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전도서강해(15)-누가 미래를 알 수 있는가?(9:1-12)

등불지기 2012. 3. 7. 18:12

 

 

누가 미래를 알 수 있는가?

 

본문: 전9:1-12

 

 

전도자는 8장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삶, 즉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이 최선인데,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모순들을 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모순들을 보면서 우리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그런데 전도자는 처음부터 삶의 의미란 이런 저런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근본적인 삶의 불확실성, 삶의 한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삶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언급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전도자의 간접적인 교훈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심각한 회의론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삶의 불확실성에 충격을 받고 치우치지 않도록 그래서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몇 가지 장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전도서 9장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① 1절: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8장의 연속) / 불확실한 미래

② 2-6: 확실한 죽음의 문제

③ 7-10: 최선의 문제 / 살아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④ 11,12: 불확실한 삶의 문제

⑤ 13-10장 1절: 지혜의 한계와 불완전성 / 불확실한 지혜

 

 

9장의 구조를 잘 보면, 전도자는 우선 인간의 한계를 계속적으로 증명하는데 주력합니다. 때와 상황에 관하여 인간은 무지하며 또한 무능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미래를 알 수도 없고, 미래를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특별히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무지와 무능은 절정에 달합니다. 그런 다음 회의론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삶을 향유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7-10절) 그러나 또 다시 인간은 “어차피 죽을 인생 먹고 마시고 삶을 즐기자”라고 하는 쾌락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전도자는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면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최선입니까? 이에 대해서 전도자는 또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의 한계성, 불완전성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결국 인간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절,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사람은 내일에 대해서 모릅니다. 아니 5분 후를 알지 못합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넥스트]는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생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단지 5분 후에 일어날 일만 아는 주인공이 겪는 에피소드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실제는 5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내일 사랑을 받을지 혹은 미움을 받을지 사람이 결정하지 못합니다. 지금 내가 시작한 사업이 내일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사람이 오늘 결정하지 못합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이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면 어리석음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일 일을 내가 지금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는 내일 일을 자랑하고 다닙니다. 내일 내가 무엇을 할 것이다! 라고 공포하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이렇게 내일에 대한 태도에서 극명하게 구분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혜가 있습니까?

 

 

2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아마도 확실한 것은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일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본문에서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나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죽습니다. 죽음은 확실합니다. 사람은 내일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대게 젊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빨리 인정할수록 좋습니다. 죽음이란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를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3절,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사람이 다 죽습니다. 죽음이란 병은 인생이 겪는 가장 고약하고 악한 질병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음의 바이러스를 몸에 지닌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건강에 좋다면 지구 끝까지 갈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광우병 파동을 잘 보세요. 한국 사람들이 먹는 문제에 얼마나 민감한지 잘 보여줍니다. 외국에서 보면 한국 사람들은 정말 유별난 족속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음식점에 가면 안내하는 분들이 한국인 고객에게는 “이것은 미국산이 아니라 호주산입니다.”라고 말을 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건강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면서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왜 직시하지 못하는 걸까요?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면서도 불행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하는 걸까요? 악한 마음을 가득 품고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죽는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죽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은 분리를 뜻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입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면서 낙원에서 안식하거나, 심판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음부에서 고뇌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운명을 이 땅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현세의 삶이 곧 내세의 삶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래서 전도자는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야 합니다. 죽으면 더 이상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들 말하여도 지금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크나큰 기회입니다. 살아 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기회요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찬송했던 것입니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사요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큰 기쁨 넘치네”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큰 희열을 느껴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음에 큰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5절,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기회일까요? 잘 죽을 기회입니다. 내세를 선택할 기회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기회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미 기회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산 자들은 상을 얻을 기회가 있지만 죽은 자들은 상을 얻을 기회가 없습니다.

 

 

6절,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있느니라.”

죽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 예배드리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한국에는 추도예배라는 이상한 흐름이 있습니다. 죽은 조상의 사진을 모셔놓고 그 앞에 음식상을 차린 후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도예배는 없습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죽은 자들을 위해서는 이미 돌아갈 몫이 영원히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 예배드리십시오. 살아 있음이란 기회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하십시오. 죽은 자들을 위해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7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전도자는 7절부터 이 문제에 관해서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자 합니다. 첫째, 전도자는 긍정적으로 살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살아가는 근본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술을 마셔도 된다고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술에 대해서 단호하게 가르칩니다. 술은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술은 마음이 상한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슨 음식이든 목적에 따라 사용하면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사용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살아갈 때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낙관적으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똑 같은 삶을 사는데도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보다는 낙천적으로 사는 사람이 더 낫습니다. 여기 컵에 물이 반쯤 차 있습니다. 부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말합니다. “물이 반밖에 없네!” 그러나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이 반이나 있네!” 삶의 태도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긍정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기회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음이 이미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기뻐해야 할 일도 많은데 왜 굳이 슬퍼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사랑해야 할 사람도 많은데 왜 굳이 미워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기쁨을 누릴 일이 많은데 굳 이 슬픔을 찾아다닐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두 번째로, 전도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신을 단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라는 말은 자신을 단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단정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까 대충 먹고 대충 입고 대충 살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기회이기 때문에 삶을 느끼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살아 있음을 누리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은 그 삶이 규모가 있습니다. 그 삶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 삶에 단정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음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의 특징은 아무렇게나 살아갑니다.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하라.”는 전도자의 가르침은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면서 살라는 뜻이 아니라 살맛나는 인생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삶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셋째로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전도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삶은 매우 짧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는 삶이란 뜻입니다. 의미가 없다는 뜻에서 헛되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짧고 순간적이기 때문에 헛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주신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과 아이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헛될 날을 살고 있음을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짧은 인생동안 사랑하며 살도록 하십니다. 언약을 통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사람에게 집중하십시오.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하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10절,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넷째로,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 전도자는 최선을 다하여 일하라고 권면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우리는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일 자체를 즐기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일이 주어졌을 때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여야 합니다. 근면과 성실이란 성품,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결코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일하지 않고 잘 살 수 없다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더 이상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올’이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무덤을 뜻합니다. 즉, 죽은 자에게는 노동과 수고가 더 이상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자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낮에는 수고하나 쉴 때도 오겠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이 오리라.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대로 힘써 일하라.(찬330)

 

 

 

11절,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해서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전도자는 다시 균형을 잡기 위해서 삶의 한계를 다시 설정하고 있습니다.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며 일할지라도 삶의 변수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를 잘 아실 것입니다. 먼저 출발하고 빨리 달린다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남이 빨리 달린다고 결코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같이 공부했던 분인데 지금은 5,000명이나 모이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저에게 조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빨리 달린다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힘이 세다고 경기에서 다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힘이 없다고 좌절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승리의 관건은 내 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또 지혜가 있다고 더 잘 먹는 것도 아닙니다. 더 똑똑하다고 돈을 더 만이 버는 것도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더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면 때와 기회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근면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수들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결국 전도자는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다른 친구가 나보다 빨리 갑니다. 저만치 앞서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조급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페이스를 잃어버리면 레이스를 놓쳐버립니다. 왜냐면 어느 누구도 자기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언제 어떻게 순위가 바뀔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재앙이라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걸려드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상황이 닥쳤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건강을 자랑하시는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암 판정을 받고 병원 신세를 지다가 죽는 경우를 종종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불확실함 속에 살아갑니다. 이럴 때 최선의 삶은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첫째,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사십시오. 둘째, 자신의 삶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화려하게 꾸미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규모있고 질서 있는 삶, 그래서 살아있음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투자하십시오. 자신을 단정하게 꾸미십시오. 그래서 살아있음을 느껴보십시오. 나이가 들수록 옷을 화려하게 입는 경향이 있습니다. 살아있음을 느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화려함과 사치는 금물입니다. 오히려 추하게 보일뿐입니다. 그러나 적절하게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삶을 멋있게 살도록 하십시오. 셋째,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십시오. 무엇보다 사랑하면서 사십시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하라고 주신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면서 살 때 참된 즐거움을 맛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그 즐거움을 알 것입니다. 요즘 경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푸는 사람은 더 베푼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분들은 베풂으로써 얻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즐거움을 알고 있습니까? 넷째, 근면 성실하게 사십시오.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것 자체를 즐겨야 합니다. 일하지 않고 손쉽게 부자될 수 있다는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땀흘리지 않고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을 거절하십시오. 땀흘리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적당하게 노동하면서 즐겁게 사는 삶이 더 낫습니다. 마지막으로 삶의 변수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하고 늘 겸손하게 사십시오. 그러면서 삶이 곧 기회임을 기억하고 삶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내게 큰 기회를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삶 이후의 삶을 준비하십시오. 잘 죽을 준비를 하십시오. 내세를 준비하십시오. 영원한 삶을 준비하십시오. 지금의 삶은 다음의 삶을 결정하는 기회임을 기억하십시오. 현세의 삶은 내세의 삶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가장 큰 기회를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