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전도서강해(5)-때를 바꿀 수 있는가?(전3:1-15)

등불지기 2012. 3. 7. 17:44

 

 

 

때를 바꿀 수 있는가?

 

본문: 전3:1-15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인생이 풀어야 하는 숙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1장과 2장에서 전도자는 헛됨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 속에서는 결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1, 2장의 메시지를 다시 요약해봅시다. 삶의 의미와 만족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해서 첫째, 유물론적 세계관, 즉 해아래서 살펴보았습니다. 둘째, 경험론적 세계관, 즉 웃음과 쾌락과 사업성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셋째, 인식론적 세계관, 즉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삶 속에서도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넷째, 실용주의적 세계관, 즉 실리를 추구하는 삶 속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대안은 오직 유신론적 세계관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세계관으로는 잠시 일시적인 유익을 맛볼 수 있어도 새롭고 영구적인 만족과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최선의 삶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 자체를 즐기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땀 흘려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혹은 사업에 성공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묻지 말고, 내가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전도서 3장의 내용은 시간의 폭력 앞에 무기력한 인생을 위한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3장에 들어와서 전도자는 “때와 기한과 목적”에 대한 인생들의 무지와 한계를 지적하면서 의미 있게 사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하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치하시는 것을 사람이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와 목적과 기한에 대해서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그것을 알고 순종할 때 비로소 참으로 현명하며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생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시험이요 숙제인 것입니다. 이 숙제를 잘 했는지의 여부를 따라 사람은 최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단락은 때와 영원에 대해서입니다.(1-15절) 둘째 다락은 선과 심판에 대해서입니다.(16-22) 이것은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도자는 먼저 시간에 관한 사람의 무지와 무능을 증명한 다음,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알고 행하는 것이 바로 선이며 축복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성경적인 시간관을 정립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개역개정판)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개정판)

 

(1)시간에 해당하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크로노스 vs.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특정한 일이 발생할 시각입니다. 예를 들어 몇 시 몇 분이란 표현은 크로노스를 의미하고, 카이로스는 알람시계나 시한폭탄에 장치된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가 무엇을 할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어도, 시한폭탄이 터지는 시간은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카이로스에 관한한 우리 인생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입니다.

 

(2)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회’ 혹은 ‘운’은 하나님이 시간(카이로스)을 주관(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카이로스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양심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거나, 혹은 그것을 부정하고 꾀를 부려서 카이로스를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하려고 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3)지혜는 이러한 시간관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이 시간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첫째, 모든 것에 기한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시90편 참조) 기한과 목적은 내가 결정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최신형 핸드폰을 구입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잘 쓰고 싶은 마음으로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이 핸드폰을 사용할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내 손에서 얼마동안 있을지 나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언제 내 손을 떠날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둘째, 모든 것에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왕상2장 참조) 모든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그 목적을 임의대로 변경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 3장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정립해야 할 시간관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주관하십니다. 어떻게 주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의 기한과 목적을 정하심으로써입니다! 내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기한과 목적을 내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모든 사물의 기한과 목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모든 때와 목적을 정하시기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미리 정하신 그것을 도로 찾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교리에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삶을 보십시오. 요셉은 자신의 삶 속에서 기한과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참고 선을 계속 행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한과 목적을 발견함으로서 자신의 삶이 결코 실패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더욱 더 선을 행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는 결코 기한과 때와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 삶에 이 진리를 적용해봅시다. 성공적인 인생이 되려면 모든 것과 모든 일에 기한과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목적을 안다면 반드시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 지혜와 지식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미련한 자(자신에 대해서 무지한 자)와 어리석은 자(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 자)는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다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때와 기한과 목적을 내가 정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2-8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으며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때와 목적에 대해 미리 정해주신 것 중에 14가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싫든 좋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1)날 때와 죽을 때가 있습니다.

생명에 관한 것에 대해서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나고 죽을 때를 사람이 정하지 못합니다. 남녀의 성별, 피부색, 사회적 신분을 자기가 마음대로 정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2)심을 때와 뽑을 때가 있습니다.

성장에 관한 것에 대해서 사람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유전자공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하나님이 입력해두신 성장 프로그램을 복제하거나 억제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신기하고 신비로운 것은 없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결코 자동적으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십니다.

 

(3)죽일 때와 치료시킬 때가 있습니다.

흥망성쇠에 대해서 사람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고 유능한 의사가 치료하려고 노력해도 의학적으로 손을 쓸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4)헐 때와 세울 때가 있습니다.

용도와 목적을 사람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살고 있는 집을 언제 헐어야 할지 사람이 그 집의 기한을 정하지 못합니다. 물건의 내구성이 얼마나 갈지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좋은 아파트에 이사 갈 때 아파트가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회사를 설립할 때 얼마나 오래갈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참조로 우리나라의 경우 100년 이상 된 기업은 2개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네델란드의 경우 200년 이상 된 회사는 222개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고 있는 삼성이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5)울 때와 웃을 때가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도 사람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웃고 싶어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웃을 때와 울 때를 내가 결정하지 못합니다. 내일 웃겠다고 큰 소리쳐도 내일 웃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웃고 우는 연기는 할 수 있겠지만 울 때와 웃을 때를 사람이 결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웃을 수 있도록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웃을 때와 울 때를 모두 대비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만 생각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 기대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려고 하지 않으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6)슬퍼할 때와 춤출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임의로 슬퍼할 대와 춤출 때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내가 슬퍼할 때와 춤출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정하십니다.

 

(7)돌을 던져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돌을 거두는 이유는 집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집을 지을 때 돌이 필요합니다. 돌은 집을 지을 때만 필요한 것입니다. 돌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지을 필요가 발생할 때만 중요한 것입니다. 필요가 발생하지 않으면 돌은 하찮은 것이 되고 맙니다. 이렇듯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어떤 것의 필요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알고 그것에 자신을 준비시키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러면 필요할 때 쓰임 받을 것입니다.

 

(8)안을 때와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합니다. 야곱이 내일이면 라헬을 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미워하고 싶어서 미워하고,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9)찾을 때와 잃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찾고 잃어버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지갑을 잃어버리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떻게 그것을 도로 찾는 것도 내 마음대로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생들을 불안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때와 기한과 목적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인생들은 불안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10)지킬 때와 버릴 때가 있습니다.

신의를 지키고 배반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왜냐면 버리게 될 것이 성경에 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싶어서 배반했을까요? 그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뒤따를 때 배반하기 위해 따랐을까요? 아닙니다.

 

(11)찢을 때와 꿰멜 때가 있습니다.

용도의 한계를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12)잠잠할 때와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 침묵해야 하며, 언제 말해야 가장 좋을지도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사오정 시리즈가 보여주는 것은 때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이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3)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14)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의 시기와 휴전할 시기도 사람이 결정하지 못합니다. 언제 어떻게 전쟁이 날 것인지에 대해서 누가 예언할 수 있을까요? 점쟁이들은 대게 사건이 발생한 직후 자신이 예언했었다고 떠들어댑니다.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누가 예언했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내일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아무도 내일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9절,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지금까지 전도자는 인생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기한과 목적을 정하는 것’을 나열한 다음에 구도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숙제입니다

10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우선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이 그것을 찾고자 노력하도록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면서 나름대로 삶의 가치와 목적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이 인생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하나님의 숙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숙제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1)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2)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종교성’ ‘하나님을 알만한 것’(롬1장)을 의미합니다.

(3)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때(기한)와 목적을 알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인생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14절 참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위해 내신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를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이 주목하는 인생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숙제를 푸는 길은 기쁨으로 주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12절,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이제부터 전도자는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일까요? 우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행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한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을 선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선의 개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것(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은 실패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최고의 만족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세상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는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돈을 벌려고 하거나 특정한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어떤 것, 어떤 사람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 남들에 비해 더 많이 가지는 것 등을 인생의 가치와 의미로 여기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것은 목표가 분명한 인생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방황하고 표류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한과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통치하고 계심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사람은 결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삶-이것을 위해 하나님을 사람을 지으셨고, 이것을 위해 하나님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숙제를 풀려면 근면 성실로 살아야 합니다. 일하는 즐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13절,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죄는 노동과 일을 싫어하게 합니다. 사단은 일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사단이 역사하면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하게 됩니다. 게으름은 사단이 아주 좋아하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근면과 성실을 매우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근면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일하지 않고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하지 않고도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일확천금, 한탕주의사상은 모두 사단에게서 온 것입니다. 오늘날 국제사회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이러한 풍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근면 성실이란 복된 성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숙제를 풀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연구하십시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교과서입니다.

14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우리가 늘 살펴보아야 할 교과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행하는 것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불변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사람이 가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사람에게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보고서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것은 ‘기한과 목적’을 정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까닭은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자가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 결코 후회함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후회함 없이 살려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면서 살아야 합니다.

 

만일 숙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15절,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것은 사람이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찾으시고자 하실 때 사람은 그분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정해두신 때와 목적을 도로 찾으십니다. 인생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찾으실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그때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공부하지 않고 마음대로 놀다가 시험 치기 전날에 후회하면서 걱정하는 수험생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수능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잘 치르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시험 치를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