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전도서강해(21)-사람의 본분은 무엇인가?(12:9-14)

등불지기 2012. 3. 7. 18:32

 

선교지에 나오기 전 협동목사로 섬겼던 교회에서 전했던 전도서 설교입니다.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설교본문은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그리고 아가서입니다.

특히 전도서 말씀은 비전을 찾아 방황하는 고민 많은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저 역시 선교지에 있으면서도 청년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가끔은 제 전도서 설교를 다시 읽어보면서 마음을 추스리기도 합니다.

말과 경주해야 할 사람이 사람과 경주하느라 피곤한 분들이 있다면 부족한 제 설교원고를 통해 새 힘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등불 선교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아프리카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

 

사람의 본분은 무엇인가?

 

본문: 전12:9-14

 

지난 시간에는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청년의 때는 기회의 때입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회를 살려야 합니다. 기회를 허비하는 것은 마치 과녁을 보지 않고 아무데나 화살을 날려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9, 10절,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창조자는 숨어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찾아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전도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계시가 필요합니다. 다른 종교는 계시에 의지하기보다는 행위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노력과 열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할 때 그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그때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사람이 만든 하나님의 개념일 것입니다.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제시하신 방법을 신뢰해야 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인격적으로 계시하여주신 바가 바로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선언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나서 교제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도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말씀을 믿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앙도 계시의존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그 어떤 수로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11절,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우선은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채찍과 같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왜냐면 말씀은 우리의 교만과 잘못된 고집과 틀어지고 왜곡된 사고방식과 이기적인 태도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우리 속에 있는 뒤틀려진 부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큰 아픔입니다.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진리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마음속에 박히면 결코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박힐 때 그 고통이 싫어서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러나 일단 말씀이 박힌 인생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인생이 됩니다. 가장 확실한 신앙은 말씀을 통해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은 어떤 시련과 역경에서도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잘 박힌 못”과 같이 견고합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 진리를 찾아온 부자 청년이 결국 진리를 포기하고 돌아 가버린 것처럼 왜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쉽게 기독교 신앙을 포기합니까? 그것은 “잘 박힌 못”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헛된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교회생활을 할 수는 있겠지만 견고한 신앙생활은 할 수 없습니다.

 

12절,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주는 경고의 교훈을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 내게 아픔을 준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힘들고 아픕니다. 일그러진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픔은 즐거이 감수해야만 합니다. 만약 이것이 싫어서 다른 책을 짓거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오히려 피곤할 뿐입니다. 책을 짓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경계를 받는 괴로움을 회피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내가 성경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성경이 나를 파헤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는 즐거움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나를 파고드는 괴로움도 경험해야 합니다. 책을 짓는 것은 지식입니다. 그러나 경계를 받는 것은 지혜입니다. 지식보다 지혜가 더 중요합니다. 또 많이 공부하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지혜는 훈계와 책망과 바르게 교정당하는 아픔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식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맡은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교정받아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책망을 달게 들음으로써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필요한 것을 공부하고 있습니까? 최고의 과목인 성경공부를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말씀을 연구하는 즐거움을 넘어 말씀이 여러분을 찔러 쪼개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배우기를 힘써야 하는 것은 결코 지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인격과 삶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통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고통 없이 성장이 없습니다. 기존의 내가 변하는 것은 상당한 고통과 아픔을 동반합니다.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우리는 변화할 수 없습니다. 책을 짓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내 인격과 삶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란 칼과 방망이로 나의 인격과 모든 삶이 쪼개어지고 두드려지고 얻어맞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내가 많은 책을 읽고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제 전도서의 최종 결론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든 것입니다. 삶의 전부에 관한 것입니다. 전도자는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란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서든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 아래서 이 해답을 속 시원하게 가르쳐주는 곳은 어디에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이 해답은 밖에서 안으로 계시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다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듣지 않고 이 일의 결국에 도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삶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할 때 ‘본문’은 ‘모든 것’(all)이란 뜻입니다. 사람에게 전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1장부터 탐구하던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조이 도우슨 여사가 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훌륭한 책을 정독해보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식이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둘째, 내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전통과 습관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열심 때문에 하나님을 말씀을 결국 대적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내 생각과 내 방식을 고수하다가 결국 하나님과의 첫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주여, 저는 이만큼 주님을 위해 희생하면서 따랐으니 그런즉 나는 무엇을 얻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면서 따랐던 제자들도 그렇게 마음이 변질될 수 있다면 오늘 우리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명령과 아무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정이 만든 것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법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차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나의 유전을 지키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이 말해줍니다. 내 양심이 알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 마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유전을 지키는 것이라면 내 마음에는 하나님과 상급을 흥정하려는 동기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어느 부잣집에 돌쇠와 마당쇠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돌쇠를 불러서 고개를 넘어 이진사 댁에 갖다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돌쇠는 싱글벙글하면서 고개를 넘어 달려갔습니다. 돌쇠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주인이 마당쇠가 아닌 나에게 이런 심부름을 시켰다! 주인이 나를 마당쇠보다 더 신뢰하는 뜻이야!” 돌쇠가 즐거운 마음으로 힘든 심부름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면 우리 마음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신뢰를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울 것입니다. 신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내가 멋대로 만든 유전을 지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상급을 흥정하려고 할 것입니다. 내가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께 데모라도 할 태세를 갖출 것입니다. 저는 각자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발견하도록 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기쁨과 선하심이 충만하게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14절,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법대로 살았는지, 아닌지 여부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상과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숙제를 잘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고, 숙제를 엉터리로 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항상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전도서의 마지막 구절은 진리를 찾아 헤매는 모든 구도자들에게 좌우간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 한 절을 이렇게 확대해서 번역해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전도서를 여행했습니다. 전도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이 어디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절히 찾고자 하는 모든 구도자들이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신앙생활이란 구도자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거룩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고민하지 않는다면 안 됩니다. 왜냐면 세상은 그처럼 사악한 곳이며 불의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진리를 찾아 방황해보지 않는다면 진리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값비싼 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장사꾼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진주는 사실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개나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주를 발로 밟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아다닙니다. 복음은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진주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보배가 됩니다. 당나귀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이게 할 수는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배부른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죄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허울 좋은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전도서를 강해하면서 계속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입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한 태도! 바로 이것이 구도자의 자세입니다. 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구도자로서 살아갑시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을 잃어버리지 맙시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놓치지 맙시다. 목마른 자들과 배고픈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생수 그 자체이시며 떡 그 자체이십니다. 진리를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해답이십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한탄하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해 아래 새 것이 어디 있는가 고민하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새 것이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새 것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해보다 더 밝게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새로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움으로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