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은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만 적용되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막 거듭나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리고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다가 내면의 질서가 무너짐을 느끼며 '회복'을 바란다면
제 일련의 메시지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첫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기쁨과 즐거움으로 시작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처음 가졌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고민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원인은 [일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정체성 그리고 삶의 습관과 패턴] 때문입니다.
그것은 묵상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자 장애물입니다.
우선 영성회복은 묵상회복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오늘은 묵상에 있어서 성령께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묵상회복: 말씀의 안내자이신 성령
본문: 겔8:1-4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다 소경과 같아서 육신의 눈은 떠서 사물을 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보는 것이 사실인 양 우기지만 그러나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100독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소경인 것입니다. 그저 외모만 보는 사람, 자기 마음에 끌리는 대로 사람을 보는 사람은 다 소경인 것입니다. 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예수님은 묵상의 대가이셨습니다. 묵상을 떠나 예수님의 삶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대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대로 예수님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핵심이었고 원칙이셨습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오직 한 사람만 고치셨던 이유였습니다. 만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언제나 바라보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묵상은 바로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첫 걸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 그분을 경험하며 하나님 그분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 일을 하는 것,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그것을 말하는 것! 예, 그것이 진정 우리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합니까?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을 공부하십시오. 직장에서 근무합니까?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대로 일하십시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저는 이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묵상은 연습입니다. 처음부터 묵상이 잘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연습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갈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늘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상처를 한 번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노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려고 오셨기 때문에 상처받으신 일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이것이 묵상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을 통해 예수님을 조금씩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주목하는 것! 이것은 묵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다윗은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하나님 그분을 주목하였다는 것을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 전심으로 주목하였습니다. 다윗은 묵상을 연습하였기 때문에 전쟁터에서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묵상을 연습하면 바쁜 학교생활, 직장생활, 가정생활 속에서도 전심으로 하나님 그분을 주목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주목하는 일은 말씀을 읽을 때 해야 합니다. 말씀이 첫 단추입니다.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진정 소경입니다. 말씀묵상이 안 되면 다른 통로로 하나님을 결코 알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영광을 만나고 보는 것이 말씀묵상입니다. 그런데 제가 강조한 것은 이 말씀묵상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묵상이 되면 자연묵상, 삶의 묵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제 자신에게 늘 주의를 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놓쳐버리는 일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 보고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되 자신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무서운 함정인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속에 적용하는데 무지하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소위 Q.T를 하고 말씀을 가르친다고 할 때 빠지기 쉬운 교묘한 함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Q.T방”이 한 때 유행했습니다. Q.T를 나눌 때 오로지 자기문제만을 하소연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자기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씀을 적용하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결국 Q.T를 포기하는 사람도 종종 봅니다. 또 예를 들어 성경에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는 본문을 가지고 구했는데 주시지 않더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을 만나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철저하게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필요에 따라 구했는데 응답받지 못하니까 기도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구하라고 하셨는가? 구하라고 하실 때 하나님 그분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실패하고 구하기만 하다가 이러한 영적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러면 묵상이 무엇입니까? 내 눈을 오로지 하나님 그분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 그분의 마음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해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묵상은 내 삶에 필요한 것을 받기 위해 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만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마음이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 그분을 주목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고 반가운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당신의 영광과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다양한 채널을 다 활용해야 합니다. 이번 주에 있을 수련회에서 이 모든 채널을 실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채널들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지난 시간에 시편 19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이란 채널을 통해 당신의 영광과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연만이 아니라 세상 역사를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과 마음을 우리 인생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또 주변 사람들과 상황을 통해서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분명 은총입니다. 그래서 일반은혜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변상황이나 사소한 것 속에서도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어제 아침 일찍 논산에 사시는 저의 부모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당신의 꿈에 제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의 전화통화를 끊고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했습니다. 내가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부모님이 나를 생각하는 것이 더 간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이 더욱 간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필요할 때만 하나님께 나아가서 내 필요를 아룁니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나를 간절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런 나를 간절하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더욱 치밀하고 처절하며 간절한 것입니다. 나는 필요할 때만 하나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내 얼굴을 찾고 계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사실 내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내 얼굴을 보기를 더욱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보기 원하여서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 인생들에게 열어놓으신 채널들 중에 말씀이 있습니다. 일반은총은 우리의 마음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기 때문에 잘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밝게 하시기 위하여 말씀이라는 특별한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medit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특별한 약입니다. 이 처방전을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말씀묵상인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사람을 대하기를 하나님 대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인하지 않은 것으로 6계명을 지킨 것인 양 자랑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유명한 청교도 설교가였던 스펄전이 서재에서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아내가 은혜를 받았는가보다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아내가 남편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아서 통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내 심장이 뛰지 않기 때문에 통곡한 것이오.” 이 일화는 저에게 매우 큰 도전을 줍니다. 내 영이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것-이것은 내 영이 죽은 상태와 같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 울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먼저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내 영이 어떻게 살아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딤후3: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동’은 ‘루아흐’ 즉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불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0,,11)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구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그 생기를 말씀 속에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기에 성령의 감동하심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기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만일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성경은 한낱 교훈집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솝우화를 읽으면서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고 수필집이나 소설책을 읽으면서도 때로는 감동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에게 기껏해야 교훈 정도만을 주는 책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다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성경은 이솝우화나 소설책보다 더 재미없는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예수 믿는 자들 안에 계시므로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 경험을 안겨다 줄 수 있습니다. 어떤 경험일까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성령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을 들어서 천지 사이에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에스겔 선지자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옮기십니다. 성령은 에스겔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몸은 바벨론에 있지만 그 영은 예루살렘에 있어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상숭배의 현장을 직접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 성령은 지금도 예수 믿는 자들 가운데서 동일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성경을 읽는 우리를 들어서 이상 가운데 이 삼 천 년 전의 그 역사의 현장으로 옮기시는 일을 하십니다. 에덴동산으로 옮기시기도 하고, 또 갈보리 언덕으로 우리를 옮기시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현장을 ‘휙’하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2년 전에 이스라엘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공부하시는 분이 가이드를 하셨는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이드가 인도하는 곳마다 그냥 대충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느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탁월한 가이드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말씀의 현장으로 안내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안내를 따라 최대한 그 현장에서 많이 보고 많이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성경을 ‘휙’하고 읽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저는 성경통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3번 정도 통독수련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해보는 것은 만류하지 않습니다만 계속 하는 것은 만류하고 싶습니다. 성경묵상은 속독이 아닙니다. 현장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성경통독은 돈 들여서 이집트와 이스라엘과 시리아와 터키를 갔는데 그냥 버스만 타고 다니면서 구경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어떤 모자가 함께 여행했는데 그 아들은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가는데 다른 사람은 더 많이 구경하고 더 많이 느끼려고 하는데 그 아이는 다니면서 계속 포터블 게임기를 가지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걸 보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돈 들여서 왔으면 좀 많이 배우고 느끼려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게임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안타까움이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충분히 보고 충분히 느껴야 하는데 그냥 ‘휙’하고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그러고는 성경을 몇 독 했다는 둥 통독수련회를 했다는 둥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작년에 시리아를 갔는데 베두인 천막에 들어가서 베두인들과 함께 차를 나누어 마시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할 때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말씀의 현장을 그냥 대충 보고 지나치지 마십시오. 최대한 그 현장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대한 가이드이신 성령의 안내를 따라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느끼도록 하십시오. 성령께서는 열심히 안내하시는데 계속 딴전피우거나 다른 곳에 기웃거리거나 다른 생각을 하거나 게임기를 가지고 놀거나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다른 곳으로 안내하시면 그때 옮기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말씀묵상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친절한 안내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말씀의 현장으로 인도하시면서 우리가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여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게임기를 가지고 딴청 피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소망한다면,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계시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이란 현장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셨다고 합시다. 곧바로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 현장으로 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가이드이신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가이드에게 물으십시오. 우리가 모를 때 사전을 찾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가이드에게 묻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나무 옆에 서 있습니다. 그 곁에는 하와도 함께 서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선악과를 계속 응시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눈치를 줍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서 자기도 먹고 그 곁에 서 있는 아담에게도 줍니다. 이때 우리는 가이드에게 여쭙습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때 당신의 독생자를 어린양으로 보내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어린양을 잡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최초의 피 흘림은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가 아니라 바로 에덴동산 안에서 하나님의 손에서 어린양이 죽을 때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구절을 성령과의 대화로 풀어내는 연습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자기 혼자 성경 속을 여행하지 마십시오. 버스를 타고 그냥 휙 지나치지 마십시오.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하고 보여주고 있는데 게임기에만 몰두하지 마십시오. 가이드 옆에 딱 붙어 다니십시오. 궁금하면 가이드에게 물으십시오. 결코 혼자 다니지 마십시오. 여행을 하면 가이드에게 딱 붙어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꼭 혼자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이드와 같이 몰려다니면서 계속 딴 데 집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역사의 현장으로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이드 없이 여행하지 마십시오. 혼자 생각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가지 마십시오. 성령은 위대한 가이드이십니다. 성령께 질문하십시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께서 관심을 갖게 하는 구절이나 말씀이 있다면 멈추십시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머물러 서십시오. 그리고 물으십시오. “성령님, 저에게 왜 이것을 생각나게 하십니까?” 우리가 성령께 물었을 때 내 안에 들어오는 감동과 교훈은 성령이 주시는 것임을 믿으십시오. 때로는 내 질문과 상관없이 느닷없이 다른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루기 원하시는 부분인줄 알고 거기에 집중하십시오. 예를 들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기 시작할 때 어떤 단어가 떠오를 수 있고, 친구가 생각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부딪혀 오는 그것을 가지고 성령과 나누십시오. 주님과 교제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계속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십시오. 만약 불쾌한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거절하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각은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는 사단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같은 책망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감사와 평안이며 내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묵상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묵상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의지하면서 묵상하기 시작할 때 점점 쉬워지고 즐거워질 것입니다. 만약 부담이 되고, 일이 되고, 의무감만 남는다면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중단하고 묵상이 무엇이가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묵상이 즐거운 이유는 마치 훌륭한 가이드와 함께 여행하는 즐거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위대한 가이드이신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2,000년 전, 혹은 3,000년 전의 상황으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을 말씀의 현장으로 인도하실 때 부디 집중하십시오. 휘익 지나가지 마십시오. 딴 데 쳐다보거나 딴 데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성령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계속 하나님 알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십시오. 말씀의 가이드이신 성령과 함께 말씀의 현장에 갔을 때 물으십시오. “이때, 이곳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정 알게 되면 여러분은 놀라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라고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현재 삶의 자리에 초청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말씀 속에서 만난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경험! 이 즐거운 경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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