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피할 수 있는가?
본문: 전3:16-22
모든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생에서의 삶은 저생에서의 삶을 결정하는 거대한 시험대와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살수록 사람은 불안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영이 인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이 자기 마음대로 놀다가 시험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더 신경질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의 세 딸들은 모두 초등학생들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어떤지 한번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공부하는 것은 좋은데 학교 다니는 것은 싫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일 싫은 것은 해야만 하는 시험과 숙제였습니다. 시험과 숙제에 대한 스트레스가 초등학생들에게도 상당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다가도 씻기고 재울 준비를 하는 순간부터 신경질을 내기 시작합니다. 숙제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똑같은 잔소리가 이어집니다. “왜 미리 하지 않았니?” “숙제부터 하고 놀아라!”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잠잘 때라는 카이로스가 다가오는 순간부터 숙제를 걱정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도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카이로스가 다가오는 순간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고 믿습니다. “왜 미리 하지 않았니?”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초등학생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숙제는 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내어주신 숙제를 검사하실 카이로스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심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숙제검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숙제검사하실 때 미리 준비한 인생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은 숙제검사가 다가올수록 불안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숙제검사에 대해서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모든 목적과 기한을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것은 사람이 다시 변경하거나 돌이킬 수 없습니다. 숙제검사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찾으시고자 하실 때 사람은 그분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정해두신 때와 목적을 도로 찾으십니다. 인생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찾으실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그때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공부하지 않고 마음대로 놀다가 시험 치기 전날에 후회하면서 걱정하는 수험생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논리적 근거를 세상의 법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6절,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세상의 법정이 있다는 것은 하늘의 법정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법정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하늘의 법정이 완전하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을 보십시오.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들은 재판을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완벽하지 못합니다. 판검사들은 왜 그렇게 법정의 공정성을 위해 노력하는 걸까요? 그것은 하늘에 법정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가 아닐까요? 이것이 억지 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하늘의 법정이 없다면 세상에서는 정의롭게 재판을 진행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과 법집행을 보면서 하나님의 법과 법집행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해야 합니다. 먼저 전도자는 인간의 심판이 얼마나 취약하며 불완전한 것인지에 대해서 먼저 말합니다. 사람이 완벽하게 재판한다고 하더라도 늘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법정을 보면 하늘의 법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면 세상의 법정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필요에 의한 존재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반대급부에 의한 존재증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완전함이 있다는 것은 완전함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한 이유는 세상의 법정이 불완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하늘의 법정이 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있다면 빛이 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가 있다는 말은 완벽이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불완전한 법정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어둠을 바라보면서 빛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불공정과 불공평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바로잡으실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언제나 온유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불공평과 불공정으로 상처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때를 믿고 기대하며 기다릴 줄 압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카이로스가 있다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선, 하나님의 심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십시오.
17절,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 모두를 심판하실 때를 정해놓고 계십니다. 최후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당신이 친히 정하신 기한과 목적을 점검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목적대로 움직였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실 것입니다. 악인뿐만 아니라 의인 역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숙제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경외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그 때 점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모든 기한과 목적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과 때에 맞게 살았는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이것을 제대로 의식했더라면 결코 땅에다 그 보물을 묻어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신을 판단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도 없습니다. 누가 잘했고 못했고...이런 식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향해서 잘했다 못했다고 판단할 때에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판단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만약 내 마음대로 살았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과 자기 뜻대로 살았던 지난날들에 대해서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과 목적대로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자기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러한 인생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분명히 당신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인간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쓸데없는 지식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영혼을 어떻게 하시느냐, 자살한 자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느냐 등입니다.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부러 중요한 본질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충성스럽지 못한 자신의 상태와 악하고 게으른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본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을 가리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인가?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둘째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18절,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시험하십니다. 즉, 숙제검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과 목적에 얼마나 맞게 살았는지를 점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기한과 목적을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것을 스스로 찾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찾을 수 있도록 충분한 길과 자료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하며 보잘 것 없으며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겸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질 때 인생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인생학교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셋째로, 죽음을 직시하십시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19절,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사람들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까닭은 삶의 목적과 기한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종말이 같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점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구도자들이 되어서 진리를 찾아 순례의 길을 나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제나 건강하게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것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참 진리를 찾아 떠나는 구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심판을 준비하십시오. 사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준비를 하십시오.
20절,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사람이나 짐승은 다 한번은 죽지만 하나님은 짐승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왜냐면 짐승에게는 숙제를 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엄중히 책임을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영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과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품꾼과 종은 주인과 회계할 것이 없지만 청지기는 주인과 반드시 결산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대신 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만약 그러한 숙제를 사람에게 주지 않으셨다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없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세를 바라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기한과 목적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뜻을 부인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마치 시험을 앞두고 자기 마음대로 노는 수험생과 같은 것입니다. 신나게 놀 때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냐고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 칠 것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가 다가올 때 갑자기 불안해지고 초조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허둥대다가 카이로스를 맞이할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서서 숙제검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1절,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즉, 심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심판을 받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짐승은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소멸될 뿐입니다. 짐승은 결코 부활하는 법이 없습니다. 부활은 오직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부활하게 되는 이유는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선을 행한 자,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산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 즉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위해서 부활하게 되는 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그러한 지식은 스스로 터득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미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진리를 깨닫고 심판을 대비하는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한 지식은 주님이 계시하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전파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스스로 수양하거나 훈련해서 터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째로,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일하여야 합니다.
22절,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개역성경에서는 ‘신후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후사’란 ‘죽고 난 이후의 일(상태)’을 의미합니다.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한번 죽어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번 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다시 살아올 길이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두세 번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번 죽어본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으면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한번 죽고 나서 그 후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살아나서 숙제를 잘 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문제를 푸는 도중에는 결코 답을 먼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믿고 따라갈 유일한 분입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이 인생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며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넘치는 교만을 내어버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됩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때와 목적을 가장 잘 성취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삶은 그 자체로 유일한 기회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은혜를 받을 기회입니다. 내일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늘을 살리지 못하면 내일은 기회가 없습니다. 왜냐면 오늘이 없다면 내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기회를 잡지 못하면 내일은 결코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오늘을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현재를 위대하게 사는 사람이 위대한 인생입니다. 오늘이란 기회를 잘 살려서 최선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해답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거대한 인생이란 시험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생의 답안지를 작성하십시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충성하시면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하늘의 아버지 뜻을 이루면서 사는 인생이 최선이자 최고의 삶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숙제를 다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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