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16)-중보기도

등불지기 2012. 3. 10. 19:52

 

제가 기도하면서 고민한 끝에

이 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헌신하려고 결심하고 교회에다 알렸을 때

교회 안에서는 "너무 멀다. 왜 멀리 가느냐? 방문하려면 힘들다. 항공료가 많이 든다" 등등의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머니까 가까운 동남아로 선교지를 바꿀 수는 없느냐고 어떤 분은 물어오기까지 하셨지요..

저도 연로하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 한국에 자주 왕래도 하기 쉽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런 이유로 사역지를 옮긴다는 것은 마치 니느웨로 가야할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 나라에 와서보니 이 나라는 오래 전 한국이 내전으로 인해 세계 최빈국으로 고통당할 때 참전용사를 보내준 나라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건너 수 백 명의 군인들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한국을 위해 배를 타고 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움을 받은 한국이, 그래서 은혜로 성장하여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대국이 된 한국교회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Shame on you!

역사속에 한국이 진 사랑의 빚을 떠나서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다면 거리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거리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머나먼 길을 지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죽음의 자리까지 건너오셨습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거리'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가신 길을 아는데 어떻게 감히 '멀기 때문에 선교사를 보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경이 그렇게 우리가 편한 것에 맞추어지기 때문에 좁은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와 형제 자매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부디 지경을 넓히십시오.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어도

우리의 기도가 세계를 누비게 할 수는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기도가 세계를 품는 그런 기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프리카에 있으면서도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저 멀리 지진과 쓰나미로 고통당하는 일본과 아이티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몸은 한국에 있으면서도 아프리카를 품고 기도할 수 있고, 유럽과 북미와 남미를 품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지경을 넓히는 것..이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지경이 우물 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방언까지 넓어지기를..

김광락 선교사 올림.

 

 

기도의 지경을 넓히라

 

본문: 시149:5-9

 

오늘은 기도의 지경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부터 우리의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역시 기도의 지경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 아버지는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나라와 민족과 열방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를 돌아보시며 인도하시며 내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온 세계 나라와 민족과 열방이 당신의 품 안으로 돌아오도록 지금도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삶이란 울타리를 넘어서 온 세계 열방 땅끝까지 확장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넓고 위대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도는 고작 내 삶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 문제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습니까? 오늘 나의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내 문제에서 남의 문제로, 내 삶에서 주님의 삶으로, 내 형통에서 나라와 민족과 열방의 복음화로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 역시 우리의 기도의 지경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까지 내 기도의 지경을 넓히는 순종인 것입니다. 처음에 여러분과 함께 나눈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딤전2:1,2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종류에 대해서 한 번 더 짚고 넘어갑시다. 첫째, 간구는 나의 긴박한 문제를 두고 호소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도는 일반적인 모든 기도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도고란 중보기도로서 특별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감사란 은혜에 감사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중보기도의 영역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보자란 누굴까요? 중보자란 누구와 누구 사이에서 중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어떤 사람 사이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유일하고 참되신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중보기도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떤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 전쟁으로서의 중보기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어떤 대상 사이뿐만 아니라, 사단과 어떤 대상 사이에 들어가서 묶고 푸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영역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로만 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기도의 열정이 있는 것은 감사해야 합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한국교회의 기도운동에 대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분명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한국교회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기도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정이 있다는 하는 분들을 보면 조금 시간이 나면 한 두 개의 나라를 품고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정도입니다. 왜냐면 자신의 부르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중보기도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모든 영적 전쟁의 출발점은 자신의 부르심과 신분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의 영역을 넓혀 가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다시 봅시다. 시149:6-9절,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예배)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말씀)이 있도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이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기도의 지경이 온 나라에까지 미칩니다. 중보기도의 영광은 모든 성도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열방을 기도로 품는 것은 모든 성도에게 주신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는 잃어버린 영광을 다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출발은 예배(찬양)입니다. 중보기도자는 말씀의 무기를 받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재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만 아니라 공동재창조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면, 자신의 부르심과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겨우 한 두 나라만 품고 기도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열방을 재창조하는 사역으로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감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렘1:9,10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내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말씀과 얼마나 비슷합니까? 옛날에 유명한 건물을 폭파하고 무너뜨리고 다시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낡은 건물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재창조의 사역(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는 일)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새로운 것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옛 것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원수의 것을 파괴하고 청소하는 ‘묶는’(=대적하고 결박하는) 기도가 필요하고, 원수의 발아래 신음하는 영혼들을 ‘푸는’(=축복하고 선포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한 마디로 묶고 푸는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신자들과 상담하다가 고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성장을 멈춥니다. 왜 그런가?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후에 기도합주회 모임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가 데이비드 브라이언트라는 사람입니다. 세계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영적으로 최전방에서 싸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이것입니다. 영적성장을 멈추는 이유는 열방을 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 자기 자녀, 눈앞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면 성장은 멈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6,000종족과 247개국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방을 품고 기도하면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계속 성장하려면 열방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속한 YWAM에서는 정기적으로 대구땅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방을 위해 특히 시리아를 위해 전략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가 당장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농부가 독수리 새끼를 발견하여 닭장에서 키울 때 독수리는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날개가 발달될 기회가 없습니다. 이것이 원수들의 전략인 것입니다. 자기 문제에 얽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닭은 시력이 없습니다. 닭은 눈앞의 것에 연연해합니다. 닭의 눈을 보세요. 눈에 불이 나오는 닭은 없습니다. 눈앞의 먹이에만 신경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수리의 시력은 7.0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독수리의 눈에는 불이 나옵니다. 멀리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독수리로 비유하고 있을까요? 열방을 품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여러분은 열방을 품는 독수리입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눈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눈앞의 것만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민족과 열방에까지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중보기도에 대한 영적 부담감을 갖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눈은 온 세계 열방을 향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채찍을 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이것은 ‘모든 족속을 위해 기도하는 집,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다’란 뜻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부르심과 신분과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내 문제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은 모든 족속과 열방을 위해 중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정의를 해봅시다. 중보기도란 하나님과 함께 기도를 통하여 열방을 재창조하는 사역입니다. 중보기도는 결코 후원사역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재창조사역입니다. 중보기도는 후원사역이라는 마귀의 거짓말을 깨뜨려야 합니다. 나이 들어서 후원하는 것이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누가 중보기도를 후원사역이라고 가르쳤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세요. 크게 쓰임 받는 것은 중보기도자이지, 은퇴하고 후원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중보기도에 인기가 없었던 이유는 뒤에서 후원하는 사역으로 인식해왔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는 최전방에서 묶고 풀며 재창조하는 사역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중보기도에 대한 잘못된 그림을 그려주면서 우리를 속여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쓰시는 지도자들과 선지자들은 다 중보기도자들이었습니다. 다윗,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아브라함, 느헤미야같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있어야 중보기도사역이 가능하며, 최전방에서 재창조하는 사역입니다. 파수꾼과 정예군의 사역인 것입니다. 집에서 애를 키우면서 할 일이 없으니, 나이 들어서 할 일이 없으니까, 뒤에서 기도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중보기도에 대한 잘못된 그림을 계속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나님께 쓰임받는 지도자들은 다 중보기도자들이었습니다! 중보기도란 하나님의 전략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전략회의에 참여하는 사람이 중보기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창조역사에 동역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중보기도의 능력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사41:14-16을 봅시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같이 만들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여기서 중보기도의 능력을 어떤 단어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타작기계입니다! 산들을 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산들은 종족들과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산으로 여긴 기도의 대상은 공산권이었습니다. 강력한 중보기도의 결과 지금 공산권을 대부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중보의 용사들이 이슬람권을 향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연합해서 24시간 연속으로 기도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시리아에 전도여행을 갔을 때 독실한 무슬림이 환상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가족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중보기도의 힘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은 중보기도의 힘을 실제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강력한 중보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몇 가지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반대의 영으로 사는 훈련(opposite spirit)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국제 YWAM 창시자인 로렌 커닝햄의 주 강조점이 반대정신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정신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반대정신(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정신을 깨뜨리는 예수님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스피릿으로만 세상의 스피릿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3년 전에 제주도에서 훈련받고 있었습니다. 제주도는 점점 기회의 땅 소망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제주도의 복음화율은 1%였습니다. 목회자의 불모지였습니다. 목회자들은 1년을 넘지 못하고 육지로 떠나곤 했습니다. 10년 전 열방대학에서 열린 중보기도학교에서 리서치사역을 하면서 영적지도를 그리게 했습니다. 이때 드러난 사실은 제주도를 장악하는 가장 강력한 영은 죽음의 영이었다는 것입니다. 4.3사건 때 10% 인구(3만명)가 학살당했습니다. 반대의 영으로 사는 것은 생명의 영, 소망과 기쁨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진 동네가 북제주군 북촌리였습니다. 4.3사건이 일어난 그 핵심 지역에 열방대학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매일 기쁨과 소망의 찬양예배가 그곳에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주땅이 얼마나 기회와 소망의 땅으로 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최근 국제자유화도시로 변화를 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보기도의 열매인 것입니다.

밖에서 시끄러운 굴착기 소리가 들린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안에서 더 큰 음악소리를 틀어야 합니다. 소리는 소리로 없애야 합니다. 왜 화장실에 방향제나 향수 스프레이를 갖다 놓습니까? 영으로 영으로서만 깨뜨릴 수 있습니다. 정신은 정신으로 깨뜨립니다. 전도할 때 중보기도자들이 함께 가야 합니다. 중보기도자와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한 팀을 이루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함께 지역을 영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이것을 리서치작업이라고 합니다. 아웃리치팀은 이 리서치작업을 꼭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해외리서치는 잘 되는데, 국내리서치는 잘 안 되는 현실입니다. 제주하면 죽음의 영이라면 대구하면 무엇이 강력한 진인지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는 어떤 영이 강한가? 군림의 영? 아니면 우상숭배의 영인가? 기도하면서 영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그러고 난 뒤 그 반대의 영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목포는 슬픔의 영이 강합니다. 일본이 한국의 가장 좋은 것들을 빼내가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슬픔, 상실의 영(목포의 눈물)입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시집간 시댁이 인색한 집안이라면 어떻게 무장해야 합니까? 관대함의 영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색하고 엄격한 집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관대함이 있어야 한다고 릭 워렌 목사님이 얼마 전 한국에 와서 말했다고 합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의 영으로 충만하여 중독자들을 바라보면서 지원그룹을 만들며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래형 교회-회복사역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이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었습니다. 거액의 인세로 거부가 되었음에도 아직도 낡은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에게 필요한 정신은 관대함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한국 사람에 대해 영적으로 꿰뚫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하7:13,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그 악한 길에서 떠나는 과정이 곧 반대 영(counter spirit) 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중보기도는 반대정신으로 사는 사람만이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능력 있고 효과적인 중보기도를 하기 위한 두 번째는 약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4) 약속의 말씀이 있어야 믿음과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모든 믿음과 소망은 약속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우리 삶에 쇠기둥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 수만 있다면 계속 인내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 듣는 기도가 중요할까요? 시중에 [듣는 기도]란 책도 나와 있습니다. 듣는 기도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취해야 강력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강력한 기도는 큰 소리의 기도가 아닙니다. 강력한 기도는 믿음의 기도인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다 둘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기도는 말씀에 근거한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강력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기도라면 강력해질 수 없습니다.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묵상을 해보십시오. 믿음이 생깁니까? 오히려 침울해지고 한숨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약속에 초점을 맞추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수 천 명이 모여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기도한다고 해도 기도의 파워는 없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북핵문제로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FTA문제나 대선문제로 어수선한 상황입니다. 이럴 때 기도의 출발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황과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상황과 문제를 알려드리는 기도만 하지 않습니까? 이때 우리가 붙잡고 기도해야 할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지 여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와 그 상황을 모르실까요? 그런데 문제 상황을 하나님께 알리는 기도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겸손히 여쭈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원칙은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제사는 희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훈련이 무엇인지 경험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감사가 제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평강과 여유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감사드릴만한 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은 제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제사인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인간이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욥이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 것입니다. 욥은 철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린 인물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제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 하이드]란 책을 읽어보십시오. 하이드는 중보기도자로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도저히 감사할 것이 없는 가운데서 감사할 것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감사할 때에 감사하면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그 때에 감사할 내용을 찾아보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지켜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는 말과 기도가 일치되어야 강력한 기도가 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할 때는 쪽지에 적어오면서 실제로 말할 때는 신중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입술로 부정적인 말을 심을 때 우리는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특히 부정적인 말은 삶을 파괴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과 감사의 말은 가정을 건강하게 세워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을 위해 좋은 말로 기도한다면 실제 생활 속에서도 좋은 말로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절대로 사람은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격려를 통해 사람의 에너지를 전환시켜주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항상 격려할 것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기도를 일치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연합기도가 능력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면 천을 두 사람이면 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개인기도보다는 소그룹기도가 더욱 강력한 것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보다 열방을 위한 기도는 소그룹으로 모여서 기도하면 더욱 강력한 것입니다. 여섯째는 끈질긴 기도가 능력이 있습니다. 눅18:1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의의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역으로 진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분은 신실하신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결코 고아와 과부가 아닙니다. 세상은 귀찮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응답된다면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겨우 몇 년 기도했다고 기도를 오래 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이 시간 돌아보기 원합니다. 내 기도의 지경은 어디까지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내 문제, 내 필요, 내 계획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내 기도의 지경이 넓어집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강력한 중보기도자로서 쓰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분의 시선은 온 세상 나라와 열방을 향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과 나라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의 지경이 주님의 시선을 따라 넓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그리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에서 나아가서 나라와 민족과 열방을 무너뜨리고 다시 건설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열방을 재창조하시는 그 놀라운 현장에 저와 여러분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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