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많은 교회들이 건물도 있고 설교자도 있지만 여전히 복음에 관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본문을 연속적으로 설교하는 강해설교는 전무하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리훈련은 더욱 더 전무합니다.
한국교회는 그나마 낫다고 보이지만
교리적인 체계와 훈련을 위해 담임목사가 관심을 가지고 직접 헌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에는 관심이 있으나 교리훈련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자기 사람을 만들고, 교회의 외적 성장을 도모할 뿐
영적 성장에는 무관심하다는 증거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걸까요?
아프리카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보니 때로는 답답하여 참을 수 없습니다.
교리훈련에 관심이 없는 담임목회자와 교회들을 바라보면 다가오는 사나온 늑대의 공격에 어떻게 교회를 지킬 것인지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신학교에조차 이단이 들어가있고, 교회에서도 이단에서 파견된 사람이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현실에서 대안은 온 교회가 교리훈련을 강화하는 것뿐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구원이란 무엇인가?(2)
본문: 엡1:3-14
1. 우리의 구원이 어디쯤 와 있는가를 생각하라!
(1)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이미-그러나 아직” (already -- but not yet)
???????????????????????????????????? 오는 세상(하나님나라) ? ? ? ? ? ? ? ? ? ? ????????????????????????????? 이 세상(악과 고난의 세상) 초림 재림 D-day V-day ( * 2차 세계대전 때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날을 D-day라 일컫음 즉, D-day는 결정적인 승리를, V-day는 최종적인 승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
(2) 구원의 세 시제(tense): 과거(롬5:1; 9:1), 현재, 미래(살전1:10)
내가 구원을 받았고, 받고 있고,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그 영생은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있고, 앞으로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3)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무엇이 증명하는가? 성령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인생의 무가치와 허무감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평화와 앞을 바라보는 소망이 생긴다. 이 기쁨과 평화는 시련과 역경 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다른 종교도 이런 감정을 흉내 낼 수 있다. 성령은 구원의 첫 열매요 보증이다.(엡1:13,14)
2.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롬12:2절을 읽자.
(1)세상을 본받지 말라
세상은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로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주장하려는 의지라고 했다.)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살 때 세상에 동화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는 세상 시민이 아니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롬12-15장)
(2)복음에 합당하게 살라.
또 빌1:27절을 읽자. 이것은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말씀이다. 행16장에 의하면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고 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이 트라시아인드로부터 이 도시를 빼앗아 자기 이름을 붙였다. 나중에 로마 사람들이 그 도시를 재선해서 전쟁에 공이 있는 장교들을 정착시켰다고 한다. 빌립보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중에서도 특수한 식민지로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민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로마의 직할 식민지인 것이다. 이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합당하게 살라’는 말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직할 식민지인데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라는 말이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께 순종, 의존이라고 외치면서 실제로 의존하면서 살지 않는다. 하나님은 저 길로 가라고 하시는데 나는 다른 길로 가려고 한다. 내가 가려는 길에 하나님보고 도와달라고 하는 식이다. 이것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을 가면서 도와달라고 하여야 한다. 축복을 기뻐하는 순간 내 신앙은 썩어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내가 잘되려고 신앙생활하지 말라. 세상은 복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3)제자도를 실행하라.
이렇게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동조하지 않고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삶을 ‘제자도’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에 찾아오는 고난은 참 제자의 특징이다. 막8:34절을 읽자. 십자가를 날마다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주장하려는 옛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으로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부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빌2:5f.) 이 제자도가 중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처하며 살아야 한다.
(4)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라.
이 제자도를 실천하며 살 때 고난은 필수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의 부활의 새생명이 내 몸에 나타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후3:16; 4:10f.; 빌3:10)
(5)성령을 따라 살라.
성령을 따라 살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 복음의 원수는 육체의 욕심이다. 오직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추구하는 것만이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6)소망을 견고하게 붙잡으라.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믿음의 결국, 즉 구원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이 성화의 과정, 곧 십자가를 지고 옛 사람이 죽어가며 새로운 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이 종결되어질 것이다. 그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완전히 참여하게 되고(롬6:5)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영화이다. 이것이 구원의 미래이다. (빌3:20,21읽자) 우리가 지금 제자도를 실천하면서 고난을 감수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완전히 동참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사는 것은 고난을 각오해야 할 과정이다. 그러나 이 고난 없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자로서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3. 그러면 이제 이 구원을 예정론과 결부하여 살펴보자.
(1)우리는 예정론을 구원론의 마지막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논할 때 태초부터 논할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의 사건부터 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예정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예정은 위로가 아니라 불안하게 하는 교리가 될 것이다. 원래 예정론은 위로와 소망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와 종말의 중심이요 역사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이다.
(2)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없다면 구약성경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에서 시작하고 있다. 구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비추어볼 때 비로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예정을 이해하려면 역사의 중심인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지 않으면 도리어 더 어려운 철학적인 억측 속에 빠지는 것이다. 역사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지 않으면 예정교리는 잘못 오해되고 잘못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지 않으면 예정교리는 우리를 도리어 혼란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3)태초부터 시작하면 내가 예정을 입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하지 말고 믿음의 현재에서 시작하라. 지금 내가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시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는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 믿음이 어디서 오는가? 즉, 내가 믿는 순간에는 내가 믿음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믿음의 결단을 한 것 같으나 믿는 자가 되고 보니 나 같이 영적으로 눈이 먼 자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이며 그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4)그때 깨닫는 것이 이것이다. “아! 분명히 내가 믿기 전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성령께서 나에게 임하셔서 그의 은혜로 나의 먼 영안을 뜨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하고 그가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의 강퍅한 의지를 꺾어서 그에게 순종하게 하였구나!!” 내가 믿는 순간에는 내 의지로 그 복음을 받아들인 것 같은데 믿는 자가 되고 보니 나로 하여금 믿도록 성령께서 미리 역사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믿음 자체를 선물로 깨닫게 된다. .그러나 태초부터 시작하면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즉, 예정은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교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인 것이다. ‘나를 예정하셨다’는 고백은 부인할 수 없는 은혜의 감격에 대한 유일하게 이성적인 설명이다.
(5)요한복음 1장을 보면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나 어떤 사람들은 영접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자기들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영접하는 자는 영생으로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다. 내가 믿는 것으로 예정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그것으로 예정 받지 못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6)엡1장을 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했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예정된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은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여부를 모르나, 스스로 예정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자기들은 아직도 그리스도 밖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예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자신의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말이다.
(7)이와같이 예정론은 구원의 확신을 다른 식으로 신앙고백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할 때 이 예정론이 비로소 의미가 있고 위로가 되고 확신이 된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담은 신앙고백인 것이다.
(8)예정의 핵심은 나의 구원에 있어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처음부터 시작하셨다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님이 시작하셨다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끝까지 이루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교리적인 용어로 ‘견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예정하시고 견인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시고 나서는 내가 설령 넘어지고 잘못했다고 가차없이 박차는 것이 아니라 끝가지 나를 지탱하시고 나를 지키셔서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나를 지키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왜냐면 그분이 시작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가 해야 될 과제이다.
(9)내가 구원받은 일--그것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확신이 드는가? 아니면 내가 했다고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이 나를 예정하셨고 또 끝까지 나를 지키시리라는 확신도 가져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시작했다고 생각이 든다면 나는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0)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 그들은 한번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도 언제든지 구원을 잃어버릴 자유의지도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고백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그 예정에 의해 내가 전적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예정론이 없으면 믿음이 나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믿음이 사라지고 침체되면 구원을 잃어버리고 믿음이 좋으면 구원을 받게 된단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믿음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얼마나 불확실한가? 앞으로 다가올 환란에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지탱해 나갈 지 확신할 수 있는가?
(11)예정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정하셨다는 이 교리는 성경적이다. 예정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부인하는 것이며, 예정을 인정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시선을 맞추라는 권면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하라는 권면이다. 그분이 한번 하시고자 하면 이루신다고 믿으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 내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잡고 계시지 내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12)내가 앞으로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왜냐면 그분이 선한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빌1:6참조)
(13)제자도를 실천할 때 찾아오는 고난을 만날 때 이 예정론을 붙들라.(예정론을 주신 이유) 롬8:31-39절을 읽자.
(14)그러나 이 예정론이 우리를 게으르게 하지 않는다. 예정론은 더욱더 우리를 더욱더 하나님 중심으로 붙들어 매고 있다. 예정론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인내하면서 주의 길을 가게 해준다는 것이다.
(15)예정론 때문에 전도할 필요를 못 느낀다면 예정론을 주신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정론은 오히려 전도하게 만든다.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도전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것은 예정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거부하면 예정되지 않은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정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6)예정론 때문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정론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예정론은 더욱더 충성하게 해준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소중히 여길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17)히2:1-3절을 읽자.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으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며 살 수 있다. 그것은 구원을 취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받은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더 받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
4. 정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받은 은혜를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 *비유: 자전거, 피아노, 백과사전, 그릇 )
(2) 이미 들은 것을 간절히 삼가야 한다.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 비유: 애굽의 이스라엘, 광야의 이스라엘, 가나안의 이스라엘 )
(4) 받은 은혜를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계속 알아야 한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아야
(5) 히12:1,2절을 보라: 무거운 것과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경주를 경주해야 한다.
(6)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 *이같이 큰 구원 )
(7) 구원의 확신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구원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한다.
(8) 구원의 목적: 하나님을 찬양(감사, 예배)하는 삶,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삶,
(9) 성령에 민감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며, 주께서 맡기신 직분에 충성한다.
(10) 열심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1) 구원 그 이후 성화의 삶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12)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계속 추구하며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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