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해서
질문1:
>사무엘하 24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구를 조사하라고 말씀하시고 24장 전체를 보면 인구조사가 죄로 드러나는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Temptation하신 것이 아닌가요? 하나님께서는 Test만 하신다고 들어왔는데...
>오늘 역대상 21장을 보니 사무엘하 24장과 같은 맥락인 것 같은데 주체가 여기선 사단으로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질문2:
>저번 주 설교시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하기만 하면 금욕주의로 빠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기뻐할 수 있을까요?
답변:
어렵지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만날 때 혼동을 느끼는 이유는 선악이원론적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선과 악의 기준 속에 가두어버리게 된 결과죠.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보다 더 큰 '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사건을 볼 때 비로소 이해되어집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자, 예수님이 시험 당하신 사건을 볼까요?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것은 test입니까? 아니면 temtp입니까? 그런데 막1장에 보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test입니까? 아니면 tempt입니까? 우리는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또 욥기 1장을 보세요. 욥이 하나님께 시험받았습니까? 아니면 사단에게 시험받았습니까? 욥은 test받았나요? 아니면 tempt받았나요?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악의 기준으로 성경을 보면 여러 군데 헷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범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역병에 들린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시각이죠.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그것은 표면적인 얘기고,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이용하신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범한 개인적인 죄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표를 드러낸 결과를 낳게된거죠. 자세히 보면 다윗의 죄가 역명을 일으킨 원인제공자라고 보이기 쉬운데,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다윗의 죄는 표면적인 계기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역병이 찾아온 것은 무조건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더 나쁘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신 겁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명령하셔서 다윗이 순종한것이 죄로 판명 났다고 표면적으로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기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기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가 죄짓도록 하는 경우가 있나요? 하나님의 명령은 죄짓도록 명령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죄가 죄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렵지만 잘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여 의에 이를 수 있도록 죄를 드러내시는 명령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율법을 설명할 대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했지요? 즉, 다윗의 마음속에 교만한 죄가 있었고 그것을 하나님이 드러내신 것입니다. 자,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만드시고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들 마음속에 늘 불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죠. 민수기에 발람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신 후에 가는 길에 죽이려고 진노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왜요? 발람 마음속에 있는 탐욕을 드러내시기 위해 가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래서 회개하여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나타내주시기 위해서 의인의 죄까지도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이 일로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기뻐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모든 고난'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백성이고, 노에로 팔린 요셉의 삶이 가장 불쌍하고, 예수 믿는 우리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활동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감동하신 것이나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이나 같은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사단의 의도와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 다릅니다. 사단의 의도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의도를 하나님은 자신의 선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 것이죠) 사단의 활동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보기 시작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사건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사단이나 예수님을 시험장으로 내모신 성령이나 사건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권리를 청구했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셨기에 허용하셨습니다. 아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연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성령이 예수님을 마귀가 있는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사단은 욥을 시험할 권리를 청구했고 하나님은 허용하셨습니다. 사단은 다윗을 시험할 권리를 청구했고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한 섭리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다윗에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찾아온 역병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을 무척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단의 활동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회개하게 하는 데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만약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이 역병에 걸리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마음을 시험하십니다. 악인의 마음은 결코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test냐 tempt냐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에 시간낭비 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부분들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책임감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test는 기뻐하고 tempt는 슬퍼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시험에 온전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1)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대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매우 선합니다.)
(2)하나님은 최선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까지도 합력하십니다.
(3)피할 길을 예비하시고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4)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십니다. 악인(혹은 악한 나라)는 결코 시험하지 않습니다. 내버려두십니다.
(5)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모든 어려운 상황은 유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6)하나님은 그 백성을 회개시키기 위해 때로는 사단의 역사를 허용하십니다.
(7)우리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두 번째 질문, 하나님을 기뻐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읽지 못하기 때문이고, 셋째, 그분의 사랑의 징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치우친 가르침을 들으면서 자라났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온전히 묵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서운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온전한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기준에 의한 '선'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배워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어릴 적 장남이라서 잘못할 때 부모님에게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런 부모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자랑스럽습니다. 만약 내가 잘못했는데도 오냐오냐 하시면서 내버려두셨다면 저는 부모님을 '경외'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부모님을 무서워하면서 기뻐하지 못한다면 왜 그럴까요? 혹은 기뻐하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는 사랑의 징계를 통해서 경외하는 법을 배웁니다. 저는 자녀를 키우면서 그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제 딸이 잘못했는데 분명히 그것도 무섭게 꾸짖는 것이 자녀에게 '참된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이 나를 매섭게 징계하시는 회초리를 여러 번 맞아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동시에 기뻐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를 맞으면서도 그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워보면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통해서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는 그분의 '최선'을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선'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만 하고 기뻐하지 못한다면 부모의 매를 무서워하고 그 매를 드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매를 드는 부모의 '선'을 이해한다면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기뻐할 것입니다. 나에게 고통이 부모에게는 '선'이 됩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를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고, 오늘 본문의 문제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성령이 주시는 은총입니다. 나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놀라운 은총이 질문한 지체와 저의 마음속에 임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레위지파에 대해서
질문:
> 요즘 말씀을 열어주셔서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 다시금 하나님께서 정리해 주시고, 잘못 알고 있던 부분들을 교정하시고, 깊이 묵상하지 못한 부분을 알게 하시며, 여러 가지를 점검하게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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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모세오경을 보면서 한 가지 너무나도 독특한 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대표성>과 <거룩하게 구별하심>, <언약>, <계약>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한데,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언약, 구원의 방법, 구속의 방법, 인도하심의 과정과 그 방법이 너무나 독특하고, 특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이며 제사장나라이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는 과정이 더 그러합니다.
>
> 지난번에 요셉과 유다에 대한 것을 여쭈어 보았는데, 이번에는 <시므온과 레위>, 특히 레위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야곱은 12아들과 한 딸을 낳았고, 창세기 마지막에서 12지파를 놓고 축복기도하는 부분에서 레위와 요셉의 두 아들-므낫세와 에브라임과의 관계(12아들에게 12지파로의 축복을 주고 있는데, 요셉에게는 창48장에서 보이듯 야곱이 한 기업을 더 주게 되고, 레위가 12지파에 들어가지 않게 됨)의 관계가 독특함을 느낍니다. 물론 디나 사건으로 그때 시므온과 레위가 칼로 디나를 범한 족속을 죽이는 일로 아비 야곱으로 거의 저주에 가까운 기도를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또한 흩어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시므온 지파는 땅을 얻기 얻지만 나중에 약해져서 다른 지파로 흡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레위 지파의 경우 하나님께 구별되어 땅은 기업으로 얻지 못하고 역시 여러 지파로 흩어지게 됨을 압니다.
>
> 여기서 제가 보게 된 것이 바로, 출애굽은 이스라엘 족속 전체의 구원, 구별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배후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치밀한 하나님의 계획이 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바로 레위지파의 구별이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한 가족과 그 가족에서 남자로 태어난 어린 모세, 누이 미리암, 아론, 그 이후에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상황에서 모세를 통해 범죄한 이스라엘 족속을 칼로 친후에 여호와께 헌신하여 구별되는 레위 지파 전체(여기서 저주와 같았던 기도가 여호와의 축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구별되는 아론과 제사장 족속으로 구별되는 그의 가족 남자들. 민수기 1-3장의 인구에서도 보이듯, 레위지파의 역할은 이스라엘 전체를 구별하기 위한 역할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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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너무나 의도적으로 레위지파를 구별하심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구별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관점이 옳은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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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레위지파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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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좋은 관찰이네요...제가 더할 것은 없는 것 같군요.
세겜 성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인한 '레위'에 대한 야곱의 기도는 '저주'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흩어짐이 축복된 흩어짐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길 때 오직 레위 지파만이 하나님 편에 서 있었고 발람의 유혹 때에 오직 레위 지파 비느하스가 하나님 편에 서서 헌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헌신과 순종이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조상탓,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저주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과 순종으로 오히려 축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굉장한 긍휼하심이죠. 그래서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된 지파로 부름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분배받지 못했지만 예물과 십일조를 기업으로 분배받게 된거죠. 또한 모든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레위지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생명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장자를 구별하신 하나님이 대신 레위지파를 구별하심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구속하신 은혜를 가르쳐주시고자 하십니다. 즉, 애굽의 10재앙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으로서 레위지파의 구별하심으로 분명히 하셨습니다. 레위지파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를 이스라엘 전체에게 가르치는 도구로 부름받은 것이고 또 그렇게 봉사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레위지파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상징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지파의 의미였습니다.
레위지파는 게르솜, 고핫, 므라리 자손의 세 분파로 다시 나누어지는데 레위지파 중 오직 아론의 후손들만이 제사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비아론 계열의 레위인들은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장들의 업무를 돕는 자로서 봉사하였습니다. 이런 특권은 그들의 헌신과 순종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레위인들에게 잘 대접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역의무를 면제받는 대신에 성막에 관련된 모든 일을 맡아 봉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성막을 보호해야 하고 성막을 수종들어야 하고 제사장을 보좌하여야 했습니다. 또한 나중에 성전에서 성물을 관리하고 예배와 찬양을 주관하는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레위지파가 아니더라도 그런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레위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삿17:8;삼상1:1;2:11)
레위인 제도를 우리 삶 속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날 이 레위인을 '목회자' 내지 '성직자'라고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오늘날 신약의 교회는 통일성도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레위인만이 성막을 수종드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목회자만이 예배를 수종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만인제사장'이라는 개혁자의 개념이나 성경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지요. 목회자만이 성직자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의미에서 '레위인'이고 '성직자'이지,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받은 사람만이 '성직자'라고 부르는 것은 카톨릭적 사고방식이고 비복음적 견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레위인'이고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입니다.
히브리서13:7절에 대해서
질문:
>오늘 GBS 때 3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길)에서 8번의 ①에 히브리서 13:17절말씀을 같이 찾아서 읽는 가운데,
>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
>여기서 '경성' 이 무엇인지와 '회계' 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기에..
>-.-a 경성은 성경책에 있는 설명[경각심을 가지고 늘 깨어 있음]을 읽어주었는데, 좀 더 쉽게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회계는 무엇인가요? 죄지음에 대한 단순한 회계가 아니라고 한 자매가 그랬는데, 그것도 가르쳐주세요.
답변:
좋은 질문에 감사해요...
음...이 말씀은 교회 지체들이 자신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는 말씀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렇게 쉽게 번역해볼 수 있어요. "우리가 우리를 다스리는 영적 인도자를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깨어 각성하려고 애쓰기 때문이고, 마지막 날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섬김에 대한 결산보고를 해야 할 청지기처럼 생각하고 우리를 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그들을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공동체 안에는 크고 작은 '목자'들이 다른 지체들을 섬기며 돌보며 또 인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사, 목사, 리더, 등의 이름으로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섬기는 동기는 다름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회계감사를 받기로 작정된 '청지기'인양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섬기는 지체들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섬기는 영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깨어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해야 합니다. 그들이 더 기쁨으로 우리를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회사같은 경우는 연말에 감사를 받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맡겨진 '섬김'의 분량을 얼마나 잘 감당했는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건 아니건 간에, 우리가 맡은 섬김의 부분을 잘 감당한 자는 10고을을 차지하는 권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회계'는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맡은 섬김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암시하는 바는 (1)공동체를 섬기는 자들은 언젠가 자신의 섬김의 행위에 따라 심판 날에 감사를 받게 될 청기기라는 사실과 (2)불의한 청지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깨어 부지런히 섬겨야 한다는 사실과 (3)섬기는 영혼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섬기는 자가 먼저 각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4)영적인도자들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 안에 크고 작은 목자들의 마음이 이러하다면 그를 따르는 지체들은 당연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비록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들의 청지기적 의도를 봐서라도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 세우신 리더의 권위 때문에라도 조원들은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순종이 없이는 공동체의 영적 질서가 제대로 세워질 리가 없습니다.
두 번에 걸친 치료에 대해서
질문:
>히히...안냐세여...질문방 이용은 첨임다...
>오늘 시심을 하다가여...(막8:14-26)
>22-26을 보믄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오잖아여...
>근데 희한하게두 여기서는 두 번에 걸친 치료 끝에 완치가 되는데여...
>왜 그런걸까여?
>음...넘 소심하구 치사한 질문인가여...
>안여쭤볼까 하다가 그래두...넘 궁금해서...
>왜 두번이나 안수를 받아야 했나여?
>아이, 궁금해라~!
답변:
매우 좋은 질문이에요..^^
하나님은 너무나도 '치사한'(?) 질문 속에 '엄청난' 진리를 감추어두기를 좋아하시지요. 하나님은 유치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굉장한' 일을 하셨듯이... 결코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성경은 예수님께서 소경을 치유하시는 사건을 모두 일곱번 기록하고 있지요. 방법도 여러 가지였어요. 그런데 본문은 아주 독특하지요? 본문을 한번 볼까요? 본문의 내용은 이래요: 하루는 벳세다라는 마을에 제자들과 함께 도착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한번 만져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 요청에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세요. 그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어요. 그 자리에서 말씀 한 마디면 낫게 하실 수 있는데 손을 잡고 데리고 나가신 이유가 뭘까요? 그런 다음에 눈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경멸적인 방법이에요. 요한복음 9장에는 눈에 진흙을 바르셨지만 침을 뱉으신 것은 아주 모욕적인 방법이지요. 그런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시고 대답을 들으시고 한 번 더 안수하십니다. 그런 다음 완전히 치유 받습니다. 자, 이 수수께끼같은 사건을 이해하려면 성경을 전체적으로 그 문맥을 더듬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8장 1절부터 보면...예수님께서 군중 4,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리고 벳세다는 그 근처구요. 그런데 11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야라면 하늘의 표적을 보여주시오"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시죠.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깊이 탄식하신 이유는 그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들 보는 앞에서 소경을 치유하지 않으시고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신 것이지요. 무늬자매님,,,마11:20-22절을 읽어보세요. 거기 보면, 벳세다라는 마을은 예수님이 화를 명하신 곳이었어요. 많은 권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완악한 마을이었어요. 그래서 엄중한 화를 선언하셨고, 또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선언하셨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거죠. 벳세다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완악한 곳이었습니다. 두 천사가 롯을 잡아 마을 밖으로 이끌어낸 것처럼 예수님도 그런 불신앙에서 나오라는 뜻으로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이끌어내신 것이죠. 어때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어요?
그런 다음에 눈에 침을 뱉으셨지요. 이 행동은 벳세다의 영적 무지함에 대한 주님의 증오심을 나타냅니다. 불신앙(소경으로 상징됨)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신 것이죠. 그런 다음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예수님께서 이 소경을 완전히 단번에 치유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불신앙과 영적 무지함에 대해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간다"고 말했을 때 제자들이 의아해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상하다. 우리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신걸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깨닫게 해주시려는 교훈은 '저 소경과 같이 어설프게 대충 희미하게 보는 상태' 즉 벳세다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의 영적 상태가 바로 그렇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수하셨는데도 단번에 사물을 명확하게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제자들도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희미한 안목에 대해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게 하시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벳세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대충 알고 있었고 그것은 거의 모른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죠. 두 번에 걸친 안수를 통해 예수님은 영적 무지함에서 벗어나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아주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말이죠...바로 보는 것(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완전히 치유하신 후에 뭐라고 말씀하셨죠? 다시 그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셨죠. 왜냐면, 표적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이죠. 또 불신앙의 마을로 들어가면 그 나음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바로 믿는데 큰 장애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이 사건은 우리가 예수님을 어설프게 희미하게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가르쳐준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바른 영적 안목이 얼마나 축복된지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
>어리석은 질문이 될 것 같아 망설이다 여쭙니다...
>사복음서(제가 본 곳은 마가복음 8장 34절~ )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을 접할 때 두려운 생각도 들고,
>또 "자기십자가"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도 잘~
>나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해 깨달음이 없는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답변 부탁드립니다. 꾸벅~
답변:
좋습니다. 막8:34절 말씀의 문맥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물으셨을 때입니다. 베드로가 멋지게 고백을 잘 했지만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서 만류했지요.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책망하신 직후에 많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통해 막8:34절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내적 동기'(inner motive)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자, 34절을 다시 볼까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 자,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면 안 된다고 만류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내적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유토피아로 생각했었고 따라서 그리스도가 고난당하는 것은 자신의 천국관에 비추어볼 때 전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을 통해 34절의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해봅시다.
(1)"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즉,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자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만약 성공과 출세만을 꿈꾼다면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자는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
(2)"자기를 부인하고..." 베드로는 입신양명과 출세라는 자기 욕망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욕망을 그리스도를 위해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숨긴 채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지! 자기 부인(self-denial)은 '나'라는 말을 하지 않거나 자기 인격을 무시하거나 삶을 내팽겨쳐라는 금욕주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도바울이 고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욕망과 죄성에 대해서 날마다 죽는 것을 의미하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욕망과 욕구에 대해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분의 말씀이 진정한 욕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욕심과 정요과 요구에 대해서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훗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면 언젠가 우리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3)"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 십자가는 자기 운명이나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십자가는 죄인들을 처벌하는 극형이었죠. 다시 말해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고난을 감수하라는 뜻이 아니라, 기꺼이 '형벌 받을 자'와 같이 자신을 여기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이구 내 팔자야!"라는 식의 체념 섞인 자조가 아니라 나 자신을 죽을 죄인의 자리, 형벌 받는 자리에 두라는 뜻이죠. 베드로는 높은 귀족의 자리를 꿈꾸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죄인의 자리에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난'으로 자위하고 있는지요! 그러나 십자가는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정신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치면서 죽을 각오로, 십자가에 매어달릴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출세와 명예를 꿈꾸는지! 그러나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아니,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잘 죽어야 합니다. 멋있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멋있게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4)"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따라 오시라고 설득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가시려는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내가 가려는 곳에 주님더러 오시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불투명한 인생을 사는 존재입니다. 내일 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인생이지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앞으로 전진했던 아브라함의 삶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이 앞서 가셔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가면서 주님보고 도와달라는 식으로 신앙생활해서는 안됩니다.
(5)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동기를 항상 점검해야만 합니다. 특히 이번 고난주간은 그러한 동기를 살피는 절호의 기간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기복주의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잘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잘 죽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잘 죽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 '세속주의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세상의 아름다움, 세상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에 현혹되어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매어달리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은 멋드러지게 잘 하여도 실제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위해 고난받는 삶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과 삶은 일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무엇을 얻기 원합니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자기 욕구와 욕망을 거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죄인의 자리, 형벌 받는 자리, 고통스러운 중보의 자리로 내려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곳이 아마존 정글지대라면 그래도 기쁘게 따라갈 것입니까? 그대의 동기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동기인지...아니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동기인지... 궁금한 영혼 속에 거룩한 제자도가 심기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사흘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다'라고 한 시점부터 부활하시기까지의 ''사흘''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어요.
답변:
음...'사흘만에' 부활하셨다고 잘 알고 있지만 그 '사흘'의 의미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덕분에, '사흘'에 대해 잠간 묵상할 수 있게되었답니다. 제가 묵상한 내용을 나누도록 하죠.
'사흘'이란 숫자 자체의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같구요, 다만 '사흘'이 가리키는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사흘이란 기간의 의미에 대해 묵상해보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세번'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셨고 예수님은 자신의 예고대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사흘'은 자아를 죽이고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흘이란 기간이 상기시켜 주는 구약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지요. (1)아브라함이 그 사랑하는 독생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으로 가기까지가 사흘이에요. 이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절대순종의 기간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 사흘은 '부활의 신앙'으로 전진했던 기간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죽이더라도 하나님이 도로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걸어간 사흘길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믿음의 기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사건에 대해 중요한 예표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이 뱃속에 '사흘'을 지내었습니다. 이 기간은 요나가 자신의 자아를 깨뜨리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요나의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중요한 표적이 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도 이 요나의 표적을 인용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니라"(마12:39,40) 예수님의 고귀하신 육신은 자신이 예고하신 대로 사흘을 땅 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2장 1절 이하의 바울의 말씀대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 이 사흘은 새로운 종말의 성전을 다시 세우는 거룩한 기간입니다. 요2:19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은 이 사흘 동안에 옛 성전을 허물고 다시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는 건축기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흘은 옛 것을 허물고 새 것을 창조하시는 기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 이 '사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절대적 순종, 절대적 믿음, 그리고 영적 갱신(spirirual renewal)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옛 질서를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일으키기 위해 정해진 기간입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할 때 주로 3일간을 작정하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담당하셨던 그 사흘이 영광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간이었다면 오늘 우리도 영광의 그 날을 경험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사흘'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매우 짧은 기간이지만 그러나 깊은 어둠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요나에게 그랬고,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말입니다.
질문하신 이에게 하나님이 '힘' 주셔서 주어진 '사흘'을 잘 감당하여 영광의 그 날을 붙잡을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좋은 질문 주셔서 내가 먼저 배우게 된 것 같군요.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이방여인과 결별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
>목사님께서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지체들에게 상세히 답변해주시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에스라 10장에 보면 이방인 아내와 자녀를 내쫓는 부분이 나옵니다.
>물론 그들이 잘못한 건 알 수 있는데 쫓아 내보내는 것은 조금은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에 적용하면, 만약에 믿지 않는 자와 결혼을 하면 이와 같은 적용이 가능한가요?
>에스더 8장에 유다사람들이 살 길이 열리게 되고 9장에는 반대로 유다 사람이 원수들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근데 이들이 죽을 만큼 잘못했는지 궁금하고 (8장 17절에 보면 유다 사람이 되기도 했다고 나왔는데 잘못이 없는데 이방민족이기 때문에 죽을까봐 단순히 두려워서 유다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유다 사람들이 이방민족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홧김에 죽이지 않았나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만의 아들까지 죽이는 부분이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답변: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조심해야 할 부분 중에 하나가 '시대착오적 관점'(anachronism)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가치기준으로 과거의 가치기준을 평가하려는 역사관이죠. 예를 들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에는 잘 못 먹고 살던 '보릿고개시절'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얘기를 듣던 손자가 하는 말, "할아버지, 왜 라면을 먹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역사를 바라볼 때는 그 당시의 가치기준으로 보아야 하지,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의 가치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질문한 내용은 두 가지가 아니고 한 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윤리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지요. 결론은 아닙니다. 과거의 윤리기준과 오늘의 윤리기준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역사는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바라 볼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구약의 사건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그때의 윤리기준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곧바로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이방여인과의 결혼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방여인과의 결혼은 율법이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사안입니다. 에스라 공동체는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은 몽학선생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에스라 공동체는 공동체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에는 더 이상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의미가 신약 교회 안에 좀 더 영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볼 때 음행한 연고없이 다른 어떤 이유로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이 엄히 금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라는 이유도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음행의 죄가 성립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이나 구약의 사건들을 볼 때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속사역의 프리즘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결혼관을 문자 그대로 교회 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라의 본문은 오늘 언약의 공동체가 영적으로 순결성을 확보하여야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고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세속주의, 배금주의, 이기주의, 성공주의 등을 몰아내야 하는 영적인 의미로 보면 가장 무난할 것 같습니다.
에스더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법개념이나 윤리기준으로 보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시대는 그 시대의 관점과 그 시대의 윤리기준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그러한 유대인의 행동을 가리켜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제군주의 시절에 일어난 일을 민주주의 시절을 살고 있는 우리가 볼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착오적인 관점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역사를 진지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취급하려면 그 시대는 그 시대의 틀 안에서 보아야합니다. 오늘의 가치라는 틀에 과거의 사건을 제한하면 우리는 한없이 오리무중에 빠져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과거에 통용되고 허용되었던 가치가 오늘날에는 전혀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대신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혀 새롭게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에스더 시대에는 전제군주의 시절이기 때문에 원수들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이 허용되었지만(그러나 이스라엘 나라 안에는 그것을 금지합니다만)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과거에는 '허용'되었지만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이혼증서를 주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죄가 아니었지만 오늘날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음행의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역사를 볼 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의 중심으로 서계시기 때문이죠. 구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 성취되었고, 완전해졌는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를 찾아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역사의 중심으로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지 전까지 모든 구약의 사건들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에스라, 에스더 두 본문의 사건들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새로운 윤리기준이 계시될 때까지는 불완전한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꼭 묵상해보세요. 산상수훈 5장은 우리가 예수님의 시각으로 율법을 재해석하는 방법과 그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약의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완성하셨으며,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온전하신 뜻을 갈보리 언덕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역사의 중심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죠.
역사의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레위기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
>이번에는 좀 부끄러운 질문입니다.
>저는 성경읽기 진도에 맞춰 출애굽기까지는 잘 따라오다가 레위기에서 막혔습니다.
>물론 전혀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닙니다. 한6장 까지 읽었는데 말이 읽은 것이지 사실은 글자만 봤습니다.
>읽고 지나가면 방금 읽었던 내용은 기억에 나지도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이를 악물고 읽었는데 이제는 진도에 따라가기도 버겁습니다.
>목사님 ! 어떻게 하면 레위기를 잘 읽을 수 있을까요?
답변:
사실, 저에게도 레위기는 쉽지 않는 책임을 고백합니다. 고등학교 때에 레위기가 참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저에게도 어렵습니다...이것은 다른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거예요. 이것은 아마도 레위기에 대한 설교를 거의 듣지 못해왔던 습관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레위기 묵상에는 거의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훈련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균형 있게 섭취하기 위해서 꼭 레위기를 읽어야 합니다. 비록 글자만 읽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레위기는 억지로라도 읽어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1)레위기를 읽기 전에 레위기 개관을 꼭 하십시오. 지난 번 모세오경 개관강의할 때 나누었던 유인물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2)레위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글자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어려운 표현 속에 담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어떻게 내 삶과 사회가운데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좋습니다.
(3)레위기는 구원받은 백성을 거룩한 삶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성별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통해 묵상하고 해결해야 할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거룩하심 둘째,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셋째,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 국가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전체적으로 묵상하는 것이 세부적으로 묵상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합니다. 나무를 보다가 숲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개관공부가 꼭 필요합니다. 레위기는 다른 성경책보다 훨씬 복잡한 숲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고 나서 들어가면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4)기록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를 통해 우리는 여러가지 제사를 비교해보면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공책에 도표를 직접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게 공부하는 비결입니다. 제사, 절기, 정결규례, 등에 나타난 규정들을 간단하게 기록하면서 읽어보십시오. 그냥 읽는 것보다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5)무엇보다 레위기의 강점은 개인의 거룩성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국가의 거룩성까지도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며 그것을 위해 원칙을 제공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회개혁이나 운동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레위기는 가장 매력적인 책이 될 것입니다.
(6)가까운 서점에 가서 쉽게 풀어쓴 '강해집'을 함께 병행하면서 읽으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7)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또 어떻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지 묵상해보는 계기로 삼는다면 레위기는 은혜로운 책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읽을 때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나무'를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전체를 보면서 묵상하도록 해보십시오. 저도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단어 그 자체의 의미를 아는데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본문의 그림을 그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비추어서 자꾸만 전체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숲을 그리고 점차적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자, 이렇게 해보십시오. 먼저, 개관을 공부하시고 나서, 각 장의 개요를 공책에다가 기록해나가십시오. 그리고 각 장의 단락을 구분하여 나름대로 제목을 붙이고 나서 그것을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비추어서 개관적으로 묵상해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원칙들을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내 삶과 공동체와 나라와 민족에 적용할만한 '거룩함의 원칙'들을 나름대로 찾아보려고 하면 어떨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읽기 전에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 '지혜'를 구하는 것일 겁니다.(약1:5절 참조)
속죄제와 속건제에 대해서
질문: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립니다. 속죄제와 속건제가 그러한 의미라면 한 죄에 대해서 두 가지 제사를 드릴 수도 있다는 말인지요? 사실 하나님께 범죄하고 사람에겐 범죄하지 않은 상황, 사람에게는 범죄하고 하나님에게는 득죄하지 않은 상황이 그렇게 흔하지 않다고 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도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범죄했지만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사오니....'라는 날을 하지 않습니까. 또 '이는 속건제니 그가 실로 여호와 앞에 범과함이니라 - 레 5:19'의 말씀을 보아도 그렇구요. 속죄제를 설명한 4장에 보아도 제사장, 회중, 족장, 평민의 경우가 모두 나오기에 제사장 위임, 월삭과 매년제, 출산 후 정결제, 나실인의 정결제 때에만 드렸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으면"드리는 제사가 속죄제라고 레위기 4장에 나와있네요. 그래서 처음에는 "의식적"인 죄와 "부지중에 저지른" 죄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그리고, "화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불에 태운다는 의미인가요?
답변:
예, 맞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두 가지 제사를 다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이것은 속죄제, 이것은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는 엄격한 규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은 속죄입니다. 즉, 죄를 대속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요.
제가 답변한 것은 이해하기 쉽도록 구분하기 위해서 개념을 설정한 것입니다만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속죄제와 속건제가 항상 병행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죄를 범했어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속죄제와 다른 점은 속죄제는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인데 반해서,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을 범하거나 금령을 어긴 경우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경우 그것에 대한 배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만 범죄했다고 해서 해를 입힌 이웃에게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속건제가 보여줍니다. 속건제는 이웃에 대한 배상, 성물에 대한 배상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속죄제와 속건제를 함께 드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두 제사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레5:6절을 보면,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인하여 속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속죄제와 속건제는 함께 병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사의 시기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적인 구분이 없습니다. 죄사함의 은총을 구하는 제사는 자신의 '죄'를 깨달은 직후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속죄제만 죄를 깨달은 후에 드리고 속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속건제 역시 속죄제와 동일하게 죄를 깨달은 후에 드리는 제사인데 다만 속건제는 배상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레5:17-19절(속건제)과 레4:13,14,23,28(속죄제)를 보면 모두다 죄를 깨달은 후에 드리는 제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물을 범하거나 이웃의 소유를 범했어도 그것은 "실로 여호와께 범과함"입니다.(레5:19) 그러므로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점이라기보다는 배상의 책임에 대한 강조점이 중요한 변수라고 봅니다.
화제는 제사를 드리는 방법으로서 불에 태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니라 방법이었습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는 모두 5가지입니다.(레1-5장을 보세요.) 번제(1장), 소제(2장), 화목제(3장)는 하나님의 열납하심을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로서 자원적인 의미가 있는 반면에, 속죄제(4장), 속건제(5장)는 죄를 대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로서 의무적인 것이었습니다. 전자를 봉헌제라고 부르고 후자를 속죄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속죄제와 속건제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죄를 대속하는 의미가 있는데, 속죄제는 회중이나 족장이 죄를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며, 속건제는 성물에 대해 범죄했거나 남의 물건을 가로챈 일에 대해서 죄를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즉, 속죄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죄를 처리하는 제사인 반면에, 속건제는 성물 혹은 다른 이웃의 소유권에 대해 범한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죄를 처리하는 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속건제의 피흘림은 이웃에 대한 양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각각의 제사는 희생제물이 드려지는 방식에 따라 다릅니다.
●번제의 짐승은 전적으로 불살라졌고 그 피는 번제단 사면에 뿌려졌으며 그 고기는 아무도 먹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번제의 동기는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바쳐드리는 자원적인 예배의 성격입니다.
●소제는 고운 가루에 유향을 넣어 불사르도록 단으로 가져갔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습니다. 소제는 매일 드렸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변함없이 예배는 드려져야 합니다.
●화목제의 짐승은 기름과 내장부분이 단 위에서 불살라졌고 피는 뿌려졌으나 그 고기는 예배자와 제사장(가슴,우편 뒷다리)이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화목제는 자원제이며 서원을 이행할 때 드리는 서원제로서 드려졌으며 '감사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열납하심(receiving)의 은총을 간구하는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속죄제의 고기는 백성 전체 혹은 대제사장의 죄 때문이라면 성막 밖에서 불사르거나 제사장이 먹게 되었고 피는 지성소, 분향단, 번제단으로 가져갔습니다. 속죄제는 제사장 위임, 월삭과 매년제, 출산 후 정결제, 나실인의 정결제와 관련해서 드려졌습니다.
●속건제는 대제사장 이외의 다른 개개인을 위한 속죄제로서 드려졌습니다. 그 기름은 단위에서 불살랐고 피는 번제단으로 가져갔고, 제사장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성적인 죄의 경우에 드려지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유하심(forgiving)의 은총을 간구하는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각각의 제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삶속에 기본이 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각각의 제사는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독특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제는 흠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복종을 나타내며
●소제는 매일 드리는 제사로서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과 생명을 나타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내며
●속죄제는 우리의 죄값를 단번에 지불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을 나타내며
●속건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범한 죄값까지도 지불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대해서
질문:
>성경을 읽다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후 나의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요셉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찾기가 힘든거죠??
>그리고 오늘은 묵상을 하다가 알게 된 건데요...
>우선 제가 찾은 말씀은요...
>먼저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으로....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당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세기 17장 8절 말씀)"
>그리고 두 번째로 이삭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26장 2~5절 말씀)"
>마지막으로 야곱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창세기 25장 12절 말씀)"
>이렇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동일하게 가나안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요셉에 대해서는 그러한 축복이 없었나요?
>아님 있는데 제가 못 찾은 건가요?
>알려주세요....
답변: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흩어진 각 족속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기 위해 한 족속을 창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서 시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친히 현현하셔서 그 약속을 확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이 너무나 확실하고 신실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번씩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에게도 현현하시고 그 약속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야곱에게도 그 약속을 확증해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현(theophany)과 언약의 확증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만 적용되고 요셉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왜 요셉에게는 현현하지 않으시고, 또 언약을 확증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왜냐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 번씩" 확증하심으로 하나님은 그 자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하나님의 현현과 언약의 확증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셉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세 사람에게만 현현하시고 언약을 말씀하셨는가? 에 대한 대답을 굳이 다른 데서 찾으려면 아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나이를 서로 비교해보면 깨달아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습니다. 그 때 이삭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나이가 35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을 때 요셉은 이미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생존해 있을 동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그 아들과 그 손자에게도 보여주심으로써 아브라함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생존해있을 동안 이삭과 그 손자 야곱에게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아브라함이 불안해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하나님은 그 부르신 자에게 그 부르신 목적을 그가 평생 동안, 생존해 있을 동안, 끝까지(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도 신실하십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나 언약의 당사자는 되지 못합니다. 다만 언약의 수혜자일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언약의 당사자들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그 형제들, 그 자손들은 언약의 수혜자들입니다. 요셉의 일생이 창세기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의 일생은 야곱의 일생에 한 부분으로 속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네 족장이 아니라 세 족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쓰임받는 도구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기록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의 가족을 어떻게 애굽으로 인도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족장은 세 명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이야기 속에 포함되고 있을 뿐입니다.
요셉이 축복을 못받은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그 선조들이 받되 그 약속의 성취는 그 후손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요셉은 축복의 약속을 직접 받지 못했지만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그 선조들보다는 더 가까이, 확실히 볼 수 있었던 것이죠. 자, 축복의 약속을 받되 그 성취를 맛보지 못한 사람과 축복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 성취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둘 중에 누가 더 나을까요? 요셉은 약속보다는 분명 성취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약속의 말씀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약속의 성취에 한 발자욱 가까이 다가와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자, 우리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까요?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성취를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또, 약속을 받되 성취를 맛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은 사람은 그 성취를 '맛본 것'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부활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 부활의 성취는 미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경험하고 있으며 부활한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인 것입니다. 자, 반대로,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직접" 약속을 받지 못했어도 우리는 주 예수님 안에서 그 약속의 성취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분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보다는 훨씬 그 성취에 다가서 있으며 또 그들보다는 훨씬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런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지요. 즉, 이미 약속을 받았지만 그 성취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살 수 있으며, 반대로 우리는 약속을 받지 못했어도 그 성취를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레위기 27장에 대해서
질문:
>레위기를 보면 26장에서 계명을 준수했을 때의 축복과 어겼을 때의 저주가 같이 나오면서 내용이 일단락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속전"이라는 주제로 다시 27장이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레위기는 26장에서 끝이 나도 별 무리가 없는데 굳이 27장을 덧붙일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레27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27장은 맹세와 서원, 그리고 헌신에 관한 규례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맹세나 헌신을 명령하고 있지는 않습니다.(정규적인 십일조와 장자의 구별 등을 제외)
특별한 맹세는 전적으로 자원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레27장이 강조하고 있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맹세는 함부로 할 것이 아니라,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맹세는 금하고 있습니다)
레26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27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기로 맹세하고 26장까지 기록된 규정을 지키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광신적으로 비현실적으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려고 하는 경향을 간파하고 이에 대해 대처하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한다면 먼저 그 값을 산정해야만 한다"는 것이 레27장의 요지입니다. 즉, 거룩함을 향한 열정은 진지한 현실주의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테면,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맹세하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은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27장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맹세의 규례를 보세요. 맹세는 그것의 가치를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해지려고 하는 모든 신앙행위들이 이러한 냉철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을 통해서 절제되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절제되지 않은 '지나친 헌신'을 규제하기 위해 말씀하심으로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한 삶을 지혜롭게, 규모 있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를 테면, 맹세는 그것의 가치를 정함으로써 아무나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없도록 규정하셨습니다. 옵션이 없는 맹세, 함부로 하는 맹세, 규모 없이 과도한 헌신은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26장까지만 있고 27장이 없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사람들은 "내게 거룩하라"(=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떼어놓아라) "구별되어라"고 하셨기 때문에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구별하거나(2-8절), 짐승을 구별하거나(9-13절), 집을 구별하거나(14,15절), 토지를 구별하려고(26-33절)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려고 할 때 무분별하게 하지 못하도록 '옵션'을 달아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헌신은 대가가 있으며 그 '가치'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27장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무분별한 헌신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뜨거운 헌신은 냉철한 판단과 함께 가야 합니다. 레27장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헌신하고자 할 때, 함부로 하지 말고, 그 헌신의 가치를 측정해서 그 가치를 지불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레27장의 요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실 때에도, 헌신하고자 할 때 먼저 비용을 계산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눅14:26-33절을 읽어보세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좁을 길을 가려고 할 때 우리가 하고자 하는 '거룩한 헌신'이 얼마의 가치가 나가는지 하나님 앞에서 먼저 값을 매겨놓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에 이렇게 값을 매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해서
질문: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여자의 후손 중에 이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큰 자'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이보다 크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에서의 큰 자, 작은 자는 어떤 의미인가요?
>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옛 언약 시대와 새 언약 시대를 서로 비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새 언약을 수립하시기 전까지의 시대는 옛 언약의 시대입니다. 옛 언약의 시대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세례 요한은 가장 으뜸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이었기 때문이죠. 세례요한은 옛 언약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가장 복음의 영광에 근접해 있었던 사람입니다. "크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정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시대에 속한 사람 중에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례요한이 알고 경험한 복음의 영광보다는 더 가까이 다가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천국을 예고하는 전령이었지만 그는 천국을 경험하는데 있어 오늘날 그리스도인보다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새 언약의 영광이 옛 언약의 영광에 비해서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세례요한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복음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 중에 가장 작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이었던 세례요한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더 가까이 근접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고, 천국에서 크고 작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을 알고 경험하는 정도를 나타낸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큰 영광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이 복음의 영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부디, 이 복음의 영광을 더 깊이 "아는" 은혜 속에서 강건하기를 축복합니다.
안식일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
> 안녕하세요 목사님!! 이러한 좋은 장이 있어서 넘 감사합니다!!
> '승리의 삶'이라는 Q.T책의 부록 비슷하게 어떤 글이 실렸는데 그것의 제목이 아마도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 인것 같습니다. 평소에 안식일에 대해 관심이 있던 차에
>열심히 읽어 보았지요... 근데 글을 읽다가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글에서는 안식일은 구약 성도들이 지켜야만 하였던 "율법"이며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거기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으로(강제적이 아닌 자발적인..) 안식일후 다음
>날인 주일을 지킨다고 하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 즉,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째 안식하심으로
>안식을 주셨다고 알고 있었는데여.. 그리고, 이러한 안식일의 의미가 물론 날짜는 다르지만
>'주일'에 온전히 나타난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 그래서 좀 혼란스럽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에 대해 신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맘으로 이 주일을 맞이하면 되는지...(이사야 58장에 나온 안식일의
>개념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과연 맞는 것인지...등등...)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요..
>(사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주일엔 구약 성서에서 말하는 안식일적인 요소가 많은 것
>같거든요... 일을 안한다던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금한다던가 등등)
>그리고, 주일의 유래(?)에 대해서도요...
>
답변:
분명 안식일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율법'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었던 법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법이라고 전제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폐기주의적인 경향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제도를 폐하여서는 안 되며 예수님처럼 그것을 '완전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안식일 규례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라 보다 철저한 방식으로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안식일은 처음 천지창조후 하나님이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범죄함으로 그 안식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을 때 하나님은 안식을 잃어버리고 종노릇하며 살던 흩어진 각 족속들에게 안식의 복음을 전할 족속으로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그들을 구원하시고, 구원하신 그들에게 '안식'을 명령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을 지킨다는 것은 종된 상태에서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을 참으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는데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안식일을 지켰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종노릇하는 데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주일을 지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종말론적인 사건임을 알기 때문에 안식일의 본래 의도를 구약 이스라엘 백성보다 보다 철저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안식일은 절대로 폐하여 졌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다 철저한 의미의 안식을 우리는 지켜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점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주일에서 '완전케' 되었습니다. 안식교도들처럼 안식일의 의미에만 매달린다면 영광스러운 부활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반대로 안식일이 폐지하여 졌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도 다른 날과 같이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일 매일이 안식일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으나 우리는 특별히 주일을 정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데서 자유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는 데 시간을 드려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일을 맞이해야 할까요? 구약의 성도들이 안식일을 맞이하는 마음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경배했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죄와 세상과 정욕과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를 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어린양을 기쁘게 경배하기 위해 모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닙니다. 주일은 굉장한 축제(festival)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과 헌신과 감사와 경배의 날입니다. 우리는 이 하루를 위해 다른 엿새를 살아야 합니다. 엿새의 날은 하루를 준비하는 날들로 보내야 합니다. 요즘 주일을 준비하지 않고 그냥 맞이하는 경향이 많아져가는 것은 분명 공동체의 '적신호'입니다. 준비하면서 주일을 맞이한다면 분명 주일은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58:13,14절의 말씀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복음의 의미에 합당하게 안식일을 안식일 되게 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하루로서 온전히 살아드리는 날로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어떤 금욕적인 규칙이나 형식이 지배하는 날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구약의 안식일의 요소가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안식일과 주일의 획일성을 꾀하는 안식교도들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불연속성만을 강조하는 율법폐기론자들의 태도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연속성만을 강조하는 획일성에도, 불연속성만을 강조하는 방종성에도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는 날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 행하지 말아야 할지는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지도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먼저 행동과 규칙을 규정해버리고 그 틀에 얽매이는 것은 또 다른 노예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릴 적 신앙생활할 때만 해도 주일날 버스를 타고 교회 가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기쁘게 따르기로 정했던 규칙이나 형식이 항상 앞으로도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는 물건을 사고 팔고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화되어버리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원론이 각론을 결정해야지 각론을 따지다가 원론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주일날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일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분명한 것은 주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글이나 편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초대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습관에 따라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는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일이 회당에서는 없었기 때문이죠. 더욱이 안식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서 기쁨의 날이기보다는 슬픔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이 아닌 안식일 다음날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이죠. 고전16:2에 보면 사도바울 역시 주일예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일은 처음부터 '성만찬'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만찬은 저녁에 가졌었는데, 처음에는 성만찬과 주일예배를 따로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배는 주일저녁에 드렸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주후 100년 경 로마 황제 트라얀의 칙령에 따라서 모든 저녁집회가 금지되자 기독교인들이 저녁에 모이지 않고 주일 아침에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른 아침 시각에 맞추어서 예배를 드린 것이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저스틴도 자신이 쓴 [변증서]에서 일요일 아침에 예배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갖가지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감격적으로 모일 때마다 주의 명령하신 성만찬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감격적으로 드렸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 주일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잔치일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를 경배합시다. 그리고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맙시다. 주일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경배하는 날로 온전히 구별해드립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참 자유(안식)의 복이 질문하신 이의 평생에 지속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11:13절과 39절에 약속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소멸하는 불의 뜻은?
질문:
>하하하.... 전에 들었던 내용인데 염치 불구하고 질문합니다.
>히브리서 말씀중....11장 13절에 약속된 것, 11장 39절에 약속된 것은 같은 것입니까?
>그리고 약속된 것이 뭔가요?(무슨 내용인지....)
>12장 마지막 절에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라고 했는데 이건 무슨 뜻입니까?
예,,,좋습니다.
답변:
히11: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11:39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약속'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11장 전체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볼 때 이것은 단지 가나안 땅에 국한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전체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입니다. 왜냐면 히브리서는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의 시대를 서로 비교하면서 새 언약의 시대의 탁월성을 논증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면 신약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를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9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12장 18절부터 보면 불의 이미지가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시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향해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심을 '불'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4:5절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를 설명할 때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이미지를 설명하는데 '불'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불은 태워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모든 죄와 부정함을 태워버리는 능력을 갖고 계시며 모든 반역과 죄인들을 불못에 던지실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십니다. 이 '불'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8절을 보세요.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 이유를 29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함이 우리의 힘입니다.
순종과 가나안 땅의 관계?
질문:
>목사님 전 지금 민수기 23장 읽고 있어요...
>(많이 밀렸어요...^^;)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 시혼 등의 왕과 싸우잖아요...
>그 싸움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연습 , 택함 받은 후의 영적 전쟁 등으로 여겨집니다.
>근데, 더 깊은 뜻은 없나요?
>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요 (그전에 믿음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도 못 들어가잖아요...)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지 않았을까요?? 그부분을 읽으며 두려움도 들고 해서 여쭙니다...
답변:
예, 좋습니다. 아주 좋은 질문을 하셨네요. 모처럼 성경읽기 흐름 속에 적절한 질문을 받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에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싸움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연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으로서 하나님이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전쟁을 사람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을 '경건의 연습' '더 큰 싸움에서 이기도록 훈련받는 과정'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 싸움은 이스라엘의 연단이나 훈련의 과정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악들을 그 권능으로 심판하심으로써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그 권능으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미리 말씀해두셨습니다.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15:13-16) 이스라엘의 싸움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을 신명기에서 모세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좇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9:4,5절) 그렇습니다. 싸움의 주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것이 영적전쟁의 본질입니다.
두 번째 질문도 매우 중요합니다. 모세가 회개하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을까~!! 하나님은 모세의 수많은 기도에 다 들어 응답하여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신명기 3:26,27절이 갖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내게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모세는 간절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그만해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모세의 간구를 거절하셨을까요? 26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이것이 모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입니다. 즉, 불순종한 이스라엘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불순종하며 불평, 원망하던 이스라엘을 바라보고서 화가 나서 반석을 가리키라는 명령을 어기고 그 혈기로 반석을 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된 것은 불순종하던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분노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홍해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못 들어가면 그 대표자인 모세도 못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더 깊은 영적 의미로서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합니다. 율법은 다만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감당할 뿐입니다. 율법 그 자체로서는 결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구약의 율법은 그 문자적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곳에서는 참된 자유함이 있습니다. 율법은 이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면화되기 시작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모세는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어긴 모세로서는 아무리 회개하더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은 들어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죄가 공동체와 연관이 되어 있을 때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되어 있다면 우리 개인이 회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세의 기도가 거절되는 장면을 보면서 다시금 공동체의 중요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모세가 간구한 것이 거절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을 부르짖지 않았고 찾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가 80여 년 전에 애굽의 궁궐을 청산하고 고난 받는 이스라엘 현장에 낮아져도 하나님은 모세의 편에 서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한 공동체를 향한 모세의 헌신은 수포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불순종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에 모세의 간곡한 기도는 거절된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모세가 죽기 전에 그를 높은 비스가산에 오르게 하셔서 요단강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불순종하던 백성들은 못 들어가지만 그들의 자녀들, 순종을 배우게 된 백성들은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오직 순종함을 배운 자들만이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거하며 그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고 행복함을 누릴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하는 자만이 육신의 정욕을 이길 힘을 얻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거하는 형제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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