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다고 사랑받는가?
본문: 전9:13-18
계속해서 우리는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처음부터 쭉 인생의 한계에 대해서 말해오고 있습니다. 왜냐면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때만 비로소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한계들을 열거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전도자는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중간 중간 최선의 삶에 대해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한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최선이 무엇입니까? 위기의 때 가장 지혜로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살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하는 모순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모순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지혜의 한계입니다. 지혜는 성공하는데 유익하지만 지혜가 있다고 무조건 사랑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은 지혜가 있다고 해서 자신에게 임하는 재난의 때를 알거나 혹은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자신에게 언제 어떻게 재앙이 닥칠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래는 불투명하며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전도자가 이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까닭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움은 겸손함이 더해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겸손함이란 인생의 근본적인 한계를 잘 알고 인정할 줄 아는 지식입니다. 인생의 한계를 아는 지식이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지혜의 또 다른 불확실성, 또는 한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지혜에 대한 사람들의 부당한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지혜가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지혜를 가진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13절,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전도자는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관찰하다가 깜짝 놀라게 된 것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혜가 정말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로 지혜의 덕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은 지혜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고 또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지혜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인기있는 배우나 권력가나 재력가입니다. 사람들은 지혜자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머리 나쁜 배우나 재력가를 실제적으로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모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듣게 됩니다. 지혜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로도 헤아리지 못하는 어떤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10장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교리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심각성을 아는 것이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죄의 성격과 심각성에 대해서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전도자처럼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14절,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먼저 전도자는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반적인 비유로 말합니다. 어느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작다는 말은 힘이 없고 약하다는 뜻이겠지요. 전쟁을 할만한 군사들도 없고 무기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은 마을을 집어 삼키려고 어떤 강력한 임금이 와서 그 마을을 에워싸게 되었습니다. 그 작고 힘없는 마을은 그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함락되기 일보 직전입니다. 이 얼마나 위기일발의 상황입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마치 이런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라고 다들 말합니다. 신문이나 T.V와 같은 매스컴을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영웅은 난세에서 난다고 했듯이 이런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를 가진 한 사람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시면 바울을 죄수로 태우고 가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나 침몰하기 일보 직전에 있었던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가 아니라 수 백 명의 생명을 살리는 영웅으로 등장시키십니다. 바울이 그렇게 쓰임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에게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절망적이라고 탄식하며 삶의 희망을 포기하려는 순간에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사명을 다 마치기까지 너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다들 죽을 것이라고 아우성치는 이 수많은 생명들을 네가 구원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지금 난파될 위기에 처한 배와 같이 오늘 우리 사회와 민족의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칼이나 창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았던 한 사람을 통해 수 백 명의 생명을 구원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한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사람의 의인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15절,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런데 그 위기에 처한 성읍을 구원하기 위해 등장한 지혜자는 가난했습니다. 그의 지혜로 그 절체절명의 마을을 강력한 군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혜를 가진 사람이 가난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지혜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의 신분과 처지가 가난했기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지금 세상은 자신들의 어려움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한 사람의 지혜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자를 기대하는 세상은 가난한 지혜자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의 존재를 쉽게 망각해버립니다. 위기만 지나가버리면 지혜의 가치는 금방 잊혀집니다. 여러분, 여기에 무서운 죄성이 있습니다. 지혜의 중요성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지혜를 무시합니다. 필요할 때만 찾을 뿐 실제로는 지혜를 찾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지혜보다는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황이 왜 우리에게 왔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물질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경제불황은 언제나 물질숭배의 결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과도하게 빚을 내어서 성장과 확장을 도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IMF위기가 찾아온 것이 10년 전입니다. 위기의 때 한국인들이 얼마나 뭉쳤습니까? 금반지도 패물도 팔았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지나가버리자 한국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IMF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IMF를 언제 겪었느냐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IMF가 지나가버리자 IMF의 교훈을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경제난을 헤쳐나가기 위해 다들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지혜자를 잊어버린 마을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일단 위기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지혜자는 잊혀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정체입니다. 세상은 결코 지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리석음을 더 좋아합니다.
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전도자는 이러한 경우를 보면서 중요한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선은 지혜의 가치입니다. 지혜는 힘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그 어떤 군사력보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의 무서운 영향력에 대해서도 전도자는 깨닫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지혜자의 말을 듣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지혜보다는 물질을 더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의 속성 때문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는 것입니다. 내가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전도하고 싶은데 그들이 나의 말을 멸시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가난한 자의 지혜를 세상은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가난하면 영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은 사업을 할 때 크고 좋은 차를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면 소형차를 타고 다니면서 바이어를 만나면 바이어들이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은 전셋집을 살더라도 일단 자동차만큼은 외제차를 몰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소형차를 타고 호텔에 가면 호텔직원이 대신 주차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소형차와 사람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이 얼마나 큰 가에 따라서 자기 신분을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작은 집에 사는 아이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세상이란 곳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자기 남편이 대대장이라고 자신도 대대장 행세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빨리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세상적인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싸워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2:1-4)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중대한 죄가 됩니다. 왜냐면 주님은 우리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겉으로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렇게 외모로 판단하며 사람을 차별하는 곳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에 옷과 사람을 잘 구별하여야 합니다. 겉모양과 속사람을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혹은 그가 가진 것으로 그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17절,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전도자는 지혜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인간 지혜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 판단합니다. 세상은 위기를 만났을 때 지혜자의 등장을 원합니다. 그리고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지혜의 덕을 보면서도 정작 위기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지혜로운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멸시합니다. 가난한 자의 말에는 권위와 신뢰를 두지 않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지혜를 존중히 여기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은 단지 돈과 물질을 사랑하는 곳입니다. 지혜가 아니라 물질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곳입니다. 세상은 물질을 숭배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것은 물질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돈과 권력과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지혜는 아무리 힘이 없어보일지라도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조용히 들이는 지혜자들의 말들”은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가 힘이 없어 보입니다. 지혜가 매우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지혜는 매우 강력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호령”보다 더 영향력이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없는 것처럼 존재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치적인 힘과 파워를 가져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교회는 아무리 힘이 없어보일지라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서머나 교회를 보십시오. 가난하고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 때문에 서머나 도시는 진정으로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겉으로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친구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조심하십시오. 겉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은 속이 비어 있습니다. 진정으로 속이 찬 인생은 겉치장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내면에 자신감이 없으니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외모를 꾸밈으로써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을 진정으로 가꿀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18절,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전도자는 다시 한 번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무기보다 낫습니다. 지혜는 그 어떤 강력한 힘보다 영향력이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물질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죄의 심각성에 대한 것입니다. 작은 죄가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혜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인 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써 왕국을 확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었지만 그 아들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이 그 모든 업적을 무너뜨린 것을 보십시오. 지혜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합니다. 그러나 죄는 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지혜가 무엇인지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지혜는 죄의 심각성을 아는 지식입니다. 지혜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죄성은 우리 안에 견고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 있는 파괴력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지혜의 결함이 여기 있습니다. 세상의 위기를 해결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지만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혜의 영향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죄의 영향력입니다. 많은 지혜자보다 무서운 것이 한 사람의 죄인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10장 1절,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하느니라.”
앞에서 전도자가 말한 것을 비유적으로 한 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향기로운 기름 한 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파리 시체가 전체 기름통을 냄새가 진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의 파괴력을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죄가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죄는 이처럼 강력한 오염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은 우매가 많은 지혜와 존귀를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지혜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우리는 죄성의 파괴력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지혜의 영향력보다 죄의 파괴력은 훨씬 더 전염성과 오염도가 심각합니다. 지혜자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러한 파괴적인 본성에 대해서 잘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찬양하면서 나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신 까닭이 여기 있었습니다. 죽는 데까지도 함께 가겠다고 큰 소리 쳤던 제자들의 말을 듣고 즐거워하지 않으신 까닭이 여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아셨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2:23-25)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죄성 때문에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울부짖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울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 때문에 깊이 탄식하였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안에 있는 죄성에 대해서 이처럼 울부짖게 될 때에야 비로소 복음이 복음이 되고 실제적인 능력이 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지혜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지혜로와서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한다고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지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물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곧 죄사함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을 치장할 줄 아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은혜의 날개로 덮어주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아래 자신을 숨길 줄 아는 인생,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인생, 그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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