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악인들은 계속 나타나는가?
본문: 전8:9-17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왕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걱정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면 삶은 혼돈과 염려로 가득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전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가는 인생만큼 행복하고 또 안전한 삶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영적 권위에 이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고 싶은데 우리의 발목을 잡아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모순들’입니다. 세상에 많은 모순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일종의 어떤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모순된 일들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살 필요가 없다’라고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러한 거짓메시지를 던집니다. 모순 많은 세상은 우리에게 “이래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텐가?” “이래도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살텐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우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끊임없이 던져대는 이러한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하면 세상의 목소리에 지고 말게 될 것입니다.
9절,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지금까지 전도자는 권위를 인정하고 권위에 순종하는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권위를 인정하고 권위에 대해 순응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 즉 삶의 중대한 모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전도자는 지금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요, 지혜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세히 관찰해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권위에 순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세상을 살려고 할 때 한 가지 큰 장애물을 만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면서 학대하고 상처를 주고 해롭게 하는 일을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를 잘못 사용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 때문에 사람은 참된 권위에 순종하면서 살기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데 가장 큰 장애는 거짓이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이비들이 진리를 찾아나서는 순례자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잘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이 권위를 잘못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권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권위주의자들의 등장 때문에 참된 권위가 손상을 입는 것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0절,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살지 않아도 평안하게 잘 살고 잘 죽더라는 것입니다. “장사 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다”는 말은 평안하게 살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위를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학대한 권위자들은 죽은 뒤에 사람들에게 잊혀져갑니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또 다시 반복됩니다. 악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악인들이 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과연 사는 것이 최선인가를 회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방관하시고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며 해롭게 하는 데도 하나님은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과연 권위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가 라고 자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심판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 때 쉽게 낙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잘 되게 하시고 의로운 자를 상 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없습니까?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배웠지만 정작 세상에서 살려고 하다 보니 모순을 발견하고 의심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최선일까요?
11절,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신속하게 뒤따른다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신속하게 실행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권위에 순종하는 삶을 떠나 세상과 타협하며 용감하게 악을 행하게 되면서 양심은 점점 굳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양심을 버리면 믿음에 있어서 파선하게 된다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심판이 시행되는 것을 보면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행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의 양심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면서 보게 되고 겪게 되는 이 모순을 우리가 어떻게든 극복해야만 우리는 지혜자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징벌과 상급이 신속히 실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실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임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더디게 보인다고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재판장이셔서 반드시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내리십니다. 지혜자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심판을 늦추시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신속히 심판을 내리신다면 인간은 스스로 죄를 멀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심판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버리지 못하고 단지 징벌이 두려워서 그렇게 한다면 사람은 징벌과 상급에 대한 책임을 적절하게 지울 수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재판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뜸을 들이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지 여부를 하나님이 알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12절,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먼저 전도자는 죄인이 자기 마음껏 악을 행하면서도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잘 되고 성공하고 자기 뜻대로 형통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라고 또한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참고 견디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령이나 운으로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을 따라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따라 살아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잘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은 헛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13절,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악인이 잘 되는데도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일까요? 첫째, 악인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악인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잘 되는 것처럼 보일뿐이지 실제로는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악인의 성공과 행복은 매우 일시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악인에게는 참된 영생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장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악인의 마음에는 결코 기쁨과 만족이 없습니다. 겉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은 온갖 두려움과 고통이 가득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내면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깃들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장수하거니와”라고 했지만 13절에서는 “장수하지 못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은 겉으로 볼 때 장수하는 것같이 보인다는 말이고, 13절에는 진정으로 그들은 장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들의 날은 그림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잘 되고 장수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전혀 삶의 의미와 목적도 없이 헛된 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알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생의 목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면서 피해를 주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잘 되고 형통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인 것은 사실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버리기로 작정한 인생은 그가 자기 생각대로 잘 되는 것을 내버려두십니다. 잠시 동안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구하기로 작정한 인생은 그가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할 때에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냐면 영원히 죄 가운데서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기로 작정하신 세상의 악인들은 유기하시는 반면 구하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고 간섭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생각으로 전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이라는 광야학교에 입학시키십니다. 고난이 없이 복락도 없기 때문입니다. 연단이 없이 훌륭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이 되려면 후계자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죄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위한 목적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그래서 고난이 아니라 연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고난이 아니라 연단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심판과 징계의 차이입니다. 징계는 바로 축복을 위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내 동기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단입니다. 따라서 참된 축복은 언제나 고난을 통과한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베풀어주시기 위해 먼저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고난을 많이 겪은 만큼, 영광의 상급도 커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의 날수대로 하나님은 기쁜 날수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크게 징계하는 법입니다. 귀한 그릇일수록 강하게 단련하는 것입니다. 큰 상급을 주시려는 사람은 크게 연단을 받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환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오히려 인내하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이유입니다.
14절,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자는 세상에 이러한 ‘모순’이 많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는데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는 것이나, 자기 마음대로 악하게 살았어도 의인처럼 대접받고 사는 일들은 분명 세상에 흔한 모순입니다. 전도자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모순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이런 헛된 일(모순)은 당연하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순에 실족해서 구도자의 길, 진리를 찾아 떠나는 길을 중도 하차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도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5절,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이렇게 세상은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곳에서 우리가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최선의 삶일까요?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러한 모순을 보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순이 가득 찬 세상에서 어느 정도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순이 가득 찬 세상에서 수고하고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만 하는 학교처럼 세상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광야학교인 셈입니다. 전도자가 하는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필수과정이라면 기뻐하면서 감당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입니다. 악인이 형통할 때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선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악인이 억울하게 죽더라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16절,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수고하면서 밤낮으로 마음의 평안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보면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수고하면서도 마음에 평안도 기쁨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낙심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더 실패한 인생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15절에서 수고하면서 기뻐하는 것을 칭찬한 다음 16절에서 어떻게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즉, ‘수고하면서도 밤낮 기쁨도 없는 자들’을 한번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를 여행해보면 우리만큼 복 받은 나라가 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식견을 넓히기 바랍니다. 독서를 다양하게 하기 바랍니다. 저는 인생의 의미를 알려면 아프리카를 여행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못하고 고난과 편견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굶주린 영혼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어진 삶의 환경 속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보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마십시오. 다른 나라에 한 번이라도 여행해보셨다면 결코 그런 말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살기 좋은 나라가 또 있을까요? 저는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 살기 좋은 곳이라구요? 그러면 미국에 이민을 간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정말 살기 좋은 나라인지 물어보십시오. 왜 이민을 간 사람들이 다시 역이민을 하는지 아십니까? 살기 힘들어서 다른 나라로 갔는데 가서 살아보니 한국이 좋은지 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크게 보면 오늘 우리가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17절,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이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무지와 무능에 대해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곧 자신의 무지와 무능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는 아이러니컬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잠30:2-4절 참조) 지혜자가 안다고 말할지라도 자신은 사실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자신의 지식이 아니라 무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혜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낙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비결이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거나 하나님의 때와 심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예기간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모순을 바라볼 때 우리는 반응을 잘 해야 합니다. 순응하는 부류가 되거나 혹은 방황하는 부류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프로테스탄트가 되어야 합니다. 휩쓸려 떠내려가거나 혹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푯대를 향해 일정한 속도로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많은 모순들이 우리로 하여금 방향을 놓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많은 모순들을 보면서 우리는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신념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참된 목표와 방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방향이며 의미이며 푯대가 되십니다. 오늘 전도자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을 마음에 새깁시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이라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잘 사는 사람들의 잘 됨은 헛된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그들의 환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갈 때 기뻐하고 자족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관찰해보십시오. 힘들고 어렵게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무순한 군상들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진정으로 행복한 줄 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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