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본문: 전7:1-18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부름 받았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소유지향적인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하나님의 목적대로 잘 선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험에서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일단 매우 적은 것을 맡기신 다음 지켜보십니다. 많이 받았다고 여기며 감사하는 자는 나가서 열심히 일할 것이고, 적게 받았다고 여기고 불평하는 자는 땅에 묻어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구원과 물질의 축복 모두 해당하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헤아리는 능력, 상황에 맞게 잘 사용하고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6장에서는 원하는 것을 마음껏 소유한다고 행복한 인생 혹은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소유한 그것을 잃어버릴 때를 생각하고 그것을 소유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그 뜻대로 잘 선용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7장에 들어와서 전도자는 무엇이 지혜며, 어떻게 지혜를 얻는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1-6장까지는 세상에서 헛된 것들에 대해 증명하는데 집중했다면, 7-12장까지는 참된 만족을 어디서 어떻게 얻을까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➀ 1-14: 분별하는 비결(지혜자의 마음이 머무는 곳) 10가지
이름과 기름, 죽는 날과 출생하는 날, 초상집과 잔치집, 슬픔과 웃음, 책망과 노래, 탐심과 지혜, 시작과 마침, 인내심과 교만한 마음, 조급함과 분노, 옛날과 오늘
➁ 15-18: 중용의 길을 가는 비결
치우침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➂ 19-29: 인간 부패와 타락의 보편성
죄 없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타락은 심각하고 보편적이다.
➀전도자는 1-14절까지 우선 지혜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가치관이며, 분별력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13,14절)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알려면 나름대로 기준이 분명히 설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혜자는 그러한 기준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분명한 가치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➁그런 다음에 전도자는 인간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15-18절) 기준을 자기가 설정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기준을 정하는 것은 지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에 철저한 것은 오히려 자기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➂그런 다음에 전도자는 죄의 보편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혜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아주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벽증세에서 자유해야 합니다.(19-22) 그런 다음 지혜는 노력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23절) 그런 다음 전도자는 모든 인생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천 남자와 일천 여자”의 비유를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를 얻으려면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가치기준을 분명하게 정립해야 합니다.
1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기름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이름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즉, 물질보다는 명예를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잠22:1-4절 참조) 아름다운 이름은 어떻게 갖게 됩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때 갖게 됩니다. 최선을 다하여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면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기억해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명예를 얻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예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함으로 명예롭게 되는 삶으로 초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이고 우리가 받은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창12:1-3) 그것은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받은 제2의 삶의 목적이자, 구원의 목적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 복이 되시는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내 안에 충만해야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히 거하게 되면(요15:5) 나의 기도는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기름을 부어드렸을 때 값비싼 보물을 일순간에 날려버렸지만 오고 오는 세대에 기념될만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녀는 그리스도를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뛰어난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은 이렇게 섬기는데서 얻어집니다. 명예를 얻고자 하지만 실제로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섬기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필요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필요, 자기문제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얻기 위해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섬기려고 해보십시오. 나의 필요보다는 남의 필요에 진심으로 반응하려고 해보십시오. 사람들이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명예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되는 이름보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이름이 더 복됩니다. 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입학식보다 졸업식이 나은 이유와 같습니다. 태어남은 고생과 수고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혜로운가 어리석은가는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발걸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를 만나려면 지혜가 머무는 곳에 가야 합니다. 그곳은 어디일까요?
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잔칫집에는 기름과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초상집에는 슬픔과 눈물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초상집보다 잔칫집에 마음이 더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욕망이 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지혜는 다수의 길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참 지혜는 언제나 소수의 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넓은 길에 있지 않고 좁은 길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일까요? 자신의 운명인 죽음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됨으로써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을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들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는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참된 구도자는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참된 지혜자는 즐거움과 행복보다는 슬픔과 불행의 때를 항상 염두에 두게 됩니다. 참된 성공자는 실패를 항상 염두에 둡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의 종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자,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쾌락입니까? 아니면 슬픔입니까? 기쁨입니까? 아니면 죽음입니까?
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사람이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 될 때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슬픔 속에서 죄의 실상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지혜는 이 슬픔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반면 웃음 속에는 지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웃음 뒤에는 허탈함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슬픔을 통해 자기 마음이 순수하게 됩니다. 겸손하게 됩니다. 죄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려면 울어야 합니다. 정화를 위해서 반드시 눈물이 필요합니다. 눈물이 없으면 마음이 자꾸만 불순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중 잣대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야고보서를 읽어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일편단심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울음을 통해 일편단심이 됩니다. 이렇게 우는 사람에게 위로가 주어집니다. 울어본 사람만이 위로의 맛을 압니다. 반대로 잘 웃는 사람은 위로의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지혜자는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어디에 둘 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지혜자의 마음이 왜 초상집에 갈까요? 자기의 운명을 생각하고 준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준비하는 인생입니다. 우매자는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고 오직 매순간마다 즐기려고만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의 심판에 있는지 아니면 지금 낙을 누리는 것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초상집에 있는가? 아니면 잔칫집에 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날을 염두에 두는가, 아니면 잘 되고 잘 먹고 마시는 일에 마음을 두는가? 지혜자는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에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잃어버릴 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소유하는 것에만 염두에 둡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인가요?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인가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의 단 꿈을 꾸고 있습니까? 아니면 결혼으로 인해 내가 겪어야 할 고통과 상실과 무거운 책임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저의 아이들이 아직 지혜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은 저의 아이들은 초상집에 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5절,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 지혜와 어리석음을 판단하는 또 다른 기준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책망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책망하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자신을 책망하는 말을 달게 들을 줄 압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고 노래를 대신 좋아합니다. 여기서 노래란 ‘아첨하는 말’ ‘듣기 좋은 말’입니다. 왜 책망을 합니까?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래에 귀가 익으면 죄에 대해 둔감해집니다. 듣기 좋은 말만 경청하다가보니 복음의 소리에는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칭찬하는 말을 듣기 좋아합니까? 아니면 책망하는 말을 듣기 좋아합니까? 지혜가 없는 어릴 적에는 칭찬하는 말을 듣기 좋아합니다. 그런데 좀 더 삶을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나이가 되면 누군가 나에게 제대로 된 책망을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친구는 얼굴을 보고 책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6절,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첨하면서 내리는 평가는 실제적으로 내게 주는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혜자는 우매자의 평가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면 어떻게 됩니까?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는 날카롭게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소리는 시끄러운데 밥이 되지 않습니다. 밥이 되려면 열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빛과 소리는 요란하게 내지만 열을 결코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속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말은 많은데 일은 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말은 그럴듯해도 전혀 실속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의 칭찬을 들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것에 마음을 둘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금방 칭찬과 아부를 했다가도 금방 비방과 비난을 일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 때 우매자가 하는 평가를 마음으로 무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지 못해 피곤해하며 속상해하는 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히12:3참조)
7절, “탐욕이 지혜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지혜의 또 다른 기준은 뇌물, 공짜, 불로소득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입니다. 지혜자가 멀리해야 할 것은 우매자의 칭찬(우매자의 웃음소리)뿐만 아니라 탐욕과 뇌물도 포함됩니다. 탐욕(extortion)이란 무엇입니까? “억지로 청구하여 뜯어내다” 혹은 “빼앗아 가지다” “강탈하다”는 뜻입니다. 지혜자가 ‘강탈하면’ 바로 우매자가 되어버립니다. 뇌물이 무엇입니까? 대가성 선물입니다. 대가를 바라보고 요구하거나 혹은 대가를 바라보고 주는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 영안이 즉시 어두워집니다. 대가성 물질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불로소득을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공짜로 준다고 하면 장사진을 이루는 것을 쉽게 보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지혜를 잃어버리기 쉬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원수 마귀는 온 세상을 향하여 손쉽게 성공할 수 있고,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함으로 의인들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쉽게 타락시키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공짜와 뇌물로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시작이 반입니다. 그러나 끝은 전부입니다. 시작하고 끝내지 못하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끝을 볼 생각이 없이 시작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지혜자는 시작보다 끝을 더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끝보다는 시작을 먼저 생각합니다. 어떻게 끝낼 것인가? 보다는 일단 시작부터 합니다. 끝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어리석다는 이유는 시작만 생각하고 끝낼 줄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을 가지려면 결과를 확신하기 전까지는 시작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지혜자는 교만한 마음을 멀리합니다. 참는 마음보다 교만한 마음을 품는 것이 우매자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교만한 마음보다 참는 마음을 선택합니다. 끝을 보려면 참고 인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끝을 보기 전에는 신앙의 길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왕 믿음의 길에 들어선 이상 우리는 끝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혜입니다. 지혜는 끝을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이러한 눈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끝을 바라보고 해야 합니다. 시작할 때는 항상 끝을 그리면서 해야 합니다.
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지혜의 또 기준은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입니다. 특히 분노란 감정을 다루는 것이 지혜의 척도입니다. 지혜자는 조급한 마음을 멀리합니다. 조급한 마음의 결과는 분노와 혈기입니다. 혈기를 터뜨리는 이유는 조급한 마음 때문입니다. 조급한 마음은 지혜자가 멀리해야 할 마음입니다. 지혜자가 되려면 언제나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급해서 되어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급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참된 일은 언제나 참고 견디는 가운데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분노란 감정을 잘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혜란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지식입니다.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지혜의 또 다른 기준은 사고방식입니다. 긍정적 사고방식과 부정적 사고방식, 그리고 과거지향적 사고방식, 그리고 미래지향적 사고방식 중에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지혜자는 과거지향적인 사고방식을 멀리합니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는 말은 현재를 바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말입니다. “왕년에는...”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현재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애굽에 있었을 때가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난날을 잊어버리고”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추억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추억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지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현재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미래에 나아가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바라봅니다. 지금 상황에 충실한 사람은 과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지금 게으른 사람이 과거를 자랑합니다. 내적치유에 있어서 문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도록 하지 못하고, 과거 상처에만 몰두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공한 기업이 망하는 근본 원인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란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과거의 그 철학, 과거의 그 경영방식, 과거의 그 사람, 과거에 성공한 그 방식, 등에 집착하면 망합니다. 변화무쌍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려면 언제나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실제로 청년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아직 새파랗게 어린데 옛날 운운한다면 아직 어리석은 할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의 사고방식은 어떻습니까?
11절, “지혜는 유산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지혜는 후손에게 물려줄 유업(inheritance) 중에서 단연 최고입니다. ‘햇빛을 보는 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에게 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지혜만큼 유익을 주는 것도 없습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지혜는 무엇과 무엇을 비교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아는 능력입니다. 일종의 가치관과 같습니다. 분명한 가치관에 입각한 선택능력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란 이것과 저것 중에서 선택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하나님의 기한과 목적을 아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용하는 능력입니다. 지혜자는 그래서 이것과 저것을 비교해보고 어느 것이 최선의 가치가 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12절,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지혜가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지혜는 보호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가진 자의 생명을 보호해줍니다. 반면, 돈은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지혜를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지혜와 지식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지혜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적용(사용)하여 영혼의 유익,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이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식은 지혜의 기반이 됩니다. 지식이 있다고 반드시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이 지혜가 없습니다. 분별하려면 사물의 내제된 가치(하나님의 기한과 목적)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3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그러므로 지혜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마음을 둡니다. 가장 중요한 지식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은 지식 중에서 교과서입니다. 그것에 마음을 두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절대적이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도전할 수 있어도 결코 하나님의 일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순응하고 따라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일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곧게 하신 일을 사람이 굽게 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하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곧게 하신 일을 굽게 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을 잘 알아야 하며, 그것에 맞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은 마치 거대한 강물의 흐름과 같아서 그 흐름에 거슬러서 헤엄치는 것이 매우 피곤한 것이며, 오히려 그 흐름에 따라 헤엄치는 것이 즐거운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일에 역행하거나 반역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굽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죄악으로 휘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본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삶의 만족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이 곧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의롭다고 하신 인생을 누가 정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신 인생은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의롭다 선언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과 판단보다 더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지혜자는 언제나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기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이 곤고하게 하셨기 때문에 지혜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생각에 잠깁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내일 일을 헤아려 알 수 없도록 하나님은 인생의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서 하나님을 경외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쁠 때는 슬플 때를 슬플 때는 기쁜 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처음에 저는 분명한 가치기준을 정립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임의대로 만든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5절,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여기서 중요한 말은 “내 헛된 날”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잠시잠간의 삶이란 말입니다. 전도자는 우리가 살면서 목격하는 부조리는 매우 헛된 날, 매우 일시적인 삶 속에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잠시 살면서 우리는 이상한 일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인이 의롭게 사는데도 망하고 악인이 잘못하는데도 잘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짓을 다 하는데도 반드시 망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헛된 날’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대충 살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합리는 지극히 짧은 삶의 시간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 경점과 같다는 것을 알 때에 세상을 살면서 보게 되는 이러한 일들을 보고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16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어떤 의와 선의 기준을 정해놓고서 자기가 정한 기준대로 사는 것이 반드시 의인이 되는 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과 생각대로 올바르게 산다고 다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것”과 “지나치게 악인이 되는 것은 자기 기준에 철저하게 사는 독선과 고집으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혜자는 자기기준이 분명하고 가치기준이 명확하지만 그러나 지나친 독선과 아집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17절,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전도자는 세상에서 타협하면서 적당하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기준을 정해놓고 그것을 절대시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극단은 서로 통하는 법입니다. 지나친 의인이나 지나친 악인은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똑같이 자기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만든 잣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참 지혜는 이러한 극단을 피하는 능력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는 중용의 능력입니다. 가치기준이 분명하지만 지혜자는 고집이 세지 않고 유연합니다. 지혜는 중용의 길을 가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극단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용의 길을 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8절,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적당히 의인이 되고, 적당히 악인 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기준에 철저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중용의 도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 이 극단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기준을 삼는 자는 극단적인 의인과 극단적인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의인이나 극단적인 악인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지혜는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항상 기준으로 정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늘 내세우므로 지혜자는 고집과 독선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화를 내고 혈기를 터뜨리는 자는 대부분 자기 기준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혜에 대해서 논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지혜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유능한 서퍼와 같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거대한 파도를 타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파도를 거슬러 힘들게 헤엄치며 살아갑니까? 우리는 성경적인 가치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기준, 내 방식, 내 논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 세상은 결코 지혜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처세술로 이해합니다. 요령으로 이해합니다. 지혜란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성경적인 가치관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가치기준이며, 이러한 기준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반드시 얻어야 합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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