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구하면 얻을 수 있는가?
본문: 전7:19-29
지난 시간에는 지혜자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혜를 가진 자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면 우리가 지혜를 발견하기도 쉬울 것입니다. 지혜를 만나려면 지혜가 있는 곳에 가야 합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고침을 받으려면 병원을 찾아가야 하듯이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가 임하는 곳에 가야 합니다. 능력을 받으려면 능력이 임하는 곳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야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문제는 매우 간단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고 저절로 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 것입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중요한 것은 병원에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인은 왜 이런 문제가 생겼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잘 안 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는 지혜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근본적으로 지혜가 없기 때문에 지혜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무엇인가 속에서 뒤틀려져 있고 심각하게 왜곡되어져 있기 때문에 길을 알면서도 길을 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지혜를 구한다고 다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머리와 결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뒤틀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바로잡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공부하면서 바로 그 부분에 대해서 가르치는 전도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19절,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이처럼 지혜는 중요하다고 다시금 전도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개인에게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읍의 권력자들은 그 성읍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가장 지식이 많으며 가장 실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공동체에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은 바로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많은 재물과 권세를 가진 사람보다 더 영향력이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 실세라고 행세하는 그들보다 더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돔성의 롯을 보세요. 하나님은 악인이 많아서 소돔성을 멸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성에 의인이 적어서 소돔성을 멸하신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지혜자입니다. 요즘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고 난리들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난국을 해쳐나가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런 경제위기의 원인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이번 기회에 체질개선의 기회로 삼자고 외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위기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약점을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적으로는 부채를 줄이면서 거품을 제거해야 합니다. 거품은 위기의 주범입니다. 탐심과 투기 심리로 인한 빚이 거품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토지사유제로 인한 투기 심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법을 조정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 근면과 성실이란 성품에 바탕을 둔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며,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면서, 소비 산업보다는 제조 산업의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20절,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들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면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선을 행하였어도 단 하나의 죄가 그 많은 선을 무색케 합니다. 선을 행하면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건이나 자격이나 공로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선인은 많아도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선을 열심히 행하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그 사회를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을 행하는 마음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선을 열심히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선을 행한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이 순수하게 자원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담과 체면과 사회적인 정황이 많이 작용합니다. 마음이 더 악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막으시는 이유는 그 사회를 보전하고 주의 복음을 듣도록 긍휼을 베푸시고 유예기간을 연장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생이 죄인이란 사실을 강조하는 까닭은 지혜를 얻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죄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얻기보다 죄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지혜를 얻는 방법을 알아도 다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며, 지혜를 달라고 간구한다고 다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닌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죄가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21절,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지혜를 얻는 길에 또 다른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결여된 상태, 즉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을 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런 말을 더 깊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내 안에 지혜가 머물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하는 칭찬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을 기대하는 사람은 또한 저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칭찬과 좋은 평가를 바라고 열심히 행하는 사람은 저주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좋은 말 듣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좌절하고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의 평가는 언제나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좋다고 할 수 있고 다른 날은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 공간이 사라집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온전히 기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이것이 지혜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에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묵상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을 묵상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더라면 오늘 우리는 놀랍게 변화되었을 것이고 성장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에 마음을 두기 때문에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지혜가 있고 없고는 이것으로 실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면 내 안에 지혜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말고 자기 생각대로 고집을 부리며 살아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청하는 법,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전도자가 하는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지 궁금해서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여러분은 누구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영광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기대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기대하십니까?
22절,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사람의 말은 결코 절대적인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을 내 주관대로 평가한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도 은연중에 다른 사람이 잘못 되기를 바란 적이 있다면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서 좋은 말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1-5)
그러면 지혜자, 혹은 의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었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지혜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지혜자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지혜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자가 되려고 노력할수록 지혜자는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사랑은 멀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여기서 인생의 궁극적인 고민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노력할수록 구원이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노력할수록 지혜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노력할수록 사랑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민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잘 안 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고민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에 뜨는 법을 이해는 하는데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데 그것이 결코 자기 생각대로 잘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잘 될 것 같은데 그것이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것 때문에 고민합니다. 학생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알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공부하면 될 것인지 머리와 마음으로는 아는데 몸으로는 잘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을 관찰해보고서 ‘아,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겠는데 실제론 잘 안 되기 때문에 고민하는 영역이 있지 않습니까? 술에 취한 사람들은 자신이 똑바로 걸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됩니까?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똑바로 걸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실제로는 자꾸만 치우치는 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내 안에 뒤틀리고 왜곡되어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24절,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그러면 지혜는 어디서 얻는단 말입니까? 도대체 지혜는 어떻게 얻습니까? 여기서 전도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라고 탄식한 것과 같습니다. 분명 인간이 안고 있는 또 다른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은데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더 미움을 받는다는 현실 때문입니다.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현실 때문입니다. 똑바로 가고 싶은데 마음과 달리 몸은 자꾸만 치우치는 현실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고 싶은데 사실은 상처를 받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렵다고 전도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나는 사람에 대해서 알았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25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도자는 인생에 대해서 연구한 결과 답을 얻기는커녕 절망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인간에 대해서 연구하고 내린 결과를 보십시오. 전도자는 인간의 악함은 곧 어리석음이요, 어리석음은 곧 미친 것임을 밝히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연구의 결과는 참담합니다. 인간의 악함은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또 어리석음은 미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없이 사는 것이 곧 미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볼 때 그 둘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의 삶에 대해서 연구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들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연구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상태에 관해 연구하면 할수록 절망적이라는 것입니다.
26절,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전도자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인간은 다 죄인이란 사실입니다.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본문에서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약해보이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같다”는 말은 마음이 온갖 시험이 가득하고 욕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겉보기에는 매우 연약하고 힘이 없어 보이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이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늪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전설의 고향을 보세요. 서양에서는 남자들이 나오는데 동양에서는 여자들이 나옵니다. 원한 맺힌 약자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동양의 도깨비 이야기는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 귀신들을 보면 귀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사나운 짐승이나 칼이나 창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에 온갖 시험과 증오와 욕심으로 가득 찬 ‘약한 자’인 것입니다. 사망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사람을 가장 무섭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27절,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전도자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인생들은 모두 죄인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여러 가지 삶의 모양을 살펴볼 때 전도자가 깨닫게 되는 것은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죄 없는 의인을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죄 문제를 발견하는데 이르러야 합니다. 죄를 직시하는 것이 지혜의 중요한 본질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곧 지혜라는 것입니다. 사실 철학이나 인문학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회의론에 빠져들게 됩니다. 유럽의 실존철학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연구하면 할수록 사람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 인문학의 결과입니다. 세상 학문은 인간의 상태와 그 원인에 대해서 장황하게 분석을 내놓겠지만 결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죄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세상 학문의 한계입니다.
28절, “내 마음이 계속 찾아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본문은 결코 남성우월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복음의 기본 전제를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일천 남자 중에 하나를 얻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믿을만한 용사를 얻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쓸만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노력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힘은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 꽤나 쓰는 사람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일하지도 않고 일할 필요도 없고 전쟁에 나가서 싸울 필요도 없고 연약하고 힘이 없으며 일과 전쟁에 쓸 만한 재목이 아닌 경우에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효과를 바라보고 사람을 찾을 때는 노력하면 찾을 수 있지만 어떤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효과가 없는데도 신뢰할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어떤 효과와 가치를 바라보고 행동할 뿐 효과가 발생하지 않으면 신뢰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죄인이란 증거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효과 면에서 찾으면 찾을 수 있겠지만, 안으로 감추어진 성품 면에서 찾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도 순수한 동기로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란 것입니다. 사람은 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사람은 다 마음에 죄를 품고 다닙니다.
29절,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꾀를 내어 죄를 범하고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마음의 보좌에서 밀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천국열쇠를 가지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결코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줄 모릅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에 다윗이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고백할 줄 모릅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보좌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했듯이 인생은 분명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로 천국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합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어!” 심지어 하나님 탓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 라고 항변합니다. 혹은 상황 탓을 합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그러나 실상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인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내 안에 근본적으로 뒤틀려져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어떤 노력과 연구와 통찰로도 지혜를 만나보지 못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생각만 고집하며, 결코 자기 책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자기 꾀, 자기 생각, 자기 계획,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생각의 중심을 이동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를 얻으려면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안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즉, 내 안에 죄가 있음을 심각하게 인정하여야 합니다. 내 속에 죄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혜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어떻게요?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옮겨야 합니다. 사람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생각의 중심을 이동시켜야 합니다. 내 생각이 기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뀌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 생각이 바뀌면 내 삶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뀌면 내 운명이 바뀝니다. 생각을 변화시키십시오. 생각하는 관점을 바꾸십시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십시오. 사람의 관점을 버리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하게 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기준으로 삼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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