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를 피할 수 있는가?
본문: 전4:1-16
우리가 3장에서 본 것은 사람은 때(카이로스, 결정적 시간, the time)이라는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서는 구도자가 됨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때”라는 한계를 사람에게 지우신 까닭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연약한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찾도록 하기 위해 숙제를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숙제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숙제를 내주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한계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이제 4장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인생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학대를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한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사회의 부조리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스스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부조리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 극복하지 못할 부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을 인생이 있는가? 없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세상의 구조적 한계, 부조리에서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그러한 부조리에서부터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전도서 4장은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3절까지: 세상에 있는 부조리(학대의 순환 굴레): 인생은 이것에서 결코 자유할 수 없다는 내용이고, 둘째, 4-6절까지: 부조리가 발생하는 원인 : 분리, 시기, 게으름, 무감각, 욕심(만족할줄 모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으며, 셋째, 7-12절까지: 부조리한 세상에서의 최선의 삶 : 진실한 동역자와의 사귐과 나눔에 대해서, 넷째, 13-16절까지: 부조리에 대한 비유: 다윗과 사울, 차라리 지혜로운 빈자, 약자가 되어라!
1절, “내가 다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란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 힘들게 하는 것,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학대와 관련하여 전도자는 세 가지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학대를 목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와 강한 자가 없는 자와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부리며 괴롭히고 착취하며 이용하며 학대합니다. 세상에서 이 학대가 없는 곳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가정, 군대, 직장, 학교,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도 이 학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위 자칭 ‘사도’ ‘은사자’ ‘주의 종’ ‘권위자’ ‘신령한 자’가 행하는 고차원적 권위주의의 영적 학대(spiritual abuses)야 말로 가장 고차원적인 학대일 것입니다. 종교의 탈을 쓴 학대인 것입니다. 또한 가정에서의 학대는 보편적입니다. 물론 학교에서의 학대도 심각합니다. 둘째, 놀라운 사실은 학대하는 사람은 학대한다고 자신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학대하는 자는 또 더 높은 자에게 학대를 받게 됩니다. 상처받은 자가 상처 주는 자가 되고, 상처 주는 자가 상처받은 자가 됩니다. 이러한 학대의 악순환의 굴레로부터 온전히 혹은 스스로 자유 할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학대 받는 자가 다시 학대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먹이사슬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학대의 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다 학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사실 모든 인생이 학대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그런데 학대를 받는 자 편에 서서 진실하게 생가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세상은 가진 자와 강한 자 편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대를 받는 자는 마땅한 이유, 혹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고난 받는다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학대의 구조에서 살기 때문에 나온 사고입니다. 그래서 학대받는 자 편에서 진실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 적은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학대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자신도 피해자라는 생각 때문이며,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에서 기원합니다. 즉, 학대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에서의 자유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2,3절,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하는 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이 과연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학대라는 구조 아래 사는 인생보다는 학대라는 구조에서 벗어난 죽은 인생이 더 복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세상에서 살면서 참으로 자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 학대라는 구조에서 참으로 자유한 인생이 진정 복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이 학대라는 부조리한 구조에서 자유할 수 있겠는가? 이것에서 진정 자유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요즘 어떤 감옥에는 텔레비전도 있고 컴퓨터도 있다고 합니다. 요즘 군대는 정말 많이 좋아졌습니다. 군부대에는 매점도 있고,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있어서 인터넷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이 많이 있어서 상당히 편해졌지만 여전히 감옥은 감옥이고, 군대는 군대입니다. 내가 어떤 한계와 굴레 안에 묶여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그토록 휴가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애쓰고 수고하여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근원적인 굴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학대’라는 부조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가 하는 말의 요지는 세상 어디에서도 참된 자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과연 삶의 의미와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도록 도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 참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까? 행복한 삶을 살려면 먼저 자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긍정을 찾기 위해 먼저 부정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도자의 원리입니다. 세상의 학대라는 구조에서 자유해야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조리의 원인들이 무엇일까요? 먼저 소외와 질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4절부터 전도자는 부조리의 원인에 대해 분석을 시도합니다. 학대의 굴레는 어떻게 생기고 시작되는 것일까? 첫째 이웃과의 소외와 단절, 둘째 시기와 질투심, 셋째 게으름, 넷째 무감각, 다섯째 욕심(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학대하고 학대받는 일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고통의 악순환이란 부조리는 첫째로 다른 사람과의 단절에서 시작됩니다. 즉, 근본적인 소외감입니다. 이 소외감이 바로 학대의 원천이 됩니다. 그런데 이 소외감은 바로 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전도자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지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과 질투를 받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재능이 많으면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큰 부조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들은 많이 이루고 크게 성취하여도 결코 행복감을 맛보지 못합니다. 이들이 행복을 느끼려면 먼저 남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힘과 재능을 섬기는 일에 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수중에 넣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남을 학대하게 됩니다. 학대의 또 다른 원인은 남과 늘 비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진정으로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면 서로 학대하거나 학대받는 일은 결코 없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주님은 당신의 몸 된 교회를 당신의 죽음의 대가로 설립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고 이해하고 교통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사랑의 화신으로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모든 학대로부터 자유한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사명으로 설립된 기관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계속해서 부조리의 원인들을 살펴봅시다. 부조리의 원인으로서 게으름과 자기학대가 있습니다.
5절,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그 다음 전도자는 학대의 순환이라는 부조리가 어리석음과 게으름 때문에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 않고 대신 자기 살을 뜯어먹습니다. 게으름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학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손으로 직접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게으른 자는 남을 학대하거나 자신이 학대받습니다. 이 근본적인 게으름이 학대의 순환을 계속 낳는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고 전도자는 지적합니다. 게으름은 자기에게 최대의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에서는 자기 살을 뜯어먹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살을 먹음으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감각이 바로 학대를 낳는 원인이 됩니다. 죄는 이처럼 감각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영적 바이러스입니다. 죄는 학대함과 학대받음에 대해서 모든 감각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자기 살을 먹고 있으면서도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도 엄청난 부조리가 아닌가요? 먼저 자신을 용납하십시오. 자신을 먼저 축복하십시오. 자신을 섬기지 못하면 남도 섬기지 못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면 남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자신을 축복할 줄 모르면 남도 축복할 줄 모릅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면 남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여기 어리석음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 살을 갉아먹고 있으면서도 팔짱을 끼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태연하게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 어리석음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학대합니다. 학대를 받은 사람이 학대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받는 일과 고통을 주는 일에 아주 태연하게 반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부조리의 또 다른 원인인 불만과 욕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6절,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학대라는 구조를 계속 낳는 원인은 그 마음에 참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불안하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평안함이 없는 까닭은 늘 두 손에 가득 채우려고 하는 끊임없는 불만과 욕심 때문입니다. 마음에 평온함이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으로서 결코 남을 학대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보다 두 손에 다 움켜쥐려고 하는 욕심이 다른 사람을 학대하게 만듭니다. 욕심이 다른 사람들과 다투게 만듭니다. 약4:1-3을 읽어보면 다툼이 바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다른 사람을 죽이게 만듭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물질적인 풍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의 평온함입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주의 은혜는 우리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큰 집(물질)에 여자(쾌락)와 함께 살면서 다투는 것보다 광야의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잠언은 말하고 있습니다.(잠17:1, 21:19, 25:24 참조) 다투기를 잘하는 사람은 독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풍요가 반드시 마음의 평안을 보장해줄까요? 다음 절에서 전도자는 또 다른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일하고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이 마음의 평안을 주는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잘 다투는 사람은 독신의 은사가 많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싸우기를 잘하는 사람은 혼자 살아야 합니다. 싸우려는 정욕을 죽이지 못하면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결혼하기를 원하는데도 잘 안 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저는 이 부분을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내 안에 싸우려는 정욕을 나는 얼마나 다스리고 있는가?
그러면 부조리의 한 예를 살펴봅시다. 많은 소유가 행복의 원천인가에 대해 살펴봅시다.
7,8절,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고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닣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많이 가지면 마음에 평안이 올까요? 과연 그럴까요? 혼자 열심히 일을 하고 또 많은 부를 축적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면서 “나는 누구를 위해 이 고생하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일 자체에 몰두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일중독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끼고 돌아볼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참된 친구가 없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외롭습니다. 그 외로움을 잊어버리기 위해 더욱 더 일에 매진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죽도록 일하지만 누구를 위해서 이 일을 하는 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허함을 호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락이나 스포츠에 열광합니다. 단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혹은 중독성 때문에 일을 하게 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 일 중독환자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소유 중독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결코 마음에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도 사회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큰 부조리 중의 하나입니다. 많이 이루고 많이 소유할지라도 마음의 평안이 없고 그래서 삶의 의미와 만족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부조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조리한 세상에서의 최선의 삶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을 나누는 교제입니다.
9-12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데 최선의 삶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를 얻는 것입니다! 동역자를 얻는 것이 삶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삶입니다. 그러나 동역자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함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에서는 결코 참된 동역자를 얻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서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는데 어떻게 참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참된 친구를 얻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친구를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내가 먼저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로 잡고 살도록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참 친구는 참된 인생의 목표과 가치를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붙는 법입니다.
우선 본문은 동역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더 나은 상을 얻습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많은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역사에 큰일을 행한 사람은 언제나 참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롬16장) 둘째,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동역자가 없는 사람은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동역자가 없이 목회하는 목사는 유혹에 쉽게 넘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셋째, 평안을 얻게 됩니다. 마음의 평안은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주어집니다.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하는 슈퍼맨은 항상 외롭습니다. 넷째, 승리를 얻게 됩니다. 동역자를 얻는 사람은 언제나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동역자가 없는 사람은 항상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보세요. 동역자가 없이 참된 승리를 쟁취한 사람이 있습니까? 더더욱 하나님의 일은 동역자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면 참된 친구, 참된 동역자를 얻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만나서 죄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합니다. 죄짐에 눌려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 동역자를 얻기 위해 우리의 죄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영원한 죄값을 청산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참된 동역자가 될 자격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버리는 참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혹은 직장에서 참된 친구를 얻지 못해서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진실한 친구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결코 참된 친구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 참된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네 가지 유익을 가져다주는 친구들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어려움을 만나서 넘어질 때 내 곁에 서서 나를 붙들어주지 못하고 다들 도망 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할 때 죄를 지적하고 책망해주지 못하고 아첨만 할 것입니다. 재미있다고 해서 참 친구는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참된 친구 즉, 동역자를 구할 수 있다고 봅니까? 천만에요! 인생의 기한과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서로에게 진실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참되고 진실한 친구를 얻을 것입니다. 롬16장을 보세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장에 여러 명의 동역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장에 거명할 진실한 동역자들의 이름을 과연 몇 명이나 기록할 겁니까? 롬16장은 사도 바울의 사역이 독불장군식의 사역이 아니라 참된 동역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외로운 사자들’ ‘독불장군들’이 너무 많습니다! 용맹을 떨치면서 많은 일을 잘 해내었지만 퇴장할 때는 아무도 거명할 친구가 없어 홀로 떠나는 것이 맹수의 왕 사자의 최후입니다. 결코 외로운 사자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제자들, 영적 아들들, 동역자들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만나십시오. 키워내십시오. 이를 위해 간구하십시오. 참된 동역을 이루지 않고 이루어낸 것은 참된 성공이 아닙니다. 동역의 정신을 배우십시오. 요즘은 진실한 친구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이십니다. 진실한 친구를 만나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친구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섬길 때 주님은 참된 동역자를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기에 요나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 동역자를 구했지만 배신자들만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친구를 구하기 전에 내가 사울이 될 것이냐, 아니면 다윗이 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참된 친구를 얻기 원한다면 사울이 변하여 다윗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 된다면 하나님은 요나단이란 친구를 붙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부조리한 세상에서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13절,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이제부터 전도자는 비유를 들어 부조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잘 이해할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가난과 부귀, 지혜와 미련함, 소년과 노인입니다. 이렇게 서로 대조하면서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선택해보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지혜를 가르치는 오래된 습관입니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부모는 자식을 구하고 자신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미련하면서 돈이나 권력이 많은 사람이 옳은가요? 아니면 지혜로우면서 돈이나 권력이 없는 사람이 좋은가요?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당장 돈이나 권력을 찾지 지혜나 나약함을 찾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만 보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지금 죽어가고 있다면 돈이나 권력을 선택하겠습니까? 미련한데 돈이나 권력이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또 다른 부조리의 예를 봅시다. 그것은 자수성가한 자의 위험입니다.
14절,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라.” 미련해서 충성된 상소를 전혀 듣지 않는 왕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 왕이 그렇게 완고하고 교만하며 고집이 센 까닭이 무엇일까요? 솔로몬은 지혜를 무시하는 왕의 고집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가난한 자로서 학대를 받아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옥에서 갇혀 있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학대를 받은 자로서 우연히 부와 권력을 손에 쥐었기 때문에 자신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자신이 받은 대로 그들을 또 다시 학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가난한 자가 옥에서 나와서 자신을 몰아내지 않도록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참된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소유와 지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안, 초조해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사울왕을 보세요. 신약성경에 헤롯을 보세요. 네로황제를 보세요. 히틀러를 보세요. 모두 피해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휴게소에서 어떤 외제차를 손으로 건드려보았다고 눈총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학대를 받은 자로서 권력과 부를 손에 넣게 되면 또 다시 학대를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대가 학대를 계속 낳는 부조리는 계속되는 것이라고 전도자는 설명합니다. 즉,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러한 학대의 악순환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부조리 안에 갇혀 살고 있는데 이 부조리에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죄 없이 함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거저 받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15절,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솔로몬이 이러한 비유를 든 배경은 아마도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인 듯합니다. [세 왕 이야기]란 책을 꼭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이 작은 책은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사울왕과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보세요. 사울왕은 의심이 많아 충성되고 지혜로운 다윗조차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왕의 강박관념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피상적으로 보면 자신의 어릴 적 상황과 갑작스럽게 부와 권력을 한 손에 넣게 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리고 부와 권력이 없었던 소년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참으로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였고 또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죄사함의 축복이 참으로 큰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요나단이란 참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 아들에 의해 왕궁에서 나와 도망 다니기도 했지만 그의 영혼은 참으로 자유하였습니다. 사울은 궁궐에서 살았지만 그의 영혼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쫓겨다디며 광야에서 살았지만 그의 영혼은 독수리같인 자유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에도 고백하기를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5)라고 했지 않습니까? 다윗은 황무지 동굴 안에 숨어 지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를 타고서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었던 참으로 자유인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신약에 사도 바울 역시 감옥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라고 편지를 썼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모든 학대의 부조리에서 온전히 자유한 자유인들이었습니다.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즉 그들은 어두운 마음의 뿌리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존귀한 자로 여길 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어두운 그늘을 찾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16절,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되어서 많은 백성들을 치리했지만 그가 치리한 많은 백성들은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전혀 기억하거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역시 부조리가 아닙니까?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 보호하고 대신 나아가 적군과 싸웠는데도 그 백성들은 그를 기념하거나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왕이 되기보다는 지혜로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낫습니다. 미련한 권력보다는 지혜로운 약자가 낫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소년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살 때 가진 자들로부터 학대(핍박과 환난)를 당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동굴 속에 갇혀 숨어 살더라도 우리 영혼은 주의 은혜의 날개를 타고 자유로이 비상하는 자유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억압하거나 속박하는 것은 없습니다. 죄와 사단의 속박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와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많은 사람을 부리거나 더 많은 업적을 이루어낸다고 해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학대받는 자가 학대하는 이 끊임없는 부조리에 사람들은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에서 참으로 자유할 수 있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세상에 있는 학대의 악순환이란 부조리를 보면서 우리 힘으로 그 굴레를 벗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어디 있는가 찾아 나서야 합니다. 참된 자유를 추구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참된 자유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그 해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롬8:32)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참된 자유인이 되는 길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서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에서 참된 친구, 참된 동역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진정한 가치, 의미, 목적, 행복을 나누는 곳은 주님의 몸 안에서입니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참 친구, 참 동역자가 되어주도록 주님이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세우신 곳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을뿐더러 웬만한 비망의 말을 들어도 상처받기는커녕 오히려 축복하게 됩니다. 감옥에 갇혀도 기뻐하라고 오히려 큰 소리 칩니다. 광야에 도망 다니면서도 자신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라고 자랑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유인이 되었습니까? 학대로 가득 찬 세상에서 참 자유를 발견하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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