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종종 광야생활로 비유하곤 하지요..
이에 대해 좀더 깊이 공부해봅시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성도의 광야생활
본문: 신8:1-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후 광야에서 40년간 훈련을 시키신 다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요? 이것은 오늘 힘들고 괴로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첫 걸음을 내디딜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새 생명의 기쁨이 강력하게 밀려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계속되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남겨두셔서 이토록 나를 낮추시고 연단하시는 까닭이 대체 무엇일까?”라고 묻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찬송 가사가 있지요.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어린양의 피로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극적으로 건널 때만해도 그들의 가슴은 즉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설렘과 흥분으로 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3일 길을 지나자마자 그들의 기쁨은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서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든 길로 인도하시는지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외치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이토록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대해서 불평을 했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말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습니다. 홍해를 둘로 가르시고 바다 한 가운데를 큰 권능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길을 둘러 행하게 하셨고, 결국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40년간의 방황은 왜 일어난 것일까요?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직된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앙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옛 사고방식을 벗어버리기 위해 방황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고방식으로 절어있던 사람들이 다 죽고 새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장성하기까지 세월이 걸려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과 시련이 우리에게 있는 이유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교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걷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한 광야생활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생활을 당신의 영광과 백성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실수와 불신으로 어려움을 자초할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광야생활을 통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차지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무장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광야생활을 마감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가나안 땅이 눈앞에 보이는 모압 평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비스가 산에 올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지도자를 따라야 합니다. 그들은 때가 되어 드디어 광야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긋지긋한 광야를 밟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황량한 광야의 지평선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시점에 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모세는 임종설교(고별설교)를 이스라엘에게 하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마지막 설교가 바로 신명기인 것입니다. 죽기 전 최후로 남긴 유언과 같은 설교 역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먼저, 모세는 과거를 한번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발자취 속에 이스라엘 자손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오늘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증거입니다. 과거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곳곳마다 새겨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이스라엘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길을 주님이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홍해바다를 건넌 후 시내산에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만한 모든 남자들을 계수한 결과 603,5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40년 광야생활을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모압 평지에서 다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만한 남자들을 계수한 결과 601,730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광야를 40년이나 생활하면서 첫 번째 계수에 포함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죽어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총회는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게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힘들고 어려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경험이 즐거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안 좋은 기억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감사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여전히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신기하게도 40년 동안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은 닳지 않았고, 광야를 걷던 발은 부르틀지 않았고, 매일 만나를 먹었고, 바위에서 물이 나와서 그들의 목을 적셔주었습니다. 꼭 필요할 때 신기하게도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지내왔습니다. 그들의 불신앙과 경직된 사고방식 때문에 광야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들을 돌보시며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패역과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40년간 이토록 보존하시고 인도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뭔가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1절을 보세요!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그들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며, 그들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번성하는 것이며, 그들이 광야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 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악한 부모도 그 낳은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란다면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욱 더 우리의 잘 되고 형통함을 바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풀고자 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백성을 단련하시는 것일까요? 곧바로 약속의 땅에 인도하실 능력이 있으면서도 굳이 광야를 걷게 하신 까닭이 무엇인가요? 광야를 걷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첫째, 나를 낮추시기 위함입니다. 나를 낮추신다고? 왜 내가 낮아져야만 합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이 목적 때문에 화가 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분 나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낮추시려고 하는 하나님께 괜히 반항하고픈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가장 큰 적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교만과 자만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나를 낮추시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내가 뭔가 한 가닥 할 줄 아는 존재인 양” 의기양양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자기가 잘 낫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낮아진 마음이 아니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모든 축복들을 단번에 다 날려버릴 수 있을 것임을 주님이 잘 아십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겸손이란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내 삶의 근원이요 생명의 근본임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아는 마음! 그것이 바로 겸손의 실체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만은 최고 최대의 적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 스스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행동하려는 마음이 교만인 것입니다. 바로 이 교만--하나님을 떠나 생각하려는 경향--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땅 에덴(하나님의 임재의 땅)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이 교만을 꺾고 겸손을 배우지 못한다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또 다시 추방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자를 낱낱이 찾아 일일이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교만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교만 때문에 망하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광야생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만은 모든 성공을 일거에 무너지게 하는 죄의 가장 강력한 세력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임재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죄의 세력입니다. 교만은 모든 아름다운 것을 가장 추하게 만드는 무서운 죄의 세력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데 마음이 교만한 자가 연단을 더 받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백성은 마음이 극도로 교만해져도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교만을 반드시 다루십니다. 교만은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만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을 애통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교만이 모든 좋은 은혜를 다 물리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교만을 버려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를 아는 사람의 마음에만 임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겸손이야 말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최고 최대의 덕목입니다. 가장 겸손한 자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가장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겸손해지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을 손해 보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마귀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낮추겠다고 하실 때 기뻐하십시오. 왜냐면 우리를 높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전략은 우리를 높이고 나서 우리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낮추어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은 우리를 저 밑바닥까지 낮추시고 나서 우리를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지금 나를 낮추고 있다면 언젠가 나를 높이실 계획이 있음을 알고 기뻐하십시오. 요셉을 낮추신 하나님을 보세요. 다윗을 낮추신 하나님을 보세요. 한나를 낮추신 하나님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려고 할 때 기뻐하고 감사하세요. 그것은 우리 안에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기로 작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나를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생활은 우리 마음에 불순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기간이고, 또 불순한 것들로부터 정결케 되는 기간입니다. 그것이 시험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광야를 지나는 동안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힘들지만 우리를 정결케 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걷게 하시는데도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고자 하십니다. 광야를 걷게 하시는데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알고자 하십니다. 광야를 걷고 있는데도 말씀을 지킨다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광아생활을 통해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경외하는지, 신뢰하는지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생활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정말 모르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상태를 그들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알고 싶어서 광야생활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원래는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자기 마음의 상태를 깨닫게 하시려고,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하면서 너 자신을 제대로 한번 보기 바란다. 네가 어떻게 반응하는 지를 보면서 네 자신이 과연 나를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나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내 뜻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너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정결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나의 참 모습을 잘 모릅니다. 내가 항상 잘 난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험한 풍랑 속에서 어쩔 줄 모를 때, 메마른 광야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발견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땅,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원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비밀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기자와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베드로를 보세요. 베드로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기 전에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을 수 없었고, 위대한 복음의 사도로 쓰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시험 당하기 전에는 자신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험 속에서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부으심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광야를 걷는데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냥 좋은 일만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길을 걸을 때에도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라고 고백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을, 우리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은혜를 못 받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시험해보세요. “시험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에도 나는 과연 주의 명령을 지킬 것인가?” “시련의 극한에 다다랐을 때에도 나는 과연 주님을 믿고 따를 것인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인가를 빼앗겼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주를 찬양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마음에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그것은 광야생활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확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이 우리에게 있는 셋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생활에서 배우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나 거듭났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님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제로는 물질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느끼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철저하게 깨어지는 곳이 바로 광야의 길을 걸을 때입니다. 돈, 명예, 성공, 출세, 진학, 사람, 칭찬, 명예, 부귀, 영화, 집, 자동차, 소유 등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이것은 책을 통해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물질의 축복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작 2,3년간의 광야를 체험하면서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더욱 더 광야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광야가 아니면 이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척 스미스 목사님은 17년간 광야의 길을 걸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7년간 목회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목회할 때마다 그는 뼈저린 실패만을 거듭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그 17년간의 경험이야말로 자기의 생애 중에 가장 값진 교훈을 얻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17년간의 영적 가뭄기를 지나면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며, 하나님 한분만을 오로지 바라보는 마음과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목회의 큰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곧 바로 목회를 크게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졸업하고 개척하거나 목회하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력하게 임하여서 사람들이 뒤로 막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 목회 현장에 임하게 되면 정반대를 경험합니다. 점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며, 자신은 전혀 무가치한 존재이며, 오히려 목회하기에 참으로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럴 때는 목회를 포기하고픈 충동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는 것은 정말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큰 은혜를 체험케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돈을 주고도 혹은 책을 보고 얻을 수 없는 값진 교훈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진정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광야의 길을 걷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성가신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부려먹거나 자신을 옭아매려는 하나님의 심술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뼛속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광야생활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광야생활 하는데서 우리에게 참 위로와 용기와 희망이 되는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광야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의 은혜를 어디서 체험합니까? 바로 광야의 길을 걸을 때인 것입니다. 왜 광야의 길을 갈 때에 비로소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까?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족을 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진정한 힘과 능력과 만족과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광야생활을 할 때인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는 너무 심심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또 읽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광야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광야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얼마나 생명이 되는지 온 몸으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생활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경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세월을 방황하며 연단을 받아야 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경직되고 부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시작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성숙케 하신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빚으신 것입니다. 결국 광야생활은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원칙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동일한 목적으로 우리를 섭리하고 계심을 믿기 바랍니다. 광야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세상이라는 광야 속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까지 혹독한 연단과 눈물 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실패와 넘어짐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배운다면 반드시 성공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달아야 합니다.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말씀의 은혜를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이러한 거룩한 목적으로 우리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베드로 사도도 같은 의미로 권면합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5-7)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는 목적을 기억하세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5,6절) 하나님이 우리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미워서도 아니고 우리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도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땅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추방되지 않도록 준비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생활의 목적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우리가 들어가서 얻게 될 땅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큰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고, “지금 당하는 환난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흰 옷 입은 큰 무리 역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걸었듯이 오늘 우리도 아무 소망이 없는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아무 희망도 기쁨도 없는 거칠고 험하며 메마른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목적을 깊이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준비가 되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의 땅, 참으로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광야생활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예비하신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 차지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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