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자의 자리
본문: 사62:6,7
오늘은 중보기도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중보기도를 하려면 두 가지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중보기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친밀감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언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기도해야 능력이 있습니다. 중보기도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중보자는 예언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위치에 가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가? 중보기도자는 어디서 기도해야 하는가? 그래서 오늘은 중보기도자의 위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중보기도자의 자리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 성벽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자의 자리는 첫 번째로 성벽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성벽을 취해야 합니다. 성벽을 취하는 자가 이깁니다. 그러면 원수가 어떻게 성벽을 파괴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적의 전술을 먼저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 원수의 전술은 불경건한 통치자를 일으킴으로 성벽을 파괴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섬김이 아닌 군림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원수는 성벽을 파괴합니다. 둘째, 권위자가 자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성벽을 파괴됩니다. 부모가 자녀의 곁에 있어주어야 할 때를 놓치면 자녀는 원수의 통제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셋째,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 거역할 때 성벽이 무너지는 틈이 발생합니다. 권위를 존중하지 못하고 대적하고 거역하는 일들을 통해 성벽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자는 성벽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들을 성벽위에 세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중보기도를 시작하지 말라고 토레이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하지 못하면 효과적인 중보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평소 하나님과의 우정관계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친구로 여기지 못함으로써 효과적인 중보기도사역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우정(friendship)은 중보기도의 바탕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친밀감(intimacy)입니다. 효과적인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친한 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역입니다. 둘째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길(ways of God) 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원칙, 하나님이 행하시는 원칙들에 대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써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우리는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마음에 있는 가장 큰 잡초는 정욕과 염려입니다.(마13장) 이 두 가지 잡초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집중력을 길러야 합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많이 울어도 엄마는 그 중에서 자기 아이의 음성을 분별해냅니다. 집중력이 약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집중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익숙해져가야 합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순종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훨씬 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효과적인 중보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듣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사람은 영으로써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은 또한 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맞게 말씀해주십니다. 학습유형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교육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유형이 있습니다. 시각적, 청각적, 동적인 유형이 그것입니다. 먼저, 청각적 유형의 사람은 어떻게 학습합니까? 그런 사람은 수업시간에 노트필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밀한 음성을 잘 듣습니다. 둘째, 시각적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유형은 모든 소리를 그림으로 바꾸어 입력하는 사람입니다. 강사와의 눈 접촉이 중요하고, 노트필기가 중요합니다. 자료정리도 잘합니다. 이런 사람은 환상도 잘 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는 소리보다는 그림으로 말씀하십니다. 셋째, 동적인 유형입니다 몸을 많이 움직여야 집중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드라마, 마임, 율동 등을 통해 잘 표현해냅니다. 이런 사람은 한 자리에서 오랜 시간 묵상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는 강한 확신과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세 가지 유형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특별히 어느 부분이이 더 강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한 자로 훈련시키십시오. 잘 듣기 위해서 늘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깨어있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듣는가? 라고 묻습니다. 반면 깨어있는 사람은 늘 듣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비로소 강력한 중보기도, 즉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보존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공동체에 흘러가는 역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보전하는 일입니다. 둘째, 보호자의 역할입니다. 파수꾼은 성 안에 있는 공동체를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자 역시 방패기도를 통해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나와 있습니다. 셋째, 관찰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먼저 관찰하는 것이 중보자의 역할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북한이나 중국을 향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물은 다음 원수들의 전략과 전술, 움직임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넷째, 문지기의 역할입니다. 공동체에 들어와야 할 것과 나가야 할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자가 없다면 이단이 쉽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새신자들이 쉽게 적응하고 정착하느냐의 문제는 어쩌면 중보기도자들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단이 들어오게 되면 공동체는 큰 후유증을 앓게 됩니다. 중보자는 이단이나 거짓영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결정합니다. 중보기도자가 없을 때 이상한 세력이 공동체에 드나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보기도자의 역할은 중요한 것입니다. 다섯째, 전투자의 역할입니다. 중보자는 최전방에서 공격을 잘 하고 전투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에 능한 사람이 중보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벽에 설 사람은 전투에 능한 정예병인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가 되어 살기를 원한다면 성벽위로 올라가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벽 위에서 무엇을 기도할까요? 성벽 위에서는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조이 도우슨은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다음의 목록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유지하도록,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도록, 셋째,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도록, 넷째, 중보기도를 쉬지 않도록, 다섯째, 하나님과 권위자를 순복하는 종들이 될 수 있도록, 여섯째, 섬기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일곱째, 동기를 정결케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권위자들을 위해 감사하면서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이 그 권위자를 통해 여러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복이 권위자를 통해서 흘러가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벽 위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 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알게 됩니다. 성벽 위에 설 때 하나님은 우리가 전략적으로 기도해야 할 영역을 보여주십니다!
아모스서 3:7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특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때까지 겸손하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잠잠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리 보이시고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의 큰 장애물은 바로 우리의 성급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급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탐 마샬이란 분은 기도의 싸이클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일들을 미리 보이시고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시점(point of vision)이 중보기도 시간에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구땅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도시를 위해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시는지, 더욱 구체적인 기도제목, 필요를 알려주시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확신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감사를 하는 단계입니다. 확신의 단계와 응답의 단계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응답을 경험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응답이 되지 않는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을 때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응답이 되지 않을 때 혹시 깨닫지 못하거나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는지 주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열정을 다하여 봉사한다면 주님이 마음을 돌이키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뇌물을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주님은 뇌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잘못된 동기로 구할 때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동기로 하나님께 구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보다는 우리의 마음, 동기를 더 보십니다. 셋째, 믿음으로 하지 않을 때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롬14:23)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죄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내 생각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듣는 기도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넷째, 용서하지 않을 때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허물을 용서해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님이 가르치십니다.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 혐의가 있을 때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를 안 하게 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거룩함과 화평함이 없이는 주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히12:14) 하나님은 용서를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중보기도자는 용서를 즐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다섯째, 불순종하는 자는 기도응답을 막게 됩니다.(요일3:22) 우리의 삶에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기도응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이 도우슨은 순종할 때 즉시, 기쁘게, 온전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울왕의 순종은 절반의 순종이었습니다. 불순종이나 절반의 순종이나 같은 것입니다. 여섯째, 정상적인 결혼관계 속에서 부부가 화해하지 않을 때 기도응답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벧전3:7) 부부의 불화는 기도가 막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면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일곱째, 자기 의에 의지할 때 기도응답이 없게 됩니다. 중보기도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의를 내려놓는 훈련을 했습니다. 느헤미야와 다니엘의 중보기도를 보세요. 그들은 자기의가 아니라 주의 긍휼에 의지해서 기도했습니다. 탕자가 아니라 탕자의 형같은 사람이 자기 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시고 헌금 잘 하는 자가 자기 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당연히 봉사하고 헌금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응답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를 의지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의가 높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성실한’ 생활 자체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탕자의 형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를 기도응답의 근거로 생각합니다. 많은 헌금, 많은 봉사를 가지고 기도응답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근거입니다. 자기의가 높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자기 의에 걸려 넘어지는 일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일수록 자기의에 걸리지 않도록 늘 깨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기도의 첫 번째 위치: on the wall, 성벽 위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기도의 두 번째 위치: in the gap, 결렬된 틈, 깨어진 곳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시106편 23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였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보기도자는 결렬된 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기도입니까? 결렬된 틈에서 기도하는 것은 '동일시 기도'라고 합니다. 그의 죄를 나의 죄로 간주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느헤미야, 다니엘의 기도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중보기도자가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영적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판단하는 죄인 것입니다. 중보기도하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도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고전4:5) 잘못된 판단은 거짓된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판단하는 자는 교만의 죄에 빠지게 합니다. 잘못된 판단은 또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중보기도하면서 남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시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명기9:25절을 보면 모세가 40주야를 주님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32장에 보면 모세의 중보기도원칙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동일시기도인 것입니다. 깨어진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기억해야 할 것은 백성의 죄를 자신의 죄인 것처럼 여기며(동일시) 겸비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생명책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목숨을 건 기도, 필사적인 기도라고 부릅니다. 중보기도자는 이렇게 필사적인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필사적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거는 기도가 생명을 살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기 원하십니다. 정말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원하고 있는가를 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필사적인 기도가 잘 응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중보기도자인 것입니다. 겔22:30,31절에,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성을 멸하시기 전에 중보기도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중보기도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도시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간주하고 겸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속에 있는 자가 있습니까? 그 한 사람을 놓고 중보기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 사람과 동일시해서 기도드려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깨어진 관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중보기도자의 세 번째 위치: in the battle 전장인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영적전투인 것입니다. 눅10:18,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제어할 권세를 언제부터 받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때부터 영적 권세를 받습니다. 이 권세는 거듭날 때부터 계속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 권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도 이 권세를 가르쳐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보기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권세는 어떤 권세입니까? 그것은 “묶고 푸는 권세”인 것입니다. 마16: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주님이 교회에 주신 권세가 무엇입니까? 18절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권세는 원수의 대문을 취할 권세입니다. 여기서 '권세'란 말은 '대문'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의 대문을 취하는 권세는 어둠의 왕국으로 쳐들어가는 권세인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를 결코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공격하고 우리가 방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공격하고 원수가 방어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권세는 원수가 당해내지 못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중보자로서 무엇을 묶습니까?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풉니까?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힌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결박하고 어떻게 풀어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로 명령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헬라어로 '케루소'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대사로서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어 '카라'라고 합니다. 구체적인 반응을 불러내는 ‘선포’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정확한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전령과 대사로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삭이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물리쳐주시옵소서"란 기도는 비성경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내가 묶는다! 내가 풀어낸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권세 있는 선포는 결코 허공에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열매를 바라보고 구체적인 대상에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영적전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실체에 대하여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 관해서는 다음 주부터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려면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친밀함 가운데 머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하나님의 친밀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중보기도할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검을 들고 우리가 어디서 기도해야 하는가? 오늘은 크게 세 가지 자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세 가가지는 우리 모두 마음에 새겨야 할 영역입니다. 첫째, 결렬된 틈(in the gap)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가로막는 자가 됩니다. 둘째, 성벽 위(on the wall)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받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셋째, 전장터 안(in the battle)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로 원수를 대적하며 결박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중보기도를 경험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진정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이러한 중보기도의 부르심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매주 토요일마다 갖는 중보기도의 자리로 오십시오. 그리고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경험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중보기도의 용사들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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