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셀, 데라, 에봇에 대해서...
질문:
>레위기 16장에서 보면 아사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사셀이 뭐예요?
>왜 염소를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나요??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또 한 가지.
>세마포 에봇은 어떤 사람이 입는 옷인가요?
>(이건 사무엘상 2장에 있어요..)
답변:
(1)아사셀이란 일 년에 한번 있는 속죄일에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죄를 담당하고 광야로 보냄받는 숫염소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입니다. 광야로 내보내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멀리 떠나보내는 의미 때문입니다. 아사셀이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음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는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훗날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한 것의 배경을 이룹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서 '아사셀'이 되셔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또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아사셀은 죄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2)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기록은 창세기 이외에 대상1:26, 눅3:34, 수24:2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가족과 함께 하란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입니다. 데라가 하란으로 이주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가족 중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만나주셔서 그를 그러한 가족으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상숭배하던 가정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떠나게 하심으로 새로운 가정, 새로운 족속으로 창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3)에봇은 대제사장이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입는 옷입니다. 에봇에 대해서는 출28:5이하와 출39:2이하를 보세요. 에봇은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들었고 특히 에봇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달아두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성막에서 일할 때 입었지만 사무엘도 입었습니다.(삼상2:8) 그리고 다윗도 범궤를 옮길 때 이 에봇을 입었습니다.(삼하6:14) 이 에봇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즉, 기도할 때 이 에봇을 입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에봇은 미신적인 도구로 전락한 적도 많았습니다.(삿17:5;호3:4) 우리가 입어야 할 에봇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갑옷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도움을 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더 이상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의 뜻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묻거나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입다에 대해서
질문:
>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는 여러 사사들에 대한 기록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신을 받았고, 또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적들을 붙이셨다는 표현이 모두 나오는 사사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그를 이스라엘 가운데 본받아야 할 사람 중 하나로 기록 하고 있다고 책에서 읽었습니다.(^^)
> 그런데 전 사실 책을 통해 성경의 다른 부분이 그를 경건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전쟁의 선두로 설 때에도 처음에는 장로들이 그를 선두에 세우겠다는 약속 때문에 선 것 같았고 그 후에 딸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 것이나 에브라임 지파를 살육하는 등이 그의 온전하지 못한 인격을 말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하나임의 택함을 받았고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과연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그렇게 극찬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
좋아요. 간만에 성경읽기순서에 맞게 질문이 들어왔군요...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대할 때 몇 가지 원칙이 있지요.
(1) 그 사람 배후에 역사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발견해야 합니다.
(2) 성경은 어떤 인물을 '본'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3) 어떤 인물을 소개해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기 위함입니다.
(4)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사랑과 헌신 외에 그 어떤 것
도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도덕적 행위나 삶을 소개하는 데는 매우 소극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5)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의 삶에서 부족한 인격에도 불구하고 쓰시고 함께 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우리의 본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부족한 인격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언약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심지어는 모세도, 다윗도, 히스기야나 요시야, 신약에 나오는 베드로,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인격은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기에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칭찬할 수 있는 것이 만약 발견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6) 입다는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식이나 출신이나 인격이나 우리가 흠모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만들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7) 오직 우리가 본받아야 하고 본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우리가 닮아가야 할 유일한 분이시죠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가셨나요?
질문:
카톨릭에서, 그리고 몇몇 개신교 목사님들이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사도신경 영문판에도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나와 있는데 한글판에는 생략이 되었네요. 자세히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론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질문한 내용은 옛날부터 원래 어려운 질문이었어요. 루터교나 천주교는 베드로전서의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가르치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불분명한 뜻을 가지고서 전체적인 교리에 위협을 가하는 또 다른 교리를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모호한 교리는 전체적인 분명한 교리에 의해서 규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1)베드로전서 3장 19절
: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본문에 대해서 개혁주의는 이렇게 해석내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의미하고, ‘옥’이란 말은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완성을 대망하는 구약성도들이 모인 곳이라고 볼 때,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과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성령을 통하여 구약의 성도들에게 구속 사업의 완성을 선포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의 견해인데요 다음의 구절 20절과 비교해보면 문맥이 틀립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신 사건으로 부활과 승천으로 옥중의 영들에게 그리스도의 부요와 능력과 승리를 선포하셨다” 저도 이 견해에 동의합니다. 즉, 전파하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음전파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선포되었다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사용되는 헬라어 ‘전파하다’는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 사용되는 헬라어와 분명히 종류가 다릅니다. 그러면 또 다른 문제는 왜 하필이면 노아시대에 죽어 지옥에 간 영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의 개선이 선포되었는가?하는 점입니다. (점점 어려워지죠?) 벧후 3장을 보면, 죄로 인해 온 세상이 멸망한 것은 노아시대뿐이죠. 그래서 그 시대는 특별한 시대로서 멸망받은 저주받은 세대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렇게 멸망받은, 저주받은 세계에 조차 진동시키며 승리를 선포하고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참조로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노아를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 무지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들에게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이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문맥상 어렵게 됩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가장 저주받았던 그 시대에조차 위대한 복음--그리스도의 승리--이 선포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에 복음전파되는 법은 없습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된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온 우주를 진동시키는, 이른바 과거와 현재를 초월하고 시공을 뛰어넘는 엄청난 우주적 사건이었다는 것을 베드로는 그렇게 쓰고 있다고 봅니다. 3장 13절부터 사도는 계속 의인의 고난에 대한 문맥을 가지고 글을 써내려 가고 있음을 볼 때,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주는 우주적 충격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을 복음의 능력으로 대처하게 하려는 의도와 맞아떨어집니다. 즉, 고난 속에서 승리하는 성도의 힘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갖는 우주적 충격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온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번역해볼까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승리를 가장 저주받은 세대에까지 선포하셨습니다.”
(2)베드로전서 4장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베드로전후서의 전체적인 저술목적이 환란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믿음의 시련을 견디어나가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인정한다면 난해구절들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도 베드로가 4장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세상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에 빠지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까? 경건한 성도를 비방하는 자들 역시 자기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5절)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조차 감히 비방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죠. “이를 위하여” 즉, 바로 이것 때문에 죽은 자들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즉,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후 죽은 고인(故人)들에게 전파된 복음이 위로가 됩니다.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즉, 복음을 받아들인 후 고인이 된 자들은 세상이 보는 방식대로는 심판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복음을 믿고 죽은 성도들이 아무리 비참하게 비극적으로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사는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환란 중에 있고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비난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 복음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된 후 그들은 심판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는 영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으로 살아있습니다.
진리를 더욱 사랑하는 영혼이 되기를 바라며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영과 육?
질문:
성경을 읽다보면 "영으로는....육체로는...."
이같은 표현을 성경에서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생각나는 본문들은 벧전 3:18, 벧전 4:6, 롬1:3,4 등입니다.
전에 John Stott의 로마서 강해에서 롬 1:3,4 를 해석하는 부분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제가 그냥 본문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렵긴 했지만 굉장히 유익했는데, 비슷한 다른 구절들에 롬1:3,4 에 대한 Stott의 해석과 같은 해석을 할 수는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각 구절들마다 다 따로따로 해석되어야 하고 전혀 유사점이나 공통점은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 그리고 각 구절들이 무슨 뜻인지...
답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영과 육에 대한 헬라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헬라적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향과 비슷한데 인간의 본성을 물질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으로 나누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혼동을 느끼는 대부분의 원인이 바로 헬라적 개념을 가지고 본문을 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요. 헬라적 개념으로는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은 영으로 죽었다가 살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예수님의 영이 죽었습니까? 예수님의 영이 죽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바울이나 베드로가 말하는 영과 육의 구별은 전적으로 구약적이고 히브리적이며 헬라적인 플라톤적인 이원론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적이고 구약적인 영육개념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사고방식에 의하면 영과 육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영이라고 할 때도 그것은 전인격적인 사람을 가리키며, 육이라고 할 때도 영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포함한 전인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찬양하라 내 영혼아’라고 할 때 육신은 가만히 있고 영과 혼만이 찬양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굳이 영과 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은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과 관계될 때(히브리적 사고방식에서 영은 육체적인 요소를 절대 배제하지 않음), 육은 사람의 (전인격적) 존재가 세상과 관계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인간으로 간주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당하셨지만, 영원하신 영으로 간주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존재로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겁니다. 왜 영과 육이라는 이런 표현으로 하나님의 일을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사고방식의 본질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군요. 우리가 성경의 메시지를 보다 잘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가 갖고 있는 헬라적 영육이원론 개념을 벗어버리고 히브리적 영육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헬라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이 차이가 생겼는가? 그 이유는 신관의 차이 때문이죠. 헬라개념은 절대신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히브리개념은 절대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간에, 자,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성경은 히브리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는데, 영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과 관계할 때, 육이라고 할 때는 세상과 관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도바울과 베드로의 영육개념은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두 사람 모두 히브리적 사고방식에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은 그 자체로 훌륭한 신학박사학위논문감이죠.)
수천 년간의 언어습관과 문화와 가치와 세계관(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저자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면 깊은 의미를 퍼올릴 수 있겠죠. 오, 성령이시여, 진리를 갈구하는 영혼을 도와주시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모세의 시체에 대한 변론에 대해서
질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기쁨은, 바로 그 말씀으로 창조된 우리들에겐 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기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주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마음이 시원하고......!"
>좋은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여러 신학적인 견해들을 소개하고 종합, 정리해서 설명해 주신 점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 작업은 저희같은 평신도(?)들로서는 시간이나 자료의 제한들로 인해서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이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나 교사들의 가르침이 균형을 잃고, 어떤 한 --보통은 자신이 신학적인 입장을 같이 하는-- 해석을 일방적으로 소개하고 마치 그 외에 다른 해석이나 설명은 전혀 불가능하고 다 틀린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곤란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장 빈번하게 경험하는 것은 어떤 분에게 '이것은 이런 뜻이다' 라고 배웠는데, 그리고 잊어버리지도 않고 은혜 받아서 나누고 흥분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다른 분에게 다른 해석과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느끼는 혼란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심하면 진리에 대한 회의에 빠져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목사님께 감사와 더불어 계속 좋은 답변을 부탁드린다는 뜻으로 몇 자 적어 봤습니다.
>오늘 질문은 유다서에서.....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9절)."
>이 부분은 사실 문맥을 통해서 볼 때, 본문이 무슨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다만 순전히 위의 구절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모세의 시체를 두고 왜 다투었는지.....등이 궁금합니다. 유다는 마치 수신자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예로 드는 것 같기에 더욱 궁금합니다.
>제가 이 구절에 관해서 들은 것은 '이 구절을 통해 사탄이 얼마나 강한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서택 목사님의 계시록 강해 1권 289 페이지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계시록 강해이지 유다서 강해가 아니었기 때문에 본문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설명을 하시다가 잠시 인용하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김서택 목사님께 질문할 수도 없었지요.....^^
>그럼 또 좋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답변:
매우 난해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해석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진리는 언제나 한가지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으로부터 어떤 관점의 해석을 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뒤엎는 다른 해석을 들었을 때 혼란이 생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진리는 언제나 한가지임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 진리를 여러 가지로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혼돈이 생길 경우 그것이 적용의 문제인지 아니면 진리 그 자체의 문제인지 먼저 살펴보고서, 만약 그것이 진리 자체에 대한 문제라면 언제나 진리를 추구하면 됩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20번 정도 정독하면서 나름대로 내렸던 결론들이 신학교에 가서 무참히 깨어지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전에 확신하고 있었던 지식들이 '진리'에 의해서 무참히 부서질 때 오히려 기쁨을 누렸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잘못된 앎이 주는 기쁨이 참된 진리가 주는 기쁨에 의해 박살나기를 소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진리를 추구하는 형제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참 진리의 깨달음이 주는 기쁨을 주시려고 섭리해나가실 테니까요. 진리에 대한 회의를 가질 필요가 없는 이유가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나를 붙드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죠. 여러 가지 해석에 대한 혼돈이 오히려 진리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경외감을 갖는 계기로 삼기를 축복하면서...
질문에 대해 요점만 정리하도록 합니다.
(1) 본문의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가?
예, 실제로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을 부정하면 성경전체의 권위와 영감이 무너지거든요. 진실이 아닌 것을 예를 들어 진리를 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주장하는 진리 그 자체도 의심할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진리임을 믿는다면 저자가 예를 들고 있는 것까지도 사실이며 진리임을 믿습니다. 또한 실제로 있었다는 증거로서 성경 자체가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4)에 언급한 본문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2) 실제의 사건으로 보는 근거가 무엇인가?
아까 말했듯이 진리의 성격, 그리고 성경의 권위의 성격 그 자체가 근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은 외경인 [모세의 승천기]에 나오고 있지만 사실은 저자가 대하는 수신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의 일부입니다. 외경에서 인용했다고 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외경에 기록되기 전에 이미 유대인들이 대다수 알고 있는 정설인데 저자가 그것에 성경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저자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유대인의 전통에서 그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는 겁니다.
(3) 그러면, 왜 다투었는가?
그 이유는 본문에 있듯이 모세의 시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시체를 감추도록 천사장에게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모세의 무덤을 미신적으로 숭배할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이 내막을 아는 마귀는 그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본문에서 '변론했다'고 되어 있는데, 사단이 변론한 것은 자신이 그 시체를 자신이 임의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고 미가엘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이때 천사장 미가엘은 직접 마귀를 꾸짖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에 맡김으로 간접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유다서는 이렇게 권위에 반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이 일화로 설명하고자 한 것임) 슥 3:2을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스가랴서는 사단에 대한 책망을 오직 하나님 한분께서 하실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 신명기 34:6
위 구절을 보면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데(히브리어 원문상에서), 생략된 주어는 '주'(the Lord)입니다. 즉, 누가 모세의 시체를 매장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묘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가엘 천사장이 모세의 시체 앞에 서 있는 것은 문맥상 진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더욱 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인용했다고 볼 때 우리는 유다서에 기록된 이 사건 이야기가 성령께서 사건의 진실됨을 증거하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오벳은 보아스의 족보에 들어가야 하는가?
질문:
>그냥...설교를 듣다가, 또 룻기를 보다가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여...
>룻이 보아스와 결혼한 것은 "재혼"이었자나여.
>근데...재혼이라함을 듣고 제가 젤 먼저 떠올린 건 다말의 일이었습니다.
>형이 후사가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의 이름으로 대를 잇게 하는...
>보아스가 나오미의 남편(기룐?)의 형제는 아니지만요,
>적어도 기업을 무르는 자로서,
>보아스와 룻의 사이에서 나는 아이는 마땅히 나오미의 전남편의 족보에 들어가야하는 거 아닌가여?
>4장 5절, 10절에서 봐도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잇게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후에 예수님의 족보에 봐도 그렇고 룻기의 마지막을 보아도 그렇고 성경에는 분명히 보아스의 아들로 나오기에..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아~...궁금해라...@^0^@
답변:
답변:
음...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기업무르기에 대한 법은 레25장과 신25장에 나와 있지요. 룻기에 나와 있는 기업무르기의 형태가 레위기와 신명기의 기록에 비해서 상당히 발전된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무르기를 거부하는 자는 신을 벗을 뿐만 아니라 침뱉음을 받아야 하는데 룻기에는 그렇지 않는 모습들, 그리고 보아스는 룻이 모압여인이라는 이유로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있었는데 룻을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점 등이죠. 룻기의 기업무르기의 형태는 모세율법의 기업무르기 규정에 비해 상당히 철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신25장을 보면 형제의 이름을 잇기 위해 그 아내였던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오직 친 형제 간에 주어진 명령이었는데 보아스는 그것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질문의 요지는 룻과 보아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이 누구의 족복에 들어가야 하는가? 오벳의 조상은 엘리멜렉인가 아니면 보아스인가 하는 점이죠.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은 말론의 아들인가 아니면 보아스의 아들인가? 분명하게 말하자면 둘 다 맞습니다. 문맥을 보시면, 룻4:11,12의 백성과 장로들의 축복은 룻과 보아스의 아들이 명백히 보아스의 씨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과 장로들은 바로 보아스의 집을 그렇게 유명하게 되도록 축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4:13에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고 했는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그가 그에게(보아스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보아스가 아버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4:14-17을 읽어보면 그 아들은 법적으로 나오미의 아들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중의 여인들은 동시에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칭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룻이 낳은 아들 오벳(오바댜의 축약으로서 '하나님의 종'이란 뜻임)의 아버지는 그래서 이중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벳의 아버지가 실제적으로는 보아스이며 법적으로는 엘리멜렉-말론 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말론의 계통과 보아스 계통 둘다 합법적입니다. 그래서 오벳은 보아스의 족보에도 들어갈 수 있고 엘리멜렉의 족보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족무르기 법은 이중의 조상을 인정하는 형태를 낳았습니다. 그 다른 예로서, 창 38장을 보세요. 다말이 낳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는 다말의 첫 남편이었던 엘의 자녀로 인정되지 않고 유다의 아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보아스의 족보에 오벳이 들어가는 것도 합법적이고 엘리멜렉-말론의 족복에 들억는 것도 합법적입니다. 친족무르기법은 상당히 융통성있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런 복합적인 조상을 인정하는 사회구조를 낳게 되었습니다.
룻기는 구약의 위대한 복음서입니다. 눅 15장의 탕자비유가 유명한 만큼 그에 버금가는 구약의 이야기가 바로 룻기이죠. 철저히 빈털털이로 돌아오는 탕자와 같은 나오미와 룻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접이 그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룻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주의 날개 아래 겸손히 그리고 믿음으로 숨어드는 나오미와 룻의 온유함은 잃어버린 기업의 회복이라는 위대한 상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기를 축복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다메섹 도상에 일어난 일에 대한 간증이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질문:
>사도행전을 읽으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과정을 설명하는 간증이 두번 나오는데 서로 모순처럼 보입니다. 행9:7에서는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고 했고 행22:9에서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라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두 말씀 사이에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답변:
좋은 관찰입니다. 그리고 좀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9장 7절에서 "소리만 듣고"와 22장 9절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는 표현은 그 문맥상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즉, 바울의 동행들은 소리로서의 음성은 들었지만 소리가 의미하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소리만 듣고"라고 한 것은 잡음만 들은 것이고 그 소리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비슷한 예가 요한복음 12:28절에 있습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군중이 듣긴 했어도 그들은 단지 천둥소리 정도로만 듣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천상에서 들인 소리의 의미, 내지 메시지는 바울만이 정확하게 알아들었다는 겁니다. 바울의 동행인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임한 소리만 듣고 빛만 보았지 그 소리의 의미와 빛의 실체는 파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또한 9:7에서 같이 가던 동행인들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한 반면에, 22:9에는 바울의 동행인들이 빛은 보았다고 했는데 이것도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9:7에서 다른 동행인들은 무엇인가 웅웅거리고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는 들었지만 누가 그 소리를 발하는지 소리의 주인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소리의 주인공을 못 알아보았다는 말과 빛만 보면서 소리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현과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바울의 동행인들은 빛을 보면서도 빛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식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인식수준을 한번 점검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과 귀가 아닌지? 설교를 들어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형식적으로 듣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듣고 있는 것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다윗의 인구조사가 따로 된 이유?
질문:
안녕하세요. 목사님~!
사무엘상 11장 8절에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을 계수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 만이요 <유다사람>이 삼 만이더라" 라는 표현이 나오더군요.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지고 나서, 암몬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던 상황에서 사울이 이것을 알고,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고 베섹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인구계수 하는 상황인데, 왜 이스라엘과 유다사람을 따로 세고 있는지? 삼상 15장4절에도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이십 만이요 <유다사람>이 일만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무엘상이 기록된 연대와 저자가 다윗의 때에 기록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유다지파의 다윗의 집안으로 이스라엘의 위를 옮기시는 것때문에 여기서 그렇게 적고 있는 것인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려 주세요.
답변:
음...왜 다른 지파와 유다지파를 따로 계수하는지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유다지파를 이스라엘 지파 중에 따로 구별하여 계수하는 것은 솔로몬 이후 왕국분열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시점이 왕국분열 이후 혹은 유다지파의 어느 선지자가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는 사무엘이 사무엘서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사무엘이 전체를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사무엘 사후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삼상27:6에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였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봐서 사무엘서의 집필은 다윗 이후의 어느 선지자임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사무엘서의 골자를 사무엘이 기록했을 것이고 나머지는 다윗 이후 유대나라의 어느 선지자가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유다지파를 따로 계수하고 있는 것은 메시아 왕국으로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지파는 메시야 지파로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하는 선지자들에게는 이 사실이 매우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글쎄..그 이상 깊은 의미가 있는 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군요. 더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히브리서에 대한 질문
질문:
히브리서 6장 13-20절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는 너무나 놀라운 말씀들이 많아서 질문하기도, 정리하기도 어렵군요. 여기서는 우선 <약속>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서에서 용례가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파악한 것으로는 1) 약속(promises) 2) 약속하신 것(the things promised)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이 본문에서도 13절의 '약속'과 15절의 '약속'은 같은 단어지만, 하나는 사실(fact)이고 하나는 현실(reality)가 되지요. 왜 이런 것인지? 단지 번역상의 문제였는지. 이것 때문에 히10-12장, 특히 11장을 읽는데 헷갈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과 함께 나오는 것이 '오래 참음'&'인내'라는 단어인데, 특히 히브리서에서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특히 히브리공동체의 상황 때문에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AD 1세기 핍박 중에 있던 히브리공동체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지...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여기선 '맹세'를, 다른 곳에서는 '유언'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성격과 의미를 설명해 주세요. 잘 정리가 안돼서요.
세번 째 질문이 바로 오늘 정말하고 싶은 질문입니다. 18절의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 도대체 무엇인지요? 제가 관찰을 잘 못해서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르는 것 같기도해서 ^.^ 두 가지가 무엇인지요?
글구, '앞에 있는 소망'은 대충 알 것 같은데, 그 다음에 나오는 그것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의 표현, 도대체 무엇을 피해가고 있는지도 알려주세요.
이 소망의 견고함이 생명의 길을 십자가상의 죽으심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신 휘장 안에 들어가게 하심을 알기에 더욱 알고 싶습니다.
그럼. 주의 성령이 목사님과 이 글을 함께 나누는 모든 자 위에 지혜로 충만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답변: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히브리 공동체의 상황은 핍박의 상황이었습니다. 핍박과 고난은 거의 모든 신약 서신서들의 정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히브리 공동체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헬라공동체와 달리 더 큰 유혹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로부터 소외되고 비난받고 배척당하는 고통이 추가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인 교회는 쉽게 유대인 회당으로 돌아갈 유혹을 항상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외부의 핍박보다 더한 것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다시 유대인 회당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다시 그리스도인에서 유대인으로 역 개종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할례를 받으면 핍박도 면제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헬라교회보다 히브리교회들에게 있어서 더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다시 유대인으로 회귀하려는 방향에 대해서 다시금 복음의 위대성을 알림으로써 참고 인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 대해 힘들어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약속을 참아 기다림으로써 약속을 받은 것처럼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엄숙한 약속에 근거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약속이 약속으로서의 약속과 현실로서의 약속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보았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시제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 이루어져야 할 약속과 이루어진 약속으로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시제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 그것은 이미 약속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현실로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참음으로 기다렸기 때문에 약속(promise)이 약속(realized promise)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현실임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죠. 우리가 참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이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로 바꾸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조로 히브리서 6:15절에 ‘약속을 받았다’고 했는데, 사실 아브라함은 현실로서의 약속은 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약속의 재확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현실을 결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약속의 참된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받은 이삭이 약속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현실이 아니라 약속의 재확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 먼저 말하죠.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17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언약에 대해서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17절에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이라고 했죠? 둘째는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로 보증하셨다는 것입니다. 17절에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변치 않으십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후자는 하나님의 맹세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약속과 맹세, promise and oath) 에 대해서 절대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간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구약의 도피성 이야기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뒤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그를 피해 도피성으로 피난해야 합니다. 그 성에 대제사장이 생존할 동안에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죽이려고 하는 죄와 세상의 세력이 우리를 좇아오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의 도성만이 우리의 참 도피성이 됨을 믿습니다.
맹세를 유언으로 표현한 구절은 히브리서 9장에 나옵니다. 헬라어 ‘디아데케’라고 하는 ‘유언’은 ‘언약’과 동의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자신의 죽음으로 실행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언약을 확고하게 보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은 독생자의 죽음으로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확실히 하기 위해 죽음으로써 그것을 입증해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맹세는 이처럼 독생자의 죽음으로 보증된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약속의 확실성을 무죄한 동물들의 피로써 세우심으로써 그 확실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언약궤에 대해서
질문:
>이번 주 말씀을 읽다가 성경 묵상 가이드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그동안 말씀을 보고 나서 성경묵상가이드의 질문들을 풀어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는데....제가 생각하지 못했던(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해하면서 뭐라고 답하기 참 어려워 다시 성경을 보는 것이 적어도 저한테는 사실입니다. 아무튼...그래도 성경묵상가이드가 있어서 많이 생각하고 또 좀 더 성경을 잘 볼 수 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이번 주 초에 언약궤와 관련한 질문들이 몇 개 있었는데요...
>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언약궤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언약궤를 내세워 출전한 이스라엘 백성들, 언약궤를 가져갔던 블레셋에 임하였던 하나님의 진노, 언약궤를 보내는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치셨던 하나님..
>
>그런데 문제는 제가 언약궤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삼상5~7장을 보면 언약궤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중요한 것이라는 건 알겠는데...그저 막연하고 추상적일 뿐입니다...그래서 나름대로 앞부분을 다시 찾아보았는데 출25:10~22과 출37:1~9에 언약궤에 대하여 나와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언약궤를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만 자세히 나와있고
>출25:22에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는 말씀을 통해 언약궤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뿐입니다.
>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또 구약의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궤를 만들라하신 뜻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의 언약궤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먼저 묵상가이드에 대해서 한 마디...저의 간절한 바램과 의도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다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고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고민하는 과정 없이 너무나 쉽게 먹기 좋게 입에다 넣어주는 것에 익숙해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전체의 체질입니다. 저는 체질개선이 절대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답을 던져주기 보다는 질문을 던져주고 싶습니다. 말씀 앞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저는 너무 기쁩니다. 계속 정진, 전진해나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언약궤에 대한 질문인데요...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1) 먼저, 언약(covenant)의 의미는 피의 맹세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주종(the Lord-the Servant)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다는 엄숙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2)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는 그러한 언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작은 상자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세 가지 성물이 들어 있는데 각각은 언약의 중요한 요소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으로서 해주실 수 있는 약속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자를 덮는 두껑을 가리켜서 '속죄소' 혹은 '시은좌' '시은소'라고 부르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3) 전체적으로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는 장소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통치하신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참고로, 언약궤는 '증거궤' '하나님의 궤' '언약궤' '속죄소'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4) 우선, 겉모습을 보면 언약궤를 덮고 있는 뚜껑이 인상적입니다. 천사 모양의 두 그룹이 큰 날개로 덮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룹의 얼굴은 두껑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바로 그곳에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는 보혈이 뿌려지게 되죠.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사도가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바로 언약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죠. 이렇듯, 언약궤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속죄하심에 대한 약속입니다. 시99:1에 보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는 여호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언약궤 안에 있는 세 가지 성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
1-두 돌판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는 약속
2-만나를 담은 항아리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양식을 공급하신다는 약속
3-아론의 싹난 지팡이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셨다는 약속
(6) 언약궤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훗날 선지자 예레미야는 종말의 때에는 언약궤가 더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렘3:16,17)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이후에는 더이상 언약궤의 존재는 없습니다.
(7) 신약에서 언약궤는 오직 요한계시록 11:19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드러나는 모습은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라졌던 언약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8) 오늘날 신약시대에서 하나님은 언약궤로 언약을 보증하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구원의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성령은 신약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언약궤는 (1)하나님의 속죄하심 (2)하나님의 공급하심 (3)하나님의 말씀하심 (4)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한 약속이자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불쌍한 아람사람과 암몬사람?
질문:
요즘 사무엘하를 읽고 있어요.
근데 요즘에 실미도와 태극기를 휘날리며 란 영화를 봐서 그런지,
자꾸 아람 사람, 암몬 자손들이 불쌍하단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방인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가나안 땅의 족속만 죄인은 아니었잖아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아주 좋은 질문을 했는데...^^
아람과 암몬, 그리고 모압사람 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이 공평하다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다네. 하나님은 자신에게 죄를 범한 족속은 똑같이 공의로 대하신다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무엘상에서 충분히 찾아볼수 있지.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유기와 적극 간섭의 차인데... 로마서 1장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심판할 족속들은 일시적으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족속은 적극 간섭하셔서 강력한 징계를 내려서라고 회개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네. 그 기준은 뭐냐? 피로 언약을 맺었는가의 여부인데... 하나님은 그 피가 내포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가치 때문에 언약백성을 강하게 징계하신다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고, 어떤 지연에 이끌리는 분이 절대로 나니지.
하나님은 용사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이든 이방민족이든 누구든지 범죄한 민족과 백성을 대적하시는 분이라네. 만약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피의 언약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의 칼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겨누어지게 되지. 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과 같이 이방족속이라도 하나님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환영하셨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문둥병자가 많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사를 이방사람 나아만에게 보내셨다고...그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평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선을 행하기보다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도록 하셨다는 것이지...아무튼 하나님은 매우 공평하고 의로우시며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땅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신 일이 한번도 없다는 것. 공평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께 경배를!
요한일서5:16,17절의 해석?
질문: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변: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일단 문맥 속에서 보면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사도요한은 14, 15절에서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였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응답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16, 17절에서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하는 지체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라. 그러면 주께서 회개할 힘을 주셔서 다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구하라'는 말은 구원(save)가 아니라 기도(pray for)입니다.
그러면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문맥에 의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란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회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죄를 의미하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란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회개할 수 없는 치명적인 죄는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2:18절 이하를 읽어보면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떠나서
적그리스도에게 소속되거나 적그리스도가 된 사람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자들을 정죄하고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자들을 다시 회개시킬 수 없으므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훼방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성령을 기만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신앙생활을 같이 하다가 사이비 교주가 된 경우 들이 여기에 포함될 것입니다.
요한서신에서 사도 요한은 이단이나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강한 혐오를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이10,11)
한 때 신앙생화를 같이 하다가 이단에 미혹되어 교주가 되거나 혹은 자칭 선지자라
하여 기존 신자들을 미혹하고 사도들이 가르쳐준 교리를 부정한다면 그는 현저히
그리스도를 욕보였으므로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반면,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시험이나 범죄에 빠진 형제들은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베드로가 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은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다시 회개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눅22:32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회개한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할 수만 있다면 치명적인 죄,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회개할 수 없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과 사귀다가 그 모임과 교제에서
떨어져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교회를 정죄하고 신자들을 미혹케 함으로
현저하게 부인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으므로
그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읽어보십시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ㅈ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교회, 진리를 위해 싸우는 교회,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중보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신명기31:29절의 '말세'의 의미는?
질문: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에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경로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라는 부분에서, 구ㅡ약에서 말세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 이유에서 말세라는 말이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주 안에서 사랑하는 김 집사님,
언제나 성경책과 경건서적을 늘 가까이 하여 애독하시는 모습이
오히려 저를 많이 부끄럽게 하십니다.^^
늘 좋은 질문으로 저를 항상 긴장케 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질문하신 본문말씀은 신명기 31장 29절이더군요.
이 말씀은 모세가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기록한 다음
언약궤를 메는 레위인들에게 명령하기를
기록된 율법책을 언약궤 곁에 항상 두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해 예언한 말씀입니다.
레위인이 누굽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어느 지파보다 언약궤와 하나님의 성막에 가장 가까이
모셔 섬기는 영적 축복과 특권을 받은 지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바로 그러한 영적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
모세가 죽은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패하고 타락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린다고 봅니다.
레위인의 타락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모든 지파의 장로들과 유사들을 물러서 말씀을 들려주면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으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해보겠습니다.
"내가 분명히 아는데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은 분명히 완전히 타락하게 될 것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가라고 명령한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갈 것이다.
"멀지 않아서" 재앙이 너희에게 임할 것인데 왜냐면 너희들이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할 것이며, 너희 손으로 한 일로 주님을 매우 화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집사님께서 궁금해하신 '말세'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런 '말세'의 뜻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세'는 단지 '조만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다가오는 때에'라는 뜻입니다.
교리적으로 흔히 '말세'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사이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말세'는 그런 교리적인 말세가 아니라, 모세가 죽은 직후의 날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 혼동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라면 '말세에'라는 표현보다 '조만간'이란 단어로 표기하면 더 원문에 정확한 번역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세에'라고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지 흔히 이해하는 그런 말세개념과 다를 뿐이지, '임박한 때'를 가리키는 의미에서 '말세에'라고 번역된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세에'라는 단어의 뜻은 '임박한 때에' '조만간' '(내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 우리는 인간의 죄성이 어떤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심각하게 부패하여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마음이 부패하여서 받은 은혜를 금방 잊어버리고 '언제 그런 은혜를 체험했느냐'는 식으로 엉뚱한 길로 가기 쉬운 그러한 인생들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과 레위인들이 '모세님,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을 겁니다.'라고 모세에게 자신있게 말했겠지만 그러나 성경역사를 보면 모세의 예언대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의 베드로 사도 역시 그러했지요.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다른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갈지라도 자기만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도 닭 두 번 울기 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죄성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무 쉽게 호언장담하는 것 역시 자신의 죄악성을 잘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며 그 말씀으로 자신을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며 사도 바울이 말씀한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만족하지 말고 언제나 현재 하나님의 뜻을 부단히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복된 말씀이 집사님과 저를 항상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답변:
세상의 빛과 소금에 대한 지상교회의 오해들이 분명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제대로 이해되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제대로 적용되어지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일반교회의 오해들을 열거해보겠습니다. 이 오해들은 너무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것입니다.
(1)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지, 너희가 소금이 되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내 힘과 노력으로 된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오직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 예수님을 '믿을 때만' '영접할 때만' 사람들의 생명과 세상의 빛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통치하실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주 예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2)팔복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가 진정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이 말씀은 앞서 가르치신 팔복의 말씀과 연결하여 보아야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가장 큰 오해가 발생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특성에 대해서 가르치시는데 명목상 그리스도인, 그리고 세상사람들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마의 특성은 바로 팔복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함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팔복의 메시지 직후에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이 이어지는 것은 팔복을 이해하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에서 따로 떼어놓고 본문만을 보려고 하니까 무슨 구제나 노력으로 소금과 빛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3)주님은 세상에 유익을 주는 삶을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금과 빛이 암시하는 바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패하게 되어 있으며 부패하고 있으며 부패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곳이며, 또한 세상은 진리를 잃어버려 갈 길을 못 찾아 헤매는 어두캄캄한 곳이란 뜻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부패를 잠시 지연시키는 것뿐이지 근본적으로 세상을 잘 되게 하거나 세상을 번영시키는 의미에서 유익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자는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세상은 왜 이처럼 부패했느냐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기독교인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있어왔기 때문에 아직도 이 세상은 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하지 않고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요 긍휼히 여기는 참 신자들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많은 신자들이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스스로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을 가지고 스스로를 책망해왔습니다.
(4)주님은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제 등에 개입하여 소금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신약의 어느 교회도 그러한 부담을 가지고 고민한 적도 없고, 그렇게 부담을 가져야 한다고 사도들이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연합하여 정당이나 기구를 결성하여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크게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오직 팔복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지 팔복의 정신과 상관없이 정치적인 이념과 투쟁심과 의협심을 가지고 일치단결해야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본문을 잘못 이해했을 뿐더러 로마 카톨릭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세상 나라에 대해 발언권을 행사한다고 개신교회가 흉내 내려고 교회일치와 연합, 혹은 기독교 정당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정치적인 방법으론 결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팔복의 정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이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정치적인 발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기독교회가 일치하여 법안을 통과시켜서 사회가 영적으로 더 나아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5)주님은 지역사회 봉사나 구제를 열심히 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지상교회가 그렇게 본문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라고 하셨을 때 주님이 말씀하신 '착한 행실'이란 '구제나 봉사'로 귀결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해석과 구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버리고 단지 행위의 문제로만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규칙을 만들어놓고선 그러한 규칙을 지키면 그 율법을 지켰다고 자신을 안심시킴으로 자기 마음을 속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 착한 행실'이란 팔복의 정신으로 사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에 하나가 구제가 분명합니다만 주님은 교회가 구제단체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팔복의 정신과 아무 상관이 없이 단지 교회를 순수한 구제단체나 자선봉사단체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찬사를 받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과는 결단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뜻은 '팔복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세상은 그러한 사람을 보고 의아해할 것이고 그러한 사람의 존재에 대해 기이하게 느끼게 될 것인데 바로 그 순간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혹은 우리 교회를 칭찬해주지 않는다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신자나 교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성장학자들 중에서 다수가 주장하기를) 교회는 세상을 기쁘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도록 행동해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가장 주님의 가르침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런데 조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교회를 압니다. 그 교회는 재정의 대부분을 구제와 자선사업에 쏟아 붓는 교회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러한 구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합니다. 그런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은근히 자랑합니다. 그런 교회에 다니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본인은 정작 얼마나 개인적인 삶속에서 팔복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얼마나 긍휼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자신은 결코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삶을 살면서 그런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란 것에 만족감을 얻는다면 이것은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만약 그런 교회가 참 교회라면 가난하여 줄 것이 없는 서머나 교회는 참 불쌍한 교회가 될 것이고 가진 것이 많아서 구제사업을 활발히 하는 두아디라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야 말로 진정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참 교회는 오직 진리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을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소금과 빛은 팔복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인데도 이것을 도외시하고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지역교회를 비판하거나 혹은 얼마나 구제와 봉사에 예산을 잘 사용하느냐를 보고서 그런 교회를 자기 의로움의 방편을 삼아 출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자선기관에 등록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진리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러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즐기며 그런 교회에 다닌다는 그것으로 자기를 정당화시키며 헌금을 조금 내면서 생색내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과연 진리에 얼마나 굶주려 있으며 예수님을 진정으로 얼마나 사랑할까요? 글쎄요. 저는 모르지만 주님은 아신다고 믿습니다. 요점을 정리하면...
1. 구제와 지역사회 봉사는 지역교회가 순수한 동기로 해야 할 일이다.
2. 그러나 구제와 지역사회 봉사가 지역교회를 소금과 빛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교회의 사명은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3. 세상의 소금과 빛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팔복의 정신으로 풀어가는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팔복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에는 도외시하고 단지 조직교회가 지역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본질을 회피하는 처사이다.
(6)주님은 교회가 먼저 자기 신분과 정체성을 확립하고 난 뒤 신분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소금을 먼저 말씀하시고 빛을 나중에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지 않고, 무슨 동기로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는 점검하지 않은 채 단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개인과 교회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본문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란 말씀이 어떤 뜻일까요?
이렇게 풀어 보겠습니다.
13절(확대해석)--"너희가 지금까지 내가 말한 팔복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러한 사람이라면 너희들은 나의 왕국에 사는 나의 사람이며 나의 백성이 분명하다. 그러한 너희들은 또한 세상나라에서 소금과 같은 존재로서 세상은 너희들을 자기들과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배척할 것이나 너희들로 인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날이 지연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 너희의 신분과 존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너희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다."
14절(확대해석)--"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가르친 팔복의 메시지를 깨닫고 삶속에 적용하게 되는 그러한 사람이라면 나의 사람 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틀림없으며 너희는 또한 인생의 기원과 의미와 목적과 종말에 대해 전혀 무지한 채 방황하며 헤매는 세상나라에서 진정으로 삶의 기원과 의미와 목적과 종말에 대해서 아는 사람으로서 두드러질 것이다. 너희들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면서 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너희들의 삶을 보면서 죄책감과 질투와 미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현자나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너희들이 가진 참된 영적 지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리 고상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더라도 너희 앞에서는 스스로 영적 무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5절(확대해석)--"사람이 등불을 켜서 항아리 안에 둔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느냐? 오히려 높은 곳에 등불을 두어서 모든 사람에게 비취도록 하지 않느냐? 만일 너희가 가진 참된 영적 지식을 부끄러워하고, 성령이 어둔 마음을 조명하여 깨닫게 하여준 그 부르심의 소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목적대로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머리속에만 집어넣고 실제 생활 속에서 적용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정말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받게 될 것이다."
16절(확대해석)--"이와 같이 너희가 가진 영적 지식, 즉 인생이 왜 존재하며,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누구를 위해 살아야 가장 보람된 것인지, 또 인생의 종말에 무엇이 있는지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당당하고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너희가 성령이 계시하여 알게 된 참된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따라, 팔복의 정신을 따라 날마다 적용하며 실천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그러한 너희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너희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족속, 다른 피조물,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너희를 보면서 기이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럴 때 너희를 새로운 피조물, 새 인생으로 거듭나게 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기뻐하게 되실 것이다. 왜냐면 그 순간이야말로 너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데, 가장 기독교인다운 사람이야말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며...
가장 기독교인다운 사람이란 가장 주님을 닮은 사람이며...
가장 주님을 닮은 사람이란 주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결국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며 정신의 문제다...
세상의 소금과 빛은 마음에 달렸지 행위나 조직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추진하는 일치와 연합운동이니 신자들의 삶의 규칙이나 행동강령이나 예산의 몇 퍼센트를 구제에 쓴다 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것은 회칠한 무덤을 만드는 꼴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 바로 그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의 소금과 빛이 되는 삶,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사순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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