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답변:
제가 운영위원으로 있는 성토모의 웹진에 실은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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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가지고서 헌금을 요구하는 설교를 해서는 곤란하겠다. 이 말씀은 “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네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감정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만약 땅에 보물을 쌓아둔다면 땅의 것 때문에 우리는 미움과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고, 반대로 하늘의 것에 대해서는 초연할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보면서 우리는 땅에 소망을 두는지 하늘에 소망을 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물로 여기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이 요동치는 곳에 우리의 보물도 놓여져있다.
또한 이 말씀은 “보물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죄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방식은 물질에 사람의 마음이 얽매이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인행세를 하느냐 아니면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느냐 둘 중의 하나이며 중간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떤 물건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을 뺏어보면 떼를 쓰며 마구 울면서 난리를 칠 것이다. 왜냐면 그 아이는 그 소유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 소유를 빼앗기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강탈당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아이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어른들에게서도 종종 나타난다. 누군가 내 것을 강탈해가면 나는 내 자신이 강탈당한 것처럼 느끼고 반응한다. 내 것과 나 자신은 동일하지 않는데도 동일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진 소유물이 우리의 지정의를 포함한 전인격을 지배하며 통제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물질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들의 모습에 대해 이보다 통찰력 있는 말씀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물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빼앗아보면 우리가 물질을 사랑하는지 않는지 진정한 여부를 비로소 가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지성과 정신과 감정까지도 지배하는 물질의 무서운 지배력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의 보물은 우리를 지배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 더 살펴보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여기서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의미한다. ‘성한 눈’이란 사물을 정직하게 올바르게 보는 관점 혹은 판단력을 가리키고, ‘나쁜 눈’이란 사물을 왜곡되게 보는 관점, 혹은 편견과 정욕과 욕망에 이끌려서 명확하지 못하게 보는 관점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암시하시는 것은 보물은 마음을 주장하는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의 판단력과 가치관과 관점까지도 지배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보물을 위해 지성을 사용하는 실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변호사들이나 검사들은 각자의 수임료와 명예를 위해서 사건을 자기들의 논리에 맞게 해석하려고 한다. 당선을 목전에 둔 정치인들은 상대편 당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한다. 과학자들은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여서라도 화성에 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쓴다. 철학자들은 온갖 이론을 다 동원하여 무신론을 지지하고자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마음이 지성을 지배하는 분명한 증거라고 하겠다. 언뜻 지성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이 지성을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유리창을 깨고 보석을 훔치면 도둑이고, 세금을 조작하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편견의 배후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 있다. 사람들이 세상의 보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탐심이 눈-관점과 판단력과 지성-을 흐리게 하는 분명하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으며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명확한 사실인데도 보물에 눈이 흐려져 있는 사람은 이러한 간단하고도 명확한 사실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을 자꾸만 회피하려고 지성을 사용한다.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싫어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사실을 말하는데도 말이다. 사람은 자기 통장의 돈이 늘어가는 것을 보거나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일시적인 것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마치 영구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인 양 생각한다. 너무나도 뻔한 사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눈이 흐려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가? 보물에 대한 탐심이다. 물질에 마음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실제적으로 마음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지성은 아주 간단한 사실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옆에서 분명히 설명해주어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듯 탐욕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오늘 우리의 지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이 아니면 하나님이다.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사실 물질이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만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제일 위선적인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땅의 것들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적인 삶은 하나님이 아닌 물질을 섬기면서 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청부론과 청빈론의 논쟁이 양립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청부론이든 청빈론이든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청부론이든 청빈론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어쩌면 청부론을 가장한 맘모니즘이 될 수 있고, 또는 청빈론을 가장한 위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청부론과 청빈론의 논쟁의 틀에서 벗어나서 실제적인 신앙론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다. 형식적 무신론보다 더 악한 것은 실제적인 무신론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주님을 섬기지 못했다면 주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 요즘 교회에 청부론이냐 청빈론이냐를 가지고 토론하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참 좋은 토론주제이다. 그러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청부론과 청빈론에 ‘섬김의 정신’이 빠져 있다. 섬김의 도를 제외한 청빈론과 청부론? ?논쟁은 항상 핵심을 놓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재물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보다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누구를 섬기느냐의 문제이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읽은 재미있는 예화가 생각난다. 어느 농부의 집에 암소가 한 마리 있는데 어느 날 흰 송아지와 붉은 송아지 이렇게 두 마리 송아지를 낳았다고 한다. 농부가 기뻐서 “둘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는 저축합시다.”라고 했다. 아내가 농부더러 “어느 송아지를 바칠 거예요?”라고 물었다. 농부는 “일단 잘 키우기나 합시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며칠 후 흰 송아지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때 농부가 하는 말이 “주님의 송아지가 죽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죽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송아지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우리가 제일 먼저 절약하고 아끼는 것은 감사헌금과 구제헌금이다. 우리가 실제로는 세상을 사랑하면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모든 사람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와 인격과 삶의 전 영역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 그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리잡으셔야 할 그 영혼의 자리에 물질이 들어서서 대신 만족과 의미를 주고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는 물질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 호령하고 있다. 물질에 구속된 상태로 물질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고 있는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심과 강한 소유욕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구원의 능력 외에는 길이 없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땅의 보물과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고 결국 물질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드디어 우리 관점과 판단력까지도 흐려놓아서 우리 삶 전체를 송두리째 구속하고 지배하게 될 것이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물질의 소유와 우리 자신을 항상 분리해야 한다. 큰 집에 사는 것이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큰 건물에서 목회한다고 큰 목회자가 되었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 보물로 여기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쌓아두는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 이 땅에 있는가? 저 하늘에 있는가? 나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가, 아니면 제물을 섬기고 있는가? 내 마음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하나님께로 내 마음이 흐르지 않는다면 사실상 물질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물질의 속박에서 구원받고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되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물질의 속박을 끊어버리게 하시는 성령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주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참조로,
2월 22일 서울에 발족되었던 토지정의시민연대 창립식에서 낭독된 선언문입니다.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나의 하나님과 동행하며
역사의식에 투철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하며 글을 올립니다.
주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토지정의시민연대창립선언문
작금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절망스러운 처지에 빠져있다. 지속적으로 심화되어가는 빈부격차와 실업은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고, 내집 마련에 전 일생을 걸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는 ‘호랑이들만의 자유’이고, 시장경제에서의 ‘시장’은 ‘정글의 법칙’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이 노동자의 과격한 투쟁에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자본가의 착취에 있다고 하나, 우리는 토지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가치를 사유화하는 잘못된 제도에 있다고 본다. 이런 잘못된 제도는 토지독점을 부른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토지소유자 중 5%가 민유지의 65%이상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수치가 토지소유자 중 5%라는 점이다. 만약 이것을 전 국민으로 다시 계산해보면 토지소유의 독점도는 이보다 훨씬 심할 것이다.
일찍이 영국의 수상 처칠은 “토지독점은 모든 독점의 어머니”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 바로 토지의 독점을 유인하고 방조하는 제도가, 변변한 땅 한 평 가진 것 없이 열심히 일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토지확보가 어려운 기업인들을 압박하여, 빈부격차, 실업, 터무니없이 높은 주택가격의 가장 큰 원인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자본주의를 받치고 있는 두 기둥은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이다. 사유재산제는 노력과 기여의 대가를 보장하기 위해 개인이 생산한 것을 사유로 하는 제도이고, 시장경제는 가격을 매개로 하여 당사자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생산물을 교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제도이다. 따라서 사유재산제는 경제정의를 이룩하고, 시장경제는 경제자유와 효율을 촉진한다. 우리가 여러 결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이를 유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토지의 가치를 사유화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유재산제에 어긋난다.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토지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천부(天賦)적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토지가치가 발생하거나 증가하는 것도 토지소유자의 노력과 거의 무관하게 자연적, 사회경제적, 정부적 원인에 주로 의존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모든 사람에게 있고 그 가치는 공동체가 소유해야한다고 보는 것이 사유재산권 원칙에도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또한 토지의 가치를 사유화하는 토지사유제는 시장경제와도 거리가 멀다. 우리가 시장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지사유제는 오히려 토지라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현재와 같은 토지사유제 하에서는 토지의 가치는 다른 상품처럼 감가되는 것이 아니라 증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지소유자가 토지를 판매해야하는 유인이 다른 상품에 비해서 낮을 수밖에 없고, 사용이 아닌 투기적 목적의 소유가 만연하게 되어, 토지라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토지라는 요소가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급력을 생각해보면 비효율적인 토지사유제의 해악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요컨대, 토지의 가치를 사유화하는 것은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의 원칙, 둘 중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 농경사회처럼 강제로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산업사회에서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제안하는 방안은 토지가치의 조세환수비율을 단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높여서 그것을 국가 재정의 최우선수입원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토지가격은 내려가고 투기용 토지소유는 사라지기 때문에, 수많은 토지가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에게 개방될 것이다. 또한 주택가격도 대폭 하락하기 때문에 가계의 주택구입부담이 줄어들게 되어 민간의 소비수요는 크게 증가하고, 이것은 기업의 투자확대를 가져와, 이른바 소비와 투자의 선순환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업문제는 상당부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토지가치의 조세환수비율강화는 환경보존에도 상당히 효과적이다. 이것은 토지의 효율적 이용을 촉진하기 때문에, 도시 내의 저사용 토지나 유휴지를 제거시켜 현대도시가 직면한 난제중 하나인 도심의 공동화현상과 도시가 외곽으로 무분별하게 확산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지가를 낮추기 때문에 정부의 환경보존을 위한 공유지 매입이 수월해진다. 이렇게 되면 환경보존에 반드시 필요한 녹지나 개방지의 확보가능성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
한편 우리는 토지가치의 조세환수비율을 높이는 대신에, 임금소득과 사업소득에 대한 조세와 상품에 부과되는 간접세 등은 단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내려야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노력하는 자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노동의욕과 생산의욕을 꺾고 상업을 위축시킨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감세는 근로의욕과 생산의욕을 활성화시켜, 눌렸던 생산의 용수철을 높이 튀어 오르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통일한국의 근본적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미 북한은 토지가 국유화되어있는 상태다. 따라서 통일 후의 북한의 토지는 사유화할 필요 없이 토지가치의 전액 환수를 전제로 하는 임대제를 실시하고, 노력소득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그 사적소유를 보장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북한의 경제재건기간은 훨씬 단축될 것이고, 통일에 대한 부담감은 상당히 완화될 것이다.
요컨대, 남한은 토지가치 환수비율을 지속적으로 높임과 동시에 노력소득에 대한 조세는 감면하는 방향으로, 북한은 토지가치를 전액 환수하는 임대제 실시와 함께 노력소득에 대한 사적소유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그래서 남과 북 양쪽이 토지가치는 공유하고 노력 소득은 사유화하는 방향으로 수렴하는 것이 통일한국의 경제체제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이렇듯, 우리가 목표로 하는 바는 간단명료하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보다 공평하고 효율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며, 이것의 제도화를 위해 위 주장에 동의하는 시민들과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는?
> 안녕하세요 목사님!! 전 청2의 복입니다. 이러한 좋은 장이 있어서 넘 감사합니다!!
> '승리의 삶'이라는 Q.T책의 부록 비슷하게 어떤 글이 실렸는데 그것의 제목이 아마도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 인 것 같습니다. 평소에 안식일에 대해 관심이 있던 차에
>열심히 읽어 보았지요... 근데 글을 읽다가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 그 글에서는 안식일은 구약 성도들이 지켜야만 하였던 "율법"이며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거기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으로(강제적이 아닌 자발적인..) 안식일후 다음
>날인 주일을 지킨다고 하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것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 즉,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째 안식하심으로
>안식을 주셨다고 알고 있었는데여.. 그리고, 이러한 안식일의 의미가 물론 날짜는 다르지만
>'주일'에 온전히 나타난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좀 혼란스럽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에 대해 신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맘으로 이 주일을 맞이하면 되는지...(이사야 58장에 나온 안식일의
>개념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과연 맞는 것인지...등등...)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요..
>(사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주일엔 구약 성서에서 말하는 안식일적인 요소가 많은 것
>같거든요... 일을 안 한다던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금한다던가 등등)
>그리고, 주일의 유래(?)에 대해서도요...
답변: 분명 안식일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율법'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었던 법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법이라고 전제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폐기주의적인 경향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제도를 폐하여서는 안되며 예수님처럼 그것을 '완전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안식일 규례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라 보다 철저한 방식으로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안식일은 처음 천지창조후 하나님이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범죄함으로 그 안식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을 때 하나님은 안식을 잃어버리고 종노릇하며 살던 흩어진 각 족속들에게 안식의 복음을 전할 족속으로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그들을 구원하시고, 구원하신 그들에게 '안식'을 명령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을 지킨다는 것은 종된 상태에서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을 참으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는데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안식일을 지켰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종노릇하는 데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주일을 지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종말론적인 사건임을 알기 때문에 안식일의 본래 의도를 구약 이스라엘 백성보다 보다 철저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안식일은 절대로 폐하여 졌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다 철저한 의미의 안식을 우리는 지켜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점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주일에서 '완전케' 되었습니다. 안식교도들처럼 안식일의 의미에만 매달린다면 영광스러운 부활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반대로 안식일이 폐지하여 졌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도 다른 날과 같이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일 매일이 안식일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으나 우리는 특별히 주일을 정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데서 자유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는 데 시간을 드려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일을 맞이해야 할까요? 구약의 성도들이 안식일을 맞이하는 마음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경배했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죄와 세상과 정욕과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를 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어린양을 기쁘게 경배하기 위해 모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닙니다. 주일은 굉장한 축제(festival)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과 헌신과 감사와 경배의 날입니다. 우리는 이 하루를 위해 다른 엿새를 살아야 합니다. 엿새의 날은 하루를 준비하는 날들로 보내야 합니다. 요즘 주일을 준비하지 않고 그냥 맞이하는 경향이 많아져가는 것은 분명 공동체의 '적신호'입니다. 준비하면서 주일을 맞이한다면 분명 주일은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58:13,14절의 말씀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복음의 의미에 합당하게 안식일을 안식일 되게 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하루로서 온전히 살아드리는 날로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어떤 금욕적인 규칙이나 형식이 지배하는 날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구약의 안식일의 요소가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안식일과 주일의 획일성을 꾀하는 안식교도들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불연속성만을 강조하는 율법폐기론자들의 태도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연속성만을 강조하는 획일성에도, 불연속성만을 강조하는 방종성에도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는 날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 행하지 말아야 할지는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지도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먼저 행동과 규칙을 규정해버리고 그 틀에 얽매이는 것은 또 다른 노예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릴 적 신앙생활 할 때만 해도 주일날 버스를 타고 교회 가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기쁘게 따르기로 정했던 규칙이나 형식이 항상 앞으로도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는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화되어버리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원론이 각론을 결정해야지 각론을 따지다가 원론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주일날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일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분명한 것은 주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글이나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초대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습관에 따라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는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일이 회당에서는 없었기 때문이죠. 더욱이 안식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서 기쁨의 날이기보다는 슬픔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이 아닌 안식일 다음날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이죠. 고전16:2에 보면 사도바울 역시 주일예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일은 처음부터 '성만찬'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만찬은 저녁에 가졌었는데, 처음에는 성만찬과 주일예배를 따로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배는 주일저녁에 드렸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주후 100년 경 로마 황제 트라얀의 칙령에 따라서 모든 저녁집회가 금지되자 기독교인들이 저녁에 모이지 않고 주일 아침에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른 아침 시각에 맞추어서 예배를 드린 것이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저스틴도 자신이 쓴 [변증서]에서 일요일 아침에 예배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갖가지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감격적으로 모일 때마다 주의 명령하신 성만찬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감격적으로 드렸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 주일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잔치일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를 경배합시다. 그리고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맙시다. 주일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경배하는 날로 온전히 구별해드립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참 자유(안식)의 복이 '복'형제의 평생에 지속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 죽었던 자들의 영혼들은?
질문:
> 오늘 학교에서 믿지 않는 친구들과
> 기도에 대한 열띤 토론 중에 *_*
> 한 친구가 기독교는 불공평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의 우리 조상이나
> 기독교의 존재를 모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 믿음의 기회도 없이 무조건 지옥에 갔으니
> 그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냐며..
>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며..저에게..흑..^^
> 저도 약간 의문이 가는 부분인데..
> 이 부분에 대해 알고 싶어요~~
답변:
기독교 복음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선언함으로 출발합니다. 이 전제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무효화되고 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고 무서운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신 그 진노를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삶으로 사랑합니다.
기독교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무조건 지옥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까?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사람이 있다면 복음을 전할 필요성이 없을뿐더러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이상 복음이 되지 않고 말 것입니다.
그 친구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왜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셔야 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귀중한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망한 사람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예, 정말 억울합니다. 그러나 지금 복음을 듣는 것이 얼마나 황송한 것입니까? 왜 그들의 억울함 때문에 지금 복음을 거부하려들려고 합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증오심을 복음에 대해 이해가 안 된다는 이성적 이유로 변명할 뿐입니다.
그 친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해보세요. 어떤 복음을??
"그렇기 때문에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라고
"너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고, 지금 우리는 하루빨리 많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라고
참조로, 이방인들의 심판에 관해서 로마서 1,2장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로마서 2:12에"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 있고 범죄한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했습니다
로마서 2:14~15에선"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의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초로 구원과 구원의 자료에 대하여 설명을 요약하면
1>율법이전의 사람들은 선한 양심으로
2>율법시대 사람들은 율법에 의하여
3>복음시대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있는 지역에서 율법을 놓아두고 양심을 지킨다고 말하거나 복음시대 사람이
양심껏 살아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세의 출생 때나 예수님의 출생 때 억울하게 죽었던 어린 아이들도 그의 양심에 성령의 전도가 있어서 천국에 갔을 것이며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알아서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우리로선 알바가 아니며 설령 복음이 늦게 들어와서 믿음이 없이 죽어 지옥에 갔다 해도 우리로선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다만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으로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멸망시킬 자를 멸망시키셨을 것으로 믿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고 구원계획입니다
동물들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질문:
> 목사님....낮잠을 자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동물들은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 그들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건가요?
> 만약 믿을 수 있다면...믿지 않는 동물들은 죽으면 지옥에 가나요?
> 좀 황당한 질문이지만...궁금해서 올립니다....
답변:
황당한 질문이지만 궁금한 부분이겠지요.
하지만 정말 궁금한 부분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관한 거예요.
자신의 구원에 관해 생각하기에도 바쁜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동물들에 관하여서는 성경을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동물들과 사람들을 창조하셨는지 그 종국에 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직접 찾아보고 연구하기 바랍니다.
동물들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그것은 동물과 사람이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얘긴가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되었다는 얘기를 모르고 하는 건가요?
하나님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사람에게 주셨음을 모르고 하는 건가요?
하나님의 형상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기 바래요.
동물들도 지옥에 간다??
동물들에게도 지옥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는 건지?
지옥의 고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지옥의 고통은 하나님 없는 세계의 상실감과 절망감과 괴로움의 절정인데...
동물들에게 그런 고통이 주어지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나요?
지옥의 고통을 생각해보고 성경이 뭐라고 얘기하는 지 연구하기 바래요.
앞으로 가능하면 자기 영혼의 구원에 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성경을 읽다가 고민되는 질문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삶의 자질구레한 쓰레기 같은 일상사에 함몰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관해 더 깊은 관심과 고민을 해주기를 부탁합니다.
삼성이 뭐예요?
질문:
>욥기9장9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에 나오는 삼성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알려주세요.
답변:
겨울 밤하늘을 보면 북쪽에 북극을 가리키는 북극성의 왼쪽에 일곱 개의 북두성이 반짝이고 있구요...남쪽 하늘에는 오리온자리가 있는데...네 개의 별 사이에 세 개의 별이 일직선으로 나란히 서 있답니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남 사냥꾼 오리온의 이름을 따서 오리온 자리라고 부르지요...삼성은 그 오리온의 허리띠에 해당하는 세 개의 별이랍니다...이제 곧 겨울이 올텐데 겨울 밤 하늘을 한번 관찰해보세요...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노라면 그 놀라운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그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수한 별들을 창조하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 같아요.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택하신 자녀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
질문: 디모데전서 2장 11절부터 15절까지에 보면 '여자는 가르치지도 말고,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단에서 여자 목사가 없는 이유인가요 ?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
>
답변: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솔직히, 답하기 전에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거룩한 말씀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라는 전체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먼저, 오해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고 봅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공중예배시'입니다. 그리고 예언을 사용하는 예배의 상황입니다. 모든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여자는 문맥상 남편을 둔 아내를 가리킵니다. 공예배를 드릴 때 그리고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과 같은 은사를 사용할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교회에서 무조건 가르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히 남자들 못지않게 특정 분야에서는 탁월하게 가르칠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회중들이 다 같이 모였을 때는 영적 질서를 위해 바울이 잠잠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불공평하다고 보기보다는 창조질서의 원리에 근거한다고 봅니다. 사실, 저희 교단에서 여자에게 안수를 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몇몇 교단(감리교, 순복음, 통합측, 등) 에서는 줍니다만... 이 문제는 교단 지도자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성들의 사역이 너무 위축되지 않나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아요. 그 반대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역사에 있어 여성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컸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이나 서신서, 계시록같은 데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자들의 이름이 기록될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족보에 5명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도 많은 여인들이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증언한 사람도 여성들이었습니다. 세상나라는 여자의 역할과 권위를 축소시키지만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면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힘있는 남자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보다는 여자를 통해 더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단지, '공중예배시'에 가르치지 못하고 예배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데 별로 크게 쓰임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매우 큰 오해입니다. '공적예배'는 영적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낸 사람들은 대부분 여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영적 축복에 있어서도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분명 한 수 위의 축복을 받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초대교회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가르치는 일에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이 쓰임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구역장이나 주일학교 교사를 보더라도 남자들은 별로 없구요, 힘도 쓰지 못합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될지 몰라도 하나님 과점에서는 공평하십니다. 단지 '공중예배시'에 나서지 못한다고 자존심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렇기 때문에 '공평하신 하나님'은 여자들에게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내리기 원하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앞에서 이끄는 사람보다는 잠잠하고 침묵하며 겸손하게 자리를 지키는 자들을 통해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백합화 한 송이에게 입히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공중예배시에 나서서 가르치는 사람이 더 큰 영광을 받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그렇지 않는 곳에서 잠잠히 있는 자들을 통해 더 큰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통해 더 큰 영광을 얻기 원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
질문:
'살인하지 말지니라.' 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 상대방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그런 상황에서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답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1) 고의로 남을 죽이는 행위 (2) 적대감으로 남을 해하는 행위 (3) 하나님의 허락과 명령 없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금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범죄자를 사형시킬 때나 전쟁이나 혹은 강도가 침입했을 때 불가피하게 자기방어적 측면에서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경우는 여기에서 제외됩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인다고 할 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 종류로서 적대적인 감정으로 남을 죽이는 것과 불가피하게 남을 죽이는 경우를 명백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불가피하게 남을 죽여야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처리해야 하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강도가 집에 침입했을 때는 해가 뜨기 전에 시체를 처리할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또한 전쟁에서 사람을 죽일 때에도 지켜야 할 선을 성경을 분명히 긋고 있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범위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양심의 선이기도 합니다. 자기방어적 측면에서 남을 해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양심의 법에 따라 집행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최고의 명령은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그 예로 손양원 목사님의 예를 들 수 있지요. 손양원 목사님은 순천반란사건 때 두 아들을 공산당에게 희생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자는 한 반에서 같이 공부하던 학생이었는데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손 목사님은 감옥을 찾아가서 사정해서 그 학생을 자기 양아들로 삼았답니다. 사형당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지만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자기 양아들로 삼아서 그를 교육시켜 결국은 복음전하는 자로 키워놓으셨다는 유명한 일화가 한국교회사에 자랑거리로 남아있답니다. 어떤 상황이든 주님의 사랑으로, 신앙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할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답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 말씀에 대해
>오늘 GBS 때 3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8번의 ①에 히브리서 13:17절 말씀을 같이 찾아서 읽는 가운데,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서 '경성' 이 무엇인지와 '회계' 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기에..
>-.-a 경성은 성경책에 있는 설명[경각심을 가지고 늘 깨어 있음]을 읽어주었는데, 좀 더 쉽게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회계는 무엇인가요? 죄지음에 대한 단순한 회계가 아니라고 한 자매가 그랬는데, 그것도 가르쳐주세요.
답변: 좋은 질문에 감사해요...
음...이 말씀은 교회 지체들이 자신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는 말씀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렇게 쉽게 번역해볼 수 있어요. "우리가 우리를 다스리는 영적 인도자를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깨어 각성하려고 애쓰기 때문이고, 마지막 날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섬김에 대한 결산보고를 해야 할 청지기처럼 생각하고 우리를 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그들을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공동체 안에는 크고 작은 '목자'들이 다른 지체들을 섬기며 돌보며 또 인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사, 목사, 리더, 등의 이름으로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섬기는 동기는 다름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회계감사를 받기로 작정된 '청지기'인양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섬기는 지체들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섬기는 영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깨어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해야 합니다. 그들이 더 기쁨으로 우리를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회사 같은 경우는 연말에 감사를 받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맡겨진 '섬김'의 분량을 얼마나 잘 감당했는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건 아니건 간에, 우리가 맡은 섬김의 부분을 잘 감당한 자는 10고을을 차지하는 권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회계'는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맡은 섬김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암시하는 바는 (1)공동체를 섬기는 자들은 언젠가 자신의 섬김의 행위에 따라 심판 날에 감사를 받게 될 청기기라는 사실과 (2)불의한 청지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깨어 부지런히 섬겨야 한다는 사실과 (3)섬기는 영혼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섬기는 자가 먼저 각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4)영적인도자들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 안에 크고 작은 목자들의 마음이 이러하다면 그를 따르는 지체들은 당연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비록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들의 청지기적 의도를 봐서라도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 세우신 리더의 권위 때문에라도 조원들은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순종이 없이는 공동체의 영적 질서가 제대로 세워질 리가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어리석은 질문이 될것 같아 망설이다 여쭙니다...
>사복음서(제가 본 곳은 마가복음 8장 34절~ )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을 접할 때 두려운 생각도 들고,
>또 "자기십자가"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도 잘~
>나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해 깨달음이 없는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답변 부탁드립니다. 꾸벅~
답변: 좋습니다. 막8:34절 말씀의 문맥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물으셨을 때입니다. 베드로가 멋지게 고백을 잘 했지만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서 만류했지요.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책망하신 직후에 많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통해 막8:34절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내적 동기'(inner motive)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자, 34절을 다시 볼까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 자,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면 안 된다고 만류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내적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유토피아로 생각했었고 따라서 그리스도가 고난당하는 것은 자신의 천국관에 비추어볼 때 전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을 통해 34절의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해봅시다.
(1)"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즉,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자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만약 성공과 출세만을 꿈꾼다면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자는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
(2)"자기를 부인하고..." 베드로는 입신양명과 출세라는 자기 욕망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욕망을 그리스도를 위해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숨긴 채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지! 자기 부인(self-denial)은 '나'라는 말을 하지 않거나 자기 인격을 무시하거나 삶을 내팽겨쳐라는 금욕주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도바울이 고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욕망과 죄성에 대해서 날마다 죽는 것을 의미하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욕망과 욕구에 대해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분의 말씀이 진정한 욕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욕심과 정욕과 요구에 대해서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훗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면 언젠가 우리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3)"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 십자가는 자기 운명이나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십자가는 죄인들을 처벌하는 극형이었죠. 다시 말해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고난을 감수하라는 뜻이 아니라, 기꺼이 '형벌 받을 자'와 같이 자신을 여기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이구 내 팔자야!"라는 식의 체념 섞인 자조가 아니라 나 자신을 죽을 죄인의 자리, 형벌 받는 자리에 두라는 뜻이죠. 베드로는 높은 귀족의 자리를 꿈꾸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죄인의 자리에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난'으로 자위하고 있는지요! 그러나 십자가는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정신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치면서 죽을 각오로, 십자가에 매어달릴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출세와 명예를 꿈꾸는지! 그러나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아니,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잘 죽어야 합니다. 멋있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멋있게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4)"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따라 오시라고 설득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가시려는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내가 가려는 곳에 주님더러 오시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불투명한 인생을 사는 존재입니다. 내일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인생이지요. 갈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앞으로 전진했던 아브라함의 삶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이 앞서 가셔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가면서 주님보고 도와달라는 식으로 신앙생활해서는 안됩니다.
(5)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동기를 항상 점검해야만 합니다. 특히 이번 고난주간은 그러한 동기를 살피는 절호의 기간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기복주의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잘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잘 죽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잘 죽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 '세속주의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세상의 아름다움, 세상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에 현혹되어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매어달리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은 멋지게 잘 하여도 실제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위해 고난 받는 삶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과 삶은 일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무엇을 얻기 원합니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자기 욕구와 욕망을 거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죄인의 자리, 형벌 받는 자리, 고통스러운 중보의 자리로 내려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곳이 아마존 정글지대라면 그래도 기쁘게 따라갈 것입니까? 그대의 동기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동기인지...아니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동기인지...
궁금한 영혼 속에 거룩한 제자도가 심기어지기를 축복하면서...
김광락 목사 올림.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질문:
성경 읽다가 궁금해서요. 사사기11장에서 입다가 딸을 바치잖아요.
근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처럼 봐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답변: 좋은 질문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바치라고 명령하신 반면, 입다에게는 전혀 그런 명령을 주시지 않으셨지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시험'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은 본심을 감추시고 딴청 피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는 성경에서 자주 나옵니다. 아무튼 그러나 입다에게는 하나님이 전혀 말씀하신 바가 없는데 자신이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과 같이 비교할 성질은 못됩니다. 입다가 맹세한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을 번제로 바치라는, 혹은 바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무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오히려 성경은 사람을 바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지요.(레18:21;20:2-5;신12:31;18:10)그런데도 입다는 그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원했기 때문에 경솔하게 입을 열어 맹세해버리고 말았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맹세는 전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즉, 명백하게 기록된 말씀을 어기고 사람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부인하고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입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입다는 자기 마음대로 맹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그 결과 고귀한 한 생명이 슬픔 가운데 사라지게 되고 맙니다. 신약에 와서는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답니다. 자, 우리가 우리의 자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고 할 때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바주셔야 할까요? 음...이 문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문젠데요.
죄는 자신이 저질러 놓고서는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적당할까요? 자신이 금과를 따먹고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 봐주셔야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담은 자신이 범죄하고 나서는 그 책임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지 않나요?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너무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아,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이렇게 행동하셔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 생각 안에 하나님을 끼어 맞추려는 태도라고 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우리 자신을 끼어 맞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 자기 딸을 희생시킨 장본인이 입다 자신이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처럼 말씀하시지도 않았고 율법에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서도 맹세했다면 이것은 처벌을 면치 못할 일이죠. 그런데도 보세요. 하나님은 입다에게 오히려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어놓고서는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나를 봐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불성설이죠. 그런데 진짜 사랑의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위해 전쟁터에서 싸워주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셔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드셨지요.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어 죽게 만드실 수가 있을까요? 이런 하나님이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실까요? 이 문제는 입다와 같이 허물 많은 사람을 위해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이 왜 그 사랑하는 딸을 희생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라는 질문과 차원이 같아요. 자,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죽게 만드셨을까요?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 사랑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생각과 기준이라는 틀에 끼워 넣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깨달을 수 없게 되지요. 반대로 하나님의 틀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이 피부로 와 닿을 수 있답니다. 입다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매정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넘치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보세요. 분명 성경에서 금하는 것을 하겠다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셨답니다. 입다는 분명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사람이 스스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죽는 가운데 내어주셨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는 우리가 저질렀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죽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죽게 만드실 수 있었습니까? 그게 사랑일까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유?
질문:
주님을 알려하는 지체 wrote:
> 며칠 전부터 마태복음을 읽고 있어요.4장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1절에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신 점 말입니다.왜 손수 시험을 받으러 가셨고 또한 성령님께서는 왜 광야로 예수님을 부르셨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성경에 관한 질문을 받는군요.
삶에 관한 질문들만 받다가 성경에 관한 질문을 받으니 속이 상쾌해지는 느낌입니다.
부디 다른 세고 지체들이 삶의 문제들에 함몰되지 마시고 성경진리의 말씀 속에 함몰되시기를 바라면서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참 좋은 질문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데도 불구하고 왜 손수 시험을 받으러 가셨을까요?
(1)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사단에게 시험을 받아 넘어지고 범죄함으로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갇히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람이 구원받는 길은 오직 또 다른 죄 없는 사람이 와서 사단의 시험을 이겨야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아담이 당한 시험을 똑같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에서 이겨야 우리를 위한 구속의 길을 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당하는 시험의 본질을 손수 체험하심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중보하시고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속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험을 당하지 않으시면 우리를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시험과 고통을 공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효과적으로 중보하실 수 없으십니다. 결국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3)그러나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셨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은 연약해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큰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한 첫 발걸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4)문맥을 잘 보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다음에 광야로 가신 것을 봅니다. 성령충만하면 시험이 안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한 시험이 올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의 현장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만드십니다.
(5)그러나 이 시험을 잘 극복한 다음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잘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승리가 저절로 뒤따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충만==>광야시험==>사역의 승리...이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사역의 공식이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공식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일의 축복도 따르지 않습니다. 작은 유혹에 넘어지면 사명을 수행하는 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6)우리는 죄성과 욕심에 따라 시험을 받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 역시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거지요.
(7)사단은 첫 번째 아담을 시험했듯이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넘어지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성령께서 이 광야시험장소로 예수님을 인도하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8)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시험에서 승리하는 지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종류의 시험을 받으셨으며 어떤 방법으로 물리치셨는지 연구해보세요.
예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계속 말씀묵상에 정진하십시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는 축복을 받으십시오.
무교절과 칠칠절이 무엇입니까?
질문:
성경을 읽다가 무교절과 칠칠절이 나오는데요 그게 뭐예요?
답변:
무교절은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을 먹는 절기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급히 나오는 바람에 무교병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급박한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랍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밤에 식구들은 서서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급히 자기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감사하기 위해 무교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교절은 애굽에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이란 일곱 번째 안식일을 말하는 겁니다. 7*7=49. 그래서 유월절 다음부터 7주간을 계산합니다. 칠칠절을 안식일 중에 안식일로 정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날로 정합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데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또한 추수단을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날에 성령께서 마가다락방에 모여 있던 백성들에게 충만히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을 다른 말로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 가운데 임하게 되어 교회는 하나님께 추수된 곡식단으로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질문:
> 안녕하세요..홈페이지에서 목사님께 처음으로 글을 올리네요...^*^;
> 다름이 아니라 고린도전서를 읽다가 의문이 생겨서....
> 7장에 보면 8,9절에
>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그리고 마지막 40절에 보면
>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라고 나와 있습니다...음...!
> 잘 모르겠습니다..결혼하는 것보다 혼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 더 올바르다는 건가요? 잘 모르겠는데.. 혹시 하나님보다 이성을 더욱 사랑할 까봐서...?
> 아이고..목사님..진짜루 I don't know !!!
답변:
좋습니다.
결혼에 대한 질문인데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사도 바울은 결혼하는 것에도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목적은 이성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다는 것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오히려 이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욕과 음란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에 어떻게 자신이 더럽혀지게 될지
모릅니다. 결혼은 세상의 더러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보호장치입니다.
이것은 최선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상에는 결혼제도가 없는 겁니다.
천상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습니다.
천상에는 최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최선이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사랑, 달콤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 나누는 일을
즐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이 최선이 우리의 정욕과 탐욕에 의해서
무너지기 쉽기 때문에 결혼제도를 임시적으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천상에는 결혼제도가 없다는 것!!
천상에는 부부가 없다는 것!!
천상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남편이라는 것!!
이 땅에서 결혼하는 것은 이성을 즐기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성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것입니다.
결혼해보면 알게 될 겁니다.
배우자는 서로를 보호해주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 서로를 추구하라고 주신 선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참 신랑 되시며 남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양합니다.
율법과 새언약의 관계?
질문:
> 고린도후서 3장 6~11절에서는 바울은 옛 언약과 모세보다 새 언약과 자신의 직분이 더 영광스럽다고 말하고 있는데 Q1>율법과 새 언약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또 Q2>율법에 속박된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Q3>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에 대한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아무튼 좋은 질문 감사드리며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요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질문, 율법과 새언약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1)율법은 정죄하는 기능이 있지만 새언약은 생명을 살리는 기능을 하는 점에서 다릅니다.
(2)율법은 돌에 새겼지만 새언약은 마음에 새긴다는 점에서 다릅니다.(렘31:31-34절을 꼭 읽어보세요)
(3)율법의 직분이 영광스럽다면 새 언약의 직분은 더욱 더 영광스럽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율법이 그림자라면 새 언약은 실체와 같습니다.
(4)죄를 정하는 율법이 영광스럽다면 의를 수여하는 새 언약은 더욱 더 영광스럽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5)사라져버리는 구약의 영광도 영광스럽다면 사라지지 아니할 신약의 영광을 더욱 더 영광스럽다는 점에서 분명 다릅니다.
둘째 질문, 율법에 속박된 것이 무엇인가?
율법의 기능은 잘 아시는 대로 죄를 정하는 기능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얼마나 이르지 못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그것을 읽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완전하지 못한 죄인이며,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죄를 죄로 알지 못하던 것을 죄로 규정해준다는 점에서 우리를 속박합니다. 제가 자동차를 처음 운전하면서 다닐 때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위반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은 편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통경찰이 불러서 저에게 그것은 위반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저는 얼마나 위축되었는지 모릅니다. 율법이 하는 역할이 바로 위반딱지를 발급해주는 교통경찰과 같지요. 교통경찰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고 위축하게 만듭니다. 혹시 이렇게 하면 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식의 생각을 불어넣는 기능이 율법이 하는 겁니다. 이 기능은 나쁜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 때문에 이 기능은 거룩한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율법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합니다. 죄를 죄로 몰랐던 것을 죄로 분명히 규정해주기 때문에 자유를 뺏기는 거지요.
셋째 질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위의 두번째 질문과 연관이 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우리를 규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함을 잃어버립니다. 율법의 영향 아래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고 말아야 되는 가에 대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정죄감과 자책감 속에서 힘들어 하게 되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이러한 정죄감에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겁니다. 그것이 진리의 사역이며, 동시에 성령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을 때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이죠. 만일 우리가 진리의 통치 아래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영향권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제가 앞서 말한 대로 어느 교통법규를 어기는 것이 위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위축되지만 그러나 제가 만약 다른 나라로 이민가서 운전한다고 친다면 저는 더 이상 그런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게 되버리고 맙니다. 법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죠. 자유함은 다른 법체계 아래 들어갈 때 이전에 규정받았던 법체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함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은 다른 법체계로 우리를 적용하십니다. 율법이 돌판에 기록된 법이라면 성령은 마음에 기록된 법이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깐 롬13:8-10을 읽어보실까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지요? 만약 우리가 남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더이성 율법의 영향권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온전한 사랑--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런 사랑의 종류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실 때 가능한 겁니다. 이렇게 남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율법이 규정하고 속박하는 것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자유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어기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친히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축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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