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전도서강해(9)-재물이 행복을 보장해주는가?(5:10-20)

등불지기 2012. 3. 7. 17:54

 

 

재물이 행복을 보장해주는가?

 

본문: 전5:10-20

 

 

우리가 전도서 1장부터 4장까지 살펴본 내용은 사람이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한계상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을 비롯하여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유한하며,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시간의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부조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생이 이러한 한계를 진지하게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영적인 구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유한하고 무능하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무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알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되면 교회에 기웃거리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생은 유한하고 죄 많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떠나다가 금방 구도자의 길을 포기해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성급한 발입니다. 둘째는 조급한 말입니다. 셋째는 불의한 일들을 바라보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조심해야 할 몇 가지 태도를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물질을 바라볼 때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된 물질관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재물이나 물질의 풍요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물건이나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행복해질 줄로 생각하는 한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매복해 있는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탐심입니다. 물론 돈은 그 자체로 결코 악한 것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곧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물질은 잘 선용하면 선한 것이 되지만 물질의 풍요를 바라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물질을 일단 소유하게 되면 만족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코 만족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탐심은 그 끝이 없는 어비스와 같습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마음은 무저갱입니다. 물질의 풍부함! 그것도 역시 참된 만족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줄로 확신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아니면 재물을 신으로 숭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재물을 섬기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한 인생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유나 풍요를 목적으로 삼지 말기 바랍니다. 돈을 버는 것과 많이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적인 재정관을 확립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젊었을 때 해야 할 작업입니다.

 

 

그러면 재물이 풍부해지는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1절,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사람들은 재산이 더하면 더 많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재물이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자신에게 더 많은 유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아진다고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재산이 많아지면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삶의 수준이 소유만큼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유지비용이 더 들어가게 됩니다. 저의 가족은 한 달에 30만원을 가지고 여러 달을 살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매달 120만원이 통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더 많이 누리고 더 잘 먹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피부로 와 닿는 체감수준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500만원이 들어오면 체감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똑같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똑같이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유지비와 감가상각비가 똑같이 상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산이 많아지면 행복해지고 만족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산이 많아지게 되면 그 재산을 지키고 운용하는데 필요한 사람들을 더 많이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재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마음뿐입니다. 이내 마음은 이상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잠시 흐뭇한 마음을 갖는 것 외에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주는 유익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재물이 늘어난다고 삶의 실제적인 행복지수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재물은 정신적인 행복감과 만족감에 하나도 기여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만큼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된 행복은 어디서 올까요?

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자는 소유가 아니라 근면과 성실에서 참된 만족이 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소유가 아니라 삶의 성실함이란 성품이 있어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이 없이 단지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만족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지 말고, 대신 삶의 태도, 특히 주어진 일에 대한 태도, 일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마지못해 일하는 것에서 즐겁게 일하는 태도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에서 주도적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필요에 의한 사역에서 소명에 의한 사역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일하기보다는 감사하며 즐거워하면서 해야 합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믿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여러분에게 늘 강조한 것이 즐기면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억지로 하면서 1등하는 것보다 즐기면서 하는 꼴찌가 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입니다. 사실 일하는 즐거움을 모르는 자는 은혜도 모릅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고, 일을 시키기 위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먼저 노동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성실하게 노동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주어집니다. 왜냐면 지켜야 할 것에 대한 부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면 성실하게 노동하는 자에게는 소유물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손으로 직접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부담도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담대함을 유지하기 위해 재정에 대한 의존성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부자는 오히려 그 많은 소유물 때문에 더 걱정하고 염려하게 됨으로써 참된 평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많이 가진 부자는 소유물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걱정 근심이 오히려 많아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금 Lotto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행복해질 줄로 생각합니까? 천만에요! 오히려 그 반대로 가장 불행해지게 됩니다. 친구와 친척에게서 떠나야 하고, 악한 사람들의 표적이 됩니다. 많이 소유하고 소유한 것을 믿고 일하지 않는 자는 오히려 평안이 없고 불안과 염려 속에서 살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굶고, 부자들은 비만 때문에 죽는다고 합니다. ‘부’와 ‘많은 소유’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부담을 안겨다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소유는 만족이 아니라 도리어 부담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자를 바라볼 때 잘 생각해야 합니다.

13절,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그 소유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영혼에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해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부조리입니다. 가졌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를 세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진 그것(물질, 권력, 지식, 재능, 등)이 그 사람에게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수단인데 실은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수단을 가지고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살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칭찬해주십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돈을 많이 벌고 땅과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악착같이 매달리면서 목회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돈을 많이 벌어다주는 목회자가 목회를 잘 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 의지해서 살아야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 가졌어도 그 가진 것을 가지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많이 가진 사람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주께서 나중에 많은 책임을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받았다고 무조건 좋아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소유는 많은 책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는 남기는 장사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단지 땅에 묻어두고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25장 참조) 그들이 왜 땅에 묻어두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받은 것이 너무나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것이 너무 적다고 불평했습니다. 자신에게 너무 적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하여 주인을 향해 원망했습니다. 주인의 의도를 악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일할 의욕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악한 마음이 게으름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적은 것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더 많이 받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마음 때문에 게으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음과 게으름은 서로 절친한 친구이자 동역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들이 가진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많이 가진 것이 무조건 축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많이 가지는 것은 사실 많이 맡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는 사실은 많은 책임을 받은 것입니다. 가진 것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것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적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굉장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 삶은 불평과 게으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며 크고 놀라운 것이며 많은 것인지 알지 못하면 삶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 많이 가졌으나 행복하지 못한 인생들의 모습을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14절,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많은 재물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한 순간의 재난에 의해서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100억의 재산을 가졌는데 당대에 다 날린 경우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래서 가진 자는 늘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새와 같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날개를 가지고 언제든지 날아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많이 맡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요구하실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자들은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심판을 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거두실 때 사람은 그것을 막을 능력도, 저항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를 주신 목적을 상실하고 더 큰 부를 축적하려고 욕심을 내다가 갑자기 패망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부를 소유한 사람이 비록 아들은 낳았지만 그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물려주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수백억 로또에 당첨되었으나 그때부터 ‘인생역전’이 시작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토록 원하던 인생역전이 아니라 정말 원하지 않았던 인생역전 말입니다. 아버지의 부를 아들이 잘 맡아서 관리하는 경우를 보았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대게 아들 대에서 다 말아 먹기 일쑤입니다. 아들에게도 부를 제대로 물려주지 못하는 이 인생의 한계를 왜 깨닫지 못합니까? 많이 가진 자는 그래서 부담이 큰 것입니다. 아들이 다 없이할 때 그 피해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많이 가졌으나 그것을 다 누리지 못하는 인생들을 생각해보십시오.

15절,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모 t하리니”

사람은 가진 것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욥이 고백한 대로 적신으로서 세상에 나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와서 벌거벗은 몸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셨다는 것은 주님이 가져가신다는 뜻입니다. 맡겨주신 것을 언젠가는 되찾으실 날이 반드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당치 못할 부나 소유는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인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결코 가지고 가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시오. 어린아이들을 보면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를 분리하여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그릇에 맞지 않는 것은 거절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당치 못할 축복은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내 믿음의 분량대로 복을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많이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믿음의 그릇을 넓혀야 합니다. 관대함과 관용이란 성품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구제와 베풂에 대해서 선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가진 것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이 직면하는 부조리입니다.

16절,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사람은 적신으로 와서 적신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면서 더 많이 벌며, 더 많이 소유하며, 더 많은 재물을 모은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 지를 늘 끊임없이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을 자신에게 맡겨주신 뜻과 기한과 목적에 대해서 늘 자문해야 합니다. 더 가지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주신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가지려고 고민하지 말고 있는 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여야 합니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은 더 큰 책임을 뜻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더 큰 책임감과 책임감 있는 행동입니다.

 

 

또한 우리는 많이 가질수록 근심과 걱정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7절,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부자가 갑자기 망하게 되면 번뇌와 병과 분노가 생깁니다. 대우그룹의 K회장을 보세요. 과거에 잘 살았다는 기억 때문에 그 고통은 울화병으로 번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잘 살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에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자신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면 그러한 정신병에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정신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부자들과 부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은 딤전 6장을 꼭 읽어야 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시며 누리게 하나님께 그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돈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돈을 주인처럼 떠받들지 말고 종처럼 부려야 합니다. 너무 적게 받았다고 푸념하지 마십시오. 너무 많이 받았다고 감사하기 바랍니다. 적은 것에 충성하는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적은 것이라도 성실히 가지고 사용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큰 것을 맡기십니다.

 

 

그러면 해 아래서 최선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18절,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그러면 가장 행복한 삶은 어떤 삶인가? 행복의 시작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분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분복’을 알아야합니다. ‘해 아래서’ 즉 세상에서 살 때 최선의 삶이란 ‘분복’ 즉 하나님이 나눠주신 분량 안에서 자족하며(스스로 만족할 줄 알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결코 채울 수 없고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원하는 것을 가지면 만족하지 못하고 더 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불교를 보세요.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려고 집중하며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신 분량을 알고 그 안에서 마음껏 누리고 향유하라고 말합니다. 창5장을 보면 “향수하고 죽었더라.”(개역성경)는 말이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성도들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리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아는 것입니다. 향수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알고 그것에 자족하며(self-satisfactory)하며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자신의 복이 있음을 알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발견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물질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물질을 떠받들면서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하고 안 하고를 지갑이 결정하고 있습니까? 직장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를 연봉이 결정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결정합니까?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만이 진정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9절,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해 아래서, 즉, 이 세상에서(in the world)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다음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모든 재물과 모든 소유물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실 때는 그것을 수단으로 삼으라고 하시는 줄 믿어야 합니다.

(3)하나님께서 주신 분량대로 수고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4)수고해야 그것이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수고하는 인생이 그 분복을 받게 됩니다. 분복은 수고 없이 자동적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응답은 절로 오는 법이 없습니다. 땀 흘리는 가운데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할 축복을 응답받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일하는 즐거움을 알아야 합니다. 게으름은 응답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근면 성실한 태도를 먼저 가져야 다음에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모두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인생을 보십시오.

20절,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라.”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렇게 살 때에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문제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사는 가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짧게 살더라도 어떻게 사는 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삶의 목적과 가치를 아는 인생의 특징은 바로 오래 사는 것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오로지 물질과 부를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이 목표이고 목적인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을 매우 두려워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물질을 하나님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은혜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재물의 풍부함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여 살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게 되면 사람은 반드시 재물을 의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결단의 기로에 서 있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우리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엇의 영향을 받으며 살 것인가? 지갑의 말을 들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 것인가? 이 선택은 저와 여러분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