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도해달라고 해서 기도해주지 마십시오.
먼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생각해보십시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그의 뜻대로 구하라
본문: 요일5:14-17
제가 기도의 패러다임을 바꾸라고 강조한 것이 오늘로 네 번째입니다. 오늘도 역시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기도의 패러다임을 바꾸십시오!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도의 패러다임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십시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의 정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응답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기도응답이라는 말에 대해서 여러 번 들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때 흔히 사용하는 교재가 그리스도인의 기본 확신입니다. 이 교재를 통해 구원의 확신, 승리의 확신, 인도하심의 확신, 그리고 기도응답의 확신에 대해서 공부를 합니다. 내가 간구한 그것을 응답받았다는 확신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기도응답이라는 말보다는 기도열납이란 단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왜냐면 기도응답이란 말보다는 기도열납이란 말이 훨씬 더 신본주의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응답은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기대가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켰다는 확신으로 잘못 오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었다, 혹은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으로서 [기도열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옛날식 표현을 빌면 기도가 상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우리가 열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의 기도가 열납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어떤 기도가 하나님 보좌 앞에 상달되는가에 대해 말씀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기도가 열납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그것은 불의의 죄입니다. 죄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게 가로 막습니다. 죄와 거룩은 서로 공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요?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느 누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죄를 다 깨끗이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열납되는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걸까요? 저는 여기서 특별히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특별한 죄가 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사야1:15-17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이 특별히 주목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의의 죄인 것입니다. 그것은 약자를 학대하는 죄인 것입니다. 모든 죄 중에서 특히 공의를 저버린 죄, 힘없고 가난한 자를 학대한 죄는 모든 기도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 처리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공의가 무너진 상태에서는 주님이 그 어떤 기도도 듣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 그 모든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의를 짓밟은 죄는 해결하기 전에는 결코 그리스도의 중보를 얻어낼 수 없습니다.
둘째는 불신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스스로 기도의 문을 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은 특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불신은 기도가 열납되지 못하게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8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의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중적인 마음인 것입니다. 일관되지 않는 마음-이것이 바로 의심의 상태입니다. 일관되지 않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이것을 구하니까 나도 구할 수 있습니다. 또 환경이란 파도에 밀려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동치는 기도, 두 마음의 기도, 일관성이 없는 기도는 다분히 감정적입니다. 다분히 충동적이고 즉흥적입니다. 그리고 다분히 일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이런 기도는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게 신뢰하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게 신뢰하는 기도는 어떤 바람이 불어도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있다면 내 마음은 결코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정욕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은 기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세력입니다. 야고보서 4:2,3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절히 구해도 받지 못한다면 한번쯤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내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내가 구한 그것을 즉시 응답해주시는 경우입니다. 또 내가 구한 그것을 한참 세월을 지난 후에 주시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내가 구한 그것보다 훨씬 나은 다른 것으로 주시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내가 구한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이 지금 나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보면 내 욕심을 따라 간절히 구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다른 것으로 내게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속상하고 불평하고 섭섭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말 내게 최선이었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지요? 내가 구하는 그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인가?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인가? 이렇게 한번 점검해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내 필요에 반응하기를 원하시지 내 욕망에 반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의 딸들이 제게 무엇을 달라고 하면 저는 즉시로 “왜?”라고 물어봅니다. 혹은 “어디에다 쓸 거니?”라고 물어봅니다. 결코 달라는 대로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딸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키워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데서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필요를 분별할 줄 아는 성숙함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아는 일에 성장하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열납되고 또 어떻게 응답되는가를 통해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거절하신다면 그것은 나를 거절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거절하시는 것도 나를 사랑하시는 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내 욕심에 의한 기도가 거절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때론 거절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더 나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하시기 때문이거나 적어도 우리의 성장을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들어가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모든 권위를 자신 안에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만이야말로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4:6-10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께 열납되는 기도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교만은 결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게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비교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이 됩니다. 이 교만이 평소 자주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데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형제를 판다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잘못이 보이면 두려워하고 자신을 점검한다면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교만인 것입니다. 교만은 기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또 교만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내일 일을 자랑하는 말로 나타납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주님의 뜻이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계획과 주장을 내세웁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은 그 말로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기도는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도가 열납되기를 진정 바란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로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14,15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내 마음에 품은 원한과 분노는 기도가 열납되지 못하게 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토하는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욥의 고백을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내 마음의 쓴 뿌리와 원한을 털어놓는 것은 죄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입술로 범죄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입술로 범죄하는 것은 다른 사람 앞에서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에 대해서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이 결코 용납하지 못할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하나님 앞에서 거침없이 표현해내지 않습니까? 소위 ‘저주의 시편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내 마음에 있는 분노를 토해놓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는 좋은 말로 기도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마음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내 속의 아픔을 주님 앞에 가져오기를 원하고 기대하십니다. 성경은 시시로 그 앞에서 마음을 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 상한 마음을 토해놓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방패가 되심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 토해놓음으로써 원수에 대해 긍휼히 여기며 용서할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열납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함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저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내 마음에 상한 감정을 하나님께는 숨기고 사람에게는 털어놓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반대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토해놓고 사람에게는 긍휼로 다가갈 능력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분노와 미움을 계속 간직한다면 그것이 곧 기도의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간직할수록 그 장애물은 내 안에서 더욱 견고한 요새로 구축될 것입니다. 그러나 빛 되신 주님 앞에 그 모든 것을 가져가서 다 토해놓을 때 그 모든 견고한 진들은 다 녹아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있다면 이 시간 주님 앞에 가져가서 빛 가운데 토해놓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빛이 내게 긍휼히 여기고 용서할 힘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한 마음은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뿐더러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도록 역사하는 견고한 요새를 만들어냅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상처와 아픔을 주님 앞에 토해내십시오. 그럴 때만이 주님이 내게 용서할 힘을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내 상한 감정을 토하는 기도는 잘못되었고, 입술로 죄를 짓는 것이란 생각을 떨쳐버리십시오. 기꺼이 주님 앞에 가져가십시오. 우리 주님은 다 받아주십니다! 주님께 가져가지 않고 내 힘으로 용서해보려고 하는 시도를 내려놓으십시오. 용서할 힘은 나를 이미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주님 앞에 내 상처를 용감하게 드러낼 때 응답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기도가 열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기도가 될까요?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기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응답의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야 하고 그것에 내 생각을 맞추어야 합니다. 무선통신을 취미로 하는 분들을 보세요. 안테나를 세우고 주파수를 맞출 때만 내 소리가 상대방에게 들리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소리를 크게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주파수를 맞추면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들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춘 기도는 쌍방향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기도가 될뿐더러 내 기도가 상달되는 기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을까요? 먼저, 그분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과 계획과 뜻을 당신의 말씀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기록해주신 말씀을 읽으면서 그분의 생각을 헤아리고 그분의 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묵상이 뒷받침되지 아니하면 우리의 기도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임재를 겸손하게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면서 잠잠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귀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마음을 열고 우리 영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기를 원하시는지 잠잠히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중보기도의 시간을 가질 때 짧지만 몇 분간 침묵하는 시간을 가진 것을 기억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생각들을 겸손하게 나누는 시간을 가진 것도 기억합니까? 그럴 때 우리 모두가 경험하게 된 것은 그 때 그곳에서 우리가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기도회를 인도하기 전에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하면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겸손히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기도제목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의 패턴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께 귀 기울인 후에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자는 겁니다. 많은 교회들이 주님이 주시는 기도제목을 따라 마음을 모아 기도하기보다는 인도자가 던지는 대로 따라가는 식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모으기 힘듭니다. 각자에게 주시는 생각들을 각자 나누면서 하나님의 뜻을 함께 헤아릴 때 비로소 진정한 합심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이상한 기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주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성령의 충만을 구하고 거짓말하는 원수 마귀를 대적하고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했다면 결코 잘못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도제목을 함께 붙잡고 기도하는 기도가 얼마나 강력하고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 모두의 기도를 응답해주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경험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15절과 16절을 연관 지어서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과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매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나의 문제만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기를 갈망하면서 기도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응답의 축복을 더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중보기도자인 것입니다. 중보기도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친구로 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의 친구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인 것입니다.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잘 헤아릴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이러한 중보기도의 용사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축복하고 또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친구의 반열에 올라서서 하나님께 날마다 상달되는 중보기도자들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한분 중보자로서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생명을 부어주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열납되는 은총을 날마다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 참 중보자이신 주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영혼들과 민족들과 족속들을 위한 중보기도자들로 세우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부어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목격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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