 지파인지와(물론 예수님이 유다지파에서 오시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런 무슨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건지), 창38장에 부끄러운 유다의 이야기가 삽입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 그중에 또 한가지 창49장 22-26절에서 요셉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지. 에브라임 지파의 여호수아를 말하는 것인지?
답변:
음...예리한 질문이군요...
첫째 질문, 왜 메시야가 유다지파에서 나와야하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열국 중에서 택하시고 부르신 것도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는 그분의 주권에 속한 문젭니다. 유다지파가 메시야지파가 된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 넷째 아들인 유다가 차지한 위치는 특별하다는 점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유다는 12 아들 중에서 거의 대변인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유다는 12 아들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질문, 38장에서 갑자기 유다의 이야기가 삽입되는 이유에 대해서...
전체 문맥을 자세히 보면 37장에서 야곱의 약전(record)을 기록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나서 38장에 유다의 이야기가 삽입되고 39장부터 다시 요셉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죠? 이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의미 없이 나열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흐름에 의해서 얘기가 진행되고 있어요. 그 흐름이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섭리'에 대한 주제이죠. 즉,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들을 어떻게 보존하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를 계속 하기 전에 유다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의 이야기나 유다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섭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8장을 자세히 보면, 유다의 부끄러운 이야기가 주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이 주 내용입니다. 유다는 두 아들이 죽게 되자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이 또 죽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씨를 유전하는 일을 게을리 합니다. 그러나 다말은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믿었기에 과감하게 행동합니다. 상식적으론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관점--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의 관점--에 의하면 유다보다도 다말이 더 의롭습니다. 나중에 유다 자신도 다말의 의로움을 인정하게 됩니다. 다말의 신앙은 '하나님의 씨'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되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어쨌든, 38장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그 백성들에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셔서 그 씨를 보존해나가시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메시야를 보내시려고 그 씨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핵심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족들을 세상에서 어떻게 보존하시기 위해 요셉을 통해 어떻게 섭리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죠. 야곱의 약전(record)은 바로 약속하신 거룩한 씨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런 섭리를 깨닫기 까지 '험악한 세월'을 보내어야 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의 목자는 누굽니까?
여호수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도구로서 쓰임 받게 된 요셉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창4923,24절을 주의 깊게 읽어보세요.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과 많은 환란과 시련이 그를 괴롭게 했지만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어서 다른 형제들보다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24절을 보면, "그로부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요셉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바로 앞에 기록한 '야곱의 전능자'를 가리킵니다. 즉, 요셉에게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올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 야곱이 의뢰했던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어서 요셉은 야곱의 가족을 인도하는 목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형의 미움이라는 환란 가운데서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았듯이, 요셉 역시 형들의 미움과 많은 환란 속에서도 (야곱과 함께하신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았으며, 그 하나님을 힘입어서 야곱의 남은 가족들이 요셉의 인도 하에 애굽으로 평안히 인도될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목자가 양떼들이 가는 길에 앞서 가면서 길을 찾듯이, 요셉은 야곱의 가족들이 찾아올 기근에 대비하여 하나님께서 미리 그 가는 길에 앞서 보내셔서 길을 예비한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야곱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가는 길에 항상 앞서 가셔서 길을 인도하신다는 사상은 창세기 전체의 위대한 주제이며, 요셉은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보여주는 야곱의 아들입니다.
질문하신 분의 삶 속에서도 '많은 환란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다른 형제, 다른 영혼들 앞서 가서 길을 인도하는 선한 목자되신 주님을 잘 보여주는 도구로서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 대해서
질문:
>저는 요즘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개역성경에 나오는 어려운 뉘앙스(?)의 표현들을 조금 더 쉽게 알고자,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과 "성경의 파노라마"를 해설집처럼 참고로 봅니다... 그 중에 "현대인의 성경"에 대해 질문합니다...
>GBS 시간에 조원들이 창세기의 말이 너무 어렵다고 하기에... "현대인의 성경과 같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근데... 몇몇 지체들이...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단점도 있다고 해서... 조원들에게 추천을 해야할지...말아야할지... 소심한(?) ^^; 고민이 됩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참고한다면, 성경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엔 좋을 것 같습니다. 허나 너무 그 쉬운 표현 때문에 그 성경만 보고 이야기처럼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음...
>에구에구...복잡합니다 ^^ 어떤 것이 좋을까요?
>성경을 알고자 하는 조원들을 생각하니...빨리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성경은 고어체 표현이 많아서 솔직히 요즘 세대 젊은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저도 읽다가 어려운 표현이 나오면 다른 성경을 참고하는데요, 시간이 없으면 NIV 성경을 보구요, 시간이 많으면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성경을 봅니다. 저는 그래도 개역성경을 고집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가 보는 개역성경은 원어에 가장 충실하게 번역된 책이기 "때문이고, 둘째, 총회와 다른 모든 교단에서 권위를 인정한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인의 성경을 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번역상 원문에 철저함이 떨어지기 때문이고, 그래서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은 전혀 참고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가 이해하기 쉽다고 다 권위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쉬운 표현이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데 어려울 수가 있어요. 이건 아이러니인데요, 성경의 권위와 영감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교과서'와 '참고서'의 관계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교과서는 어디까지나 교과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는 개역성경은 '권위역'입니다. 반면 현대인의 성경은 (다른 성경, 공동번역성경이나 새번역성경 등과 마찬가지로) '비권위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권위역'만 보아야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참고서를 참조해야죠.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나온다고 할 때 현대인의 성경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주석서나 좋은 강해설교집을 참조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어려운 표현은 문맥을 이해할 때 거의 이해되기 때문에 우리는 문맥을 잘 해설한 다른 책들을 참고하면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저의 결론은 '현대인의 성경'은 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권위역'(unauthorized version)이라는 점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강해집이나 주석서를 권하는 것이 어떨까요?
여호와의 책에 대해서
질문: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1절부터 15절까지는 무슨 말씀인지 좀 알겠는데
>우리가 많이 알고 있고 외웠던 16절 말씀이 갑자기 막히더군요....
>'(16)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17)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친수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눠 주셨으니 그것들이 영영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 거하리라'
>16절의 '이것들'과 17절의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나요?
>여호와의 책,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졌고, 성령께서 모으셨다는 것은 알겠는데... 앞의 말씀(15절 이상)에 나오는 에돔을 멸하시고자 보내시는 여러 짐승들을 모으셨다는 의미로 해석해야하는지 모르겠네요... 17절에 나오는 그것들이 여러 짐승이라고 보는데.... 왠지 16절이 1절부터 17절 사이에 갑자기 나온 말씀 같아요...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닌 패역하고 교만한 에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라고 하시는데... 글구 그 여호와의 책이 모세오경을 얘기하는지 아님 이사야서를 얘기하고 있는지....
답변:
좋은 질문에 감사하구요...
질문하신 분께서 묵상한 말씀 이사야 34장은 열방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16절, 17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 문맥을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
14,1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실 땅을 차지하게 될 존재는 방백이 아니라 들짐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리, 숫염소, 올빼미, 부엉이, 솔개 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얼마나 땅이 황무하게 될 것인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그런 다음에 16절을 기록하고 있어요. "이것들"(16절)과 "그것들"(17절)은 앞에 나오는 14,15절에 나열되고 있는 들짐승들입니다. 그 땅에 거할 들짐승들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얘깁니다.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 들짐승들을 누가 모았느냐? 하나님이 그들을 모으셨다는 겁니다. 즉, 각 새들, 각 들짐승들의 명단이 다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실 일들이 너무나도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열거한 들짐승들은 그냥 모이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대로' 모인다는 겁니다. 즉, 열방에 대한 심판의 말씀들이 '기록된 대로' 남김없이 성취될 것이라는 말씀을 그렇게 '역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들어온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들짐승에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성경에 짝이 없는 말씀이 없다고 보는 데는 문맥적으로 무리가 있어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기록한 대로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실현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렇게 확인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이 성취될 때 그것이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는가 아니한가를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이 구절은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구절로 암송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기록하신 말씀대로 정확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측면에서 16,17절을 이해하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심판받을 열국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책'을 읽어보라고 했는데 그 '책'은 어떤 책인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너무나도 확실하고 분명히 예고되었다는 의미에서 '선지자적 선포형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즉, 이렇게 쉽게 번역해보면 어떻까요? "너희 심판받을 열국들아! 너희가 당할 모든 심판이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예고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행하실 일을 반드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먼저 보이신 후에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계시록에 기록되었듯이 세계역사는 천상의 어린양되신 예수님께서 일곱 인과 일곱 인을 떼시는 그 두루마기에 기록된 대로 심판은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대로' 그 역사를 진행하시는 분입니다. 그 신실하시고 정확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록한 대로 남김없이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영혼이 되시기를...
요셉의 정치에 대해서
>질문 1
> 요셉이 애굽에서 행한 일은, 일종의 "중앙집권화 과정"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의가 있겠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갑자기 고센 땅에 들어와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강력한 왕권으로 통제되는 국가질서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 이렇게 생각을 해보다가 하나님께서는 "중앙집권화" 혹은 "지방분권화"라는 정치 활동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위에서 제가 생각한 것은 구속사의 관점에서 정치를 해석한 것일 뿐 일반은총적인 "정치" 자체를 생각해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이것은 NGO활동도 포함합니다)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
>질문 2
> 야곱은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 자신의 것으로 선포하고, 그들의 자손부터 요셉의 것으로 인정합니다. 왜 그런지요?
>
>질문 3
> 48장 7절에서 "내게 관하여는...."라고 시작하영 야곱이 라헬의 얘기를 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 구절이 삽입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질문 4
>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면서, 에브라임을 장자로, 므낫세를 차자로 인정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또 실제로 그 모습이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이만 총총.....
답변:
예리한 질문에 내심 당황했습니다.
첫째 질문은 그리스도인의 '정치관'에 대해서 묻는 것 같은데, 특히 권력분배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에 대해서 묻고 있군요...이건 제가 너무나도 오래전에 고민했던 문제였고, 그래서 요즘은 거의 생각하지 않은 분야예요. 그래서 오래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을 서재에서 끄집어내어서 보았답니다. 이 공간을 빌어 다른 세청일 지체들에게 그 책을 소개해드립니다. 책 이름은, 폴 마샬이 쓴 [기독교 세계관과 정치](IVP)입니다.
요셉의 '중앙집권화과정'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르겠지만 제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악한 권력이든 선한 권력이든,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권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악이원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주권 속에 이 문제를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권력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시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잘 분배되어야 하고 잘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세상 권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지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중앙집권이냐 분권이냐? 이 문제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라는 관점에서 현재 권력의 흐름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권력의 집중현상은 그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고 권력의 분산현상은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상황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권력의 형태를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시는 섭리를 우리는 믿습니다. 독재권력이 형성될 때 교회는 신음하기 시작했고, 독재권력이 무너질 때 교회는 부흥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세상 권력의 공백기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모든 세상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권력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함으로써 저항해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권력이 무너지고 권력이 효과적으로 분배되고 실행될 수 있도록 중보할 뿐 아니라 책임감 있게 행동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창조세계의 범위만큼 넓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치에 대해서도 중립이란 없습니다. 절대권력, 부패하기 쉬운 세상권력은 무너지고 분배되어야 합니다. (부가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분배되어야 하는 일에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삶이 놓여 있듯이, 정치적 삶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성경은 NGO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지만 '권력'에 대해 분명한 관점을 가르친다고 봅니다. 구약의 신정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부패해져가는 왕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권력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롬13장에 나오는 국가에 대한 바울의 관점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보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해서 '원론적인 얘기'만 할 수 밖에 없는 저의 한계를 시인하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둘째 질문,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선포하는 이유는?
야곱의 이 행동은 요셉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가족의 일원으로 취급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다른 형제들과 같이 야곱의 친 아들로 대우받고 있으며 가나안땅 분배시에도 동등하게 권리를 행사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로 축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야곱은 다른 형제들에게 주는 축복의 몫보다 두 배를 요셉에게 주기를 원했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실제적으로 두 배로 축복을 요셉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질문, 창48:7절이 삽입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둘째 질문에 대한 해답과 연관됩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주 몫의 축복을 주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요셉에게 어머니의 묘가 가나안 땅에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요셉에게 가나안땅을 향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요셉은 애굽에서 80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을 때에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말했고, 자신의 해골을 메고 나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48:7절이 삽입되는 이유는 48:5,6절에 대한 이유, 내지는 배경을 설명하는 의도 때문으로 보입니다. 즉, 야곱은 요셉을 두 배로 축복하면서 요셉으로 하여금 어머니이 고향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넷째 질문, 에브라임을 장자로 내세운 까닭은?
그것은 아마도 야곱 자신의 삶을 통해 배운 교훈 때문이었을 겁니다. 장자권 문제로 야곱은 쓰라린 과거를 안고 있었습니다. 비록 노령에 의한 시각장애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영감으로 알게 됩니다. 즉, 아버지 이삭이 노령에 의한 시각 장애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부주의하게 행동함으로 인해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렇게 행동하는 모습속에서 아버지 이삭의 행동과 같이 행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야곱이 배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축복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택적인 은혜에 따라 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가인 대신 아벨을 받으셨고, 이스마엘 대신 이삭을 받으셨고, 에서 대신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행동하고 있으며 아버지 이삭과 같이 행동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의도대로 이삭은 에서에게 복을 주려 했으나 하나님은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혈통대로 축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는 은혜대로 축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요셉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의 이 축복이 역사 속에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에브라임 지파가 므낫세 지파보다 더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사ㅏ시대를 거쳐 분열왕국 시대를 보면 수적으로나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나 에브라임 지파가 월등하게 뛰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 왕국'을 '에브라임'이라고 부르기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나중에 분열 왕국 시대에 '북 이스라엘왕국' 전체를 대표하는 중요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람이 선포하는 말에는 굉장한 위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고, 우리는 입의 열매로 배부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하는 말이 미래에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조심합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축복하는 말로써 우리 미래의 삶을 바꾸어 봅시다!!
'신앙상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들과 함께 했던 신앙상담14 (0) | 2012.03.05 |
---|---|
청년들과 함께 했던 신앙상담13 (0) | 2012.03.05 |
청년들과 함께 했던 신앙상담11 (0) | 2012.03.05 |
청년들과 함께 했던 신앙상담10 (0) | 2012.03.05 |
청년들과 함께 했던 신앙상담9 (0) | 2012.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