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II
본문: 전10:12-20
계속해서 우리는 모순 많은 세상, 불의로 가득 찬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한 번 요약해봅시다. 왜 이러한 고약한 구조가 생겨나는 걸까요? 전도자에 의하면 모든 삶의 모순이 생겨나는 근본 원인은 마음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혹시 마음의 변화보다 삶의 변화, 환경이나 상황의 변화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변화가 급선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지혜는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나의 태도를 바꾸는 능력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상황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서 찾는 능력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모순을 바라볼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불의한 것에 대해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특히 잘못된 권위자들에게 대해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그럴 때 전도자는 냉정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냉정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을 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순에 대한 대처방법으로 자업자득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원리를 가지고 부모님과 직장의 상사에게 적용해보십시오. 불의한 권위자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장차 행하실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분노에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판단하기 보다는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순에 대한 대처방법으로 준비의 원리를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볼 때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입니다. 오늘은 모순에 대한 또 다른 대처방법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혀와 관련이 있습니다.
12절,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모순에 대해 잘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혀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혀의 권세를 잘 알아야 하고 잘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언어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을 때 그 권세는 바로 말의 권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만드셨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은 말로써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세상에서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영향을 주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세상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진리를 알지 못하게 끊임없이 거짓말로 유혹하는 거짓 영의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언어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잠언을 꼭 읽어보십시오. 잠언은 특히 말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지혜란 바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지식입니다. 때와 목적에 맞게 혀를 사용할 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나,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말의 영향력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자가 왜 말의 영향력을 강조하겠습니까? 권위를 행사할 때 말로써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잘 사용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어찌 보면 언어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지혜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말로써 알 수 있습니다. “지혜자의 말은 은혜롭지만, 어리석은 자의 말은 자신을 해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 말로써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말로써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까지 해롭게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모순들이 발생하는 원인에는 언어의 영향력이 가히 절대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는 법, 은혜롭게 말하는 법, 사람을 살리는 언어, 격려하는 언어, 상황과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이것을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술에 관한 책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혜의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인 것입니다.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은 매우 위험한 능력입니다. 사단이 이것을 원하는 자들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생명을 주는 언어입니다. 오늘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필수과목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말하기”란 제목의 강의입니다. 하나님처럼 말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대변자, 하나님의 스피커가 되는 법을 배우십시오.
13절,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어리석은 자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매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시작은 우매요, 끝은 심히 미친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나름대로는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인데도 결국은 어리석음이요 파괴적이며 미친 소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화술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령으로서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첨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에 무엇을 쌓아놓았느냐를 결정해야합니다. 주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쌓은 것에서 나는 것이 입술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평소 마음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어떤 말을 하느냐를 결정짓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리 좋은 동기로 말할지라도 그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련한 말입니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말은 결코 어떤 공식이나 요령으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말은 지혜로운 마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죄악을 해결하지 못한 인생이 어떻게 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내 말이 은혜로운 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점에서 파는 화술에 대한 책을 읽고 말하는 법을 배우려고 한다면 곧 좌절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러한 책들은 결코 내 마음의 어리석음까지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밖에는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면 인생의 마음에 가득한 죄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성경만이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14절,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이 많다는 것은 가치 없는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를 태울 때 소리는 요란하지만 결코 밥을 지을 정도의 열은 내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의 말은 요란하면서 실제로는 선한 영향력이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실수도 많은 법입니다. 성경은 듣기는 자주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말합니다. 저같이 설교하는 사람은 실수할 가능성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습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는 잘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전도자는 내일 일에 대해서 함부로 자랑하는 말을 주의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어리석은 자는 내일 일에 대해서 자랑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무조건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미덕이 아닙니다. 진리는 많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말들입니다. 장래 일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자랑하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면 이것을 할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내일 일에 대해서 결코 떠벌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가져야 할 말하기 원칙입니다.
15절, “우매한 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 그들은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그 다음으로 전도자는 모순에 대한 올바른 대처방법으로서 삶의 목적을 정립하는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수고하면서 자신을 피곤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자들은 땀 흘려 수고하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이 말씀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피곤함을 느끼는가? 아니면 보람을 느끼는가? 만약 어떤 일을 하면서 자신을 피곤하게 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잠간 멈추어 서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방향이 잘못 되지 않는지?’ ‘혹시 목표를 잘못 정한 것은 아닌지?’ 라고 말입니다. 피곤하다는 것은 방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혹은 이유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이유나 방향이 분명하다면 공부하는 것은 결코 피곤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의미가 없이 하는 일에 피곤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피곤하다는 것은 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쉬면서 새롭게 의미와 방향을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노는 것과 창조적으로 쉬는 것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는 일에 피곤함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의미 상실은 피곤의 원인임을 기억하십시오. 무슨 일이든 목적과 방향이 없이 하면 피곤이 몰려옵니다. 내가 하는 일들의 의미와 의의와 목적을 분명히 알수록 우리는 일하면서 더 힘이 날 것입니다. 반대로 일하면서 피곤해지는 것은 의미와 목적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다시금 목적과 방향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곤을 느낄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 방을 내가 청소하고 치운다고 생각해봅시다. 남이 나에게 시켜서 한다고 생각하면 방을 치우면서도 우리는 따분하고 피곤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 방에 사랑하는 애인이 곧 찾아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내 방을 내가 치우는 것이 신나고 즐거울 것입니다. 만일 교회 마당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싫어하는 담배를 누가 여기 떨어뜨렸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영광의 주님이 지나가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혹은 주님이 내게 그 일을 하라고 부탁하셨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렇다면 그 일이 불평할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존경하는 분이 그런 하찮은 일을 내게 부탁하시다니 라고 생각하면서 황공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삶의 방향과 의미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피곤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을 쓰면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즐거움보다는 피곤함을 더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 이 일을 누구보다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을 하든 주님께 하듯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힘들게 종을 울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은 피곤을 느끼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읍은 안정을 뜻합니다. ‘성읍에 들어간다’는 말은 어리석은 자는 쉴 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안정을 얻지 못하고 계속 불안해 한다는 뜻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정서적인 특징은 안정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방향이 없기 때문에 늘 방황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든 목적과 방향을 바로 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리석은 자는 의미를 발견할 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곤함을 느끼면서도 계속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방향을 정하십시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효과보다는 먼저 의미를 정하십시오. 분명한 의의와 목적을 정하십시오. 내가 하는 일에 내가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큰 의의와 의미를 부여한다면 나는 그 일로 말미암아 큰 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지혜롭게 하십시오. 그것은 요령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의의와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임하라는 것입니다.
16절,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자, 이제 전도자는 이러한 지혜와 어리석음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사회와 국가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망할 나라의 모습과 복 받을 나라의 모습을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망할 나라의 모습부터 봅시다. “왕은 어리고”란 말은 경험이 없는 권위자를 뜻합니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연륜이 있어야 합니다. 의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연륜이 짧다는 말은 자신이 가진 권위를 미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경험과 경륜이 짧은 사람이 높은 권위를 차지하는 것은 그 사회가 매우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또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는 무슨 뜻일까요? 왕을 모시고 나라를 다스릴 대신들이 아침부터 잔치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신들이 즐기는 것을 먼저 하는 것은 나라가 망할 조짐입니다. 그 나라의 건강함은 그 나라의 공무원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무원들 가운데 부정부패가 없으면 그 나라는 건강합니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뇌물과 쾌락을 일삼으면 그 나라는 급속도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가세가 기울어지는 징조가 보입니까?
17절,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반면에 복을 받을 나라, 잘 되는 나라를 생각해봅시다.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란 말은 준비된 지도자를 뜻합니다. 귀족들은 자기 아들들을 어릴 적부터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훈련을 정상적으로 밟은 가운데 왕이 된 사람의 나라와 그렇지 못하고 반역이나 무력을 통해 왕이 된 사람의 나라는 다릅니다. 그리고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는 말은 쾌락이나 즐기는 것이 아니라 때와 상황을 잘 판단할 줄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즐기기 위해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하기 위해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음식을 먹느냐는 중요합니다. 어리석음은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일하기 위해 음식을 먹을 줄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목적과 의미를 어떤 것으로 정하느냐를 보면 그 나라가 망할 것인지 아니면 흥할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다스리는 자들이 오랜 경륜을 통해 준비된 인물인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된 인물인지, 그리고 권위자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공무원들이 어떤 목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는지를 잘 보십시오. 잘 되는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의 특징은 무슨 일을 하든 때와 목적에 맞게 할 줄 아는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하에 모든 일에 때와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목적에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18절,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전도자는 게으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면 부지런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면 사람이나 국가나 할 것 없이 게을러집니다. 방향과 의미와 목적 상실이 게으름이란 못된 성품을 낳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게으름이란 고약한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게으름에게 붙잡히게 되면 쇠약해집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게으름이란 열쇠가 쥐고 있습니다. 게으름은 망할 징조입니다. 게으름이란 운에 맡기는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게으름이란 요행주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겠지’란 생각으로 대충 사는 것입니다. ‘어쩌다 보면 축복이 굴러들어오겠지’란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심지도 않은데서 거둘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심는가를 눈여겨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는 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열매가 나오도록 하셨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불평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심는 자에게 최대의 적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른 농부는 먹을 것을 거두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이 거둘 것을 소망하여도 안 됩니다. 우리는 농부들입니다. 이러한 게으름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인이 경계해야 할 최대의 적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타락시키기 위해 핍박이란 무기보다는 게으름이란 무기를 사용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비결은 방향과 목적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방향을 잊어버리면 방황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 원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게으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입니다. 성품이 게으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언제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특징은 부지런하고 성실했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북이스라엘을 위해 드고아의 농부를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암1:1) 예수님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난 후 그물을 씻던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게으름은 일종의 사고방식입니다. 방향의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것입니다. 방향이 없기 때문에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일종의 요행주의입니다. 운을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심지 않아도 거둘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복권공화국입니다. 로또가 유행하는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음과 게으름은 동전의 앞뒤면과 같습니다. 그 둘은 아주 절친한 죽마고우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게으름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모든 일의 기한과 목적을 알기에 부지런합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19절,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무엇보다 우리는 부정부패를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적을 잘 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존재하는가?’ ‘이것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항상 목적을 점검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여러 가지 목적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해 베푸는 것’입니다. 잔치는 기쁨을 공유하는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을 삶에 의욕을 잃어버리고 낙심에 빠진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잘못되면 어떻게 됩니까? 술이 사람을 망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술은 마음이 슬픈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 목적을 잘못 정하면 인생을 망치는 것이 됩니다. ‘돈은 범사에 이용된다.’고 했습니다. 돈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정직한 돈이 되기도 하고 부정한 돈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전도자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잔치나 술이나 돈은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지혜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20절,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언행심사를 조심하고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신중한 것입니다. 지혜는 경솔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자기 말에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입니다. 겉으로 존경하는 말을 하더라도 주님은 그 마음의 태도를 눈여겨보십니다. 왜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면 안 될까요? 왕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위자가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우리는 권위를 보호해야 하며 권위자와 싸우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보여준 태도를 보십시오. 사울이 까닭 없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란 이유만으로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마도 심중에라도 사울을 저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권위자에 대한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가진 자를 저주하는 것은 많이 가지게 한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다른 사람 뒤에서 하는 말을 조심하십시오. 특히 권위자에 대해서 은밀하게 하는 말에 대해서 조심하십시오. 설령 그 권위자가 사울왕과 같이 잘못 되었다 할지라도 권위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을 하나님은 무척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 경외한다면 권위자가 아무리 악하다고 할지라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그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쉽게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내가 하는 모든 은밀한 말들을 다 듣고 계시며 판단하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듣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듣고 계십니다! 지혜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줄 아는 지식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탓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심으로 남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항상 은혜로 채울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 일에 대해서 자랑하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게으름을 멀리해야 합니다. 게으름과 어리석음은 서로 친한 친구입니다. 게으름은 개인과 공동체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일의 목적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곤해지면 반드시 멈추어 서서 생각해야 합니다. 목적을 점검해야 합니다. 의미와 의의를 분별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왜 이 일을 하는 거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나는 누구를 위해 이것을 하는 거지?’ 지혜는 방법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방향에 관한 지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방법에 대한 지식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점에는 그런 방법들을 소개하는 책들이 인기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요령입니다. 우리는 요령이 아니라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지혜는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지혜는 마음에 관한 지식입니다. 지혜는 태도와 관점을 교정해줍니다. 지혜는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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