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졌다고 다 누리는가?
본문: 전6:1-12
오늘은 성공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진정한 성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5장에서 살펴본 것은 인생의 한계를 인식하게 될 때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되거나 혹은 물질을 찾게 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6장에서 살펴보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것들--재물, 장수, 부귀, 건강, 존귀, 학식, 자녀, 지혜, 좋은 이념들, 등등--이 인간의 행복에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모으기를 원하는 것들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행복과 만족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계속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가 인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전도자가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고 많이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그분의 목적대로 사용하면서 성취감(“낙”)을 맛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지금 그것을 “잘” 사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그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한들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칼은 전쟁할 때가 아니라 요리할 때 ‘낙’이 있는 것입니다. 돈은 모을 때와 소유할 때 ‘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고 베풀 때 ‘낙’이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가지고 더 가질 때 ‘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가지고자 하는 것, 또는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이 내일이 아닌 “지금”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나는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는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성공의 기준이 아닙니다. 적게 가져도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용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 노력하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지금 누리는 삶이 진정 성공한 인생입니다. 전도자는 실제적인 성공자가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헛된 성공을 위해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전도자의 이러한 외침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 읽은 전도서 6장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➀ 1-3: 소유자와 향수자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 (가졌지만 누릴 줄 모른다면?)
➁ 4-6: 소유자라도 다 성공했다고 할 수 없음 (누리지 못하면 낙태된 자보다 못함)
➂ 7-9: 소유자는 그것의 가치와 유익을 점검해야 함 (가치와 의미가 어디 있는가?)
➃ 10-12: 소유자는 그것을 잃어버릴 때를 생각해야 함 (하나님이 가져가실 때)
본문 전체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심각한 폐단(부조리) 한 가지를 소개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혹은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것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지키기만 하다가 쓸쓸히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원하는 것을 가져도 전혀 행복함과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해 아래 사는 인생들이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반드시 행복하거나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1-3절) 차라리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태어나다가 죽어버린 낙태아보다 못하다고 논증합니다.(4-6절) 그러므로 무엇을 가진 사람은 혹은 무엇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하며 가치가 있는지 실제적으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7-9절) 그러면 해 아래서 어떻게 살아야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도로 가져가실 때를 생각하고 심판의 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10-12절)
전도자는 인생이 경험하는 대표적이면서도 심각한 부조리(불행한 일)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졌다고 다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다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절,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살아가면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앞서 전도자는 5:13-17에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큰 폐단을 한 가지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에게 해가 되도록 지키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재물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 분명 행복해야 함에도 오히려 가진 것 때문에 더욱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면 왜 이유 없이 자살하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도자는 비슷한 폐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심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을 가지면 행복할 줄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인생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인생은 그것을 알면서도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노력을 계속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곧 그들에게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소유가 하나님이 된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인생은 물질의 풍요를 섬기게 됩니다.
2절,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첫째, 소유와 누림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원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고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지키고만 있을 뿐 그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지고 모으는 것이 목표이지,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저축만 하다가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채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가 결국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인생을 그냥 마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재물을 수단으로 생각할 줄 모릅니다. 재물을 선용하는 지혜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때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재물이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요 목표가 됩니다. 사람들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난해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궁극적으로 그것을 사용할 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 안에서 옵니다. 수집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고 수집한 그것을 결코 사용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수집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주인의 뜻대로 선용해야 합니다. 돈은 하나님의 방향으로 계속 돌려야 합니다!
둘째, 종과 청지기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면 되었을 것을 굳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을 종이 아니라 청지기로 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종은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만 청지기는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고 주인의 뜻대로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할 줄 아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요셉을 한번 보세요. 요셉은 종이 아니라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가능성, 하나님의 종이 아닌(천사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천사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아니다.) 대리자로서 일할 수 있는 청지기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람이 갖게 된 특권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시퍼가 질투함으로 자기 지위를 벗어나 에덴으로 내려감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사람은 청지기의 권세와 특권을 사단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는 사단이 가지게 되었고(청지기를 흉내 내는 것이다.), 사람은 사단의 종이 되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살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이나 부귀를 목표로 열심히 수고하는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결코 물질이나 부귀를 수단으로 삼는 지혜를 가지지 못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좋은 청지기가 되려면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적은 것을 주시고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하나님은 인생을 시험하십니다.
셋째, 많이 가진 것과 성공한 것은 다릅니다!
열심히 모으는 인생과 가진 것을 가지고 잘 사용하고 누리는 인생 중에 누가 진정 성공한 인생일까요? 그러나 열심히 모으기만 하고 지키기만 하면서 정작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성공했다고 칭송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을 주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뜻(목적과 섭리)을 잘 알아야만 그것을 진정 누릴 수가 있습니다. 소유한 인생이 반드시 누리는 법은 없습니다. 소유한 인생이 누리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죄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넷째, 소유와 행복은 다릅니다!
사람은 가지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진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왜냐면 어떤 것이든지 가진 것이 정신적인 행복과 만족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재물, 부요, 존귀, 장수, 자녀, 사람, 지위, 등은 사람이 일단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며, 사람들이 가지기를 원하며, 가지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지만 사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장하지만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노력하지만 채울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가졌다고 자랑한들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단 말입니까? 실제로 삶 속에서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전도자는 소유한 인생이라고 반드시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듯, 누리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아니면 사람은 물질을 숭배하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3절,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많이 가졌다고 성공했다고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많이 가졌지만 낙태아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전도자는 비교법을 가지고 논증합니다. 비교법은 지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자, 해 아래 사는 인생들을 보세요. 많이 가졌다고 실제로 행복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생에게 자녀와 장수의 축복을 주셨지만 정작 그 축복을 받은 본인은 마음에 전혀 만족감이나 행복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재물과 장수와 부귀와 건강과 존귀와 학식과 자녀를 많이 주실지라도 정작 그것을 받는 자들은 마음에 전혀 낙이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그것을 누리는 법은 오직 하나님을 알 때 배우는 것입니다. 그 소유를 잘 선용하고 누리는 방법을 재물을 주심과 같이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생들이 풀어야 할 근본적인 숙제인 것입니다. 영혼의 진정한 낙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한다고 얻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100명의 자녀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를 매장해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몸을 가지고 남을 섬기는 일에 쓰지 못하고 섬김 받는 일에 집중한 인생이 바로 그러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몸, 건강, 물질, 부 귀, 장수, 지식, 자녀, 은사, 등등)을 가지고 제대로 쓰지 못한 사람이 그러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에 달려 있습니다. 잘 사용하는 자가 많이 소유하는 자보다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눅12장) 영혼의 진정한 낙은 그것을 능히 주시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것들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많이 소유하면서도 정작 누리지 못하는 사람과 많이 소유하지 못했으면서도 잘 사용함으로 누리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성공한 인생일까요? 잘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전도자는 향수하는 삶(창5장)을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누가 과연 성공한, 행복한 인생입니까?
4,5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어떤 사람은 내일 낙을 누리기 위해서 오늘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며 저축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일 예상한 대로 낙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많이 소유하면서도 누리지 못하는 인생보다는 차라리 낙태된 인생이 더 낫지 않습니까? 참고로, 낙태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아담을 대표로 하는 모든 인생이 다 죄인이지만, 낙태된 자는 책임질 일이 없습니다. 지옥의 심판에도 동일한 형벌이 획일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상급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이가 저보다 평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지 못한 인생보다는 낙태된 자가 더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것을 소유한 인생은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노심초사 염려하며 신경 쓰고 있습니다. 걱정하며 염려하면서 받은 재물과 부귀를 재로 사용해보지 못하고 간수만 하는 인생을 어찌 행복한 인생, 성공한 인생, 가치 있는 삶을 산 인생이라고 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6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장수는 그 자체로 축복은 아닙니다. 재물도 마찬가집니다. 재물이 많은 것 그 자체로는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그것을 훗날 증거 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 사람은 많이 찾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하고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용할 때 비로소 누리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피아노(자동차, 컴퓨터, 책)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간수하기만 하고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축복은커녕 오히려 큰 짐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울까요?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그 삶의 질, 누리는 삶을 결정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점검해보세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나는 오늘이라 일컫는 시간에 낙을 누리고 있는가? 내일 낙을 누리기 위해서 오늘 열심히 가지고 모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실상 내일도 낙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한번 효과와 가치를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7절,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내가 수고하는 것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사람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는 일 때문에 열심히 수고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욕은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채울 수 없는 식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채움을 갈망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수고하여도 결코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영적으로 죽은 인생은 하나님 아닌 물질로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하는데도 결코 그 욕망을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공허함은 오직 예수님의 영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8절,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전도자는 물질과 건강과 장수만이 아니라, 지혜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인생에게 지혜와 지식을 부어주시지만 정작 본인이 그것을 가지고 사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지식이나 지혜를 내가 가졌다고 무조건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물질만이 아니라 지혜라 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잘 활용할 때만이 누리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9절,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 상상만 하다가 끝내기도 합니다. 망상은 일종의 도피입니다.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망상도 심합니다. 멋진 생각은 많은데 정작 현실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많은 생각에 집중한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이 활용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지금 전도자는 실제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매우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역시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을 다 가져도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많은 재물, 부귀, 학식, 지혜, 건강, 장수, 자녀들을 가졌지만 그러나 그것이 실제적으로 내게 어떤 유익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행복과 성공에 이르는 실제적인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전도자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싸워 이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시험 답안지를 작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십니다. 특히 인생을 만드신 분이시기에 어떻게 살아야 최선인지, 삶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의 인생에 겪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을 아십니다. 그러나 인생에게 답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인생은 답을 가르쳐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하나님을 떠나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전도자의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 없이 홀로 성공하고 홀로 행복해지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은 실상 하나님과 싸워 이겨보려고 하는 시도들입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과 경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11절,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이 시험에서 사람은 답안지를 잘 작성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피조물이기에, 그것도 청지기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치러야 할 시험입니다. 결코 내 마음대로 답안지를 작성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틀린 답을 마구 기입하면서 의기양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헛된 것을 더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답안지를 써내려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시험 답안지를 그냥 가득 채운다고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교수님이 가르친 대로, 그리고 교수님이 기대하는 대로 답안지를 적어야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이 각자에게 기대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들이 시험을 치루는 거대한 시험장과 같은 곳으로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기준과 관점에 다라 참된 것으로 인생의 답안지를 작성해야 합니다. 그 시작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내용을 적어놓아도 점수 없습니다.
12절,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잠간 동안 부질없이 사는 날 동안 어떻게 살아야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사는 것인지 스스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신후에, 즉 그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스스로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죽은 후에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자신 있게 알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진정으로 성공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숙고하고 또 숙고해야 합니다. 무조건 열심히 살면 안 됩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방향을 정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냥 달려가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방향이 없이 무조건 달려가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 달려가서 골인 지점에 와서는 “어, 이게 아닌데!”라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청년의 때는 이 방향을 정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청년의 때부터 속도를 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유냐, 존재냐,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소유로 사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청지기로 삼고자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맡기신 작은 것에 만족하고 충성하면 큰 것을 맡기십니다. 충성된 마음, 근면 성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가 힘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소유인생이 되지 말고 사용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맞게 사용하는 성취감으로 사는 것이 바로 누리는 인생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의 종교가 아니라 누리는 종교입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뜻대로 잘 선용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 또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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