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 야 학 교
본문: 시63:1-7
복음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은 연습과 훈련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자라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일이 점점 더 쉬워지고 익숙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에 있어서 훈련되어지고, 또 자라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인데, 이 믿음은 배우는 것이란 사실을 먼저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마치 강에서 수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배운다는 것은 마치 수영을 배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처음에 수영을 배울 때 강사는 물에 자신을 맡기라고 가르칩니다. 몸에 힘을 빼라는 것입니다. 긴장하고 힘을 주면 물에 뜨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는 것입니다. 팔과 다리를 휘젓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뜨는 법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은혜의 강물에 뜨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생겨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배우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두려움과 직면하고 극복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에게 믿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마11:29-30)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동행하는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과 같이 멍에를 메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기꺼이 짊어질 최소한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부단히 배우려고 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배울 때만 안식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주님 안에 거하면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렘31:18) 다시 말해서 연습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서 말씀하실 때 믿고 순종하는 연습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습과 훈련을 부단히 행함으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인 주님과 함께 있는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을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하기로 결정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을 배우기 위해서 우선 우리의 사고방식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가? 내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부합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부단히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배우는 첫 번째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 역시 믿음으로 사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비밀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에 초점을 맞추도록 부단히 힘쓰셨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시면 예수님의 마음을 잘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8-29)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요12:49-50) 예수님의 삶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어떤 원칙을 가지고 평생을 사셨습니까?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삶!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는 삶이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참 제자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나의 뜻, 나의 계획, 나의 목적, 나의 수단, 방법과 재능과 능력보다는 주님의 뜻을 언제나 먼저 생각할 줄 아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분명한 부르심의 증거를 갖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세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명령 중에 하나가 지팡이를 던지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에 모세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모세는 광야에서 많은 뱀들을 보았을 것이고 또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뱀을 잡을 때 머리를 잡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은 상식 밖의 행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바로 이렇게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모세의 손에 들려졌던 평범한 목자의 지팡이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내 상식 밖의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신다면 나는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기꺼이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내 믿음을 키워갈 생각이 있는가?”
두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하나님께서 이 믿음에 대해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위해 광야학교에 입학시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광야학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치시려고 입학시키는 학교입니다. 광야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믿음의 순종’인 것입니다. 좋은 조건에서 순종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광야와 같은 상황에서 순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광야라는 상황은 오늘 우리가 믿음을 배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우리의 내면에 감추어진 두려움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이 잘 노출되는 것입니다. 광야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다들 어리둥절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누구나 들어가는 학교인데도 자기만 특별하게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기 잘 합니다. 그러나 이 학교는 구원받은 직후 곧바로 입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광야의 학교를 다른 말로 ‘성령의 학교’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모든 삶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가르치시는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학교는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단체나 특정 장소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DTS를 받으면 자신의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DTS 훈련이 강력한 훈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6개월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아침부터 함께 모여서 묵상하고 강의 듣고 교제하고 또 땀 흘려 노동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 저녁에 개인적으로 독서하고 혹은 기도함으로 하루를 마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큰 도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실 DTS훈련을 받을 때는 내가 변화된 것처럼, 그리고 확실히 내 삶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훈련을 마친 후에 내가 전혀 변화된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 비참함은 이루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훈련이 잘못되었는가? 아닙니다. 진짜 훈련은 DTS이후 내 삶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의 경우는 DTS때 받은 훈련보다 간사로 섬기면서 받은 훈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DTS때 지식적으로 도전을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기본정신’이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들지는 못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훈련받을 때는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은 익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훈련받고 나서 진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형제 자매로 인식하면서 부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훈련받을 때는 묵상이 쉽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난 이후에 스스로 골방에 들어가서 묵상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훈련프로그램, 수련회, 부흥회, 기도모임 등에서 훈련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속에서 훈련받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 생활 속에서는 멘토가 있고 코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 생활 속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나의 멘토가 되셔서 가르치시는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의 멘토와 스승이 되셔서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시는 것이야말로 진짜 확실한 훈련이고 확실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DTS에서 내적치유를 하면서 나는 치유를 경험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DTS이후에 여전히 내 안에 치유되어야 할 고질적인 문제를 발견할 때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성령께서 친히 내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 나를 다루어주시면서 진정한 치유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사람이나 학교가 나를 변화시켜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령께서만이 나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는 광야학교, 생활 속에서의 훈련이야말로 참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다루시기 시작하실 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내 삶속에 일어납니까?”라고 묻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한 때 기쁨이 충만했던 나에게 이런 환경이 주어지는 것일까?”라고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축하받을 분입니다. 왜냐면 성령학교에 입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광야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배워야 할 것을 빨리 배우면 광야학교를 빨리 졸업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점을 이수하면 빨리 졸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배운다면, 영적인 필수과목을 빨리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는 광야학교를 수료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내 것으로 취할 날이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먼저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이 광야학교에 입학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중도에 포기하고 미완성의 상태로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4)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나를 광야학교로 인도하신 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광야란 상황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억할 것은 마음의 변화, 즉, 사고방식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임하십시오. 이 광야학교에서 우리를 다루는 것은 우리의 낡은 사고방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사고방식은 낡은 가죽부대인 것입니다. 옛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다면 둘 다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학교에서는 낡은 사고방식, 옛 사람의 사고방식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가 제자를 가르치는 법을 보면 거의 공통적으로 이렇습니다. 자신의 무공을 전수해주기 전에 언제나 청소를 시키고 잡일을 하게 합니다. 왜죠? 자기 생각, 자기 꾀, 자기의 잔재주, 전에 배웠던 어설프고 잘못된 기술들을 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자기 방식, 자기 생각이 남아 있으면 새로운 기술을 제대로 배울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 옛 사람의 습관이나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안에 새 포도주를 가득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를 광야학교로 데리고 가셔서 새 가죽부대로 바꾸어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약 우리 삶속에서 이러한 훈련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훈련을 ‘징계’란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징계’는 ‘훈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들을 징계(훈련)하시는 분이십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는 줄 네 마음에 생각하고...”(신8:5) 우리 생활 속에 어떤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 지금 나의 사고방식을 다루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와 함께 있구나. 하나님께서 나의 사고방식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사용하시는구나.’ 그리고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주님, 지금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변화되어야 할 부분을 말씀해주십시오. 내 생각의 영역에서 어떤 부분이 주님의 길과 말씀에 맞지 않는 부분인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러한 태도와 간구가 광야학교에서 훌륭하게 학점을 이수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러한 훈련이 내 생활 속에서 감지된다면 일단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6-13) 하나님께로부터 훈련받는 부분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광야학교에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히5:8) 여기서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이 순종을 고난을 통해서 배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어려움을 허락해주신 거룩한 목적입니다. 우리가 온전해질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광야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 중에 최고로 중요한 것, 필수과목 중에 가장 중요한 과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 회복”인 것입니다. 광야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학생이라면 하나님과의 친밀감 회복이 최고의 우선순위가 되게 하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법, 즉, 말씀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감 회복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광야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감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 들어가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지금 다윗은 어디에서 이 시편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예, 광야학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야곱에게도, 요셉에게도, 모세에게도 있었던 그 광야학교가 다윗의 생애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절) 지금 다윗이 있는 곳은 광야입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가 배워야 할 것을 훌륭하게 배워가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광야의 상황을 ‘성소’로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절) 다윗에게 성소는 곧 광야였고 광야는 곧 주님과 대면하고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광야란 상황은 전적으로 주님밖에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한 광야에서 다윗은 주님의 임재를 처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다윗이 배웠던 첫 번째 필수과목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었습니다. 그러한 친밀감은 주님만을 바라볼 때 주어지는 은총인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광야는 다윗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광야란 상황이 없었다면 다윗은 바쁜 국정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친밀감을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바로 그런 경우인 것입니다. 성공과 번영 속에 하나님의 친밀감은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처럼 다윗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친밀감이란 과목을 이수했기 때문에 그가 늙어서도 주님의 친밀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다윗이 고백하는 친밀감은 어떤 것인지 보십시오. 다윗은 광야에서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광야학교가 아니면 도무지 이러한 것을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다윗은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발견했다고 고백합디다. 광야에서 자신의 생명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광야학교에서 새삼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란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광야학교를 지나는 동안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광야학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광야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렘2:6)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사막과 구덩이의 땅입니다. 사람들이 걷기 힘든 상황이고, 가고 싶지 않는 상황입니다. 또한 한번 빠지면 자기 힘으로 헤어 나오기 힘든 상황이 계속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상황을 만난다면 광야학교에 들어와 있다고 여기십시오. 둘째, 건조한 땅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목마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영혼에 깊은 갈증 찾아오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구원의 기쁨보다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듯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친밀감을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군대생활이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군대에서 하나님의 친밀감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셋째, 사망의 음침한 땅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조차 모릅니다. 위험한 땅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시는가 배우십시오. 넷째, 사람이 다니지 않는 외로운 땅입니다. 친구들이 떠나가는 상황입니다. 외롭고 괴로운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친밀감이란 과목을 배우는 것입니다. 다섯째, 낮추시는 곳입니다.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는 때입니다. 여섯째, 주리게 하시는 곳입니다. 우리는 결핍과 빈곤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크고 거대한 광야입니다. 가고 가도 끝이 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한계를 절감하는 곳입니다. 나의 보잘것없음을 절감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 불뱀과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위험한 곳입니다. 사단의 시험과 공격이 극심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깊은 사랑을 체험합니다. 아홉째, 열매 없는 땅입니다. 내 생활 속에서 열매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입니다. 사역의 열매, 성품의 열매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짐승이 부르짖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도 짐승과 같음을 깨닫게 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광야생활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나요? 축하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취하는 승리를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광야학교를 다닐 때에도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끝맺고 싶습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신령한 공급을 경험합니다. 저는 YWAM에서 전임간사로 일할 때 하나님의 신비한 공급하심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YWAM은 전임사역자들에게 한 푼의 사례도 주지 않는 선교단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저와 저의 가족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광야학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란 신비한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또한 이 광야학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는 사실을 경험하여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놀라운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광야학교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인도해들이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축복의 학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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