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본문: 전10:2-11
전도자는 이제까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모순과 허무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 모든 모순의 원인은 죄의 파괴력에서 비롯된다고 9장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오염력과 지혜의 영향력은 마치 향기로운 기름통에 떨어진 파리 시체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모순의 원인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전도자는 강변합니다.(2절) 그리고 지혜자의 마음과 우매자의 마음은 너무도 달라서 우매자가 흉내를 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흉내를 낸다고 할지라도 실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우매함을 스스로 자랑하고 다닐 것입니다. 전도자는 10장에서도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다음에 지혜자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10장에서 전도자는 세상의 모순 중에서 지도자(권세를 가진 자,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신 자)의 어리석음과 잘못 때문에 생기는 모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0장 전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①2,3: 모순의 근본 원인: 어리석은 마음
②4: 모순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 - 공순
③5-7: 지도자의 잘못으로 인한 모순의 예
④8,9: 모순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 - 자업자득
⑤10,11: 모순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 - 준비
⑥12-14: 모순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 - 말
⑦15: 모순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 - 삶의 목적
⑧16,17: 망할 나라 & 복 받을 나라의 비교
⑨18-20: 원인: 나태, 부정부패, 왕에 대한 저주
10장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도자는 모든 모순이 어리석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특별히 불의한 주권자에 대해서 분노하게 될 때에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말고 냉정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전도자는 지도자의 잘못으로 인한 모순이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예를 든 다음 이러한 모순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두 나라의 그림을 그려주면서 모순을 줄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들을 제시하면서 10장을 마무리합니다.
2절,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전도자는 이 모든 세상의 모순들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평행선과 같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다.”는 표현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가장 적절한 비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힘과 의지로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리석은 자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이 책을 많이 보고 학식을 많이 쌓는다고 지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혜로운 자가 되는 걸까요? 그것은 위로부터 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본성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그분 안에 들어가는 것은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 은총은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말씀하신 것을 믿는 자에게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축복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하며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3절,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전도자는 죄성을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은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길에 행할 때에도”라는 표현은 행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어리석음은 삶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어리석음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자랑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우매한 지를 만인에게 알립니다. 이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 속에 은연중에 자신의 불신과 미련함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내년에 나는 이런 장사를 해서 돈을 벌겠다고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음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어리석음은 이처럼 철저하게 무지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다니는 어린아이들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단이나 사이비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기만당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나 어리석음은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이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내가 회개해야 할 죄가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죄는 철저하게 자신을 가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가 죄인지도 모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조차 알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히려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랑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이 세상의 수많은 모순들을 만들어냅니다.
4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받게 하느니라.”
전도자는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주권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의 모순들은 주권자의 어리석음에서 만들어진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순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는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권위자가 가지고 있는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권위자(ruler)가 자신이 받은 권위를 잘못 사용할 때에 사람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오직 사람만이 가능한 것인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가기 위해 지음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은 다른 모든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감정(emotion)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왜냐면 감정(emotion)은 행동(motion)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energy)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감정을 죄악시하지 마십시오. 감정은 축복입니다. 사람이 감정을 무시하고 억압하게 되면 감정이 꺼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아는데 행동이 안 되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무기력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이유가 감정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에 정직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64: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은 사실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는 에너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분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내 영혼이 본성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감정이 생겼을 때 내가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급하게 행동하지 말라.”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분노는 행동을 과격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가인의 행동을 보세요. 가인은 동생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절감이 동생에 대한 분노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에게 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라고, 그래서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미리 말씀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결국 감정을 다스리기보다는 감정에 이끌려서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맙니다. 가인의 충동적인 행동은 결국 피를 흘리는 범죄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거절감으로 생긴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낳는 원인입니다. 모든 감정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성적으로 알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입니다. 왜냐면 내 영혼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처리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감정이 생겼을 때 조급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네 자리를 떠난다.”는 표현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가인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떠나 빈들에서 아우를 쳐 죽였습니다. 이러한 감정이 생겼을 때 우리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어떤 자리일까요?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자는 ‘공손함’(calmness)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잠잠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감정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제대로 처리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이 생겼다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공손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까?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감정이 생겼을 때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가인처럼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해버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절감으로 분노가 일어납니까? 격한 감정이 속에서 끓어오릅니까? 권위자로부터 받은 부당함에 화가 납니까? 불의한 권위구조에 대해 화가 치밀어 오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어보십시오. 모든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처리하기로 결심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하나님, 왜 내 안에 이러한 감정이 일어납니까? 나는 참기 힘듭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면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에 대해서, 공평하지 못하게 대우받는다는 느낌으로 격한 감정이 일어날 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고, 결국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출발하였지만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었고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5절,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
사실 많은 모순이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위임 받은 사람이 그 받은 권위를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같은 사회학자는 구조적인 모순을 이야기합니다. 개인이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한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조적인 모순은 권위자들의 허물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권위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그들이 받은 권위는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은 권위를 자기 멋대로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면 권위자들이 권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은 오늘 전도자가 말하는 대로 ‘재난’이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 받은 권위를 잘못 사용할 때 그 공동체는 재난을 겪게 됩니다. 특히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 권위를 갖게 될 때 그가 속한 공동체는 재난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독재자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러한 재난을 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을 가진 자가 권위자가 될 때 공동체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어리석은 권위자는 자신이 가진 권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위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심판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 참된 지식이 없습니다. 세상은 이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이것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는 권위를 가진 사람,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성경을 가까이 하고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하신 것은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지도자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 비로소 참된 권위가 될 수 있습니다.
6절, “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전도자는 대표적인 모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높은 지위를 얻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높은 권위를 얻는 일은 재난입니다. 또한 부자들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면 이것 역시 재난입니다. 가진 자들은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노블리스 노블리제’라는 말은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느 사회건 가진 사람이 그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가진 사람이 자기가 속한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 사회가 불의한 사회란 뜻입니다. 부자들이 존경을 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멸시를 받는다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우리는 가진 자들이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높은 권력을 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줄 아는 사람이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우매한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없도록 제재하는, 그리고 부자들이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7절, “또 내가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종들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전도자는 계속해서 사회적 모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들이 말을 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종은 종답게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고관들은 고관들처럼 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종이 고관행세를 하고, 고관들이 종의 행세를 하는 것이 모순입니다. 최근 우리는 종들이 말을 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열심히 땀 흘리며 노동해야 할 사람들이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학생들이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있습니다. 땀 흘리며 살아야 할 청년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호황하며 살아갑니다. 베짱이처럼 살아갑니다. 확실히 이것은 모순입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합니다. 노동자는 노동자다워야 합니다. 반면 존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사람들이 종처럼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천사같이 대접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선교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그분은 정말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정말 복음이 한 번도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 종족을 품고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진짜 선교사이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을 후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너무나도 힘들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모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모순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들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8절,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그러면 이러한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전도자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로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자업자득이란 말입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자업자득의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해야 할 청년이 외제차를 굴리고 다니며 놀고만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자업자득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를 기억해야 합니다. 추운 겨울이 오고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날 그들은 탄식하며 땅을 치면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행위로서 잘 되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면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을 헌다는 말은 부당한 방법으로 자기의 지경을 확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볼 때 자업자득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뱀에게 물리게 되어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방법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사람은 결국 뱀에게 물릴 것입니다.
9절,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불의한 방법으로 잘 되는 경우 반드시 그 행위대로 갚아주실 분이십니다. “돌들을 떠내는 자”는 집을 건축하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기가 사는 집을 건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만큼 희생과 수고가 따를 것입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렇게 성공하기까지 그들이 치어야 할 대가를 보십시오. 가정을 희생하고, 자녀를 희생하고, 자기 건강을 희생하고서 얻은 것입니다.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공을 향해 몸부림치면 칠수록 그만큼 위험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공했다고 인정받는다면 성공에 대한 후유증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불의한 세상 속에서 참고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10절,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전도자는 자신을 준비시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그것을 “무디어진 철 연장”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베려고 하는데 도끼나 톱의 날이 서 있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힘이 많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지혜는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 있는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방향은 방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보다는 올바른 방향을 먼저 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학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열심히 공부하는데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날이 무디어있지 않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날을 점검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투입한 공부의 양만큼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면 습관의 문제를 점검해야 합니다. 공부는 습관입니다. 올바른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적은 양으로도 최적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습관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또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공부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내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공부하는 이유를 아는 것은 마치 날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하고 있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런 부분이 없습니까? 열심히 하는데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답답하고 힘들어하는 부분이 없습니까? 날을 갈아야 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갈 때 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혜롭게 살라고 전도자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무작정 열심히 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방향이 방법보다 중요합니다. 목표가 방법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가치가 효과보다 앞서야 합니다. 힘보다 지혜가 훨씬 중요합니다. 열심보다 습관이 더 중요합니다. 투입한 양에 기대한 결과가 적습니까? 능률은 오르지 않고 힘이 듭니까? 그렇다면 일단 멈추어 서십시오. 그리고 생각하십시오. 지금 나의 날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점검하십시오. 시간을 내어서 날을 세우십시오. 그것이 훨씬 더 시간을 버는 비결입니다.
11절, “주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며 술객은 소용이 없느니라.”
미리 준비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입니다. 지혜는 미리 준비할 줄 아는 지식입니다. 대비할 줄 아는 지식입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미리 미리 대비하면서 사십시오. 그런 상황을 만날 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럴 때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불의한 세상을 볼 때 비판하거나 방황하지 말고,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개혁해나갈 것인지 미리 준비하십시오. 대비할 때 대처능력이 생깁니다. 미리 대비한 사람만이 돌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처음 자동차 운전 면허증을 취득할 때 돌발 상황이 있습니다. 갑자기 적신호가 들어오는 코스가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간 감점을 당합니다. 운전할 때도 그렇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갈 때에 항상 발을 브레이크 위에 올려두어야 합니다. 도로 가에 정차한 차를 지날 때에는 어린 아이가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평소에 기도하고 평소에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삶의 적신호가 켜졌을 때 잘 대처하게 해주는 능력이 됩니다. 학교시험은 벼락치기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시험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합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모순이란 덫에 내가 걸려들지 모릅니다. 특히 청년의 때에 기도하십시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껏 취해보십시오. 성령에 취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를 헤엄쳐보십시오. 양궁장에 선 선수들이 과녁을 향해 시위를 겨눕니다. 대충 눈짐작으로 시위를 날리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방향을 잡기 위해 뜸을 들이는 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젊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온 몸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모순들을 보면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모든 모순들이 왜 생겨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성 때문에 고민할 줄 아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경험되는 그 모든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서 처리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모든 감정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감정이 생겼을 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하나님 앞에서 해결받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머물러 하나님을 기다릴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 안에 모순을 바라보고 분노하게 되는 순간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권위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권위자들이 그 권위를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업자득의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뿌린 대로 반드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준비하여야 합니다. 베짱이처럼 살지 맙시다. 우리는 개미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우리를 인도하여주시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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