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가 왜 싸웠나요?
질문:
> 사도행전을 읽다가요..바울 전도팀이 싸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뭐 마가가 어쩌니 저쩌니 하여 바울이 불만을 하고...
> 그런데 왜 싸웠는지를 정말 모르겠어요.그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 뜻도 알려주세요.^^
답변: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동행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심하게 다투었지요.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시 같이 동역하여 복음을 전했던 사역자들이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시에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갔었지요. 그런데 전도여행이 너무 어렵고 고난이 심하니까 중도에 마가는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는 중에 마가문제 때문에 서로 충돌하게 된 겁니다. 바울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바나바는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쪽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아마도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기 때문에 바나바가 더 인간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새로운 전도여행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전번에 중도하차했던 마가를 동행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중요했습니다. 바나바의 입장도 이해되고 반대했던 바울의 입장도 이해됩니다. 바울의 입장은 전도여행이라는 막중한 사역에서 마가와 같은 미지근한 인물을 데리고 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여기서 성격을 엿볼 수 있는데, 바나바는 온화하고 화평을 추구하는 피스메이커와 같다면, 바울은 강직하고 원칙적이며 성격이 곧고 바른 것 같습니다. 이 다툼은 인간적인 문제를 가지고 다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툼입니다. 모든 다툼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말이죠. 다툼은 천상에서는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화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합당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기 때문에 때로는 올바른 문제를 가지고 다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채찍을 가지고 성전에서 휘두르셨잖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투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복음전도가 중요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편,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가 바나바는 갈라지게 됩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 복음은 확장되었지요. 바나바 일행은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했고, 바울일행은 마케도니아 지역을 비롯한 유럽의 관문에 복음을 전함으로 복음이 세계에 확산되는 일에 이바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더욱 편만하게 전 세상으로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지 않았다면 복음이 쉽게 유럽지역(빌립보 등)으로 전파될 길이 열려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당신의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사랑하신 자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세계선교에 결국 돌파구를 마련하도록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지혜롭고 능력 많으신 분이십니다.
몽학선생?
질문:
> 갈라디아서를 읽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하는 건데 3장 24절에 보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란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몽학선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 구절의 의미를 알고 싶거든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몽학선생이란 고대세계에서 노예로서 주인의 자녀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학식 있는 종을 가리킵니다. 로마가 헬라를 정복했을 때 헬라의 학식인들을 잡아서 자기 집의 자녀들을 정규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책임지고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유치원 교사와 같지요. 예비교사입니다. 정규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가르치는 교사이죠. 율법이 몽학선생과 같다는 말은 따라서 진리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임시적으로 배워야 할 과정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율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모세를 만나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진노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해 배웁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배우게 됩니다. 율법을 통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예비단계라는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은 그리스도라는 정규과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
질문:
>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요한 계시록을 읽는데 4장에
>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일곱 영이란게 무엇인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고싶어여. ^_^
답변:
일곱 영이란 성령의 완전성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 혹은 전부를 뜻하는 숫자예요.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 완전하고 충만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가시지 못하는 곳은 어디든지 없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영은 전 우주와 전 세계와 전 피조물에 걸쳐서 어디서나 자유롭게 존재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뜻은 아니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실 수 있으며 어디에나 모르시거나 못 계실 곳이 없다는 하나님의 자유하심을 일곱 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139편을 묵상해보기를 바랍니다.
탄식시?
질문:
> 말씀학교에서 시편을 배울 때 탄식시에 대해 배웠는데 궁금한 점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 시편 88편도 탄식시이지만 보통 탄식시가 호소, 불평을 하다 다시 확신과 찬양을 하는 거와 달리 끝까지 처절한 괴로움, 절망을 표현합니다,,,,
> 탄식시가 정답이 있는 탄식, 찬양의 또 다른 것이라 배웠는데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답변:
예...좋은 질문입니다.
시편88편은 전형적인 탄식시의 유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시인이 탄식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한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88편에는 시인 자신의 어려운 상황만을 늘어놓는 일반적인 불평조가 아니라는 것을 우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주' 혹은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을 몇 번이나 외치고 있는지 헤아려 보세요.
지금 시인은 절박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황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이외에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신의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탄식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탄식 중에서도 하나님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있으며, 버림을 받고 있으며, 두렵게 하심을 당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왜냐면 그런 상황을 발견하지 않고서 구원의 하나님께 이렇게 매어달릴 수 없거든요.
물에 빠진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서 구원의 밧줄을 절실히 요청할 수 없듯이
우리가 처한 영적 상태가 이러한 위경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서 구원의 하나님께 호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불평과 탄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탄식임을 기억하십시오.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더 깊은 갈망으로 주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창세기를 읽는 법?
질문:
> 다름이 아니라 창세기를 읽는데 여러 가지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 많습니다. 과연 창세기는 어떤 방법으로 봐야 할지 알려주세여~~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1)창세기를 '내가 이해해야 하는 어떤 책'이 아니라 '지금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2)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기 전에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어둔 지성을 조명해주시고 진리를 밝히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창세기를 읽기 전에 전체를 개관하시기 바랍니다. 전체구성과 주제, 저자, 수신자, 저술의도 등을 미리 사전에 공부하십시오.
(4)창세기는 기원에 대한 책입니다. 창조의 기원, 인간의 기원, 문명의 기원, 죄의 기원, 구원역사의 기원, 약속의 기원, 선택과 부르심의 기원, 섭리의 기원, 히브리민족의 기원, 등이죠.
(5)처음에는 여러 번 자주 반복해서 다독하여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조금씩 정독하여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좋습니다.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기도하시고, 메모해두어 나중에 물어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번 읽어보는 것입니다.
(6)창세기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에 대한 책입니다. 단순한 인간의 역사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역사를 이끌어 가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역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7)창세기 읽기 전에 개관하는 일을 먼저 하고, 개관하는 일을 돕기 위해 서점에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서점에 가서 창세기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십시오.
(8)읽어가면서 노트에 발견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됩니다.
(9)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말고 차근히 하세요. step by step.....
요한계시록을 읽는 법?
질문: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는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여
어떻게 읽어야 되나여?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일단 요한계시록은 성경 66권의 결론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를 알아야 합니다.
몇 가지 방법을 일러드리겠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에 대한 개관을 반드시 하십시오. 이 책에 대한 전체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이 책이 갖고 있는 장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의 장르는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이란 그림언어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이 책이 편지글의 형태로 전달된 당시 교회들의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666이 컴퓨터 바코드라고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왜냐면 이 책은 당시 교회들에게 전달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이 책은 두려움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당시 핍박과 고난을 받던 교회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기록된 목적을 잘 알면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표현을 통해 고난 받는 교회들을 어떻게 위로하기를 원하셨는가?”라고 물어보십시오.
다섯째,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계시록을 읽을 때 여러 가지 모르는 단어들과 이미지들이 나옵니다. 그럴 때 이러한 단어들이 이전에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성경 전체를 통해 찾아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바다와 땅’의 그림언어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땅에 부어지는 재앙들은 출애굽기의 10가지 재앙들과 어떻게 유사한지, 그리고 천년왕국의 경우 다른 사도들은 왕노릇한다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등등...이렇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섯째, 이 책은 요한 사도의 개성과 경험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경험과 사고방식을 알면 도움이 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등을 참조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일곱째,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체크를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억지로 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석을 참조할 수도 있고, 교역자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이유?
질문:
> 이상하네요. 정말루요..혹시 제가 사무엘하 24장땜에 질문한 거 기억나세요? 인구조사문제요...근데 오늘 역대상 21장 보니까요 삼하 24장의 내용이 다시 나오더라구요.
> 문제는 바로 이겁니다!^^ 삼하를 보면요 여호와께서 다윗을 감동시켜서 인구조사를 시켰다구 하네요. 다윗의 교만을 꺾으시려구요. 역대상 21장은 사단이 다윗을 격동시켰다고 나왔습니다.
> 그럼 누구는 여호와께서 일으키셨다고 하고 누구는 사단이 일으켰다고 하고...
> 물론 사단의 일도 여호와의 주관 아래 일어나긴 하지만 굳이 이렇게 다르게 표현한 이유가 있을까요? 각각의 저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더 강조하려고 했고 더 표현하려고 했을까요?
> 또 질문인데요^^; 성경책이 언제 쓰여지고 편집됐는지 궁금해요. 글구 천주교 성경이랑은 왜 다른건지 언제부터 다르게 된건지, 우리 기독교 성경이 옳은가에 대한 증거는 없는지 그것두 좀 알구 싶어요. 목사님,부탁드릴게요~^^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분명히 역대기와 사무엘서는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하나가 틀렸다고 볼 수 없지요.
사단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사단은 수족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성경책이 기록된 당시의 상황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서의 전체적인 의도는 범죄한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고 그래서 순종을 강조하는 교훈들로 가득 차 있지요.
반면 역대기서의 전체적인 집필 의도는 범죄하고 이미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에게 위로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며 따라서 소망을 강조하는 교훈들로 가득 차 있답니다.
이러한 기록당시의 상황과 기록한 저자의 의도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게 됩니다.
강조점이 다르다고 해서 역사가 왜곡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바르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무엘서를 통해서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지요. 사단이 격동했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로 봅니다. 반대로 역대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사단이 격동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면서 표현이 다를 때,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아주 긴 설명이 요합니다.
성경책이 언제부터 쓰여지고 편집되었는가는 간단합니다.
모세의 때로부터 기록되어져서 에스라에 이르러 구약성경 39권이 편집이 완료됩니다.
반면 신약성경은 사도와 사도의 동역자들에 의해서 쓰여져서 주후 1세기경에 편집이 완료되고 주후 3세기에 27권이 정경으로 선포됩니다.(주후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카톨릭에서는 열 몇 권의 외경을 66권에다 추가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외경이지 정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경은 당시 기록된 문학작품이나 경건도서에 해당하는 것이지
모든 시대에 적용될 하나님의 권위 있는 거룩한 책(정경)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정경에 결정적인 인물은 에스라 학사입니다.
신약정경에 중요한 인물은 사도와 사도의 동역자(누가, 마가, 등)입니다.
에스라에 의해서 편집이 완료된 것에 카톨릭은 15세기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외경을 정경으로 간주한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에스라가 구약 39권만이 성경이라고 선포했고, 심지어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하셨는데, 그리고 성경은 그것에 가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는데(계시록22:19), 감히 사람들이 15세기에 와서 추가한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정통은 카톨릭이 아니라 개신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책, 정경은 66권만 존재합니다.
물론 사도들의 제자들이 기록한 책이나 몇몇 구약의 훌륭한 문학서가 있지만 그것은 경건서나 문학서에 불과할 뿐입니다. 당시 배경과 생활풍속, 신앙생활에 대해서 참조할 만한 훌륭한 자료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기준(canon)이나 규범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66권만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이 역사적으로 바른 것임을 알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고 자랑하는 영혼 되기를 축복하며...
고전3:21의 의미?
답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3:21)
고린도전서 3장의 전체 문맥은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지혜의 특징은 '아, 내가 누구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위인을 내세움으로써 자기가 지혜롭다고 은근히 주장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입니다.
당시 세계에서는 지혜의 척도로서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가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구를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그의 똑똑함을 알아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이며, 결국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람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어떤 피조물을 안다, 혹은 어떤 피조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볼까요?
"주님께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비웃으신다.
사람들은 누구를 알고 있다고 혹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혹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자신들의 지혜를 자랑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헛된 것으로 보신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지혜롭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내세우거나 학벌을 자랑하지 말라. 사실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그것은 다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의 것이 아니냐?
지혜로워지기를 원한다면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에게 찾아가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찾으라. 그분은 모든 것을 소유하시는 분이다"
즉,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것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증거하기 위해서 사람이나 사물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두 가지 실족에 대해서?
질문:
> 목사님. 제가 성경을 읽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 성경에 마태복음 11장에 요한이 예수님을 통해 실족케 되잔아요...
>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멧돌을
> 목에 매여 바다에 빠트려라...무슨 그런 말씀이 있잔아요...
> 그럼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요한은 실족케 됐는데
> 예수님께선 실족케하는 자도 나쁘다 라는 것 같은데...해결 좀 봐주십쇼....
> 구럼..부탁합니다.(저는 역촌동근처에 있는 교회에 다닙니다...이방인이죠!!!)
답변:
좋습니다.
이방인의 질문도 환영합니다.
질문의 내용은 실족에 관한 건데요.
우선 문맥을 자세히 보면 마태복음 11장과 18장의 문맥이 전혀 달라요.
실족이라는 말이 어떤 상황에서 쓰여졌는지 자세히 보세요.
우선 세례요한이 실족한 것은 예수님을 의심한 상황이죠.
모태에서부터 성령충만했던 세례요한조차도, 예수님의 전령이었던 그 조차도 예수님을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세례요한은 지극히 연약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구요
어린 소자를 실족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심했던 세례요한처럼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큰 벌을 받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실족할 수는 있는 문제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어린 아이(혹은 소자,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과는 분명이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스르엘?
질문:
> 열왕기상 19장 46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에서 '이스르엘'은 지명으로 여겨집니다.
> 그런데 다른 곳 예를 들어 호세아 1장 3-4절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라.' 에서는 '이스르엘'이 호세아가 자기 장자에게 상징적으로 붙여준 인명으로 보입니다.
> 다른 여러 곳에서도 '이스르엘'이 나오는데 '이스르엘'이 지명인지 인명인지 확실히 구분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고, 만약 지명이라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 그리고 호세아 2장 22절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에서'이스르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상징적 이름이라는 설명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 점에 대해서도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답변:
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
이스르엘이란 말은 지명도 되고 동시에 인명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르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심으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르엘이 인명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역대상 4:3에 유다 자손 에담의 아들, 그리고 호세아 1:4에 호세아의 맏아들, 이 두 사람에게 적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명으로서 이스르엘 역시 두 가지 장소인데요... 유다지파에 있는 어느 성읍(여호수아15:56)으로서 헤브론 남쪽의 언덕에 위치했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구요, 또 다른 하나는 잇사갈 지파의 영토 안에 있었던 성읍(여호수아19:18)로서 예닌 북쪽 11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이스르엘이란 지명은 잇사갈 지파의 영토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
질문:
> 안녕하세요..타교회 성도입니다
> 갑자기 궁금해 져서 올립니다.
>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상당히 직설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셨습니다.
> 제사형식이나 방법, 이스라엘민족들에게 가르치시는 것등..
> 신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비유와 은유..등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돌려서 말씀하셨습니다.
> 왜 다를까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정반대 스타일인데.. 하나님과 예수님의 스타일 차일까요?? 스타일 차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거 같고...
>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스타일에 대해서 잘 관찰을 하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13:10-17에서 제자들에게 잘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1) 이러한 차이가 있을 것을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그 예언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입니다.
(2) 천국의 비밀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분명하게 알려지게 됩니다.
(3) 천국의 비밀에 대한 분명한 선포는 깨달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 입니다. 들을 귀가 없는 자에게는 아무리 직설적으로 설명해도 그것은 비유이자 비밀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중에 사도 바울이 고전1,2장에서 잘 설명했으니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4)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더 강퍅해지고 완고해져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스타일에 있어서 변화가 생긴 까닭은 사람들이 완고해졌기 때문입니다.
(5) 사람들이 스스로 완고해졌고, 진리에 대해 스스로 무지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직설적인 방식보다는 비유의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6) 완고해지고 무지한 귀를 가진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손을 들어 영생의 실과를 따먹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무지와 완악함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생명을 얻게 되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은총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 때문입니다. 인간이 크게 완악해지지 전에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으나 이제 사람들이 완고하게 되고 스스로 무지하게 된 상태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8)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 모호하거나 비유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언제나 명확하게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비유적인 방법은 오직 완악하고 무지하며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외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적용되는 방법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잘 설명했습니다.(고전1,2장)
(9)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사람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분명히 깨닫는 시대가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 스타일의 차이는 바로 백성들의 본성의 변화(점점 완고해지고 무지해져감)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10) 완악하고 완고한 백성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자신의 무지와 완악함을 깨닫고 겸손해져서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바라는 자에게 진리는 명확하게 선포될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힘과 명철로는 결코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 것은 사람의 명철이 그처럼 어두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사람들보다 신약시대의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데 있어서 성령의 조명이 더욱 더 필요하게 될 정도로 명철(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 주의 영이 우리의 어두워진 영혼을 밝히셔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바라보게 하시기를...
삼위일체에 대해서
질문:
> 3위1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답변:
1.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과 능력과 신성에 있어서 분명 한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격에 있어서 세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인격이 하나이십니다.
2.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대해서 우리가 이성 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매우 당연합니다. 만약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양식이 이해된다면 더이상 하나님이 아니겠지요.
3. 성부께서는 작정하시고, 성자께서는 구속하시고, 성령께서는 보증하십니다.
4.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며 함께 일하십니다.
5.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가 우리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등급이 낮은가요?
질문:
> 궁금한 게 많아서 죄송한데요.
>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 혹시라도 한 등급이라도 더 낮지 않을가요?
> 성령도 그렇구요.. 능력으로 보이는거니깐;; 아닌가?
> 어쨌든 3위1체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 천국에 관해서랑 3위1체에 관해서랑
> 날과 절기에 관해서두요..
답변:
1. 한 등급이라도 낮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낮다고 하는지 궁금하네요.
2. 신성, 거룩, 능력, 영광, 등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십니다.
3.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는 질서는 존재해도 등급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사랑하시므로 질서는 존재해도 등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4. 성령은 에너지가 아닙니다. 성령은 지.정.의를 소유한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슬퍼하실 수도 있고 떠나가실 수도 있습니다.
5.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에너지정도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성령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성령의 인격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논리학과 해석학을 조금 배우시면 좋겠네요...
땅을 단지 문자적인 의미로서만 이해하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땅이란 단어에 적용하는 것을 논리학에서는 '확대의 오류'라고 하지요. 우리가 성경을 논리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을 이성의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성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험해보십시오. 그러면 삼위일체도, 인격이신 성령 하나님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세상에도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태어날 때 낳아주신 부모를 이성적으로 DNA 검사를 해서 알고 나서 부모를 믿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음의 언어는 이성의 언어를 훨씬 능가하지요.
하나님은 이성의 언어로 다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를 보이지 않다고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증명할 수 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지 이해되어질 대상은 아니지요.
믿음이 먼저고, 그 다음이 이성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담당하십니다.
질문하신 분에게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해보시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런 은총을 베푸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욥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답변:
욥기의 주제는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지 말아야 정상적일 것 같은데
세상을 보면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의인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은 다분히 인간중심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흠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보시기에는 다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이지만 큰 죄인이든, 작은 죄인이든 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현세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내세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튼...욥과 같은 사람도 고난을 받았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면, 욥이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까?
욥이 고난을 받게 된 것은 욥을 시기한 사단의 참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욥이 이런 시련을 당하는데도 보고만 계시는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낙심하는 이유는 영원한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 속에서 복락을 누리게 될 욥으로서 잠시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것은 오히려 크나큰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난을 받는 것은 반드시 축복과 상급으로 이어집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이 없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게 될까요?
아마도 고난이 없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선생입니다.
결국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참고 견디었던 욥은 끝내 하나님을 체험하고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욥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면서 자신이 받았던 고난을 회상하면서 더욱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축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욥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 대해 세 명의 친구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이란 상황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얼마나 좁고 편협된 것인지 말해주지요.
고난이란 상황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은 고난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 자신을 진실로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던 사람이 한 사람도 있던가요? 내가 고난을 겪을 때 나는 정말 외로움을 느낍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특별히 고난 받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한없는 위로자가 되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본 사람은 없거든요.
예수님은 인생이 겪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다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난을 겪고 힘들어하든지 우리를 이해해주실 수 있고 위로해주실 수가 있으십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데 하나님께서 방관하시는 것처럼 보여서 힘들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토록 고난을 당하시는데 사랑의 아버지께서 방관하신 일은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욥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욥이 고난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욥을 보고만 계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보고만 계셨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욥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을 갖는데 입문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욥기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영성을 보여줍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불평하지 않으면서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욥의 세 친구들처럼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진리일 수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참고 견디는 자에게 고난은 축복과 상급의 문이 될 것이고,
고난을 당할 때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는 고난 속에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욥기는 고난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고난 속에서 힘들어할 때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내가 고난을 당할 때 욥기는 나의 참된 위로자가 누구인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욥기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빼놓고 욥기를 읽으면 반드시 화가 나서 책을 덮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욥기가 주는 유익을 마음껏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히브리서의 그리스도?
질문: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왜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쓴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여겼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낫게 여긴 것은 사실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분명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어떻게 고난을 받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고난이기에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영광이자 무한한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버립니다.
그 형제들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고난을 영광으로 여기는 세고가 되기를 바라며...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외경에 대해서?
질문:
> 성경 중에 **변역(외경포함)이라고 써있던데 외경이 뭔가요??
> 그리고 외경을 읽어도 되는지....또 정경과 외경은 어떻게 구별되는지..
> 외경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답변:
성경에 관련된 몇 가지 용어들을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성경: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2.정경: 유일한 규범이자 기준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정되는 66권의 성경
3.외경: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는 인정되지 않지만 참고할만한 종교문학서
4.위경: 저작권을 위반하여 저자의 이름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인양 기록한 위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인정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정경과 외경으로 크게 구분합니다. 아무리 경건한 신학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그것을 신자의 삶에 유일한 규범이 되는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정경과 외경을 나누는 기본적인 기준은...
저자가 선지자 혹은 사도의 계열에 속하였는가?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납할만한가?
등입니다. (이외에도 정경과 외경을 구분하는 몇 가지 기준들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교회가 신중을 거듭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했다는 증거입니다.)
기본적으로 구약성경 39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때는 주전 5세기 경 에스라 시대에 확정되었으며, 신약성경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때는 주후 3세기경 초대교회 때 확정되었습니다. 확정되기 전에도 수백년 동안 정경으로 인정해왔던 것들을 교회들이 모여서 공식화한 것뿐입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했던 이유는 수많은 이단들이 일어나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책들을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교회들이 모여서 정경 목록을 확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신실한 성도들은 어느 책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기본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기름부으심(=영적권위)을 가지고 있습니다.-요일2:18-27절 참조)
그 이후 기록된 경건서적들은 그 저자가 의심스러울 때는 위경으로, 저자는 진실하지만 저자가 선지자나 사도의 반열에 든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외경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총회를 연후 거기서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16세기에 들어와서 몇 권의 책(외경)을 정경의 목록 안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정통성을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우리는 카톨릭이 주장하는 정경의 목록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경은 그리스도의 삶에 유일하며 궁극적인 권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외경은 그리스도의 삶에 참고할 만하지만 유일한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교과서와 참고서의 차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정경은 교과서요 외경은 참고서입니다. 우리는 66권 정경만이 우리 삶에 유일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합니다.
외경은 읽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 삶에 권위와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읽을 수는 있지만 참고만 할뿐입니다.
실제로 외경은 일반 신자들이 평소에 읽을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신학적인 연구를 할 때 참고할 필요는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연구논문을 쓸 때 외경을 참고한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는 오로지 정경만을 붙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있어 정경으로 충분하며, 정경 아닌 책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경건서적을 읽을 때도 참 은혜를 받을 때가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내게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경건서적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서적만으로 우리 삶이 견고질 수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와 참고서를 병행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과 경건서적을 병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서로 상충되는 문제가 생겼을 경우 참고서가 기준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성경이 결정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적인가요?
답변:
예정론은 구원의 확신의 문맥에서 다루어져야지 철학적 문맥에서 다루어져서는 결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을 제대로 연구해보지도 않고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 성급함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정론은 15세기 칼빈이란 개혁자가 처음 만든 '학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혹은 연구해보고 나서 그렇게 말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숙명론'으로 확대해버린 무책임한 몇몇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 글을 보면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속을 예정하신 것이고, 누가 구원받을지에 대해서 예정하지 않으셨다면 성경에서 또 다른 모순을 일으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택하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자를 분명히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바울의 '학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요10:14-16)라고 하셨고,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6,27)고 하셨는데, 이것도 예수님의 '학설'로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엄연히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도 역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안하고는 사람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사항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의지대로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은 사람이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의 예정 탓으로 돌릴 인생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행한 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5)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정론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계시록도 성경에서 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양면을 다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큰 구원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느냐, 구원을 받은 사람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코끼리를 정면에서 본 사람이 하는 말과 옆에서 본 사람이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일까요?
마찬가지로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칼빈의 예정론은 학설이 아닙니다.
예정론은 칼빈이 말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만약, 그것이 학설이라면
성경에서 빼버려야 할 부분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빼버리는 사람은 낙원에 참여할 기회를 박탁당할 것입니다.
온전한 진리를 붙드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ㅎ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1:10) 여기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모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제6계명과 전쟁?
질문:
궁금해서 글 올립니다!
십계명에 살인을 하지 말라고 나와 있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군인들이 싸우다가 죽고 죽이는 것...
그것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답변: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 사용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엄연히 다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경우는 인간의 욕심에서 우러나오는 충동적 행위로서 정죄 받아 마땅한 범죄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그런 경우지요~ 이렇게 살인하는 것은 자신이 받은 상처와 피해 때문에 분노심으로 행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살인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결코 아니지만 인간질서와 인간생명의 보존을 위한 방어적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된 것이며, 이런 경우는 그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다른 기준이 제시되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밤에 강도가 침입했을 때 강도를 제지하다가 강도를 살인한 경우, 성경은 해가 뜨기 전에 처리하지 않으면 그것도 살인죄라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가 뜨기 전에 신속하게 신고를 하고 처리를 할 경우 죄가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며 싸우는 전쟁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전쟁은 남의 것(영토, 재물, 등)을 빼앗기 위해 시도하는 무력도발입니다.
그러나 방어적인 차원의 전쟁은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빌며...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킹 제임스 성경외 다른 성경은 다 사탄적이라고 하던데?
질문:
져기~ 제가요 킹 제임스성경에 대해서 궁금해서요~ 설교 말씀을 보는데
이상하게~ NIV 나 NASB 그리고 지금 저희가 보는 성경책을 비난하던데요;;
보는데 화날 정도로..
저희가 보는 성경은 루시퍼의 속임수로 쓰인 거라고..사탄의 성경이라고;;
하지만 KJV는 하나님이 선택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답변:
킹제임스 성경만이 진리라고 말하고 다른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말씀 보존 학회" 라 이름 하는 종교입니다. 의정부 성경 침례교회가 대표적인 이단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권위역(원문에 가장 가깝게 번역된 성경)인지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킹 제임스 성경은 엄밀히 말해서 권위역이 아닙니다.
원어성경에 가장 가깝게 번역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참고서로 삼고 읽을 수는 있지만
공예배때 사용하고 묵상하고 연구하는데 사용하는 교과서로는 삼을 수 없습니다.
원어를 깊이 연구하는 성실한 학자라면 킹제임스 성경이 원문에 충실하다기 보다는 자기들이 믿는 '교리'에 충실하기 위해 번역했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것을 자세히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역본을 다 인정해주자는 태도에는 반대합니다.
공교회가 사용하는 교과서, 즉 권위역은 하나입니다.
참된 권위는 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고서는 여럿 있지만 교과서는 오직 하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개역성경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왜 하필 하나님의 아들인가요?
질문:
> 말씀을 보다보면 꼭 아들이라고 나와 있는데
> 왜 딸이라고는 안 나와 있는거죠? 찬양도
> 형제라고 하는 것이 많더라구요.
답변:
사람이라고 하면 남자와 여자를 다 포함하듯이
히브리어에서 '아들'이라고 하면 사내아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후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때로는 민족 전체를 지칭할 때도
"아들"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일정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도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들'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는 대게 긍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딸"이란 단어가 사용될 경우는 대게는 부정적이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딸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지만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아들과 딸은 상징적이고 숙어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거든요.
왜 하필...?? 이렇게 묻지 말고... 그때에는 그런 식으로 표현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도 그런 흔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죠.
아들은 가문을 이어받으며, 전쟁에 나가서 싸우며, 노동을 하며,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아들'이라고 하면 '실제적이고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사내아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상속자'를 가리킬 때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
이 영광스러운 말을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안 가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해야 "기업을 이어받는 상속자"란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요.
물론 요즘도 그래요. 딸들은 기업을 이어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들'과 '딸'이란 단어는 단지 성의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상속 유무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권리를 가진 자들을 말하며,
사람들의 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지 못할 자들을 가리킵니다.
아들은 상속권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롬14:5절의 말씀의 뜻?
질문:
> 안녕 하세요..목사님...
> 궁금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 로마서...14장...5절에...
>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 각각 자기마음에 확정할 찌라....
> 이러한 말씀이....있는데여...
> 머리속으로 어떻게 정리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 저혼자 기도 하면서 알아보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 제가 너무 무지해서 알기가 너무 어렵네요...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여러 가지 질문을 이곳에서 접하지만 이렇게 성경을 읽다가 생긴 질문들은 거의 접하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는데... 성경말씀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올라왔으면 하네요...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사람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한 날로 여기고 있는 날은 일주일의 제 7일째를 가리킬 것입니다.
로마시대에 회심자들은 일주일에 첫째 날(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지만 어떤 회심자들은 일주일에 마지막 날인 제 7일도 일을 하지 않고 지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안에서는 논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토요일이 더 거룩한가, 아니면 주일이 더 거룩한가...
요즘도 보면 안식교도들이 찾아와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비난을 합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날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빛을 잃는다는 거죠.
각기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는 말씀은 이러한 불필요한 논쟁이 신앙양심에 장애물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난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더 소중하고 거룩한 날을 지키지 않는다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 6절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것도, 다시 말해서 안식일 보다 주일을, 혹은 주일보다는 안식일을 더 중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사실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꼭 어느 날에(안식교도들과 같이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날을 예배의 날로 선택할 것인 지에 대해서는 "각기 자기 마음에 확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어느 날이 더 중요하고 거룩한 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한 것,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음식문제나 금식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는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를 위한 일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고, 혹은 반대로 업신여기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어느 날이 더 거룩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삼손의 자살에 대해서?
질문:
> 저는 오늘학교에서 삼손에 대한 옛날 영화를 잠시 봤는데 ..
> 힘이 센 삼손이 적군과 함께 주글껄 각오하면서 벽을 무너뜨려서 주겄자나요?
> 그거.. 자살인가요 ??
> 남을 위해서 죽는 것도 자살이나요 ?
> 궁금함다.
답변:
자살에 대해서 지난번에 한번 누가 질문을 올렸던 것 같은데...
흔히들 자살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살기 싫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기 싫어서 말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멸시와 회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죠.
그러나 삼손의 경우는 다릅니다.
표면적으로 보지 말고 심층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삼손은 원수들과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싸움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한 죽음을 자살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희생적 죽음이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원수들을 물리치고 자기 백성들을 구했으니까요.
강재구 소령을 알고 있나요? 부하의 실수로 수류탄이 땅에 떨어졌을 때 자신의 몸을 그 위에 던져 많은 부하들의 생명을 살린 사람입니다.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충분히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죽음의 잔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한 죽음을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한 마디로써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처형을 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고백을 붙잡음으로써 맹수들과 사나운 칼의 밥이 되어간 자들은 다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순교자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지만 그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서...
전쟁터에서 다른 사람을 총으로 혹은 칼로 죽이는 것을 살인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기에 남을 미워하고 해치는 것은 살인죄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죽는가가 중요합니다.
대의를 위해 스스로 죽는 사람을 가리켜서 자살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참 창창한 나이에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린 것을 가리켜서 거룩한 죽음이나 희생적 죽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죽음은 자신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제 6 계명을 범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훼손하는 중대한 죄입니다.
다시 용서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죄입니다.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죽을 각오로 산다면 못 살 것 없습니다.
삶과 세상에 대해 너무 나약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강하고 굳센 심지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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