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이란 말이 거창하거나 부담스럽게 들리나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회복]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특별하고 거창한 메시지를 기대한다면 오히려 실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스러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저는 [묵상하는 삶]에서 출발한다고 믿습니다.
영성회복에 대한 저의 메시지는 묵상에 관한 연속설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묵상은 예배입니다!
본문: 시19:1-1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계속 묵상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묵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첫 단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묵상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육신을 입은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사귈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셔서 주신 선물들이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며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만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 속에 당신의 흔적을 남겨두십니다. 우리는 그 흔적을 가지고 그분의 영광스러움과 그분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하나님의 깊은 생각을 아는 것! 예, 바로 그것이 묵상입니다! 그러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을 아는 사람이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잘 생긴 사람도 아닙니다.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도 아닌 것입니다.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묵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갖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즐거움을 찾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9편을 보십시오. 시편 전체가 묵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특별히 19편 말씀은 자연묵상과 말씀묵상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에서 6절까지는 다윗의 자연묵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13절까지는 말씀묵상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 결론으로 이 모든 묵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요, 향기로운 제사임을 말씀함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입니다! 묵상은 곧 예배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윗의 확신이며,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진정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묵상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묵상하는 삶을 사십시오. 묵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래서 묵상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며,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것은 말씀묵상이 아니라 자연묵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모든 피조물들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1절에서부터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원래 타락하기 전의 사람은 그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그리고 사람은 밤에도, 낮에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육신의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영으로 감지되는 소리였습니다. 3절부터 보십시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다윗은 지금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귀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늘의 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요즘 결혼할 때 부모님이 집을 마련해주는 일이 있지요? 결혼하는 자녀들을 위해 집을 장만해주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요? 지금 다윗은 하늘과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어주기를 기뻐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자연묵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자연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다윗의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이 자연묵상이야말로 예배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때로는 자연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바로 죄가 우리 마음눈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이 우리의 영안을 흐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보아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되고, 당연히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치 동굴 속에 갇힌 죄수들처럼 반응하는 것입니다. 동굴 속에서 태어나서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빛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단지 그림자를 보면서 상상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보는 것이 참된 것이라고 우깁니다. 자신이 보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게 된 겁니다. 이것이 인생의 비참함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생의 탈출구는 없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동굴에 갇혀버린 자신의 인식의 틀에 갇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기록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신 기록된 말씀은 우리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둔 마음과 눈을 밝게 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확실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 말씀의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마치 꿀과 송이꿀처럼 사모해야 합니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내 마음을 치유하고 기쁘게 할뿐만 아니라 죄를 이길 힘을 주며, 큰 상을 얻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의 능력이 아니면 자기 허물을 깨닫게 하고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묵상할 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묵상함으로 내 마음이 밝아지고 내 눈이 열리게 되면 다시 자연묵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소생되었는지 여부를 시험해봅니다. 내 눈이 밝아졌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참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자연묵상이 처음부터 잘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며 마음이 부패하고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묵상으로 내 영과 마음을 치유하여 밝게 하고 열게 되면 자연묵상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 만물을 볼 때 단순한 동물, 식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말씀묵상과 자연묵상의 관계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연묵상을 위해 말씀묵상을 주셨고, 말씀묵상을 통해 우리는 다시 자연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묵상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절)
묵상하는 삶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요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증명할 일이 남았습니다.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묵상하는 삶을 사셨는가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묵상은 교회에 유행하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저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이 묵상하는 삶이었다면 묵상이야말로 오늘날 교회 안에 시급히 회복되어야 할 중요한 영역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묵상의 대가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은 묵상을 떠나 설명할 수 없고, 오늘날 교회는 묵상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현대 교회는 화려하고 요란스럽고 분주하지만 너무 가볍다는 것입니다. 원인은 간단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묵상의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묵상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는 묵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소망하는 부흥은 따라올 것입니다. 묵상은 곧 마음의 부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먼저, 예수님은 과연 자연묵상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복음서를 조금만 읽어보아도 그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5,26)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묵상하셨습니다. 먹이시는 아버지, 기르시는 아버지를 묵상하셨던 것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이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8-30) 예수님은 들에 핀 한 송이 야생화를 바라보면서도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를 묵상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예수님은 바람을 느끼시면서 성령을 생각하셨고, 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 대해 묵상하셨습니다. 또 아무 것도 아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보시면서 자신의 사명인 십자가를 묵상하셨습니다.(요12:24) 또 무화과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시면서 종말의 때에 대해 묵상하셨습니다.(마24:32)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를 묵상하셨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15:1)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햇빛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비치는 것조차 예수님의 눈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묵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눈에 비친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궁한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묵상의 즐거움을 가지고 사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묵상은 예수님의 체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묵상만이 아니라 삶의 묵상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농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셨습니다. 좋은 땅과 가시밭과 길가와 같은 땅을 바라보시면서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배의 결실을 기대하시고 계시는 아버지, 온갖 박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복음의 큰 역사를 이루어내실 하늘의 농부이신 아버지를 묵상하셨습니다. 또 추수하는 일군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셨고, 추수 때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평범한 가정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연만물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셨습니다. 결혼잔치를 바라보시면서 마지막 심판의 때를 묵상하셨습니다.(마25:1-13) 염소와 양떼를 구분하는 목자를 바라보시면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최후의 심판을 묵상하셨습니다.(마25:21-46) 예수님의 눈에 비친 모든 일상생활이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계시하는 통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우리 역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묵상은 더더욱 예수님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배고프고 힘들 때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은 평소 말씀묵상이 몸에 배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하여도 평소 말씀묵상을 실천하지 못하고 체질화하지 못하면 금방 육신의 포로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는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바탕이 되면 성령의 역사는 더욱 강력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12살이 되었을 때 내노라고 하는 당대의 성경학자들과 말씀을 가지고 토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묵상하셨는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다른 해석을 내리신 것은 묵상의 삶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똑같은 6계명을 다르게 해석하셨습니다. 어떻게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인간에게 6계명을 주실 때 어떤 마음으로 주셨을까? 예수님이 묵상하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6계명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단지 사람을 육체적으로 죽이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형제에게 분노하고, 형제에게 욕하고, 형제를 깔보는 말들까지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동일시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은 그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아버지께서 율법을 주신 진정한 의도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삶,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쪽도 돌려대는 것, 구하는 자에게 주고 거절하지 않는 삶이었음을 아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문자만 보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의도를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를 묵상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묵상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묵상에 대해서 요한복음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은 또 없을 것입니다. 하루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셨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낫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직 한 사람 38년된 병자에게만 찾아가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왜 그 한 사람에게만 다가가셔서 낫게 하셨을까요? 그가 자신을 도와줄 친구가 없어서? 그냥 예수님 마음입니까? 그가 스스로 걸어갈 힘이 없기 때문에?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로 인해서 예수님은 핍박을 당하게 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아버지를 항상 응시하고 사셨습니다. 아버지를 언제나 묵상하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오직 한 사람에게 마음이 가 있음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한 사람에게 가셔서 낫게 하시는 일을 아들이 본 것입니다. 아들로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대로 보고 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8:38)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만약 나의 삶이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면 나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말씀 속에서,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언제나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내게 계시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기를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9:2)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를 응시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사람은 언제나 사람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경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안식일에 소경을 고쳤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소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다시 보게 할 수 있냐고 반박하자 그 자리에서 출교를 당하고 맙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다시 만나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 소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가 그를 보았고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바로 그다.” 그러나 그 소경은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며 절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바리새인 중에 이 말을 듣고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눈을 떠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흑암의 동굴 속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죄는 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0-23)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봅니다. 그리고 공중에 날아가는 새들을 봅니다. 그러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해를 위해 장막을 베푸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합니다. 하늘로부터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는 이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소경(=죄인)입니다. 주님, 보기 원합니다. 내 눈을 열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나요? 들에 핀 한 송이 야생화를 보며 하나님이 나를 입히시는데 관심이 많다는, 그리고 실제로 영광의 옷으로 입히시겠다는 영광스러운 약속을 보고 있나요? 이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아닌가요?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자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에게 심각한 도전입니다.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누굽니까? 열정은 있습니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문제는 보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묵상은 눈을 여는 것입니다.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보아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고, 마땅히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발견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묵상이 내 눈을 여는 데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내 눈을 열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볼 때 언제나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삶 속에서, 내가 하는 일 속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보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일단 보고 들으면 모든 삶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리고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묵상의 위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사모하십시오. 묵상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아버지를 묵상하시고 아버지를 바라보셨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게 되면 내가 변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게 되면 예배가 살아납니다. 38년 된 소경이 비로소 주님 앞에 엎드려 절했듯이 말입니다. 묵상이 되면 예배가 됩니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묵상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가 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이 훈련을 받을 때 쓰레기 소각장에서 노동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때 저는 재활용을 따로 구분하고 휴지조각 같은 것들을 모아서 드럼통 같은 데서 소각하는 일을 하면서 내 죄와 상처들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불에 대해서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냄새나고 벌레가 기어 다니고 지저분한 곳에서 일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어디서 묵상하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서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즐거운 것입니다. 묵상이 곧 예배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에게 묵상할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향기로운 제사처럼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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