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아니 거의 모든 분들이 상한 마음으로 고통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 이분은 마음이 상해있구나!"라고 알 수 있지요..
상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하는 말에는 '독'이 스며 있습니다.
상한 마음을 치유하지 않으면 그 독이 온 공동체에 퍼져서 온 몸을 병들게 할 것입니다.
목회자는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며 치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목회자에게 상처받은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권위자로 인해 마음이 상한 분들은 누가 치유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요즘 들으니 수많은 젊은이들이 안티 기독교로 돌아선다고 하네요..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는 하루빨리 치유의 권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썩고 병들 육신을 치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상한 마음의 치유
본문: 사61:1-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으시고 처음으로 설교하실 때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록된 이 말씀은 당신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자신이 곧 구약에서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이 본문말씀은 메시아의 사역이 어떤 사역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이곳입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의 사역 중에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이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또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유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이유는 그를 치유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실 능력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에 상처가 생기게 되면 하나님을 만날 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치유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맛볼 때입니다.
이처럼 치유하는 일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지상교회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어째서 오늘날의 지상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해서 치유하는 일에 도구로 쓰임 받으려고 하지 않는 듯이 보일까요? 언뜻 보기에도 교회는 너무나 프로그램과 행사나 확장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마음이 상한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할뿐더러, 마음이 상한 자들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부담감도,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하지 않습니까? 물론 상한 마음의 치유가 교회 사역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사역을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넘겨준 듯이 보입니다. 세상은 마음이 상한 자를 어떻게 대할 지 연구합니다. 그리고 상담기관도 운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것일까요? 이런 문제를 저와 여러분이 풀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치유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면 상처받은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이 상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마음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작동되는 곳입니다. 특히 마음이 상했다고 할 때 그것은 감정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왜냐면 감정은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어야 할 상황에서 화를 내지 못한다면 마음이 상한 증거입니다. 용서해야 할 상황에서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마음이 상한 증거입니다.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기뻐하지 못한다면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한 마음이란 감정의 장애인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감정이 있다면 분노와 슬픔입니다. 보다 깊은 차원에서의 감정이 있다면 수치심과 두려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들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나쁜 것입니다. 어떤 문제일까요? 감정의 장애, 다시 말해서 상한 마음은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대인관계에서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회피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입니다. 그녀는 상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상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똑똑하고 박사학위를 여러 개 가지고 있어도 정서의 장애를 겪고 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상한 마음이 치유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감정의 장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지나치게 공격적이어서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거나 혹은 지나치게 회피적이어서 무관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한 마음은 치유되어야 합니다. 상한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결국 성인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속사람이 자라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두기를 원하지 않으시겠지요? 주님의 말씀으로 상한 마음이 치유되고 성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상처를 받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존감이 낮을 때 상처 받기 쉽습니다. 자존감이란 자신에 대한 가치평가를 의미합니다.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다는 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낮은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점수를 매기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낮은 자존감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자존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치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낮든 높든 다 건강하지 못한 자존감, 다시 말해서 낮은 자존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가치를 얼마 정도로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나름대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에 미치지 못한다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둘째로 정체성의 혼동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정체성이란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인식을 말합니다. 사람이 상처를 받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혼란을 겪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형 같은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집을 나간 동생이 다시 돌아왔을 때 기뻐해야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그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 그는 감정의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신분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한 번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종이라고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행위에 상처를 받고 있고,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행위에 오히려 상처를 받고 화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맏아들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모태신앙이거나 혹은 오랫동안 성실하게 섬기고 봉사한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증후군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러한 장애를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가까이 하셔서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셔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그 음성이 여러분의 상처를 넉넉히 치유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상한 마음을 가졌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감정이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 나는 지금 치유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야'라고 여기면 틀림없습니다. 웃어야 할 상황에 시원하게 웃지 못한다면, 울어야 할 상황에 울지 못한다면, 감사해야 할 상황에 감사하지 못한다면 '지금이 곧 은혜 받을 때'라고 여기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치유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쓰라린 감정을 자백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여러분의 어두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상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로 결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계속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서 살기로 결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라나지 않기로, 성인아이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나타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서 아름다운 성품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사울왕을 보십시오. 그는 기름부음받은 왕이 되었지만 그는 정서적인 장애를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상한 마음의 치유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열등감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느라 평생을 허비하다가 결국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치유를 받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을 연습하십시오. 그것이 힘들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지체에게 드러내는 것을 연습하십시오. 빛 가운데 드러내는 연습! 이것이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저의 간절한 바램이 있다면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 삶, 그리고 상처를 주지 않는 삶,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상처받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지 않는 삶, 건강한 정서를 가지고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야 합니다. 건강한 속사람의 특징은 건강한 자존감, 그리고 명확한 정체성입니다. 그것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사람이 자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묵상의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으로 자랑하십시오. 결코 사람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 잘하는 사람의 특징이 사람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기보다 사람을 자랑합니다.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에게 기대하는 사람이 쉽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만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받게 될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감정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감정을 억압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억압하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고 폭발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계발해야 합니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하나님 한분에게만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약한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를 잘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날마다 먹음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일에 게을리 말아야 합니다. 묵상하는 일이야말로 자기 속사람을 위해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계속 알아야 가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계속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존감을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하십시오. 무엇보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사단을 대적하십시오. 영적전쟁을 연습하십시오. 원수의 거짓말에 속지 않도록 하십시오. 원수는 우리의 신분과 가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함으로 우리의 마음에 견고한 요새를 짓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리고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권위에 대해 배우십시오. 권위의 한계선을 넘지 않도록 하십시오. 때가 되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또 노동의 즐거움을 아십시오. 땀 흘리는 삶을 사십시오. 성실하게 일하는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게으른 사람이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땀 흘려 일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상처를 잘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십시오. 건건한 취미생활을 영위하십시오. 자연 속에서 거닐며 묵상하거나 화초를 가꾸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 하여 마음을 아름답게 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성경에서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대부분 상처받는 이유는 말 때문입니다. 말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다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혀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바로 혀끝에 있습니다. 혀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것은 놀라운 지혜의 영역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혀의 권세를 잘 활용한 사람입니다. 선거유세에서 경쟁자가 자신을 향해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비난했을 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기를 '내 얼굴을 보십시오. 내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얼굴을 가지고 다니겠습니까?' 이렇게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지혜란 상황에 맞게 말할 줄 아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상황에 맞는 말을 할 줄 아는 지혜를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은 하나님의 입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혀는 하나님의 혀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의 말투를 보면 지혜가 모자란 부분이 많습니다. 성급하게 말하기 때문에 말에 실수를 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 이것은 아주 놀라운 경건의 연습입니다. 경상도 사람 중에서 이러한 연습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될까요? 말을 무심코 내뱉은 후에 후회하는 일이 잦다면 한번쯤 자신에게 지혜가 부족함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심각하게 간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 가정에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이상한 말을 배워오면 '아빠 엄마가 쓰지 않는 말은 쓰지 말아라'고 말하면서 교정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는 말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번은 아이들에게 '누구는 잘 하는데 누구는 못한다'는 식으로 말을 했더니 주님께서 저의 마음에 책망하시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더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을 때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종종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는 것을 쉽게 말하고서도 아무런 가책감도 느끼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쉽게 말하고서 "웃자고 한 말이다"라고 하거나 "농담으로 한 말인데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니?"고 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입니다. 언어에 조급한 사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단지 말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를 잘 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 곁에 가기만 해도 상처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어떤 행위나 결과로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같이 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혀가 마치 하나님의 혀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 평생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언어에 완전한 자가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대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기준이요 모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스스로를 소개하셨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에게서 배울 것을 찾으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비난하지 않고 또 비난을 받더라도 공격하지 않겠다는 성품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마음에 상처를 받던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다가가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성품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부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위선적인 사람들은 통렬하게 비판하시고 공격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비난받는 사람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겸손하고 온유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예수님을 본받기를 간절히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대할 때 외모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외모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 때 쉽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세상에서 상처를 피해갈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상처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외모보다는 내면을 바라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긍휼과 연민으로 사람을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들을 때 한 쪽 귀는 사람에게, 다른 귀는 하나님을 향해 늘 열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던 시므이를 향해 보복의 칼을 날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비난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쪽 귀를 늘 하나님께 개방하여 있는 한 그 어떤 사람들의 어떤 말에도 상처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로마서는 우리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한 사람을 치유하는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내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를 통해 그에게 부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그에게 부어주시도록 간절히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진실한 중보기도자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통로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위해 진심으로 중보기도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주님이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 상한 자들을 대할 때 충분히 들어주는 자가 되십시오. 들으면서 공감해주십시오. 마음을 같이 하십시오. 그가 가긴 감정을 같이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감정을 읽어주십시오. "이런 마음이었겠다!"라고 확언해주십시오. "이런 느낌이었지 않습니까?"라고 물어주십시오. 그럴 때 치유의 은혜가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감정들을 직면하도록 격려하십시오. 감정을 숨기고 숨지 않도록 격려해주십시오. 이것이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사역자의 자세입니다.
자,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죄와 상한 마음을 자백함으로 상처를 드러내고, 회개함으로 상처를 씻게 됩니다. 그리고 용서함으로 이물질을 제거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우리는 항생제를 맞습니다. 믿음으로 상처를 꿰메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과 인내함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신뢰함으로 상처에 대한 기억은 추억으로 변하게 됩니다. 몇 가지 중요한 것은 지적하고 끝냅시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은혜에만 집중해도 충분히 상처를 영광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흘러들어온다는 것도 기억합시다. 치유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치유 받으려고 하기보다 남을 섬기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더 빨리 치유될 수 있습니다. 상처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상처를 치유하는 삶이 되기를 열망하십시오. 구약의 제사장은 건강한 사람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감정의 장애를 치유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길 수 없고, 세상을 바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치유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유 그 자체가 우리 삶의 목적도, 목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세상을 사랑하고 치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자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치유에서 회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상한 마음을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상한 마음으로 가득 찬 세상을 치유하는 치유자들이 우리 가운데서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