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30)-치유

등불지기 2012. 3. 10. 21:01

 

 

이제부터 치유에 대해 연속적인 메시지를 올려봅니다.

치유는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지요..

치유 그 자체가 목적지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치유는 꼭 필요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병원과도 같은 곳이지요..

어떤 이들은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비난하기도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문제가 많냐고 비웃기도 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그 말은 모두 맞는 말입니다.

교회는 치유가 필요한 '환자'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목회자들은 영적인 의사들과 같지요..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가득한 곳..그곳이 교회입니다.

치유를 위한 메시지가 많이 선포되기를 바라고

치유에 대해 열려 있는 교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여호와 라파

 

본문: 출15:26

 

오늘부터 치유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우리가 온전해지는 일입니다.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치유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그 말씀은 우리를 치유하며,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출애굽기 15장을 읽어보면 극과 극의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서 춤을 추다가 3일을 못가서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감정의 변화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바로 그것이 상처받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받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의 환경에 취약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십시오. 그것이 모든 상처를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이미 받은 상처는 신속하게 치유될 것이며, 웬만한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광야길을 3일간을 갔지만 물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광야란 상황과 물이 없는 상황은 사람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극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상황에 있을 때는 자신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춤을 추었지만 그러나 사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전도여행을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평소 함께 모여서 교제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달 간 같이 먹고 마시면서 함께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의 내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놀랍니다. 결혼하기 전에 함께 오랫동안 교제할 때 보고 알고 있었던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 알게 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사람은 자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극한 상황으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밖으로 드러낼 때에야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란 상황, 내 안의 모든 문제들이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 외부의 환경에 취약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으로 주님의 손이 인도하실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실 순간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3일간 광야를 행하였지만 물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강한 갈증과 소원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극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간절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편하고 안락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간절해지지 않습니 다. 바로 이럴 때 우리 마음이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간절한 열망을 갖고 있을 때 상처받는 것입니다. 에를 들어, 내가 사랑과 칭찬을 받고 싶은 열망이 강할 때 나에 대한 말 한 마디가 내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갈증으로 인해 간절해졌을 때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마라의 샘이었습니다. 제가 이집트에 있는 마라의 샘을 두 번 가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홍해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 가면 바닷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라의 샘은 깊고 지저분해 보여서 맛볼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 샘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목마름으로 간절해진 그들이 마라의 샘을 처음 본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으로 반응하면서 뛰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몇몇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은 선한 분이셔! 우리를 위해 이렇게 샘을 예비해놓으셨어!”라고 찬송하였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지를 이해하겠습니까? 상처를 잘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환경에 따라 감정의 변화가 심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면에 말씀이 없는 사람은 외부의 환경에 조그만 변화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의 샘물을 맛보았을 때를 상상해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그들이 기대한 맑고 시원한 샘물 맛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맛본 것은 써서 먹을 수 없는 죽은 물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깨어지고 부서질 때 그들의 반응은 모세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광야 길에서 경험한 마라의 샘은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났던 마라의 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라의 샘은 우리의 기대가 철저하게 깨어지는 곳입니다. 우리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는 곳입니다. 좌절과 고통이란 쓴 맛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장소입니다. 쓰라린 감정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마라는 우리가 지나가는 세상 길에 언제나 놓여 있습니다. 오늘 이 마라를 우리의 삶에 상처라고 봅시다. 그리고 마라의 샘을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쓰라린 감정이라고 합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오늘 읽은 본문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라의 샘에서 자신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유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나서 마라의 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까닭은 그들을 치유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곳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마라의 샘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중에 어려운 상황을 지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처를 주는 일은 사단의 일이고, 상처를 받는 일은 사람의 일이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내 삶에 경험하는 상처와 쓰라린 감정, 부정적인 감정이 어떻게 치유되는 것일까요? 출애굽기 15장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내가 가는 길에 쓴 뿌리가 생긴다면, 쓰라린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그러한 상황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아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시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실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리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마라의 상황을 가지고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치유의 열쇠가 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마라를 만났을 때, 우리의 기대가 변하여 분노가 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상황을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것을 가지고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치유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치유 받도록 하기 위하여 마라의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치유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는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또한 치유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혹시 내 안에 어떤 상처가 숨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내 안에 있는 모든 상처를 다 찾아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가 일부러 마라의 샘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찾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마라의 샘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이것이 내가 너를 치유하기를 원하는 영역이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하나씩 우리의 상처를 다루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상처가 다 드러나게 되면 우리가 감당못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상처가 있는 지 우리의 모든 상처를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금씩 한번에 하나씩 다루어나가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내 안에 있는 모든 상처를 다 들여다본다면 나는 아마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너에게 마라의 샘이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잠잠히 주님을 따라가면 충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갖 치유 프로그램과 세미나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 드리건데 완벽한 치유가 일어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치유는 점진적입니다. 치유는 과정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과정으로 우리가 가진 쓰라린 상처를 치유하시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굳이 그 모든 치유세미나를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의 상처를 다루어주기를 원하시는 상황을 잘 포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삶 속에서 ‘마라의 샘’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순간적으로 하나님과 영적 지도자들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차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이 여러분을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때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마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는 흔히 ‘부정적인 감정’ 혹은 ‘쓰라린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하넌 이름을 붙여보십시오. 그것은 부정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긍정적인 감정인가? 혹은 누가 그러한 감정을 주었는가? 왜 그런 감정이 생기게 되었는가? 생각해보십시오. 모세는 동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광야에서 방황하는 삶을 살면서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낳은 아들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주었는지를 보면 그가 받은 마음의 쓰라린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를 어떻게 만나주셨습니까? 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모세의 관심을 끄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경험하려면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감정, 혹은 파괴적인 감정이 찾아올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내게 쓰디쓴 마라의 샘이 있다면 불평만하고 원망만 하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온갖 지혜와 긍휼과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충분히 그리고 놀랍게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내게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그러한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그 앞에 나아가 인정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그러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십시오. 그것을 불경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자신을 위로하지 마십시오.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마십시오. 사단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러한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쓰라린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감정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친히 말씀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내 상황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치유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서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과 느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실과 느낌을 종종 혼동합니다. 느낌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 즉 느낌을 가지고 사실처럼 다루기 때문에 종종 갈등과 싸움과 오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대구에 와서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감정의 표현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터부시하거나 혹은 죄악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인관계에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볼 때 대구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매우 서투릅니다. 혹은 매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와 편협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낭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회복자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라에서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치유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잠잠히 있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치유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반항과 반역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셋째, 자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답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문제 자체를 사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답을 구합니다. 그러나 문제 자체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넷째, 죄가 내 안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자기 수치감에 눌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잠잠히 머물면서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할 때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신체를 치유하는 능력도 되고, 내 상황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됩니다. 우리의 영이 치유되고 마음이 치유되면 우리의 육체도 치유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체의 치유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은 내 마음의 치유이며, 마음의 치유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내 영이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치유 받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잠잠히 안식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십시오.

오늘은 치유에 대해 보편적인 이야기만 다룹니다.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봅시다. 나는 어떻게 아는가 하는 인식론과, 나는 누군가 하는 존재론과,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목적론에 대해서 점검해봅시다. 나는 왜 삽니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내 삶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내 소망은 무엇입니까? 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현세를 바라보면서 현세에 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까? 그리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가치론을 점검해봅시다. 내가 다른 곳에 가치를 두고 있지 않는가? 가장 소중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낸 12명의 정탐 중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본 사람은 겨우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다른 10명은 하나님의 눈이 사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때 모든 것이 변화될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에 따라 인식하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나의 도피처들을 점검해보십시오. 내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나는 어디로 도피하는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나무 뒤에 숨었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렸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리고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질문을 가지고 묵상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를 쌓는 것입니다.

저의 집에 아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DVD 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오래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런지 플레이되다가 다다닥 소리가 나면서 튀는 현상이 얼마 전부터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버리기에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그만 드라이버를 가지고 용감하게 뜯어보았습니다. 정밀한 기계라 잘못하다가는 고장 나서 아예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냥 사용하지 않고 있느니 차라리 고장 나더라도 일단 뜯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뜯어서 살펴보니 의외로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조그만 스프링이 하나 있었는데 못 쓰는 볼펜의 스프링을 가위로 잘라서 대체하여 보니까 멈추는 현상이 생기지 않고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제 마음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새것을 사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마치 기술자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서 의기양양해서 아내랑 아이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너무나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를 치유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문제가 생겼을 때 결코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로 여길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쓰라린 문제가 생겼을 때 고통과 아픔과 분노와 원망하는 마음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불평하면서 원망하거나 혹은 나는 원래 이런 아픔이 많은 사람이야 라고 하면서 마라의 샘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의 샘을 만났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거나, 그것을 마시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끌어안고 체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에 마라의 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결코 체념하거나 혹은 원망하고 불평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그것을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이 치유의 은혜가 여러분을 위해 예비하신 은혜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치유하시는 은혜를 경험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예비해놓으신 엘림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해 경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