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혜로운 마음을 가졌는가?
본문: 전8:1-8
저는 7장에서 전도자는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지혜자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지혜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분별하며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1-13절) 이러한 지혜를 가진 사람을 보면 삶의 기준을 분명히 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기준을 정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기준에 철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지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의인과 극단적인 악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 두 길은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15-18절)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죄의 보편성을 알아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19-29절) 내 안에 근본적으로 뒤틀리고 왜곡된 부분이 있음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보고 판단하는 것이 항상 올바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8장에 들어와서 전도자는 지혜자가 되려면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5절) 그리고 때와 심판에 대해 알고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6-8절) 그리고 현실에서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9-13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현실의 모순을 바라보고 불평하지 말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지혜자가 되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14-17) 전도자는 1-8절에서 지혜자가 되는 길로서 권위에 순종함에 대해서 말한 다음, 9-17절에서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는 모순과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과 대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8장 전체를 단락별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 지혜자의 길
➀1-3: 지혜자가 되려면 왕 앞에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1: 지혜자가 되는 것이 최고다.
2,3: 권위에 대한 두 가지 적절한 태도를 가져라.
➁4-8: 그 이유
4,6: 그 말에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5: 화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심판을 생각한다.)
7: 장래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기의 문제에 있어 사람은 무지함)
8: 생기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문제에 있어 사람은 무능함)
9-17: 모순해결의 길
➂9-13: 지혜자가 되려면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9,10: 현실의 모순
11-13: 모순에 대한 반응
➃14-17: 최선의 삶, 지혜자의 삶은 무엇인가?
14: 헛된 세상
15: 기쁨과 만족의 중요성
16: 헛된 수고
17: 지혜자는 곧 자신의 무지를 발견한 사람이다.
지난 주에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문제, 특히 죄문제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지혜자가 되려면 먼저 권위를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절,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는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지식은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이요, 지혜는 사물의 본질(하나님이 정하신 기한과 목적)에 맞게 잘 사용(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삶에 대한 통찰력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이 살 수 있는가? 인생의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 등에 관련된 경험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학을 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반면 신학공부를 많이 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인터넷 정보화시대입니다. 인터넷은 정보화 시대의 아이콘이며 정보들의 바다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시간을 소비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정작 유용한 정보는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저 보편적인 상식에 머무를 뿐입니다. 그리고 정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학생들은 옛날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고 분주한데 실력은 옛날보다 못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시험이 끝났는데도 놀지도 못하고 또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도 실력은 늘기는커녕 줄어들고 있습니다. 서울대 입학생의 경우 수학실력이 10년 전보다 훨씬 떨어져있다는 교수님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보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분석하고 응용할 수 있으려면 경험이 필요한데 요즘 학생들은 경험할 틈이 없습니다. 즉, 지혜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혜보다는 물질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혜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경험된 정보를 평가하고 응용하는 능력, 쉽게 말해서 삶에 대한 통찰력, 삶의 가치와 목적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 정립인 것입니다.
지금 전도자는 지혜자가 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밝히 깨닫고 그것을 설명하고 가르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오늘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이 지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어치가 있습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 얼굴부터가 다릅니다. 지혜는 지혜를 가진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은 지혜야말로 사람을 가장 능력 있게 해주는 것이란 뜻입니다. 삶에 대한 통찰력과 삶의 가치와 목적과 방향에 대해 분명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그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여유가 있습니다. 멀리 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 어릴 적에 [맥가이버]란 TV드라마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훤히 꿰뚫고 있어서 그것을 어려운 상황마다 적절하게 잘 적용해나가는 모습은 언제나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문제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의 얼굴은 지혜로 항상 빛나고 있었고 보는 나에게 존경심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안과 초조, 근심과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왜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의 얼굴을 사납다고 했습니까? 불안과 두려움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가장 근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벤 에플렉이 주연한 [Sum of all Fears]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었고, 두려움 때문에 핵무기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파괴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피해를 입히는 죄를 짓습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 두려움이 남을 해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같이 지혜가 없는 사람은 상황 자체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 얼굴은 긴장과 사나움으로 나타나는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만나도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은 지혜로 빛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근심으로 어두워져있습니까?
2절,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지혜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앞서 7장에서 전도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밝히면서 죄의 보편성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이제 8장에서 들어와서 전도자는 권위자를 인정하고 그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모든 종류의 권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이 권위의 원천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왕의 왕이십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또한 세상 지도자일 수 있고 또 성경말씀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권위 있는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알려면 그가 어떤 체험을 했는가를 보지 말고 그가 얼마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생각과 판단이 권위입니까? 아니면 내 경험이 나의 권위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의 특징은 반항적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권위로 삼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기 때문에 늘 상처를 받기 잘합니다. 여기서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권위를 인정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권위에 복종하기를 힘들어한다고 말합니다. 주로 청년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인 사람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권위를 인정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하나님이 권위를 주신 사람도 인정해야 합니다. 권위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다면 하위 권위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내가 얼마나 인정하느냐? 나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 내가 인정하는 권위는 무엇이냐? 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3절,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전도자는 계속해서 권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권위 앞에서는 신중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조급하게 행동하거나 다분히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디면 권위를 대항하게 되어 화를 도리어 자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급함과 성급함은 권위를 대항하는 것으로서 지혜자가 단연 멀리해야 할 성품들입니다. 왕 앞에서 신하가 급하게 물러나는 것은 스스로의 명을 단축시키는 자살행위인 것입니다. 그것은 반역에 가까운 일입니다. 왕이 반역의 음모를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내려주신 모든 종류의 하위권위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악한 것을 반복해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왕은 하고자 마음먹은 일을 하나도 실패하지 않고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암시해주는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급거히 행동한 사람을 벌하기로 작정하신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똑똑하고 힘이 있어도 그 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하만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왕이 한번 벌하기로 마음을 정하니까 하만은 자신이 세운 나무에 자신이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할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고자 하는 일을 다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인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지혜의 근본입니다.
4절,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임금이 한번 내린 명령은 취소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변경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자가 되려면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를 지혜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이는 말씀을 읽지 않는데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신 것을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 아래 자신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은 무엇입니까? “나는 나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한 것을 이루려고 왔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의 권위 아래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으로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고난의 잔을 받기 전에 기도하시기를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그리고 기쁘고 온전하게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십자가는 핵심 중에 핵심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요즘 교회들마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그러나 진짜 영성이란 신비한 체험이나 현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기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5절,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은 벌을 받을 것에 대해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걱정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재앙과 진노를 피하려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근심과 염려에서 해방되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요즘같이 어렵다고들 하는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살면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 근심과 염려가 나를 사로잡습니까? 내 뜻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을 이루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은 실패와 불행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의 사고방식에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심판을 항상 생각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언제나 ‘때’와 ‘심판’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대로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명령은 등불이요 빛입니다. 명령을 따라가면 결코 방황하거나 헤매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생각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나의 뜻대로 살아갑니까? 명령을 따라 살아갑시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복된 삶입니다.
6절,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3장에서 카이로스와 심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염두에 둡니다. 지혜자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두 기둥이 바로 카이로스와 심판에 대한 지식입니다. 지혜자가 ‘때’와 ‘심판’에 대해 마음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화를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재앙을 당하는 이유는 때와 심판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때와 심판에 대해 알고 있다면 제일 안전한 길이 곧 명령대로 행하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종은 결코 두려움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때와 심판에 대해 무지한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다가 결국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때와 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고 전혀 무능합니다. 사람은 때에 대해 무지하고 심판에 대해 무능합니다. 따라서 지혜자는 자신의 무지와 무능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결국 패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7절, “사람이 장래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전도자는 사람이 때에 관해서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장래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장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 가르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유명한 점집이 많은 미아리 고개를 가보세요. 제가 사는 동네만 해도 점집이 10군데가 넘습니다. 그들이 점을 잘 친다면 왜 자신들의 집은 판잣집입니까? 그들이 점을 잘 친다면 직접 주식이나 복권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거짓말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장래 일을 알거나 또는 가르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인생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내일 일을 자랑하면서 다닙니다. “내일 나는 무엇을 하리라”고 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악한 것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야고보서 참조)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주의 듯이면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카이로스와 심판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8절,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개역성경에는 ‘바람’이 아니라 ‘생기’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어떻게 번역을 하든 이뜻은 사람은 자기 생명에 대해서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에 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심판에 관해서도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사람은 무능합니다. 언제 출생하고 언제 죽을지에 대해서 사람은 결정할 능력이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자처할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시는 사항입니다. 지금까지 전도자는 지혜자가 되려면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깨닫게 되면 권위를 인정하고 권위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최선의 삶이라는 것을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2절부터 8절까지 요약하자면 이것입니다: 지혜자가 되려면 권위를 인정하고 권위에 순응해야 하는데 사람이 권위에 대항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읽은 본문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지혜를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유일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할 줄 압니다. 이렇게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태도에 있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대조적입니다. 삶을 크게 보는 사람은 그 얼굴에 빛이 납니다. 삶의 가치와 목적과 방향을 하나님 안에서 정립한 사람은 그 삶에 빛이 납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사람의 얼굴은 사납습니다. 문제와 상황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지혜는 문제와 상황이 아닌 다른 곳을 쳐다봅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는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입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상황과 문제에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그러나 지혜로은 사람은 전혀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지혜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삶의 목적과 가치와 방향에 대해 분명하게 정립하셨습니까?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내가 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문제나 상황에만 집중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상황에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염려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염려에서 벗어나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권위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권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인생이 될 때 모든 염려와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사는 인생,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영적 권위를 가진 인생입니다. 우리가 근심하며 염려하는 이유는 영적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영적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들어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아래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 권위를 가진 인생은 상황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상황을 묵상하면 반드시 낙심하게 되고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면 기쁨과 평강과 여유가 찾아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여러분은 표류하는 인생이 될 수도 있고,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십시오. 그것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안전한 생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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