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성막론 강해(2)

등불지기 2012. 4. 4. 23:30

 

구약의 성막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성막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김광락 선교사 올림.

 

성막론(2)

성막, 그 외형적인 모습

본문:출21:1-14

 

오늘 새벽에는 성막의 전체적인 외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두가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이요, 또 하나는 성막도입니다. 출애굽기의 후반부의 구조는 바로 이 두가지를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출20-24장까지는 십계명에 대해서, 출25-40장까지는 성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는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십계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성막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말씀과 성령의 은혜라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은혜가 균형있게 임해야 우리는 균형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성막에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성막의 명칭에 대해서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성막은 여러 가지 명칭이 있는데, 하나님과 만나는 곳을 의미할 때 회막(레1:1;민1:1)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라고 의미할 때 성막(출27:21;26:1)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는 곳이라고 할 때 증거막(민17:7,8)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먼저 살펴볼 것은, 하나님께서 왜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까?

본문에 보니까, “이름을 두시려고”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지상에 두신다는 말은 그곳에서 자기 백성들과 만나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요17장에 예수님의 기도를 보시면 같은 의미가 반복됩니다. 즉,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만나고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 드러낸다, 전한다는 말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인격을 만난다는 말입니다. 출20:24절을 보시면, “...무릇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데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무데서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성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막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 이름을 성막에다 두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예수 이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줄 믿습니다. 왜냐면 천하에 예수 이름외에 다른 이름을 구원얻을 만한 이름으로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예수 안에서 살아곗니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어떻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까?

26:1을 읽어봅시다. (생략)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삼가 네게 보인 식양대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체적인 설계도를 그려보여주셨습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 설계도대로 성막을 지어야 한다고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우리가 맞추어야지 우리의 기준에 하나님을 맞추어서는 결코 열납되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식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예배해야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지 않습니까? 나납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하려고 했을 때 불이 나와서 그들을 태워죽였지 않습니까? 또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세요. 내뜻대로 드리는 제사는 아무리 정성들여도 열납되지 않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제사드릴때만 하나님께서 기쁘게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한번 보세요. 아무리 자기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도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거부하시고 철저하게 자기의를 거부하고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세리의 기도를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방식대로 예배합니까?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리 정성들여 기도해도 별 소용이 없을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할 하나님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이해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와 예배를 드릴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막의 전체적인 외관을 살펴봅시다.

첫째로, 성막은 흰 세마포에 둘려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세마포는 가로 100규빗(약45m), 세로 50규빗(약22.5m)의 울타리입니다. 이 세마포는 정결과 의로움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결함과 의로움’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금그릇이 되지 못했다고 열등감에 빠질때가 간혹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한 그릇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정결하지 못한 금그릇보다 정결한 나무그릇을 더 좋아하시고 더 크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마포 안에 있어야 ‘의’를 얻게 됩니다. 밖에서는 아무리 선행을 행해도 성막 ‘안’에 있지 않으면 의를 얻을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즐겨 표현한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말의 깊은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얼마나 착한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었느냐를 보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이 세마포로 된 울타리에는 문이 오직 한쪽에만 나 있습니다. 이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요10:7,9을 보시면,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4:6에서도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The Way)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받을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 외에는 다 사이비입니다. 이 길 외에는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영적세계에서도 영적절도와 강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받은 능력, 은혜, 축복, 물질, 사람, 환경,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다 사이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축복이야말로 참된 축복이요 은혜인줄 믿습니다.

 

성막의 전체적인 모습 두 번째로 성막은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있습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성막은 가로30규빗(13.5m), 세로10규빗(4.5m)의 크기입니다. 겉으로는 보잘것없이 보이는 매우 평범한 천막입니다. 거무스름한 해달가죽으로 덮여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그 화려함과 영광은 더해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해달가죽을 벗기면, 붉은 물들인 수양가죽이 나옵니다. 그리고 수양가죽을 벗기면 흰 염소털이 나옵니다.(앙장은 바로 커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주님은 별로 흠모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감추어진 영광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53:2절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고, 3절에도,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우리 주 예수님은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셨고 지금도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사람들 가운데서조차도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한국에 4만개가 넘는 교회가 있지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교회가 몇이나 될까요? 천만이 넘는 신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 몇이나 될까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분을 알면 알수록 그분은 더 아름다워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분은 더욱 존귀하게 되어지는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을 섬길수록 그분은 더욱더 존귀하신 분으로 내게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 같어이” 그렇습니다. 주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아, 예수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동정녀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은...등등’으로 함부로 쉽게 말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주님은 알면 알수록 더 신비하고, 알면 알수록 더 존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고백할겁니다.

 

적용해봅시다. 성막의 외관은 별로 보잘 것 없이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별로 귀히 여김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많은 신자들조차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새벽에 나온 저와 여러분은 누구보다 우리 주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자, 주님을 존귀하게 만들어드리는자,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이 지금 찾고 계십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죄를 위하여 고초당하셨네

십자가를 지심은 무슨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야 죽였네

피와같이 붉은죄 없는 이가 없네 십자가의 공로로 눈과 같이 되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