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영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영성'이란 말이 너무 거창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영성'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삶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어떤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가장 인간적인 삶'입니다.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의 모습이 오늘날 이상하게 뒤틀려서 소개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다름 아니라 묵상하는 사람, 묵상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치고 묵상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묵상이 어렵고 때로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묵상이 힘든 이유는 묵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을 힘들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정체성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종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즉, 일중심적인 가치관과 생활패턴 때문에
묵상이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청지기로 창조하셨고 부르셨습니다.
종은 일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이지만 청지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며 누리는 존재입니다.
종은 결코 주인과 마음을 나누지 않습니다. 종은 그저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일을 하긴 하되, 주인과 친밀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공유하며 친밀함을 누리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종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무조건 묵상하려고 하지 말고 나의 정체성을 말씀으로 돌아보아야 한다고..
일중심의 사고방식과 삶의 패턴과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고,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정체성을 회복한다면 묵상은 한결 쉬워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묵상은 영성의 기초요 뿌리며 시작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본문: 시1:1-6
지난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 중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저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누린다 혹은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표현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궁극적인 소망--저는 이것을 최고의 부르심Highest Calling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힘써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말씀으로 관계들을 점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풍성히 흘러들어오려면 묶인 관계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누리는 삶의 핵심은 양으로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나는 그분의 양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사랑스러운 양으로서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목자가 어떤 분이시며, 또한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친 음성을 듣는가를 알고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가? 오늘은 이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나눌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질문해봅시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첫 단계는 묵상입니다! 왜 묵상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인가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알 수 있는 통로를 여러 가지로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타락했고 죄에 오염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 힘과 지혜만으로는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알 수 없기에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특별한 약을 처방해주셨습니다. 원래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이 원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2장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과 우주만물을 보기만 해도 하나님의 영롱한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가 인생에 들어온 이후로 사람의 마음은 어두워졌고 지금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자연만물 속에서 그분의 놀라운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마음을 치유해야, 그래서 우리 영이 살아나고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눈이 밝아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마음을 치유하는 말씀을 주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고, 기록된 말씀을 친히 보존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록된 말씀은 우리의 영안을 열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여 태고 적부터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약입니다. 묵상이란 바로 그 약을 먹는 것입니다. 영어로 묵상이란 meditation인데, 이 말은 라틴어medikelus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서 ‘약’이란 뜻의 medicine이란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처방약인 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그 약을 내 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묵상이야말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삶은 곧 묵상하는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묵상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묵상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질문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입니다. 우리는 왜 묵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내 영이 치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내 영이 치유되고, 말씀으로 내 마음이 밝아져서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를 지으실 때 의도하셨던 바로 그것, 하나님을 누리는 삶,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묵상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이유는 영적 전쟁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은 바로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로 전쟁터라는 얘기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고지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에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신문을 보고 세상 뉴스를 보고 인터넷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생각 안으로 공격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생각의 영역에서 고지를 점령했다면 우리는 넉넉히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입니다.
그러면 묵상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로 질질 끄는지 아십니까? 묵상이 도대체 무엇이며, 묵상을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묵상은 또 하나의 일이 되고,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묵상에 대한 국어사전식 정의는 단순히 “자신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새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묵상을 왜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묵상은 그냥 일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내 마음에 생명을 새기는 것과 죽음을 새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내 영혼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홍성건 목사님은 묵상하지 않고 밥을 먹는 사람은 돼지와 같다고 말씀하는 것을 작년에 강의 중에 들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밥을 먹으면 ‘아, 나는 오늘 돼지가 되었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러분, 묵상하지 않았다고 여러분 자신을 너무 심하게 정죄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는 대로 묵상은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하지, 결코 부담이나 의무나 일로 여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1분 만에 밥을 후딱 먹어치우고 출근하고 혹은 등교하는 것처럼 묵상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묵상은 즐거워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을 바로 했다면 반드시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묵상이 일이 아니고 즐거움이 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묵상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는 시간이란 것입니다. “묵상이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는 시간이다.” “묵상이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갖는 시간이다.” 저는 이 정의야말로 묵상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가장 성경적인 표현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이 일이나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냥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아니 그냥 함께 있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묵상은 바로 하나님과 연애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즐거움과 비교를 불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경청했던 베다니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었던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앉아서 내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달콤하고 더 행복한 시간은 결코 없습니다!
묵상의 개념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묵상이 아닌 것들에 대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묵상과 비슷하지만 묵상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공부는 묵상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는 지식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친밀감을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성경공부는 신학적 지식과 배경적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묵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입니다. 물론 성경을 공부할 때에도 성령의 감동이 있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간구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내가 배우거나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둘째, 명상은 묵상이 아닙니다. 명상은 자기 마음을 비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 영과 마음에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명상은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 친밀한 교제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Q.T는 무엇입니까? 저는 묵상이라고 말하든 Q.T라고 말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추구하는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저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묵상’이라고 부르든 혹은 ‘Q.T’라고 부르든 간에 저는 묵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묵상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이고,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 묵상에는 몇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전제로 하면서 크게 네 가지 묵상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 묵상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고 누리는 방법인 것입니다. 둘째, 자연 묵상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만물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또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랜시스가 즐겨 사용한 묵상입니다. 이 자연 묵상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셋째, 삶의 묵상입니다. 이것은 내 삶 속에 함께 하시고 실재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15세기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란 책을 썼던 로렌스 형제가 했던 묵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삶의 묵상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넷째, 성품 묵상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어느 한 성품에 집중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성품이 변화되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오늘 이 네 가지를 다 다룰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이번 달 마지막 주에 있을 겨울수련회에서 다룰 것입니다. 저는 이번 수련회를 묵상수련회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집중적으로 다루고, 또 함께 워크샵도 가질 것입니다. 묵상에 대해 좀 더 깊게 배우고 훈련하기를 원한다면 이번 겨울수련회에 오기 바랍니다.
오늘은 묵상에 대한 서론이나 개관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묵상이란 하나님을 누리는 시작인데,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사귐을 갖는 시간이란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그런 시간을 가질 때 말씀 묵상, 피조물을 가지고 그런 시간을 가지면 자연 묵상, 삶의 사건이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면 삶의 묵상, 하나님의 특정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과 사귄다면 성품 묵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묵상 중에 가장 기본이 되고 뿌리가 되는 묵상은 당연히 말씀 묵상입니다. 말씀 묵상이 안 되는데 다른 묵상이 잘 된다면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묵상만 잘 하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내 영의 양식이요 치료하는 약입니다. 치료되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뜻이 아닙니다. 치료되면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 묵상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말씀 묵상에서 더 나아가서 모든 관계 속에서, 모든 사건 속에서, 모든 자연만물 속에서, 모든 가정과 직장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게 되기를 진정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 제가 묵상에 대해 너무 서론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제 본문을 봅시다. 그리고 말씀 묵상에 대해 생각을 해봅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유명한 본문은 바로 말씀 묵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복 있는 사람”은 묵상하는 사람인데, 무엇을 묵상하는 사람일까요? 복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무엇을 그 마음에 새기는 사람일까요? 1절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이 그것을 암시해줍니다. 시편이나 잠언을 보면 언제나 병행구를 유념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은 서로 대조됩니다. 그리고 악인의 꾀와 대조되는 것이 바로 의인이 묵상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란 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그가 기록된 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은 바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발견하고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은 악인의 마음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생각에 기울어집니다. 그리고 악인의 생각에 내 마음이 영향을 받게 되면 악인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과 동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인의 잔치자리에 함께 앉아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의인의 회중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즐거움을 찾고 있습니까? 내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즐거움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는 전적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묵상할 능력이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묵상이 잘 안 된다면 그것에 대해 낙심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여러분에게는 묵상할 지혜나 능력이 결코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묵상이 잘 되어서 정말 내 영혼이 즐거워하게 되었다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혜롭고 똑똑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 것임을 겸손히 시인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상하기 전에 항상 겸손하게 성령을 초청해야 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을 읽을 때 언제나 성령을 의식하고 의지하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여 항상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물으십시오.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것을 계시하여 주실 때까지 그분 앞에 가만히 머물러 앉으십시오. 이것이 말씀 묵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같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에게 좋은 결과들이 많이 주어지게 되는데 우리가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첫째, 마음에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마치 밭에 숨긴 보배를 발견하는 즐거움과 같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어떤 즐거움보다 더 즐거운 것입니다. 둘째, 감정의 기복이 줄어듭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라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그 뿌리를 물가에 두기 때문에 어떤 계절이 와도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묵상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환경에 따라 흔들리고, 사람에 따라 흔들린다면 여러분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둔다면 여러분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약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묵상으로 치료받으십시오. 가장 확실한 치유의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묵상하다가 마음의 병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책하면서 자연 묵상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된 것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묵상하다가 성령세례 받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묵상은 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셋째, 묵상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을 누립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형통한 자, 성공자가 됩니다. 소유나 업적과 같은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성공자가 아니라 만족이나 행복이나 즐거움과 같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의 성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까?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합니까?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배우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여기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앉는 것입니다. 그때 내 마음의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내려놓고 안식함으로써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시고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데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 힘과 지혜로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합니다. 이전의 어떤 지식이나 경험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묵상은 지식을 얻는 것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며,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런 다음 성경을 펴서 읽습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읽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으로 주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의 삶 속에 말씀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영광, 주님의 성품, 주님의 원칙, 주님의 의도, 주님의 마음에 대해 내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습니까?” 이때 주님이 떠오르게 하시는 것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과 본격적인 교제를 나눕니다. “주님, 제게 이 말씀을 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주님, 저의 상황과 이 말씀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고쳐야 할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내 감정과 내 상황과 내 고민과 내 염려를 주님께 아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진정 즐거운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희락입니다. 이 희락이 없이 어떻게 기독교적 삶을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는 복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묵상의 즐거움을 알고 누리는 축복이 올 한 해 저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내 영혼 주 안에서 참 기쁘다.
내 영혼아 주님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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