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본문: 전5:1-9
5장부터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새로운 국면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구도자의 기본자세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1장에서 4장까지 우리는 인간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상황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 사람은 일단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고민하게 됩니다. “나는 세상 가운데서 얼마나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내가 보고 있는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지?” “시간과 폭력의 한계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지?” 결국 사람은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구도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는 것이 5장의 내용입니다. 이 주의사항을 무시하다가 하나님을 만지 못하고 돌이켜서 물질을 숭배하는 삶으로 전락해버린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기 노력으로 행복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한번 정리해봅시다. 첫째, 사람은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조할 능력이 없으며(1장), 둘째, 사람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한계를 안고 있으며(2장), 셋째, 때의 한계를 안고 있으며(3장), 넷째, 학대의 한계를 안고 있다(4장)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이 한계를 근본적으로 안고 살아갑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한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한계상황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상황을 느끼지 않고서는, 그리고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고서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한계를 인생에게 두신 것은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은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과 관계(언약)를 맺을 때, 인생은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해답이라기보다는 길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실패하고 떨어져서 하나님 대신 물질을 찾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➀ 1-7: 하나님께 나아갈 때 조심해야 할 것들: 발과 말을 조심해야 한다.
➁ 8,9: 세상을 바라볼 때 조심해야 할 것: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➂ 10-12: 물질을 바라볼 때 조심해야 할 것: 물질이 만족을 주지 않는다.
➃ 13-17: 부자를 바라볼 때 조심해야 할 것: 부자 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➄ 18-20: 해답/ 분복을 알고 즐기라.
5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게 될 때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조급한 발과 말이며, 둘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의함을 보면서 불평하는 것이며, 셋째는 물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며, 넷째는, 부자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해 아래서 최선의 삶이 어떤 것인가 제시하면서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하나님과 물질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은 참된 만족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든가, 아니면 물질을 찾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본문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든가, 아니면 물질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물질은 사람이 찾는 두 개의 큰 목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물질을 찾으려고 하는 분기점은 어디인가? 세상에서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세상에서 빈민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면서 부와 물질이 만족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높으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분복에 자족할 때, 우리는 물질숭배에 기울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구도자로서 하나님을 찾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을 먼저 살펴봅시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발”과 “말”입니다.
1절,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인간이 안고 있는 여러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 사람은 구도자가 되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계를 두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한계를 인간에게 두신 하나님을 만나야 구원의 길을 제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성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성전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나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는 없는 곳입니다!! 성막의 구조를 잠간 생각해보십시오. 입구, 세마포장막, 번제단, 물두멍, 성소와 지성소, 등등이 있습니다. 입구는 굉장히 넓지만 그러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초청은 모든 인생들에게 다 해당됩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자기 방식대로 나아가는 자는 다 그 앞에서 죽게 됩니다. 왜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잘못된 불을 드렸을 때 어떤 비극을 맛보게 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또 언약궤를 짊어지지 않고 수레에 싣고 가다가 즉사한 웃사에 대해서도 압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분향하려다가 하나님의 치심을 받은 웃시야, 그리고 아하시아왕의 결국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보낸 오십 부장이 어떤 모양으로 죽었는지도 압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를 무시하고 멸시하다가 어떻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더라도 함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둘째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이 무엇인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법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전과 번제와 제사장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안내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르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경청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방법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는 제사는 결코 악을 깨닫는 것과 악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처음 하나님의 전에 나아올 때 그들은 자기 생각과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이 아무리 지극정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내 노력과 내 생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발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내 생각과 내 뜻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한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발을 조심해야 하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말입니다.
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성급하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차원을 인간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 경청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기본기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모습은 너무 요란법석을 떠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침묵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 듣기 위해서 잠잠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 이유는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3절,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개역성경에서는 걱정이란 말보다는 ‘일’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일을 많이 하면 꿈이 생깁니다. 이것은 일의 주도권을 사람이 쥐고 있을 때 사람은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을 하는 경우 얼마나 걱정이 많은지 모릅니다. 만일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라면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라면 걱정이 많은 법입니다. 그래서 일과 걱정을 같은 의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교훈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어떤 태도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입니다. 내 생각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도록 해야 하나님께 나아갈 때 걱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내가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집중해야 참된 소망이 생깁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나의 일인가를 곰곰이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려는 이 일이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하는 일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참된 봉사도 그렇습니다. 모든 필요에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 필요 중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자신은 그것이 주님을 위한 섬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섬김을 요구한 적이 결코 없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주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참된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내 뜻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면 헛된 망상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망상임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탓하기보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꿈과 헛된 꿈에 대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누가 주도하는가에 대해서 물어보면 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것일 때 우리는 참된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마르다처럼 내 생각과 내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잘못된 꿈을 갖게 됩니다. 망상을 가지고 교회생활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렇게 잘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에게, 혹은 내가 하는 사업에 복을 주실거야!’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시겠지!’ 이것은 영적인 망상입니다. 이러한 망상 때문에 결국에 가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내가 결국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긴 것은 자기 마음대로 기대치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린 결과입니다. 그러나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세요.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자기 뜻과 자기 생각으로 열심 내는 식의 신앙생활은 요란스럽습니다. 어리석은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내 생각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잘 듣는 사람이 잘 일합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봉사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 예배합니다. 참되게 일을 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은 결코 떠들어대지 않습니다. 광고하고 나팔을 부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과 자기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 혹은 일하지 않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이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치고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은 결코 말을 많이 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기도생활에 한번 적용해볼까요?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를 위한 기도를 먼저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을 많이 하는 기도보다는 듣는 기도, 경청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초보단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조급함입니다. 신앙생활이 성장하다가 단명하는 대부분의 원인이 조급함과 성급함 때문입니다.
4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은 갚으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까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말씀이 자라나서 그 말씀이 나를 통해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경청하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버리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아계시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급함이 있을 때 내 안에 말씀이 들어올 여유와 공간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말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움직여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시기 전에 자신이 먼저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스타트 라인에 선 수영선수들이 있는데 출발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물속에 먼저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부정출발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것은 부정출발입니다. 신아생활의 기본은 하나님의 신호에 우리가 반응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를 끌고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양은 오직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그 뒤를 따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끌고 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게끔, 하나님이 나를 설득하시게끔 내가 내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함부로 서원하게 됩니다. 사사 입다의 서원을 보세요. 그의 조급한 서원으로 인해 사랑하는 딸을 죽여야 했습니다. 조급함은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단축시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움직여보려고 애씁니다. 이것이 듣는 것보다 말을 많이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 때 사람은 참지 못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하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감동시켜보려고, 하나님을 움직여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급하게 서원하는 것은 마치 부도수표를 발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도수표를 남발하면 반드시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최근 우리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보고 있습니다. 투기성 투자가 결국 이러한 경제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결코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잠잠히 기다리고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특히 언어에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영적 성장을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신실한 말을 신앙고백으로 올려드려야 합니다. 신실한 입술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즉, 두 마음으로 두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부정한 것으로 열납 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말에 조급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는 일, 그리고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되는지 살펴봅시다.
5절,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신약성경은 서원하고 맹세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과 야고보서의 기록을 살펴보세요. 성경은 왜 서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함부로 서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왜 장애물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고 내가 구원의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사람의 타락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체가 바로 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혀의 권세, 말의 타락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이 가장 먼저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6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하게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이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 지체 중에서 가장 더럽고 불결한 부분이 바로 입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두 손으로 우리의 입을 가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혀로 하나님을 제어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또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이게 만들려고 하나님 앞에 약속을 남발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것이며 빠지기 쉬운 교묘한 함정입니다.
7절,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꿈이 많은 사람은 또한 실망도 많이 할 것입니다. 말이 많아도 역시 실망을 많이 할 것입니다. 스스로 상처를 많이 받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많습니다. 보세요. 꿈과 말이 많은 사람치고 실속이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꿈과 말이 많은 사람은 실망도 많이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허황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실족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조이 도우슨 여사가 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책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더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뵙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헛된 기대를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경외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다가 실망하고 돌아서는 이유 중에 근본적인 것이 하나님께 헛된 기대를 갖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순례의 길을 포기하고 구도자의 길을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 너무 많은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쉽게 약속을 남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하고 혹은 자신이 한 약속 때문에 부담감을 가져서 구도자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8절,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재판장이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약자가 피해를 보고 불의가 성행하며 행악자가 형통한 것을 볼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7편과 73편을 읽어보세요. 행악자가 형통할 때 시기하거나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말아야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할 수 있습니다. 행악자를 바라보면서 불평하고 분노하고 혹은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장애물이 됩니다. 이 장애를 딛고 넘어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감찰하시다가 결국에는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잘 되는 것을 보거나 불의한 방법대로 잘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마음에 시험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기하거나 혹은 분노하거나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기 위해서는 그 두 가지 극단을 모두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공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또 공의를 짓밟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9-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먹느니라.”
공의란 땅의 이익을 공평히 분배하는 것입니다. 내 것과 남의 것, 그리고 우리의 것을 잘 구별하는 지식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헨리 죠지가 쓴 [진보와 빈곤]이란 책을 꼭 읽어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불의란 땅의 이익을 한 두 사람이 독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진 임금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땅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임금이라도 땅의 소산을 먹을 뿐입니다. 임금이라고 해서 땅의 소산을 다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임금도 땅에서 나는 것을 통해 혜택을 누릴 뿐입니다. 땅에서 나는 소산은 특별한 소수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사람이 땅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만들지도 않고, 그 자신이 밭의 소산을 나게 하지도 않으면서 땅을 확장하거나 땅을 독차지하려고 하거나 땅의 것을 독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뭇사람을 감찰하고 계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나눠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기를 예로 들어봅시다. 토탈리콜이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공기를 한 사람이 독점하려고 한다고 칩시다. 공기를 돈으로 다 사서 자기 것을 삼는다고 칩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공급하시려는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것을 독점하려는 것은 불의의 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금까지 보았습니다. 그것은 첫째, 조급한 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조금하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생각과 뜻대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둘째, 경솔한 말입니다.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움직여보려고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시도록 잠잠히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로, 불의한 일입니다. 불의한 일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한 일을 볼 때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이 세 가지 태도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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